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유령
모스크바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어 저격수의 활약이 중요한 이 때, 류드밀라, 크세니야, 안나, 나타샤 등 소련 여성 저격수들은 저격 수행 임무에 있어서 매우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저격수는 한 발 사격 이후에 장소를 이동해야 생명이 보장된다. 그런데 허가받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가 재수가 없으면 반동분자로 몰려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오늘도 한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또한 허가 받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는 이유로 반동분자로 몰려서 즉결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크세니야가 중얼거렸다.
"마..말도 안돼! 훈장까지 받은 동지인데!"
"무전기도 없는데 어떻게 자리 이동을 보고하라는거야?"
류드밀라 일행은 처형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빠른 걸음으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타샤가 속으로 생각했다.
'바보들! 이제 알았어? 우리는 그냥 이용당할 뿐이라고! 죽어라 싸워봤자 스탈린만 이득이야!'
저 멀리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탕! 타앙!!
한편 블라슈크는 무선을 통해 지원 병력을 요청하고 있었다.
"현재 381 거점에서 전투가 진행 중이다!! 현재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다!!! 지원 병력을 요청한다!! 지원 병력을 요청한다!!"
블라슈크가 머무는 건물에서는 기관총 사수가 모래 주머니를 쌓아두고 기관총을 긁어대고 있었다.
드륵 드르륵 드르륵
기관총을 긁을 때마다 사수의 옷과 팔뚝까지 드르륵 떨린다.
"탄약이 부족합니다!!!"
블라슈크가 계속해서 무선을 보냈다.
"지원 병력과 기관총 탄약을 요청한다!!!"
한참 바쁘게 무선을 보내는데 저격수들이 블라슈크를 찾아와서 외쳤다.
"정치 장교 동지! 보다 효율적인 저격을 위하여 4시 방향 건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허가받아도 될지 여쭈어도 될지 궁금해해도 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블라슈크 동지! 17구역이 독일군에게 점령당하기 일보 직전이라 16구역으로 기관총을 옮겨도 될지 물어봐도 될지 허락받고 싶어해도 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지난 번에 기관총 사수가 허가 없이 자리를 이동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이후, 저격수들과 기관총 사수들은 자리를 이동하기 전에 정치 장교에게 이를 일일히 보고하였던 것 이다. 블라슈크는 골치가 지끈거렸고 이를 모두 허가했다. 그리고 기관총 사수가 외쳤다.
"이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해주십시오!!"
블라슈크는 각 저격수, 기관총 사수들이 위치를 이동해도 된다는 것을 허락하는 명령서를 직접 작성해야했다. 그 동안에도 독일군은 계속해서 밀려오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독일군 전차의 주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들렸다.
티잉!! 쿠과광!! 콰과광!!
여기저기서 박격포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쿠과광!! 콰광!!!
하지만 기관총 팀이 처형당한 이후로, 각 저격수와 기관총 사수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위치를 이동할때 정치 장교를 찾아가서 증명서를 받아냈다.
결국 정치 장교 블라슈크는 안토노프에게 각 부대가 보다 자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동, 전술의 자유가 주어져야한다고 건의했다. 안토노프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비겁한 반동분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상황에 퇴각할 수 있네!"
블라슈크가 말했다.
"시가전에서는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위치를 이동해야 합니다! 무전기가 없기 때문에 기관총 사수나 저격수가 이를 모두 보고하고 허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더 이상 무의미하게 정예 병력들을 소모해서는 모스크바를 지킬 수 없습니다!"
최근에 블라슈크는 표도르 등 전차장들에게도 직접 불편한 점들을 물어보고 다녔다. 표도르는 독일군의 전차에만 무전기가 있었기 때문에 유동적이고 자율적인 기동이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블라슈크가 말을 이었다.
"또한 기갑 부대에도 기동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건의합니다!"
결국 안토노프는 보병뿐만 아니라 전차들도 자율적으로 기동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한편, 류드밀라, 나타샤는 독일군이 점령한 위치로부터 고작 한 블락 떨어진 건물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타샤는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스코프 안을 바라보았다. 잿빛 도심 속에서 병사들은 연막을 깔아놓고 그 틈을 타서 빠른 속도로 소련군이 점거한 건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으아아...으아아...'
