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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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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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DUMMY

한 대의 마차가 커다란 대문을 지나쳐 넓은 정원에 들어섰다.


마차의 상단에는 리벨리타스를 상징하는 사자의 깃발이 걸려있었는데, 이윽고 멈춘 마차의 안에서 한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연둣빛의 긴 생머리와 눈을 지닌 여성의 이름은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로, 이 별장 주인의 딸인 후작 영애였다.


뭇 남성을 자극할 사랑스러운 외모의 그녀는 미소를 띤 얼굴로 마부 루케가 내밀어오는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수고하셨어요.”


감사를 전한 라프리트는 시선을 돌려 정면에 있는 별장을 보았다.


――곧 온다.


쾅!


거칠 게 별장의 문이 열어젖혔다.


예상대로다.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문을 연 사람은 중년의 남성으로, 남자는 목 언저리까지 오는 황금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뛰었다. 최근엔 바빴던지 염색하지도 못해 머리카락의 끝만이 살짝 연둣빛을 띠었다.


그렇게 서두르는 중년의 남성은 바로 뒤에서 황급히 따라오는 사용인들의 안색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막을 새도 없이 달려왔다.


라프리트는 미간이 찌푸려질 것만 같았으나 인내심을 발휘하여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어서 오거라, 라프리트야! 아니, 그보다 괜찮은 게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예. 잘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남자―― 이 저택의 주인인 엘리아드 아포이 디안 리벨리타스는 딸의 인사를 받자 주책맞게 얼굴이 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금세 진지해져선 라프리트를 요리조리 둘러봤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딸을 걱정하는 것이 어찌 나쁠 수 있겠는가.


다만······ 너무 방정맞다.


삭삭, 몸을 날리듯 움직이며 살펴보는 모습에선 아무런 체통도 없어 후작이라는 높은 지위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과장된 동작에선 도리어 놀리려는 의도가 있지 않을까 의혹마저 생겨난다.


그나마 주변엔 다들 아는 사람들뿐이라 괜찮다지만······


라프리트는 점점 빨개지는 얼굴을 의식하며 재촉했다.



“아, 아버님, 인사는 들어가서 하시죠. 저는 진짜 괜찮으니까.”

“그럴 리가! 그 피의 축전이랑 제국에 가지 않았느냐?! 모르긴 해도 반드시 무슨 일이 벌어졌을 터! 어디냐! 어딜 다친 게야?!”

“아뇨. 전혀 다치지 않았――”

“입막음이라도 당한 것이더냐?! 크윽! 내일 폐하께―― 형님에게 가, 내 직접 따지도록 하마. 한 번도 아니고 금지옥엽 키운 내 딸을 사지로 내몰다니. 참을 수 없다! 암만 형님이라도 더는 용서―― 컥!”


팍!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단말마를 지르며 주저앉는 엘리아드 후작.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등을 쓰다듬으려 했다.


엘리아드 후작의 폭주를 막은 건 가차 없는 등짝 후리기로, 라프리트는 말려준 이―― 차가울 듯 날카로운 인상의 여인에게 반갑게 말하였다.



“고마워요, 어머님.”


감사를 받은 여인―― 후작 부인은 자상하게 눈가를 늘어뜨리며 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에 따라 진한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렸다.



“뭘요. 그보다 다난했어요, 라프리트. 여행길에 지쳤을 테니 어서 안으로 들어와요.”


반대는 없었다. 엘리아드의 등을 토닥여 주는 사용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후작 부인의 뒤를 따랐다.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 바로 집사 바탄이 환영해줬다.



“어서 오십시오, 라프리트 아가씨.”

“네. 다녀왔어요, 바탄.”

“바탄, 저번에 들여놓은 다과 있죠? 아무쪼록 잘 어울릴 차와 같이 내줘요.”

“예. 알겠습니다.”

“어머님, 전 금방 돌아갈 거예요.”

“알아요. 오랫동안 발을 잡아두지 않을 테니 잠시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들려주세요.”


되도록 티를 내진 않았지만, 후작 부인의 눈에는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차마 무시하긴 힘든 라프리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잠깐만이에요?”

“후훗. 물론이죠.”


그렇게나 기분이 좋을까.


드물게 신나 하는 후작 부인을 따라가면서 라프리트는 피식 웃었다.


바탄이 금방 다과와 차를 준비해주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라프리트는 물었다.



“그래서 듣고 싶으신 게 뭐예요?”

