판타지에 핵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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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생각.
작품등록일 :
2020.05.16 10:33
최근연재일 :
2022.03.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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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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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이름에는 힘이 있다(3)

DUMMY

나이트는 주춤하며 하늘에서부터 떨어졌다.

품에는 소녀를 안은 채다.


그는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불길들에 찢어진 하늘과 신음하는 대지, 그리고 녹아내리는 괴수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마법사였나.”


그것도 본 적조차 없는 수준의 터무니없는 대마법을 사용하는, 멸망 이후에 넘쳐나는 사기꾼 마법사들과는 격이 다른 진짜 마법사.


“그래, 마법사지. 아니면 뭐인 줄 알았나?”

“그치! 우리 짱짱 센 마법사 아저씨 잘한다! 저런 괴물들은 다 쓸어버려야 해!”


나이트는 여태껏 검사 혹은 기사인 줄로만 알았던 상대는 휘황찬란한 은빛 쿼터스태프를 든 채 바라보고, 인질로 잡은 꼬맹이는 저 무시무시한 불꽃 화살들의 세례를 보고도 신나서 소리치는 모습에 황망해했다.


‘형님. 어쩌면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를 건드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사능의 자식이다.

그리고 방사능의 아이들은 무언가를 저지르고 또 저지르되, 결코 후회하지 않는 족속들이다.

나이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은 채, 거대한 구멍이 한꺼번에 주위 사물들을 전부 집어삼킨 것만 같은 장벽의 공허를 바라보았다.

파이로는, 그의 큰형은 보이지 않았다.


방사능의 아이들 소속 상위 서열, 파이로 패밀리의 둘째-박쥐 인간 나이트가 물었다.


“큰형은 죽었나?”

“죽었다.”


검은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대답했다.

나이트는 조금 더 정확하게 물었다.


“네가 죽였나?”

“엄밀히 말하자면 자폭했지. 하지만 그 원인을 결국 내가 제공했으니······내가 죽였다고 봐도 되겠군.”


나이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얼핏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정말로 파이로가 죽었을 줄이야.


“큰형이 죽었다니.”

“믿기지 않나?”

“아니, 그냥 이제야 실감이 난다 싶군.”


그는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그리고······큰형이 죽었으니 이제 내가 우리 패밀리의 빅 브라더Big Brother다.”


검은 마법사는 시큰둥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렇군. 고맙다고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아니, 그 정반대다. 전대의 뒤를 이어 빅 브라더 자리를 이은 패밀리의 리더는···전대 빅 브라더의 유지遺旨를 받들어야 할 의무가 있지.”


나이트는 박쥐 특유의 새카만 구슬 같은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대 빅 브라더 파이로는······자유도시 갈란을 멸망시키고자 했다.”

“······.”

“그의 유지를 이어, 나 또한 자유도시의 파멸에 앞장설 것이다.”


멸망을 기수旗手하는 박쥐가 말한다.


“이와 비슷한 대전쟁 시절의 마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지. 미티어 스트라이크Meteor Strike라 했던가. 그 대규모 마법을 발휘해 몬스터 웨이브를 막고 있는 건가, 마법사?”


엄밀히 말하면 미티어 스트라이크는 아니었다. 그것과는 이름값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마법을 그만두어라. 자유도시가 괴수들의 침공 아래 멸망하게 놔두어라. 그러면 이 소녀를 살려주겠다.”


나이트의 손에 인질이 잡혀 있다는 것.

그는 소녀의 목덜미를 붙잡아 들어 올린 채 말을 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겠다면······자유도시를 반드시 지켜야만 하겠다면, 소녀를 포기해라. 결코 깔끔하게 죽이지는 않을 테니. 큰형의 넋을 기리기 위해 아주 더럽고, 비참하게 죽어갈 거다. 그걸 원한다면, 그리 해라.”


방사능의 아이들의 트럭, 그때 파이로에게 당했던 것과 똑같은 딜레마다.

도시냐, 소녀냐의 양자택일.


마법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 * *




‘결국은 마지막도 인질극이군.’


유논은 일출을 부수며 떨어져 내리는 불꽃의 날벼락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바라보는 척하며 마력에 의념을 깃들게 해 전달했다.

