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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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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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7,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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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6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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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와 충성의 대상

DUMMY

잠시 뒤, 위니아는 듣기 싫다는 기색으로 서고를 나가버렸다.


빈 공동에 벙어리와 유녀 같은 유부녀만 남았다. 나가버린 마법사를 보고 로나는 뺨을 부풀렸다.


“에잉. 이거 정말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


롬은 눈을 껌벅였다. 귀가 무언가를 듣긴 했는데 이해가 뒤늦게 따라왔다. 그는 확인하기로 했다. 방금 전까지 들었던 설명을 간추려서 물었다.


[제가 토너먼트에 참가해야 한다고요? 왜요?]


사실 들으면서도 이해가 안됐다. 로나는 친절하게 늦깎이 학생에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쉽게 설명할게요. 롬, 잘 따라오세요? 큼큼, 헤르미아에서 열리는 토너먼트는 유서 깊고 전통 있는 행사예요. 요즘에는 기사들과 전사들의 등용문이다. 또, 부나 명성을 노리고 참가하는 대회다. 그런 말이 많아요. 토너먼트의 순위권에 드는 자들한테 헤르미아의 기사라는 명예가 주어지거든요. 어쨌든 모두 사실이지만 그 뿌리에는 성전기사단이 있어요.”


“오?”


문득 아는 얘기가 나왔다. 롬이 브리타니아 바깥에서 유랑하던 시절, 서적이나 이야기로 들었던 성전기사단의 이야기였다.


모를 수가 없었다. 롬은 그 이야기에 기대서 엘리자를 꾀어냈다. 그리고 결투인 척 말을 타고 날아났다.


그게 꽤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 성전 기사단에는 예로부터 오랜 관습이 있었답니다. 그리시아 교의 성서나 지엄한 왕국법에도 짧게 명시되어 있어요. 기사된 자의 분쟁은 결투로써 해결한다고요.”


우린 신 아래서 한 점 속됨과 부끄럼 없이 싸우리라. 이르매 우리께 주신 약속이니. 너 기사된 자여. 전사여. 죄와 죄를 가르는 싸움을 받들라.


롬은 그 문구를 떠올렸다. 그런데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래서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가? 자신이 토너먼트에 참가해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의아한 눈빛에 로나는 펼쳤던 로맨스 소설을 휙휙 넘겼다. 그리곤 결투란 챕터를 짚어냈다.


“계속 들어봐요. 카룰 왕께서 엘리자 님들을 토너먼트 마지막 날에 결투 재판을 명했잖아요? 자매들의 결투가 이 토너먼트와 아주 관계없는 내용은 아니란 거예요. 사람들이 숭배하는 승천자 샤를롯이 승인한 결투예요. 신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성사시킨 결투.


오랜 관습이자 사장되다시피 한 결투 재판을 명분상으로나마 승인한 거랍니다. 신 아래에서 무죄인 자가 승리하리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요.”


그래도 사람들은 받아들일 거다. 그들을 다스리는 승천자가 내린 명이자 판단이기에. 그리고 썩 사람들의 입맛에 맞을 테다. 원래 모든 것을 잃는 싸움이 재밌는 법이다.


“왕께서 치밀하게 성사한 결투는 무를 수 없어요. 어떻게든 한쪽이 패배하겠지요. 그건 좀 슬프잖아요. 그런 이야기는. 한쪽이 그렇게 끝나는 이야기라니. 제가 보기에 백작님들은 어느 쪽도 악이 아니잖아요?”


길어지는 얘기에 롬은 점점 집중력을 잃고 있었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만. 조금 짧게 설명해주시면 안됩니까.]


“그러니까! 어찌됐든 이 결투 재판을 방해하고 싶잖아요? 판 자체를 엎을 수가 없으니, 그렇다면 샤를롯 님이 짠 판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통제에 혼란을 끼얹는 거지요!”


[조금 더 짧게...]


“아휴. 지금 짧게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첫 번째, 롬이 토너먼트에 참가해서 정당한 자격을 얻는다. 둘, 그 다음 결투 재판에 이의를 제기하라는 거예요. 승천자가 승인한 결투란 방법을 가지고요!”


“...!?”