“급하다는 건 알겠지만 인사가 아직이잖아요. 밖에서는 예절을 잘 지키면서 집에서는 매번 그러네요.”


핀잔을 주듯 말한 후작 부인은 거기서 한 번 끊고 생긋 웃었다. 어떻게든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제국까지 다녀오느라 고생했어요, 라프리트. 안네도 갑작스러웠을 텐데 수고 많았어요.”

“말씀 감사합니다.”

“인사는 그쯤 하도록 해요. 그보다 하실 말씀은 뭐예요? 진짜로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신 건 아닐 테고.”


가끔이기는 하나 집엔 몇 번 들렸었다. 그때마다 근황 보고 같은 것을 했기에 이제 와 새삼스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할 리가 없다.



“오늘은 평소보다 다급하네요. ······좋아요. 오래 붙잡지 않는다고 했으니까요.”


후작 부인은 선심 쓴다는 듯이 말하고는······ 차려놓은 다과를 입에 넣었다.


흐응~


이상한 교태까지 섞으며 음미한 후작 부인은 이후 찻잔을 들어 우아하게 차를 즐겼다.


이게 오래 붙잡지 않는다는 사람이 보일 행동이란 말인가.


라프리트는 이마에 핏줄이 솟는 기분이었지만 참았다. 이럴 때의 어머님은 괜스레 건들면 더 귀찮아진다는 것을 알기에 굉장한 얼굴이 되었음에도 참아내었다.


그런데도 후작 부인은 여봐란듯이 다시금 저 혼자 티타임을 가졌다.


무척이나 길게만 느껴졌던 인고의 시간이 지나 겨우 후작 부인의 입이 말을 하기 위해 열렸다.



“제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건 하나예요. 바로 당신의 친구분들에 대해서죠.”


무슨 의미인지······


라프리트는 눈을 가늘게 하여 뜻을 간파해 보여 했다.


그러나 역시 후작 부인. 차가워 보이는 인상 그대로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전혀 속내를 모르겠다.


아니, 엘리아드 후작은 데릴사위이니 후작 부인이야말로 리벨리타스 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부인들의 모임 같은 데에서 기싸움도 잦았을 터. 잔뜩 단련되었을 테니 속내를 알기 어려운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루비아 님이라면 꿰뚫어 보시겠지만······’


아쉽게도 자신에겐 그런 능력 따윈 없다.


결국 라프리트는 항복 선언을 했다.



“알겠어요. 원하시는 게 뭐죠?”

“역시 제 딸이에요. 말이 잘 통해요.”


몹시나 기쁜 듯 연령이 무색하게 후작 부인은 귀엽게 두 손을 맞잡았다.


참으로 주책이다.



“무슨 무례한 생각이라도······”


후작 부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 눈매는 차가운 인상과 매우 어울려, 모르는 자가 봤다면 흠칫 떨었을 위압감이 풍겼다.


그러나 라프리트에게는 매우 친숙하기만 모습이다. 눈치가 빠름에 전혀 동요 없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것도요. 생사람 잡지 말고 어서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죠?”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후작 부인이었으나 본인의 용무도 있는바, 오래가진 않고 눈가에 힘을 뺐다.


평소대로 차가운 인상만이 남은 후작 부인은 원하는 걸 입에 담았다. 다만 상한 기분이 남아있던지 다소 토라진 목소리였다.



“두 분을 초대하세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갑자기라뇨?!”


자못 화났다는 듯 후작 부인은 볼을 부풀렸다.


그럴 때가 아니지만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이에게 들었어요. 서훈식 때 넌지시 말해뒀다고. 그런데!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는 한 달이 넘도록 깜깜무소식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어, 어떻게 되다뇨······”


지난번 집에 왔을 때 분명 엘리아드에게 그러한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 들었었다.


잊진 않았다. 그야 칭찬을 바란다는 듯이 얼굴을 보자마자 자랑스레 떠벌렸는데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상대는 최고 국빈과 루 몬테르의 공주님이다.


특히 리아는 현재 제국의 전권대리인이기도 했다. 아직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나 곧 있으면 제국 측에서 발표할지도 모를 일이다.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리아는 다방면에서 온갖 관심이 쏟아지는 화제의 인물이다. 쉽사리 초대하기엔 곤란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당연히 아버님의 가벼운 농담 정도로 여겼는데······’


생각보다 후작 부인은 진심이었나 보다.



“어, 어머님. 저희가 두 분을 초대하기엔 무리라는 걸 아시잖아요?”