반대편에 있는 건물들도 언제 독일군에게 점령당할지 알 수 없었다. 나타샤는 반대편 건물에 무시무시한 독일군 저격수 아돌프가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것을 상상했다. 놈은 나타샤의 머리가 스코프 한 가운데 있을때 방아쇠를 당길 것 이다. 나타샤는 몸서리를 쳤다.
'엄마야!!'
그 때, 갑자기 확성기로 독일군이 휴전을 제의했다. 어색한 발음의 러시아어로 말하는 독일군의 목소리가 시가지에 울렸다.
"인도적인 목적으로, 앞으로 30분간 교전을 정지할 것을 요청한다!"
류드밀라가 중얼거렸다.
"무슨 꿍꿍이지?"
다들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독일군의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민간인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30분간 이 인근에 교전을 정지할 것을 요청한다! 그 동안 민간인들을 그 쪽으로 보내겠다!"
크세니야가 중얼거렸다.
"거짓말이야...절대 속으면 안돼..."
하지만 놀랍게도 흰 깃발을 달고 있고 측면에 커다란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독일군의 오펠 블리츠가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저격수들은 다들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했다. 나타샤가 속으로 생각했다.
'트...트로이의 목마처럼 안에 폭탄 있는거 아냐? 아니면 파시스트 정예부대가!!'
오펠 블리츠에서는 독일군 집행유예 부대원 한 명이 나왔다. 그는 양 손을 들고는 소련군에게 외쳤다.
"이 트럭 안에 민간인들이 있소! 이들이 그 쪽으로 가는 것을 허가해주시오!!"
블라슈크가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허가한다!!!"
류드밀라는 덜덜 떨면서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블라슈크가 류드밀라에게 말했다.
"내가 명령하기 전에 사격 금지한다."
오펠 블리츠의 뒷칸이 열렸고, 거기서 어린 아이, 노인 등 많은 민간인들이 나왔다. 그렇게 모든 민간인이 내린 이후, 독일군은 오펠 블리츠를 운전해서 독일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공포에 떨던 민간인들은 재빨리 소련군이 점령한 건물로 들어갔다.
이 민간인들은 소련군이 점령한 건물과 독일군이 점령한 건물 사이에 위치해있었고, 그들이 머물던 집은 독일군과 소련군 양쪽 진영에서 계속해서 박격포탄을 맞고 있었던 것 이다. 소련군 진영에 들어가고 나서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풀어진 병사들에게 블라슈크가 말했다.
"집중해! 저 놈들은 우리 적이야!"
한편, 독일군 병사들이 보며 중얼거렸다.
"저런 한심한 놈! 굳이 쓸데없이 귀찮은 일을 자처하다니!"
"냅둬! 집행유예 부대원인데 전공 하나라도 더 세워야 빨리 부대 복귀하지 않겠냐?"
"저 녀석, 사형 선고 받았는데 1개월의 유예 기간을 받은거래! 그 동안 독일 제국에 필요한 군인이라는 것을 입증하면 사형에서 면제될 수 있다더군!"
이는 만슈타인이 시행하는 정책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집행유예 부대원도 한 달의 유예 기간을 주고 그 기간 동안 전공을 세우면 사형을 면제해주는 정책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사형 선고를 받고 한 달간의 유예를 받게 된 집행유예 부대원, 하이에가 오펠 블리츠에서 내렸다.
하이에는 여태까지 받았던 훈장과 계급장을 모조리 빼앗긴 상태였다. 하이에는 더러운 수통에 들어있는 물을 마셨다. 집행유예 중대의 헤어만 중대장이 하이에에게 외쳤다.
"아주 훌륭했네! 39 확인점에 추가 임무가 있네! 이 임무만 성공하면 귀관은 명예와 직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네!"
하이에는 참고로 이번 주에만 이 말을 10번 넘게 들었다. 헤어만 중대장은 하이에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주 쓸모있는 사냥개가 들어왔군! 쓸데없이 오지랍이 넓기는 하지만!'