순간 롬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냈다. 거기에 짜게 식은 표정도 섞였다. 그리고 눈앞의 유녀가 자신더러 죽으라고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 말은 왕이 주관한 결투를 결투하자고요?]


결투를 결투한다. 이게 당최 무슨 소리인지. 롬은 자신이 적어내고도 혼란스러웠다.


“비슷하긴 하네요.”


그에 로나는 뺨에 손가락을 댔다. 정답에 가까워진 롬이 내놓은 답은 정석 같은 거였다. 하지만, 그녀가 펼쳐놓은 페르난디의 소설의 한 부분처럼 그랬다. 흑기사가 연인을 구하려 거대한 적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이야기.


하지만, 그녀는 거기에 각색을 더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쪽이 아니에요. 감당할 수 있나요? 제가 보기에 롬이 특별하긴 해도 왕의 챔피언을 이기기엔 무리 같은데요.”


“넵.”


벙어리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즉답했다. 왕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결투를 들먹이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응했다고 한다면 샤를롯은 대리인을 내세울 거다. 황금의 챔피언 코마드. 그가 곧 자신의 검인 셈이니. 롬은 그 미친 인간병기 앞에 서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상상만으로 그는 죽어버렸다. 아니, 그 전에 불경하다면서 로열가드들이 자신의 목을 쳐버릴 지도 모른다.


롬은 모르겠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모르겠고 정답이나 알려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신호에 로나가 입을 열었다.


“결투할 대상은 자매들입니다.”


이건 기사가 연인을 구하기 위해 왕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기사가 연인을 구하기 위해 연인을 줘패는 이야기다.


.

.

.


멜로스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뭔가 따끔 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음, 뭐지? 이 동류를 감지한 것 같은 느낌은?”


음유시인이 중얼거렸다. 그러고 있으면 옆에서 기침하는 목소리가 기함을 토했다.


“쿠울럭! 그게 다...! 공작님이 노하셔서 그런 거야아!”


“아, 그런 거 같네요. 어쩐지 공작님이 보고 계신 것 같더라니.”


“...으잉? 요즘 젊은이 같지 않은 소리를. 자네 같은 젊은이 덕에 세상이 빛을 보는구먼.”


“크큭, 그쪽도 요즘 어르신 같지 않게 정정하십니다.”


철썩.


마부석에서 멜은 말의 고삐를 퉁겼다. 그러자 사람들을 태운 마차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살살 몰아!”


멜의 옆에 앉아있는 공작무새 노인이 빽 소리쳤다. 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있으면 짐마차의 뒤에 앉아있던 목소리가 불퉁하게 내뱉었다.


“저 노망난 늙은이는 누가 데리고 나왔어?”


“뭐!? 노망? 나 아직 안 늙었어!”


“세상에나... 저 치가 저렇게 될 줄이야. 그 과정을 천천히 봤어야하건만.”


“아미츠에 있는 마누라 앞에서는 멀쩡하던데?”


“원래 와이프 앞에서는 없던 정신도 돌아오는 거이...”


순간 짐마차의 뒤에서 노쇠한 웃음소리들이 번졌다. 그에 멜은 씨익 웃었다. 황혼을 딛고 달리는 짐마차가 달달거리면서 굴러갔다. 짐마차에 앉아있는 늙은이들의 갑주가 절그럭댔다. 개중에는 오랜 자신의 검을 들여다보는 자도 있었다.


“롤랑 님이 정말로 우리를 소집했나? 그 양반은 결코 우리를 부르지 않을 텐데.”


한 늙은이가 물었다. 그에 음유시인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그랬지요. 롤랑 경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흑기사를 설득했습니다. 이게 곧 공작령을 구하는 길이라고 말이지요.”


“무슨 소리지?”


“어르신들께서 가는 전장이 곧 바타니아를 구하는 전장이라는 겁니다. 제가 말했다시피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전장이지요.”


“...”


짐마차에 침묵이 감돌았다. 음유시인은 상관치 않고서 말했다.


“죽는다면 헛되이 죽을 겁니다. 이 땅에 거름이 되겠지요. 후손은 당신들의 노고를 모를 것이고. 칭송하거나 기억하지 않겠지요. 대부분은요. 그런데도 이렇게 따라오셨군요. 왭니까? 자매들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피 흘리는 데도 나서지 않았잖습니까.”