“네. 저희가 초대하면 그렇죠. 분명 알렌나시안 후작 파벌에서 견제가 들어올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괜찮아요. 학우로서의 당신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 확실히 후작과 후작 부인보다야 덜 하겠지만 어찌 됐든 말은 나온다. 여차하면 리아에게도 피해가 미쳐, 이후 그녀를 초대하기 위한 무수한 행렬이 이어질 것이다.


그녀에게 피해를 준다니······


그러한 일은 절대 할 수 없다. 아무리 어머님의 부탁이라도.



“지자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하죠. 당신의 걱정을 알겠어요. 나빠질 우려가 있다면 이대로 현상을 유지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에요.”

“네. 그러니까――”

“――아아. 알겠어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하지만 저는 조금 슬프네요. 제 딸이 친구 하나 초대하지 못할 정도로 겁쟁이였다는 사실에. 이런저런 핑계만 대고 꼴불견이 아닐 수 없어요. 제가 당신을 잘못 보고 있었나 봐요.”


라프리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핑계’를 대고 물러선다고 하는 말은 그녀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로 터부였다. 이전 다른 미래에서의 한심하기만 했던 자신이 떠오르기에 무척이나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저런 말을 듣고 내뺄 수는 없다. 그건 정말로 내빼는 것에 불과하니까.



“뻔한 도발인 건 알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걸려드리도록 하죠, 어머님.”


어머님을 끊어 말하는 라프리트를 보며 후작 부인은 기분 좋게 웃었다.



“기왕이면 두서가 없었으면 더 멋졌을 텐데······ 흠. 좋아요. 그럼 언제쯤 뵐 수 있을까요?”

“몰라요. 다들 바쁘신 분들이니까. 내킬 때 천천히 느긋하게 오시라고 할 거예요.”

“어쨌든 모셔 온다는 거죠?!”

“네네.”


대충 대답한 라프리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대답을 들은 후작 부인은 그걸로 만족했는지 신경 쓰지 않고, “뭘 준비할까나~”라며 벌써 손님 대접을 위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정말 흔들리지 않는 마이페이스다.


그런 어머님을 황당하게 생각하면서 라프리트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벌써 오후 3시를 넘어가고 있다. 진짜 시간이 별로 없다.


라프리트의 방은 중앙 계단을 타고 올라가 2층 오른쪽 끝에 있었다.


보통 영애의 방은 1층에 있는 게 보편적이다. 멀면 힘들고 귀찮으니까. 그런데도 2층을 고른 건 무언갈 몰래 하기 좋기 때문이었다.


오늘 찾아온 목적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가씨.”


분위기를 읽은 안네는 문 앞에 멈춰서서 인사하였다. 평소대로였다면 여기서 쉬라며 그녀를 보냈을 것이다. 은밀한 일을 하는데 들여보낼 순 없으니.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아니, 더 이상 설명을 안 해주기 어려워졌다고 해야 하리라. 다름 아닌 제국의 황제로 인해.


잘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도 라프리트는 말했다.



“들어와요, 안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아가씨?”


라프리트는 놀라는 안네의 손을 잡아 방으로 데리고 왔다.


실내는 후작 영애의 개인실답게 넓고 고풍스러운 세간들이 즐비했다. 검소한 주인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는데, 전부 딸 사랑이 과한 엘리아드 후작의 작품이었다. 바꾸기엔 돈과 시간이 들기에 내버려 두고 있는 실정이다.


라프리트는 그런 값비싼 소파에 사양하는 안네를 억지로 앉혀 마주 보았다.



“저······ 아가씨? 하실 말씀이라는 건······?”

“제국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거예요.”

“······황제와의 면식인가요.”


제국으로의 방문은 생명의 신 루시아스나 환수와 만남 같은 깜짝 놀랄만한 사건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모두 꿈 같은 일들 뿐이었다. 그런데도 단박에 황제와의 일을 뽑는다.


마치 예상한 듯한 이 반응에 라프리트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때의 일이야. 안네는 어찌 생각해?”

“······.”

“괜찮아. 편한 대로 말해줘. 나도 편하게 하고 있잖아?”


잠시 머뭇거리던 안네는 마음을 잡았는지 진지한 눈빛을 향해왔다.



“여태 아가씨께서 해오신 일들이 전부 그것들과 관련된 겁니까?”

“응. 모두 다 좋은 미래를 위해 애썼던 거야.”


순순히 인정하자 안네의 눈동자가 커졌다.



