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 속에 모스크바
후두둑 후두둑
모스크바에는 엄청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련군 저격수 이반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지붕에 자리를 잡고는 스코프에 집중하고 있었다. 곳곳에 비치해둔 양철 통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후..."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김이 나왔다. 워낙 비가 거셌기 때문에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았다.
투둑 후두둑
이반은 결국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17번 건물로 옮기자."
그렇게 이반은 17번 건물의 3층 벽면에 망치로 구멍을 뚫고는 엎드린 다음, 발은 땅에 붙였다. 엄청나게 비가 많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민간인들이 종종 짐을 들고 지나갔다. 민간인이 지나갈 때마다 이반은 스코프로 이들을 예의 주시했다.
'여태까지 피난도 안 가고 뭐하는거야?'
저격수 입장에서 민간인만큼 성가신 것은 없었다. 물론 이 근방을 지나가는 민간인들의 대다수는 나이든 아주머니나 어린 아이들이었기에 딱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이 길 맞은편에서 우산을 쓰고는 한 손으로 커다란 짐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파시스트인가?'
변장한 독일군일 수도 있었기에 이반은 그 자의 쇄골 아래를 겨누었다. 파블리첸코나 바실리 자이체프나 그 외 베테랑 저격수라면 몰라도, 이반은 사격 실력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기에 머리를 한 번에 맞출 자신은 없었다.
이반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은 상태로 그 자에게 집중했다. 부사수 또한 다른쪽 창문에서 페리스코프를 이용하여 그 자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저 모자 쓴 새끼 보이지?"
"확인"
그 때, 모자를 쓰고 있던 자가 미끄러져 자빠졌다. 부사수가 말했다.
"아줌마네."
아주머니가 들고 있던 짐 안에서 빵이 우수수 떨어졌고, 아주머니는 빵을 주워담기에 바빴다.
이반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른 곳을 조준했다. 그 때, 창문 반대편에서 불꽃이 번쩍거렸다. 0.0001초의 순간, 이반은 파시스트 저격수가 자신을 조준하여 발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
순간적으로 이반은 19년의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퍼억!!!
"이반!!!!"
잠시 뒤, 류드밀라, 크세니야, 나타샤, 안나 등 저격수들이 엎드린채로 이 건물로 들어왔다. 이반의 얼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뇌수와 피, 박살난 두개골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안나는 이 광경을 보고 구역질을 했다.
"우웩!!!"
아까 전에 이반이 쓰던 구멍은 현재 모래주머니로 막아둔 상태였다. 나타샤는 눈을 굴리며 벽에 있는 모든 구멍이 제대로 차단되어있는지 확인했다. 저격수들이 쓰는 이런 구멍을 모래주머니나 책으로 막아두지 않았다가 적에게 저격을 당하는 일이 흔했던 것 이다.
류드밀라 일행은 엎드린채로 계단으로 기어가서 내려온 다음 건물 밖으로 나와서 하수구를 따라서 걸어가며 수근거렸다.
"아돌프가 틀림없어!!"
"쉿! 조용히 해!!"
안 그래도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하수구는 장마로 인하여 물 흐르는 소리가 평소보다 세차게 들렸다. 혹시 독일군이 올 수도 있었기에 다들 최대한 조용히 걸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평소에 지나가던 하수구가 잔해 더미로 막혀 있었다.
"이럴수가!"
"독일군이 폭발시켜서 막아놓은거야!!"
독일군은 하수구를 통해서 잠입하는 소련군을 차단하기 위하여 하수구를 폭발시켜 길을 막은 것 이었다.
결국 류드밀라 일행은 멀리 돌아서 가야 했다. 어두컴컴한 하수구를 통해서 가다보니 마침내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타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슐레프 중대는 여전히 가솔린을 보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소련군의 연료를 노획했기 때문에 T-34와 IS-2 전차는 운용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IS-2의 엔진 상태가 안 좋아서 결국 오토의 소대는 네 대의 T-34으로 교전을 벌이기로 했다. 마티아스를 포함한 오토 소대의 조종수들은 이런 좆같은 상황에 욕을 퍼부었다.
"출발!!!"
오토의 소대 전차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고, 오토는 전차장 뷜리겐의 전차와 함께 69번 길로 향했다.
트드등 트드드드등 트드등
오토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보병을 지원하러 갔다. 보병들은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긴채로 막대형 수류탄의 뚜껑을 돌돌 돌려서 연 다음 격발끈을 잡아당기고 소련군이 엄폐해있는 잔해 더미로 수류탄을 집어던지고 잽싸게 몸을 숙였다.