평소대로라면 어마어마한 마력을 잡아먹는 잔재주인지라 애당초 시도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서클이 열려 있었다.

이미 ‘파이어 애로우’ 마법을 사용 중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서클에 여유가 있어 이런 자그마한 도움 정도는 충분히 받을 수 있다.


그는 꼬맹이에게 텔레파시Telepathy를 전했다.


[꼬맹이.]

“어? 아저씨?!”

[그래, 나다. 입 열지 말고 머릿속으로 말해라.]


꼬맹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박쥐 인간.

유논은 태연한 낯으로 여전히 고심하고 있는 듯 연기했다. 꼬맹이 녀석도 뒤늦게 제 입을 틀어막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그 누가 봐도 수상하다 느낄 법한 행동이었지만, 박쥐 인간은 어린아이의 돌발행동에 불과하다 치부하고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 눈치였다.

유논은 다시금 의념으로 말을 걸었다.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었지.]

‘응! 아저씨, 나 마법 가르쳐주기로 했잖아! 약속 지킬 거지?’

[그래. 가르쳐주마.]

‘진짜? 언제? 어디서?’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그는 일생일대의 고민을 앞두고 있는 척 부러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의념을 이었다.


[넌 세상이 어떻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하냐.]

‘응···? 갑자기? 아마 네모나게 생기지 않았을까? 책에서도 다 세상은 반듯한 직사각형이라고 그랬는걸!’

[그래, 책에서야 그랬겠지. 하지만······.]

‘하지만?’


유논은 지나가듯 말했다.


[세상이 동그랗다고 생각해 봐라.]

‘동그랗게?’

[그리고 원을 그려 봐라. 네가 하나의 세상을 창조한다고 생각하면서.]

‘······응!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원에 소원을 빌어라.]


유논은 알려줄 건 다 알려줬다는 듯이 단호하게 의념을 끝마쳤다.


[그러면 마법을 쓸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쉽다고? 아저씨, 이거 믿어도 되는 거지?’

[나를 믿어라. 마침 실전 연습하기에도 딱 좋은 상황이군. 내가 신호를 주면, 저 못생긴 박쥐를 물리치기 위한 마법을 사용하는 거다. 알아들었나?]

‘응···해볼게.’


소녀는 굳은 다짐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 그가 말해준 지침들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 눈에 뻔히 보여, 유논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 것처럼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없앤 뒤, 나이트에게 다가섰다.


“뭐지?”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말고, 거기 서서 얘기해라.”


유논은 알겠다는 듯 가만히 멈춰 선 채 말했다.


“꼬맹이, 지금이다.”


소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 * *




또다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꼬맹이에게 알려준 것은 마법을 부리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저 아주 간단한 마법 적성 검사에 불과했다.

멸망 이전, 마나가 희박해지고 마력이 오염되기 전의 시대, 아주 까마득한 고대에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마탑이 시행했던 그런 적성검사.

재능 있는 아이들은 원시적인 형태로나마 유사 마법을 보이게 되고, 재능이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여전히, 그는 꼬맹이에게 마법을 가르쳐줄 생각이 없었고, 가르쳐줄 수도 없었다.

마법은 사제지간에서나 겨우 가르쳐줄 법한 귀한 것인 데다가, 알려줘 봤자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탓에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된 사장된 기술을 가르치는 것에 불과하다.


꼬맹이는 유논이 재현한 멸망 이전의 마법을 보고 혹해서 저리 가르쳐달라 졸라대지만, 저건 한때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랐던 유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마법이 죽은 시대였다. 유논이 꼬맹이에게 마법 적성 검사의 방법을 알려준 것은 그저 눈속임에 불과했다.

꼬맹이도 속이고, 박쥐인간도 속이기 위한 눈속임.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박쥐 돌연변이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와 인연이 있는 꼬맹이에게도 무언가 숨겨진 점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꼬맹이에게 신호를 보내면 자연히 그쪽으로 눈길이 쏠릴 것이고, 유논은 그 틈새를 이용할 속셈이었다.


지팡이를 없앤 듯 보였던 그의 손에는 투명하게 변한 핸드캐논이 쥐어져 있었다.