“호, 혹시 왕형과도······”

“그 사람에겐 다 털어놓았어.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말이야. 전부 밝히지 않고서는 신뢰를 얻을 수 없었어.”

“그렇습니까······”


심란한 얼굴로 말을 흐리는 안네. 그러나 이내 후련하다는 듯 훌훌 털어버리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되려 사실을 밝힌 라프리트가 어안이벙벙해질 정도로 깔끔히 받아들였다.



“어라? 그걸로 끝이야?”

“솔직히 섭섭하다면 섭섭합니다. 하지만 전 아가씨가 아이일 때부터 봐왔습니다. 분명 저희에게 밝히지 못할 이유가 있었겠죠.”

“으응. 그렇긴 한데······. 그, 너무 깔끔하달까······”

“그럴 수밖에요. 얼추 낌새 같은 건 느꼈었으니. 미래를 아신다는 소리를 하셨을 땐 오히려 바로 납득이 갔습니다.”

“뭐······?”


뜻밖의 이야기에 라프리트는 멍한 눈이 되었다.



“아, 알고 있었다고?”

“네. 아가씨는 잘 감췄다고 생각하셨던 듯합니다만 제법 티가 났어요.”

“어, 어째서?!”

“그야······ 가시는 곳마다 문제가 터진 사람들이 있었잖습니까? 한 번도 아니고, 매번 마을로 나가실 때마다 그러시니 아무래도 의문이 들죠.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사건을 금세 해결해버리셨고. 그리고 이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크든 작든 전부 그런 아가씨의 도움을 받았었죠. 우연이라기엔 좀 수가······. 게다가 전원 착실한 성품이라는 것도 묘했어요. 반대로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던 사용인들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서 해고하셨고. 또······”

“더, 더 있어?”

“마을로 나가실 때요. 생전 그러지 않던 분이 웬일로 떼까지 써서 나가시겠다는데. 처음에는 어린아이의 변덕이겠거니 싶겠지만, 차츰 쌓이니 뭔가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죠. 이곳에서 일할 사람이라고 데려오는 경우도 많았었고.”

“서, 설마 다들 알고 있는 거야?”

“이젠 다들 경력이 쌓였으니 알고 있어요. 몇몇 분들은 아가씨를 신의 사자라고 부르기도 하죠? 물론 아가씨에게 폐를 끼칠 수 있으니 함부로 발설하진 않아요. 그 연장선으로 사도라 부르지도 않고요.”

“사, 사도······. 경력은 또 뭐고······. 아, 아니. 아버님―― 부모님들도 알고 계시······겠구나. 그래서 전에 찬크에르 씨의 정보를 얻으려 불렀겠지.”

“찬크에르 씨요?”

“으응······ 다른 이야기야. 부모님들이 아신 건 언제쯤이야?”

“정확하진 않지만······ 주인 어르신께서 그 어떤 엉뚱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 도우라고 명하셨던 게, 아가씨가 6살이 되셨던 해일 겁니다.”

“시, 십 년이나 전에······”


크게 낙담한 라프리트는 고개를 떨구고는 이마를 짚었다.


정확히 미래를 안다는 확신은 없었겠지만 이렇게나 오래전부터 들켰었다니······


심하다. 가족들에겐 끝까지 숨기긴 어려울 것이라 예상하긴 했다. 그렇지만 생각보다도 심하다.


어린아이였었다는 변명이 있긴 했다. 제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한들 사고가 성숙해지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자기 딴에는 열심히 감추려 했어도 조잡할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충격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기 혼자 안 들켰다고 믿어 열심히 고군분투했을 자신이 떠올라 수치심만이 밀려온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렸던 라프리트는 뺨을 두드려 가까스로 떨쳐냈다. 다만 얼굴은 아직 조금 붉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괜찮습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편하실 때 말씀해주세요.”

“뭐······?”


어떻게 자세한 정황은 말해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는가.


라프리트는 놀란 눈으로 안네를 쳐다봤다.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가씨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다고. 무슨 이야기를 하실지는 쉽게 상상됩니다.”


활짝 웃는 안네의 미소에선 신뢰만이 존재하였다.


‘부모님들도······ 다들 묻지 않았다는 건 저를 믿기 때문이겠지요.’


새삼스럽지만 참으로 좋은 사람들 뿐이다. 그렇기에 라프리트는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 안네.”

“아, 아가씨?! 뭐 하시는 겁니까?! 어서 머리를 드세요!”

“아냐. 난 안네에게 꼭 사과해야만 해.”

“대체 아가씨가 제게 사과할 게 뭐가 있으시다고 그러십니까?”