쿠과광!!
보병들이 엄폐물에서 수류탄을 던질때마다 소련군은 기관총을 긁어대고는 박격포를 발사했다. 보병들은 오토 소대의 T-34를 보고 처음에 놀랐다가 이내 전차에 걸린 깃발을 보고 반가워했다.
"왜 이제 오냐!!"
"저 새끼들 날려버려!!"
오토의 소대 전차들은 소련군이 점거한 건물을 향해 유탄을 발사했다.
티잉!! 티잉!
쿠과광!!! 콰과광!!!
다른 건물에 숨어있던 류드밀라는 대전차소총으로 뷜리겐의 T-34의 기동륜을 조준했다.
타앙!!!
카가강!!!
류드밀라는 그렇게 기동륜을 조준해서 박살낸 다음, 오토 소대 다른 T-34의 기동륜 또한 조준했다.
탕!! 카가가강!!
류드밀라는 그렇게 오토의 전차를 제외한 세 대의 T-34의 기동륜을 모두 격파한 다음 오토의 T-34의 기동륜을 조준했다. 원칙대로라면 저격을 한 다음 바로 이동해야했지만, 지금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한대의 독일 전차라도 더 기동불가로 만들어야 했다. 그 때, 오토 소대 뷜리겐의 T-34가 류드밀라가 있는 건물을 향해 포탑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류드밀라는 저격총만 챙기고 황급히 도망쳤다.
류드밀라가 서둘러 옥상으로 올라가는데, 유탄이 건물로 날아왔다.
쿠과광!! 콰광!!!
'꺄아악!!!!'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처럼 옥상이 흔들렸다. 류드밀라는 잽싸게 옆 건물 지붕으로 점프한 다음 탈출에 성공했다.
티잉!! 쿠과광!! 티잉!! 쿠과광!!!
오토가 외쳤다.
"사격 중지!!!"
보병들이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잠시 뒤, 보병들이 건물을 점령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오토가 전차 위로 깃발을 올리고는 외쳤다.
"본부로 복귀한다!!"
그런데 오토 소대의 다른 T-34들이 모두 붉은 깃발을 전차장 해치 위로 올린 다음 위아래로 움직였다.
"기동불가!!!"
"기동불가!!!"
"기동불가됐슴다!!!"
"이런 젠장!!! 일단 나부터 본부에 복귀하겠다!!"
그렇게 오토의 T-34가 조심스럽게 후진하는데 전차 밑에서 엄청난 충격이 전달되었다.
콰광!!!
"으아악!!!"
오토의 T-34의 좌측 궤도가 대전차 지뢰를 밟고 끊어진 다음 스르륵 벗겨진 것 이었다.
"이런!! 젠장!!!"
그렇게 오토 소대의 T-34가 모두 기동불가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오토의 소대원들은 방금 전 보병들이 점거한 건물로 진입했다. 오토와 소대원들은 T-34에 비치되어있던 따발총과 수류탄 등을 챙겼다. 유선으로 중대 본부에 구난 소대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런데 다른 중대 전차가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건물이 무너져서 구난을 받느라 구난 소대가 임무를 마치고 여기까지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시발...'
오토의 소대원들은 그렇게 5층짜리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소련군이 다시 건물을 탈환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이런 젠장!!!'
오토는 옥상 위로 올라가서 페리스코프를 위로 올려보았다. 정말 소련군 보병이 탑승하고 있는 트럭이 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오토는 1층으로 내려간 다음, 수류탄 두 개를 들고는 담벼락에 있는 구멍에 눈을 갖다댔다. 소련군이 있는 길목에서 이 건물까지는 곳곳에 엄폐할만한 잔해더미, 박살난 포 진지 등이 널려 있었다. 소련군은 상당히 주의 깊게 이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오토는 일부러 상당히 멀리 수류탄을 집어던졌다.
쿠과광!!!
오토가 허리를 숙이자마자, 소련군이 오토가 있던 곳으로 따발총을 발사했다.
따다닥!! 따닥!!!
오토는 허리를 숙인 채로 담벼락을 따라 달려갔다. 그리고 20초를 셌다.
'하나...둘...셋...넷...'