아주 잠시라도 시선을 돌린다면, 그렇다면 곧바로 총알이 박쥐의 미간을 꿰뚫을 것이다.

아무리 감각이 예민한 돌연변이라 하더라도 이 거리에서 쏘아지는 마탄에 반응할 수는 없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소녀와 도시 중 무엇 하나도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핸드캐논을 정확히 박쥐인간의 머리에 조준했다.

그러나 쏘지 못했다.


정확히는, 쏠 필요가 없었다.


경악한 눈빛으로 자기가 붙잡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는 박쥐가 보인다.

그 새카만 눈은 이보다 더 커질 수가 없을 정도로 동그랗게 변해있었다.

유논도 소녀를 바라보았다.


“······!”


그는 그렇게 기적을 보았다.


꼬맹이는 더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로 자기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그리는 원이 곧 하나의 세상이라고 생각하며.

소녀의 눈에서 눈부신 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세상의 법칙을 이루는 톱니바퀴가 뒤틀리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며, 그렇게 소녀의 손끝에서 금색 마력원이 그려졌다.


‘···금색마나.’


유논이 ‘불의 심장’으로부터 얻은 적색마나가 불을 상징한다면, 금색마나는 시간을 상징한다.

적색마나와 마찬가지로, 한참 전에 세상의 정기가 쇠하며 희박해지고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색깔의 마나였다.

유논은 그런 금색의 마나와 순수한 마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다시 온 세상에 충만해진 것처럼 활발하게 소용돌이치며 소녀의 손아래 모이는 것을 보았다.


몽실몽실한 금색 서클이 그녀의 부림을 받고 있었다.

정작 서클을 소환하고서는, 그 이후에 잠시 주춤하는 모양새다.

녀석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뻔히 알 것 같았다.

소원을 빌라고 했는데,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하지? 따위의 고민을 하고 있을 터.

고민은 아주 잠깐 동안 이어졌고, 소녀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식으로 외쳤다.