묻는 말에 라프리트는 고개를 들어 안네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가슴골 사이를. 옷 안쪽에 있는 커다란 흉터를 보았다.


단검 형태의 아티팩트―― ‘마법사 죽이기’가 박혀 생긴 흉터는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안네의 몸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지금도 이따금 생각한다. 좀 더 서둘렀다면. 좀 더 신중히 행동했더라면.



“난 안네를 도운 게 아니야. 사실은 망친 거지. 자만이 넘쳤던 거야.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에 세상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거라는 어리석은 망상을 했어. 사실은 내가 가면 안 됐어. 내가 가지 않았어도 안네는 스스로 그곳을 빠져나왔을 테고, 다치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그곳에 없었으면――”

“――아가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짝!


메마른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라프리트는 멍청하니 아픔이 느껴지는 뺨에 손을 올렸다.


안네는 뺨을 때린 자세 그대로 분노를 담아 말했다.



“빈민가에 있던 저를 데려와 주신 그날은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입니다. 사람조차 아니었던 전 아가씨를 만나 비로소 길거리에 널브러진 쓰레기가 아닌, 한 사람의 인간이 될 수 있었죠. 눈부심으로 가득했던 그 날을 부정하는 건 아무리 아가씨라 하더라도 용서 못합니다.”

“나, 나는······”


안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프리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정하게 안아줬다.



“아가씨가 계속 마음 쓰셨던 건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 더 나은 미래가 있었기에 그랬겠죠. 하지만 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빛바랬던 제 세계에 아름다운 색채가 칠해지던 그 광경을······. 예.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제가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선물로는 과분하다고 느낄 정도로. 지금도 믿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꿈속이고 현실은 아직 빈민가의 축축한 뒷골목에서 얇은 천에 몸을 말고 누워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면 아가씨의 미소가 저를 반겨주죠.”

“안네······”


몸을 땐 안네가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만약 아가씨가 오시지 않았더라도 흐르고 흘러 후작 가에 와 아가씨와 만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저는 아가씨가 와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한 안네는 밝게 미소 지었다.



“감사드립니다, 아가씨. 저를 찾아내 줘서―― 저를 만나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니 아가씨도 마음의 짐을 덜어내세요. 저는 정말 행복하답니다?”


라프리트는 안네를 와락 껴안았다.


뭐라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하염없이 고맙다고만 말했던 것 같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응.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니까 잠시 쉬고 있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안네는 깔끔하게 인사를 했다.


그에 비해 뒤늦게 창피한 짓을 했다는 기분이 든 라프리트는 조금 어색하게 방을 나가는 안네를 배웅했다. 그렇지만 마음만은 후련하여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여전히 안네를 치료할 방법은 오리무중이지만······ 아냐, 아냐. 축 처지는 생각은 그만두고 얼른 볼일이나 보자. 많이 늦었어.”


안네가 나간 문을 한 번 쳐다본 라프리트는 옆방의 서재로 들어갔다.


라프리트는 벽면 빼곡히 책이 꽂혀있는 서재에서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방 한가운데에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앞의 방과 마찬가지로 엘리아드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중후한 책상은 좌우에 서랍이 있었는데, 왼쪽 서랍 첫 번째 칸을 열었다.


서랍 안엔 나무로 된 작은 직사각형의 얇은 상자가 있었다.


라프리트는 그것을 들었다. 그러자 상자에서 살짝 빛이 발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자리엔 나무 상자 대신 옅은 푸른색이 도는 유리 상자가 있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팔각형의 이것은 평소에는 평범한 나무 상자처럼 생겼으나, 이처럼 소유자를 인증하면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장치가 있다. 더불어 본 능력도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 능력이란 바로 시간의 경과에도 조금의 열화도 발생하지 않고 무엇이든 넣을 수 있는 전설의 [차원수납]이었다.


이 유리 상자의 명칭은 속칭 암굴왕의 보물전으로, 무려 신화급의 아티팩트였다.


라프리트가 이 신화급 아티팩트에 집어놓은 물건은 자그마한 수첩 여러 개가 전부였다.