황혼을 달리는 마차에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 대답이 없었다. 음유시인은 침묵했다. 입을 놀리기에는 안 좋은 타이밍 같았다.


그러고 있으면 음유시인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다 공작님... 아니. 우, 우리는... 독수리와 사자의 깃발 아래 기사된 자. 흑기사의 이름으로, 우린 갈라질지언정 서로 피 흘리지 않을지어다.”


오락가락하던 노인이었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사실, 그건 오래되고 지워진 기사서임의 첫 구절이었다. 분단령이 되고 난 뒤에는 퇴색해버린 말이었다.


그에 뒤에 있던 늙은 기사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대 들으라. 기사되려는 자여.”


그들은 바타니아 공작을 떠올렸다. 그들의 주군이 언젠가 그들의 오른쪽 어깨에 스쳤던 검이 있었다. 또 다른 늙은이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대 정의를 행함에 있어 주저하지 말지어다. 망설임은 미혹을 낳고 미혹은 정의를 흐리게 함이라.”


그들은 거기에 대고 끄덕였다. 또 다른 노인은 부루퉁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언젠가 아론과 롬이 찾았던 기사 식당의 주인이었다. 그는 낯간지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대 선을 베풂에 아끼지 말지어다. 이는 주어진 숱한 악을 씻어내는 강물이 되게 함이라.”


그들은 자신들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 진실 할지어다. 어떤 삿됨과 못남조차 꾸미지 말지어다.”


정의. 선. 악. 그런 건 잘 모르겠다. 기준, 잣대. 그런 걸 가져다대면 골치 아픈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그들은 황혼에서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뭔가를 깨달았다. 비극과 절망에 타성적으로 살던 고개가 들렸다.


오랫동안 버렸던 검이 대상을 찾았다. 그들은 고개를 들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마차가 멈춘다. 황혼을 등지고 그들의 앞에 흑기사가 나타났다.


“늙고 노쇠했을 지라도 우린 바타니아의 기사라네. 바타니아가 위험하다는데 어쩌겠나. 그리고 저 양반 혼자 가게 둘 수는 없지.”


늙은 기사들이 흑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차에서 하나 둘씩 내렸다. 삐걱거리는 관절들이 갑주처럼 울렸다. 흑기사는 저 멀리서 들리던 기사서임의 문구를 곱씹었다. 이내 고민했다. 롤랑은 자신의 욕심으로 그들을 사지로 데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나보다. 늙은이들의 각오는 꽤 남달라보였다.


흑기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일어나라. 기사여.”


이제 그대는 다시 기사로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검 끝을 바닥의 한 점으로 모았다.


음유시인은 피식댔다. 마부석에 비뚜름하게 앉은 그는 흑기사의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늙고 노쇠한 주제에 타오르길 갈망하다니.


멜로스는 이런 바보들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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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우는 소리 24.09.04 11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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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하얀 거절 24.08.30 12 1 17쪽
152 하얀 거절 24.08.29 10 1 10쪽
151 하얀 거절 24.08.28 14 1 16쪽
150 검고 하얀 그대들에게 24.08.26 12 1 11쪽
149 날개 없는 자 24.08.26 10 1 11쪽
148 날개 없는 24.08.26 6 1 14쪽
147 이어지는 길 24.08.26 6 1 14쪽
146 이어지는 길 24.08.26 6 1 11쪽
145 죽거나 살거나 24.08.21 7 1 14쪽
144 죽거나 살거나 24.08.21 7 1 14쪽
143 입으로 내는 것 24.08.16 9 1 10쪽
142 벌레들의 합창 24.08.16 9 1 17쪽
141 벌레들의 합창 24.08.16 8 1 11쪽
140 벌레가 우는 아침 24.08.12 10 1 11쪽
139 벌레가 우는 아침 24.08.12 9 1 14쪽
138 벌레의 다리 24.08.09 12 1 12쪽
137 어스름 24.08.09 12 2 12쪽
136 하울링 24.08.02 12 2 10쪽
135 저항과 혼란 24.08.02 14 1 14쪽
134 도망치고 전진하는 자들. 24.08.02 12 1 15쪽
133 늑대와 마법사. 그리고 황금 24.07.29 14 1 11쪽
132 밤을 타넘는 자들 24.07.26 1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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