[얍. 시간아, 멈춰라―――――――――――――――――――――――――――――――――――――――――――――̸̫̠͉͎̪̆͒͂̇͐͒̾̿̏̌̃͆͋͆―̵̡̛̛̫̗̤̼̦̳̺̗̭̠̽̽̒̅̈́̒͋̋̓̒̐̓̅̓̚͠͠͝―̸̝͇͔͇͆͒̄͌―̸̢̧̦͕̭̪̺̠̹̲̝̟͓̺̰̏͜―̸̼̔̐̈́̓̄̆͌̊̍̈͊̄̌͌̈́͒͌̃̽͌̃͘̚͝͠͝͝―̶̬͚̺̥̻̬̓͆̅͂̈̄͌͐̀̓̅́͑̿͒̌̎̒̓̚͜͝―̶̨̛̜̼̗͚̮͇̗͉͈͍͚̞̗̃̌̍̿̈́́̑̄̒̒͋̎̃̍̀̌̇͒̓̽͊̈́͛͛̽͊͋͘̕̚͘͜͝͠͝͠͝―̴̢̧̡̛̲̙͉̖̩̜̤̫̞̦͚̪̻̠̟͈̙͚̜̱̭̩͉̣͊̿͌̏̔̅̇̋̔̂̽̉̋̌̾̊̿̈́̄̂̚͝͠T̶̢̞̻̭̼̫̙̺̟̝͙̮̈͑̆̈́͊̀̾͑̐́̓͛͋̓͐̾͛͗̄̈́̐͌̇̐̍̏̔̽͠į̵̨̛̛͕̙̺̠̤͚͉̺͈͔̻̭̪͔̣̝̟̞̯͎̥͖̝̖̫̻͓̫͔̹̼͖̼̦̺͎̻̗̖͓͕̰̟̮̤̺̺̪̫̲͉͍̓̒͛͑͑̌́͗̿̀̀̊̓̾̉͜͝͝ͅm̴̡̧̨̢̨̛͙͍͍̯͚̰̙̯͔̗̝̙͙̲̣̞͕̜͕̜̮̖͚̹͇̮̹͈͓̥̮͔̪͚̿̿̈́̀͆͂̈́̆͆̔̋͐́͑̅͆̍̏̉̽̈͛̓̈́͌͗̏̈́͌͂̀̓͆̑͐̈͗̿̾̒́̾͂͘̚̚͘̚͜͜͝͠͝͠e̴̡̨̛̥̦̣̩̮̥̥͎̠̣͖͍̝̟̩͙̠͙̳̰̺̯̅̃̂̍̎̌͊̄̇̓̌͗̈́͑̋̎͛̈̑̀͒̾̈́̆͂̀̄͗͑̌̆͂͑͒̕̚͘̚̕͘͝͝͠͠͠͠͠͠ ̸̢̧̡̡̮͓̥͙͕͙̻̥̥͕̬̹͇̙̻̠̍̓͑̋̄̊̌̋̃̈́͆̄͛́̔͗̓̈́̿̍̕͘̕͝͝͝S̶̡̨̙̟͓̤̤̭̯͎̹̮͙͖̦̺̱̹̤̬̳̙̠̫̰͇̩̼͓̳̯̞̦̬͙͎̦̯̹̥̩̹̘͒̓̓̋̓̂͑̾̍͒̎̈̋̽̃́͗̚̕͜͝t̵̼͚̽̽̔́̎͂̓̒̓̃͐͛̅̕͠ő̷̡̧̨̨̧̢̧̼̭̪̤͈̮̣͙͉̮͇͇̫̹̟̲͖͎̤̭̦͓̟̤̹͖̼̦̹̯̮̦̲͈͙̘͕̹͈̘̼̟̞͎̱̮̮͙̳̄́̅͒̑͗͊̈̀́̆̌͌̂̎̈́̓̀̂̄̿͛̒͂̓̀̊͊̈̈͛̀̏̌́̓́̓̃̃̎̂̿̒͗͂͛̿͌̊͒̓͆̚̕̕̕̚͜͝ͅͅp̶̡͉̩͙͔̺͈̯̗̣͇͔̟͙͍̆͒̉̈̂̍͒̋͋̓̓͐̏̽̊͗―̶̨̛̜̼̗͚̮͇̗͉͈͍͚̞̗̃̌̍̿̈́́̑̄̒̒͋̎̃̍̀̌̇͒̓̽͊̈́͛͛̽͊͋͘̕̚͘͜͝͠͝͠͝―̴̢̧̡̛̲̙͉̖̩̜̤̫̞̦͚̪̻̠̟͈̙͚̜̱̭̩͉̣͊̿͌̏̔̅̇̋̔̂̽̉̋̌̾̊̿̈́̄̂̚͝͠―̸̼̔̐̈́̓̄̆͌̊̍̈͊̄̌͌̈́͒͌̃̽͌̃͘̚͝͠͝͝―̶̬͚̺̥̻̬̓͆̅͂̈̄͌͐̀̓̅́͑̿͒̌̎̒̓̚͜͝―̸̝͇͔͇͆͒̄͌―̸̢̧̦͕̭̪̺̠̹̲̝̟͓̺̰̏͜―̸̫̠͉͎̪̆͒͂̇͐͒̾̿̏̌̃͆͋͆―̵̡̛̛̫̗̤̼̦̳̺̗̭̠̽̽̒̅̈́̒͋̋̓̒̐̓̅̓̚͠͠͝――――――――――――――――――――――――――――――――――――――――――――――――――――――!]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몹시 원시적이고, 가다듬지 않은, 정제되지 않은, 투박한.

그러나 강력한 시간 정지 마법.


세상 만물이 얼어붙는다.

쏟아지던 푸른 불꽃들의 비가 점차 느려지더니 못 박힌 듯 움직이질 않았다.

불바다 속에서 울부짖으며 헤엄치던 괴수들도 흉악한 생김새 그대로 멈추고, 박쥐 인간도 무언가 행동을 취하려던 자세를 유지하며 우스꽝스럽게 정지했다.


구름조차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공기도, 방사능도, 심지어 마력까지도 이 일시정지의 물결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유논은 동결凍結된 세상 속에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오직 강력한 마법 저항력을 지닌 유논과 그 마법의 시전자인 소녀만이 시간 정지에서 자유로웠다.