겨우 수첩 따위를 보관하기에는 상당히 낭비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다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수첩이야말로 라프리트가 가진 기억의 전부―― 즉 미래의 모든 걸 총망라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수첩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라프리트는 세린에게 미래의 기억을 전해 받자마자 제일 먼저 이 암굴왕의 보물전을 발굴하러 갔었다. 소유자 이외에는 절대 아무도 열 수 없고, 죽기 전에는 소유자가 바뀌지도 않는 세계 제일의 금고를 얻기 위해······


성능은 확실하다. 괜히 신화급의 아티팩트가 아니다. 소유자가 아니라면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


만약 도난당하더라도 되돌아오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집 서재에 보관한다는 안일한 취급을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제가 알아낸 기능은 아니지만요.’


이 모든 기능을 알려준 건 여섯 영웅의 일원인 드워프의 벤티노 우루프노프였다. 그가 토벌대의 여행 도중 특유의 감각으로 유적지를 발견, 그 안의 왕릉에서 암굴왕의 보물전을 발굴하여 직접 [감정]한 것이었다. 소유주도 발굴했을 그로 인식되어 벤티노가 토벌대의 물자를 도맡아 관리하였었다.


‘막상 찾을 땐 고생 좀 했지만요.’


토벌대가 있던 미래에는 파멸의 용왕―― 찬크에르레이가 날뛰던 때였다. 대지 자체가 변한 곳도 많았고, 녹색 빛 자체가 극단적으로 적었다.


유적지가 있던 곳도 황무지였던 것에 반해, 여기는 초원으로 덮여있었다. 제아무리 어딘지 알고 있다 하더라도 찾는 게 쉽지 않다.


덕분에 유적지를 발견하는 데에 1년. 엘리아드에게 떼를 써가며 근처 마을에 머물며 지형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간신히 찾아냈다. 땅에 묻혀있던 왕릉의 지붕이 뾰족 튀어나온 것을 발견했을 땐 너무 기뻐 환호성도 질렀다.


그런데 유적지를 찾고 나서도 문제는 산재했다. 안에는 온갖 함정들이 있었던 거다.


토벌대들은 전원이 생물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월자들. 대륙 전체로 봐도 한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들뿐이었다. 그들에게는 그깟 함정 따위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다. 너무나 손쉽게 정면으로 돌파해버렸다.


그러나 이쪽은 아니었다. 어린 라프리트로서는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제 막 사용인으로서 예법을 익히던 안네도 마찬가지였다. 강대한 힘 같은 건 없던 터라 돌파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편법을 썼다.


왕릉에는 뒷길이 있었는데 거기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토벌대가 밖으로 나올 때 이용했던 길이기도 했다.


사실 거기엔 밖에서는 열 수 없는 강대한 방범 마법이 있었다는데, 시대를 측정할 수 없는 예전 일이라 현재는 소실 됐다고 한다. 덕분에 그 길로 들어갈 계획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다만 그 길도 땅에 묻혀있었다. 파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만큼은 집안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아드 후작에게 부탁하여 입이 무거운 자만을 선별하여 은밀히 땅을 파내어 길을 찾았다.


‘이제 와서지만 참으로 눈에 띄는 짓을 많이 했네요. 이러나저러나 쉽게 진입하여 찾긴 했지만요.’


어렸을 적 본인의 행동에 살짝 한숨을 쉰 라프리트는 암굴왕의 보물전을 가동했다.


팟.


한순간 허공에 나타난 수첩을 집어 든 라프리트는 암굴왕의 보물전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빠르게 읽어나갔다.


오늘은 놓친 건 없나 복기하기 위해 온 것. 꺼낸 수첩은 초기에 적은 미래일지였기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어 사건의 나열이 뒤죽박죽이다. 거의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는 느낌이었다.



“으으. 부끄럽게······. 특히 첫 장은 심하네요. 온통 눈물범벅이라 읽기도 어렵잖아요.”


후회와 참회와도 비슷한 사죄의 말과 함께 이번에야말로 힘이 되겠다며 다짐하는 글귀들. 라프리트는 눈물로 인해 일그러진 첫 장들을 아련하게 읽어가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렇게 몇 장을 넘기니 드디어 본론이 나온다.


처음은 리아에 대해서다. 리아는 언제나 마력의 절대적인 양이 부족한 미숙아로 태어난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건 변함이 없었다. 언제 어느 때건.



“아뇨······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죠.”


가장 최악은 너무 허약한 탓에 뭘 해보기도 전에 리아의 생이 다하는 거다.


이후 큰 상실감에 빠진 리아의 부모와 조부는 이 일을 계기로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다. 서로의 잘못이 아님은 알고 있다. 그러나 오갈 데 없는 슬픔은 주체할 수 없었고, 그들의 관계는 점차 악화하고 만다.