빗줄기 속에서 소련군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오토가 수류탄을 멀리 던지기 전까지는 상당히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토가 상당히 멀리 수류탄을 던졌기 때문에, 소련군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오토가 있는 담벼락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투두둑 투둑 투두두둑
빗줄기가 계속해서 오토의 슈탈헬름을 때렸기에 소련군의 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련군이 어디까지 접근했는지 오토로서는 알 수 없었다.
'열여덟, 열아홉, 스물'
그리고 오토는 담벼락 너머로 수류탄을 집어던지고는 귀를 막았다.
쿠과광!! 콰광!! 쿠구궁!!!
담벼락 옆에 바짝 붙어서 모여있던 소련군은 오토의 수류탄에 파편을 맞고 모두 한 번에 즉사했다.
오토가 처음에 일부러 수류탄을 멀리 집어던진 이유는 소련군으로 하여금 담벼락에 붙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방금 전 수류탄이 터진 곳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자 하고, 담벼락 같은 곳에 붙어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렇게 오토는 처음에 던진 수류탄으로 소련군을 담벼락 바로 옆으로 유인한 다음에 바로 수류탄을 담벼락 뒤로 넘겨서 한 번에 많은 소련군을 사살할 수 있었던 것 이다.
오토는 엄청난 짜릿함을 느끼며 건물 안으로 다시 진입했다.
'난 역시 머리가 좋아!!!'
보병들이 오토를 보고 환호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오토가 으쓱하며 외쳤다.
"수류탄은 적을 사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적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용도로도 쓸 수 있다네!!"
그 때, 헤어만 중대장과 하이에, 루크 등 집행유예 부대원들을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오토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저 새끼들이 왜 여기에 온거야!!!'
헤어만 중대장이 외쳤다.
"무선 감청에 따르면 로스케 놈들이 이 건물을 다시 점거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로 공격할 가능성이 있네!"
한편 아직도 오토의 격파된 T-34들을 구난해주기 위한 구난 소대는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토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구난 소대는 도대체 언제 오는거야!!!'
오토는 건물 밖으로 나간 다음, 담벼락에 난 구멍을 통해서 초조하게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구난 소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저격수 맥스가 담벼락 밑에 구멍을 통해서 어딘가를 저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보병들이 맥스를 보고 수근거렸다.
"세계대전 때부터 활약한 최고의 저격수래!"
"죽음의 숙녀나 바실리 자이체프보다 강하다고 하더군!"
오토 또한 저격수 맥스를 바라보았다.
'뭐...뭘 노리는걸까?'
맥스는 담벼락 옆에 엎드린 채로 스코프에 집중하고 있었다. 1시 방향에 기동불각 된 트럭이 한 대 있었다. 굵은 빗줄기 때문에 맥스조차도 시야 확보가 쉽지 않았다. 맥스의 각막 위로 빗방울이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스는 눈을 부비지 않고 스코프에 집중했다.
그리고 소련 군복의 누리끼리한 색깔의 무언가가 트럭 밑에서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맥스는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트럭 밑에서 기어가던 누군가는 머리를 맞고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토 또한 식은 땀을 흘리며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날씨에도 우수한 저격수는 시야 확보가 가능하구나!!'
잠시 뒤, 보병들이 정찰을 갔다와서는 당황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어린 아이였습니다."
'!!!'
맥스는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자리를 옮기고 다시 스코프에 집중했다. 에밀이 쑥덕거렸다.
"아무리 대단한 저격수라도 실수로 민간인을 사살할 수도 있군요."
참고로 맥스는 에밀로부터 멀지 않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기에 에밀이 주절거리는 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오토가 에밀에게 제발 입 닥치라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하지만 에밀이 계속 중얼거렸다.
"포병들도 오폭으로 아군이나 민간인을 사살할 수 있으니 이런건 어쩔 수 없는 사고이긴 하죠. 하지만 아무래도 저격수가 더 힘들 것 같은데 직접 조준해서 대가리를 날렸는데 그게 민간인이면...악!!"
참다 못한 오토가 에밀의 대가리를 쳤다.
그리고 이 때, 상당히 많은 수의 소련군이 독일군으로부터 건물을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우르르 몰려가서 소총을 하나씩 받았다.
"비켜!!"
"이건 내꺼야!!!"
그렇게 소련군은 모두 한 자루의 소총과 수류탄 한 개를 받았다. 정치 장교 안토노프가 외쳤다.
"총 물에 안 젖게 조심해!!!"
여러 민족이 섞인 소련군은 빗줄기 속에서 소총과 수류탄을 한 개씩 챙기고는 독일군이 점거하고 있는 건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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