소녀와 마법사가 눈을 마주쳤다.

‘해냈어!’라고 외치는 듯한 소녀의 해맑은 미소와 뻐끔거리는 환호소리가 뇌리를 찔렀다.

소리의 파동조차 움직이지 못하던 그런 시간이었으나, 그의 눈에는 그 모든 것들이 보였다.


하늘의 별들이 고정되고 바람조차 흐르기를 거부하던 어느 때.

그렇게 유논은 진정으로 소녀를 보았다.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는 검은 단발머리, 그가 마법을 걸어주었던 검은-금색의 홍채이색적 눈.

저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빛을 발하는 얼굴과 통통한 볼.


유논은 운명처럼 그에게 다가온 그 소녀를 보았다.

소녀 또한 유논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금빛이 선명한 눈과 심연처럼 새카만 눈이 서로를 마주본다.

한쪽은 지구에서 온, 흑색의 대마법을 익힌, 용의 가르침을 받은 사내.

다른 한쪽은 황족의 직계 후손이자 강력한 돌연변이이며, 미친 마법 적성을 가진 소녀.

세상을 바꿀, 혹은 이미 바꾼 두 강렬한 존재가 이 자리에서 진정으로 마주쳤다.


“······.”

“······.”


그들이 하염없이 침묵하는 동안, 정지되어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푸른 불의 화살들이 다시금 쏟아지고, 괴수들도 다시 불에 타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으며, 박쥐 인간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작 5초 정도 되는 짧은 찰나 동안의 시간 정지였다.

그러나 소녀가 박쥐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미 그녀는 박쥐 돌연변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리에 서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인질을 빼앗긴 채 당황하던 나이트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푸른 불화살을 맞고 그대로 한 줌 붉은 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유논은 그의 최후에 일말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이쪽으로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멈칫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난 십수 년 동안 그의 삶을 옭아매던 첫 번째 법칙을 떠올렸다.


세상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세상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세상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세상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그는 그에 맞춰 행했다.

오직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법한, ‘사소한’ 축에도 속하지 않을 일들만 행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게 점차 깨져가기 시작한 것이 저 소녀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저 소녀는 세상을 바꾸고도 남을 존재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쉽게 그런 존재와 가까워졌다.

그런 존재가 그의 마음속에 발길을 들이밀었다.


그래서 여러 귀찮은 일들이 생겼다.

세상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첫 번째 법칙을 어기자 오크 부족장에게 추격당했고, 죽을 뻔했다.

거대 세력과 엮여서는 안 된다는 세 번째 법칙을 어기자 방사능의 아이들과 지긋지긋한 인질극, 그것도 자유도시의 존망을 건 인질극을 벌여야만 했다.


전부 그가 스스로 세운 법칙들을 어기자 생겨난 일들이었다.

그는 이러한 일들을 피하기 위해 기계처럼 살아왔다. 법칙을 지키고, 오직 마정석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감정 없는 기계처럼.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되새기기에, 그는 결국 인간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 법칙에 불복하는 존재다. 규칙을 어기고, 또 규칙에 반발하는 이들이다.

세상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너무나도 많이,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바꿔버린 존재였다.

그렇기에 이런 법칙을 만들고 지키려 노력했다.

더 이상 세상을 바꾸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망가진 세상이 고쳐지지는 않는다. 이전의 풍요롭던 세상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저 나빠지고, 더 나빠지고······악의 순환을 반복할 뿐이다.

그는 그 사실을 이미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어쩌면 그는 또다시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설령 정녕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할지라도······그 또한 그가 안고 가야 할 수많은 죄악들 중에 단 하나가 추가되는 것에 불과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저 무거운 어깨에 원죄 하나를 더 짊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랬기에, 유논은 정말 큰 용기를 내어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소녀가 주저하며 대답한다.


“시드Seed.”

“난 유논이다. 마법사지.”

“알아.”


유논은 그 짧은 통성명 뒤에 물었다.


“···나와 함께 갈 테냐?”

“응.”


유논은 다시금 물었다.


“시청에 잠시 머무를 때를 기억하냐.”