그러다 마을에 마족들이 들이닥치게 된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들에게는 때마침 좋은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필사 항전을 하나, 정작 죽을 때는 오히려 반기듯이 드디어 리아의 곁으로 간다며 기뻐하였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시작 된다.


하지만 몇 번이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돼도 딱 하나,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리아가 사는 마을 주민들의 죽음이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고 모두 고향을 잃은 마족들에게 학살당한다.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두 살아계신다는 듯해요. 애당초 찬크에르레이······ 용왕이 있는 마을에 손을 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가당찮아요.”


찬크에르가 마을에 머문 게 학살이 일어난 다음일 가능성이 있긴 했으나, 말하는 분위기로 봐서는 그건 아닌 듯했다.


아니. 그 이전에 찬크에르가 마을에 머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마을에 방문하는 일 자체가 지극히 희박했을뿐더러, 오더라도 아이리스――그때의 이름은 제각각 달랐다.―― 때문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아이리스가 리아의 마을까지 찾아왔던 탓에 그는 그저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뿐 마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리아 양과 아이리스가 죽을 때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찬크에르 씨가 마을에 머문 적은 없어요.’


첫 전제조건부터가 현재와는 다르다. 그 어느 때와도 일치하는 게 없다.



“더군다나 아이리스도 리아 양의 아들로 되어 있고. 원래는 친구 사이였을 텐데······. 왜 이렇게나 달라진 거죠?”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미래일지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분명 미묘한 차이에 불과하긴 했다. 하지만 미래일지는 정확했었다. 적어도 라프리트에게만큼은. 그 증명은 왕형이 해주었다. 아는 미래들이 틀렸다면 그와의 협력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뭣 때문에 달라진 걸까요? 또 마을을 침공했을 마족들은 어떻게 됐을지······”


잠깐 고민하던 라프리트는 추측하기를 그만뒀다.


이전 공국에 다녀온 뒤 집으로 와 미래일지를 읽으며 고민해봤던 문제였다. 그때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아직 볼 건 많다.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페이지를 넘겨 계속 읽어나갔다.


라프리트는 놓친 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 읽었으면 새로운 수첩을 꺼내 그것들도 읽어갔다.


그렇게 몇 권의 수첩을 읽었을 때 라프리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모든 게 달라요. 어느 루트와도 맞지 않아요.”


하지만 열심히 읽은 보람은 있어 왜 달라졌는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얼추 답을 낼 수 있었다.


힌트는 제국이었다. 그곳의 황제가 결정적이었다.



“떠올린 자들―― 미래를 기억해낸 자들이 생겨났기에 현재가 틀어진 건가요······.”


벌써 그 영향력도 확인했다.


엔가나를 통해.


그는 단 한 번도 리아를 따라 벨루디스로 온 적이 없었다. 아니, 이처럼 리아를 호의적으로 대하는 엔가나의 모습 자체가 처음이다. 여느 미래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사례다.



“그러니까 떠올린 자들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만큼 분명해 보여요. 근데 황제의 이 행동은 대체······”


존재감을 가시화하는 황제의 능력으로 뭔가를 확인했기에 벌인 일이겠지만, 당최 무얼 노리는지를 모르겠다.



“설마?”


황제는 하얀 악몽이라 불릴 때의 리아에게 심취해있다. 아니겠거니 싶으면서도 괜스레 불안하다.



“아니에요. 황제가 무얼 하든 괜찮을 거예요. 리아 양은 벌써 초월자니까요.”


떠올렸다면 황제도 리아가 초월자임을 단박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허튼짓을 꾸미진 않으리라.


더군다나 곁엔 찬크에르와 델리안이 있다.


존재감을 읽을 줄 아는 황제라면 현재 리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전력을 지녔는지 누구보다도 명확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리아의 전력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벽. 일단 용왕인 찬크에르가 있는 시점에서 절대적이다. 혹 찬크에르는 용왕의 사명이 있기에 전력에서 제외하더라도 리아의 곁엔 델리안과 세스타스가 있다. 이 대륙 최강자인 여섯 영웅 중 두 명이······.


리아 본인까지 합치면 여섯 영웅의 절반인 셋이 모여있는 거다.


전력으로서는 차고도 넘친다. 그 어떤 나라라고 하더라도―― 세인트리안을 포함한 세 국가가 힘을 합치더라도 당해낼 수 없다. 되려 리아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하루아침에 세 국가는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리라.


그렇기에 암만 꿍꿍이가 많은 황제라도 리아를 건드리진 않을 것이다. 호감도 충만하니 이 점은 안심해도 된다.