하이에는 헤어만 중대장을 따라갔다. 헤어만 중대장은 하이에에게 MP40을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중대에서 전투력이 뛰어난 이들을 뽑아서 집행유예 돌격대를 편성했다. 결국 하이에는 그렇게 편성된 집행유예 돌격대를 이끌고 빗줄기를 뚫고 전진했다. 집행유예 돌격대 일원인 루크가 씨익 웃으며 외쳤다.
"전우들!! 조만간 발할라에서 봅시다!!!"
현재 소련군이 주요 거점으로 쓰고 있는 도서관 건물의 3층에서는 보초들이 꾸벅꾸벅 졸면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졸지 않는 보초들은 이따금씩 창 밖을 바라보았다. 독일군이 진입할만한 경로는 3군데 있었기에 이 곳을 계속 확인해야 했다. 보초가 창 밖을 보는 동안, 반대편 창문에서 밧줄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건물 밖에 매달린 하이에와 집행유예 부대원들이 반대편 창문에서 한 번에 수류탄을 던지고는 창가에서 몸을 피했다.
쿠과광!! 콰광!! 쿠과광!!!
수류탄이 한꺼번에 터졌고, 이 엄청난 충격과 폭발에 옆 건물에 있던 소련군들이 모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놈들이 진입한다!!"
하지만 하이에와 집행유예 부대원들은 이미 유리창을 와장창 부수며 도서관 내부로 진입한 상태였다.
드득 드드득 드드득
어둠 속에서 엄청난 소음과 함께 MP40가 불꽃을 번쩍거렸다. 실내에서 총격이 시작되면 엄청나게 시끄럽기 때문에 소련군은 서로에게 명령을 전달할 수 없다. 소련군은 MP40가 사격되는 쪽으로 따발총을 발사했다.
따닥!! 따다닥!! 따다닥!!!
그 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소련군의 목을 칼로 벴다.
스으윽!!
잠시 뒤, 도서관 건물은 하이에의 집행유예 부대에 완전히 장악당한 상태였다. 집행유예 부대원 루크는 소련군의 시체를 발로 걷어차며 외쳤다.
"오늘 발키리들과 술 한잔 하나 했는데 글렀군!!"
루크는 민간인 사살로 사형 선고를 받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루크 또한 군법에 의해 한 달 안에 전공을 세우면 이를 사면받을 수 있었다. 루크는 비록 전투력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하이에는 루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사고치는 일은 막야아 한다!'
이렇게 모스크바의 주요 거점을 하나씩 장악하는 무시무시한 집행유예 부대에 대한 소문이 소련군 사이에서 퍼졌다. 하이에와 집행유예 부대는 [모스크바의 유령]이라고 불리웠다.
안나가 수근거렸다.
"놈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와서 지휘관의 목을 긋는대!"
나타샤가 속으로 생각했다.
'나같이 평범한 저격수를 굳이 노리진 않겠지? 노려봤자 직급이 높은 정치 장교나 지휘관을...'
"저격수, 특히 훈장을 받은 저격수가 주요 타겟이라고 하니 류드밀라와 나타샤 너희 둘 다 조심해야해!"
나타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돼!!!!!!'
한편, 슐레프 중대는 모스크바 외곽에서 파르티잔에게 협조하던 작은 마을을 검거한 상황이었다. 이들은 파르티잔에게 물건을 보급해주고, 지리를 가르쳐두기도 했고, 독일군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오토는 이 마을 주민들의 얼굴을 보고 구역질을 느꼈다. 무장 파르티잔들은 즉결 처형당했고, 오토는 이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로 했다. 오토는 자전거 뒤에 무장 파르티잔의 우두머리의 시체를 매단 다음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트드등 트드드드등
파르티잔의 시체가 자전거 뒤에 매달려 진흙탕에 쓸려다녔다. 오토는 자신이 헥토르를 죽이고 시체를 끌고 다녔던 아킬레우스라도 된 듯한 심정이었다. 오토가 환호성을 질렀다.
"워우!!!"
잠시 뒤, 오토는 슐레프 중대장에게 귀를 잡혔다.
"아악!!!"
슐레프 중대장이 외쳤다.
"또 집행유예 부대 가고 싶은게 아니면 자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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