“응.”

“아마 시장이 좋은 방에 맛있는 음식도 주고, 좋은 옷들도 입혀 주었을 거다. 나와 같이 가면 그때처럼 편안하게 생활하지는 못할 거다.”

“···그러면?”

“몹시 고달플 거다. 잠자리도 차가울 테고, 괴수들과, 사람들과 싸워야 할 테고. 그들을 죽여야 할 거다. 어쩌면 네가 죽음의 위기에 처할지도 모르지. 그런데도 날 따라올 테냐?”


소녀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왜?”

“나도 고달픈 건 싫어. 싸우는 것도 별로고. 하지만······아저씨랑 함께하는 게 제일 안전하잖아.”


그러며 베시시 웃고 덧붙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아저씨가 제일 좋아.”


유논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냐.”

“응, 진짠데.”


그랬다.

유논은 소녀에게 여러 거짓말들을 했지만, 반대로 소녀는 그를 속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네가 어디를 가든, 너와 함께하마.”


그가 그리 말하는 순간 하늘이 번쩍이고 대지가 울었다.

마법사의 일언을 영원토록 기억하겠다는 듯이.


“약속하는 거지?”

“그래.”

“새끼손가락 걸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텐데······.”


이미 마나와 마력의 그의 약속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그였으나, 소녀가 부루퉁한 모습으로 볼을 부풀리자 한숨과 함께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두 새끼손가락이 서로를 옭아매고 위아래로 움직인다.


소녀는 몰랐겠지만, 이것은 매우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내려온 유서 깊은 의식이었다.

태초의 드래곤이 첫 번째 마법사에게 마법을 전수해줄 때부터 내려온 마법사들의 약속.


사제관계의 약속.

스승도 이를 깨뜨릴 수 없으며, 제자도 이를 깨뜨릴 수 없다.

둘의 운명은 혈연보다도 더 진하게 엮이게 된다.

그렇게 함께 흐르게 될 것이다······.


손가락을 맺고 있는 소녀와 마법사 주위로 푸른 불똥들이 떨어졌다.

해가 하늘 높이 떠올랐고, 어딘가에서 모터사이클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아침이 오고 있었다.



Ep.2 시장 납치 사건(The Mayor Has Been Kidnapped!)

End.


작가의말

요즘 너무 더워서 졸리네요. 오늘도 세시간이나 낮잠을 잤습니다....

전 내일 막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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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2) +22 20.06.19 1,906 100 12쪽
39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다(1) +16 20.06.18 2,060 95 14쪽
38 재회(Reunion)(5) +17 20.06.17 2,284 97 14쪽
37 재회(Reunion)(4) +17 20.06.16 2,104 113 12쪽
36 재회(Reunion)(3) +14 20.06.15 2,214 121 13쪽
35 재회(Reunion)(2) +22 20.06.13 2,320 122 14쪽
34 재회(Reunion)(1) +24 20.06.12 2,341 126 12쪽
33 막간-카멜레온(Chameleon, 七面蜥蜴)(2) +28 20.06.11 2,299 127 18쪽
32 막간-카멜레온(Chameleon, 七面蜥蜴)(1) +17 20.06.10 2,340 110 13쪽
» 이름에는 힘이 있다(3) +54 20.06.09 2,440 147 20쪽
30 이름에는 힘이 있다(2) +18 20.06.08 2,372 119 13쪽
29 이름에는 힘이 있다(1) +20 20.06.07 2,406 126 15쪽
28 누구의 자식인가(4) +35 20.06.06 2,457 110 15쪽
27 누구의 자식인가(3) +16 20.06.06 2,413 113 12쪽
26 누구의 자식인가(2) +20 20.06.05 2,452 119 12쪽
25 누구의 자식인가(1) +23 20.06.04 2,549 111 15쪽
24 Fast & Furious(3) +2 20.06.04 2,481 114 12쪽
23 Fast & Furious(2) +16 20.06.03 2,590 122 14쪽
22 Fast & Furious(1) +20 20.06.02 2,652 133 13쪽
21 방사능의 아이들(Children of Radioactivity)(3) +15 20.06.01 2,644 12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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