“다만, 조약······. 아니마무스의 말이 마음에 걸려요. 인간과 환수 사이에 무언가 조약을 맺었다니.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봐요.”


그때 라프리트의 뇌리가 번뜩였다.



“어쩌면 그게 각 나라의 왕들에게만 전해진다는 내용인 건······.”


왕들에게만 전해진다는 그건 미래 어디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실로 굉장한 보안이 아닐 수 없다. 최측근에게만큼은 전할 수 있을 텐데도.


왕이 맡는 업무의 양은 엄청나게 많다. 도저히 혼자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관료들의 숫자가 많은 것이고, 믿을 수 있는 측근에게만큼은 정보를 공유하고 업무를 처리한다. 그게 보통이다.


왕에게만 전해지는 것이라면 필시 사안은 중대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거란 말인가?


물론 세인트리안까지 포함하면 네 나라의 수장들이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 뿐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도 현 네 나라의 수장들은 제법 훌륭한 인물들뿐이다.


하지만 역대 왕들 모두가 그럴 수가 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닐 것 같다. 누군가는 다소 심약한 성품이지 않을까 한다. 오히려 지금 시대가 운이 좋아 잘 타고났을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


그런데도 보안은 유지되고 있다. 어느 미래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마치 강제로 입이 다물어진 것처럼.



“어? 강제로······? 아! 루비아 님에게 걸려있었던 저주! 혹시 그게 비밀을 지키기 위한 제어장치?!”


퍼즐이 맞춰졌다.


인간은 무언가 환수들―― 혹은 다수의 누군가와 어떠한 조약을 맺었다.


그 대표자로서 각국의 수장들이 선출되었고, 그들은 한데 모여 조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강력한 제어장치를 스스로에게 달게 되었다.


――자식에게도 전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저주를.



“루비아 님은 알아차리셨나?”


의미 없는 물음이다.


그 루비아다. 이쪽이 그린 그림을 똑같이 그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더더욱 정교하게 그렸으면 그렸지, 뒤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얻었다고도 하셨고. 그렇다는 건 루비아 님은 아니마무스와 대화를 나눈 시점에 이미 답을 얻으셨던 거네요. 하아······ 웬일로 무모한 짓을 하시나 했더니, 전부 치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네요. 정말 리아 양의 말대로예요. 불필요한 짓은 절대 하지 않으시네요.”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상당한 좌절감에 휩싸인 라프리트는 책상 위에 드러누워 버렸다.



“으으. 한 방 먹여주기로 했는데 이래서는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루비아 님의 이마에 핏줄이 솟은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울분을 터뜨리듯 책상을 탕탕 두드린 라프리트. 그러다 이내 고개를 들어 겹쳐놓은 두 손 위에 턱을 괬다.


계속 한심한 모습을 보인다면 안네가 화를 낼 것이다.


아직 조금은 얼얼한 뺨을 쓰다듬은 라프리트는 미소 지었다.



“여하튼 정리하자면 어느 미래로도 흘러가지 않게 된 건, 미래를 아는 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겠죠. 아니마무스도 그렇고, 떠올린 자들이 제법 숫자가 되다 보니까 반드시 어딘가에서 영향이 미쳤을 거예요. 리아 양도 전제조건이 그리 달라진 걸 보면 아마 떠올린 거 같은데······ 모르겠네요. 솔직히 판가름이 안 돼요.”


솔직하게 말하자. 정리할 수 있는 건 이게 끝이다. 나머지는 불명확한 점이 너무 많아서 섣불리 결론을 내기 주저된다.



“미래를 떠올릴 수 있었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든가 모르는 점이 많아요. 그 미래조차도 어쩐지 저와는 좀 다르게 떠올린 듯하고요.”


라프리트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심하고는 책상 위에 있던 모든 수첩을 암굴왕의 보물전에 넣었다.



“어쩔 수 없네요. 이번만큼은 루비아 님과 함께 머리를 맞대야겠어요. 저주도 리아 양이 풀어줬으니 조약에 관해서도 의견을 나눌 수 있을 테고요.”


그렇다. 결코 혼자선 막혔기에 루비아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니다. 단순히 불명확한 점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속으로 그런 말을 되뇐 라프리트는 암굴왕의 보물전을 서랍에 돌려놓고 안네에게로 향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크윽...


더 쓰고 싶었으나 문피아 아카데미 모집 준비에 할애하느라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2랑 올리고 다음화도 같이 준비해 대령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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