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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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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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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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0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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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DUMMY

“슬슬 가볼까요? 기다리는 분도 계시니. 마저 못한 이야기는 그곳에서 하죠.”


‘나도 좀 정리하고 싶은 게 있고 말이야.’


딱히 서두르라는 건 아니었지만 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클립스는 누나에게서 떨어져 눈가를 박박 비볐다.


저런 식이라면 아플 텐데······.


아까 이곳에 오기 전에도 그랬지만 꽤 거칠다.


제법 걱정스럽게 보고 있자니 메이어가 이를 말리고는 작은 탁자에 놓여있던 조금은 허름한 손가방을 짚었다. 그리고는 안에 들어있던 하얀 손수건을 꺼내 이클립스의 눈가에 가져갔다.


역시랄까,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순백의 손수건이었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더러워지는 건 안중에도 없이 이클립스의 눈과 심지어 코까지 풀어줬다.


마음씨도 마음씨지만, 메이어는 이제 막 성인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꽤 어른스럽다.



“아, 그렇지!”


여러모로 보기 좋은 남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이클립스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리고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어······ 저, 저기, 고맙습니다. 우리 누나를 낫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를 전하는 건 고맙지만 제대로 이름을 부르셔야―― 응? 아. 그러고 보니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구나.”


그리 잘난 듯 굴어놓고는 아직도 통성명을 나누지 않았다니······


‘이, 이런 실수를······’


살짝 빨개진 얼굴로 자책한 리아는 정신을 다잡고, 최대한 멋들어지게 치마의 끝자락을 잡아 양산처럼 살며시 펼쳤다. 창피한 탓인지 평소보다 기합이 들어갔다.



“소개가 늦어 미안하게 됐어요. 저는 이스피리아라고 해요. 두 분 모두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

“응?”


뭐가 잘못됐나? 이클립스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는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그러시나요, 이클립스?”

“어, 어! 아, 아니, 무척이나 예뻐서······”

“어머나, 고마워요.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었네요.”

“으으······”


휙. 허둥대는 느낌으로 이클립스는 몸을 돌렸다.



“누, 누나, 괴, 굉장해! 드래곤을 물리친 영웅이랑 이름이 똑같아! 그런 사람이 내 결전을 보러와 줬어! 진짜 굉장하지 않아?!”


방금의 느낌이 착각이었나. 허둥대는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신난 이클립스의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보이진 않지만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지 않을까······



“으응. 그렇구나······”


메이어가 어색하게 웃으며 힐끔 리아를 쳐다본다. 그리고 에르도 슬쩍 곁눈질로 시선을 보냈다. 딱히 얼굴을 본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몸에 두르고 있는 의복이나 분위기 등을 엿보는 것이었다.


의아한 행동에 리아는 잠시 고민했고, 이내 무엇 때문인지 깨달았다.



“서, 설마······. 저, 저기 이클립스?”

“어, 응. ――아, 아니, 네!”


숨을 가다듬은 리아는 살짝 얼굴이 붉은 이클립스에게 천천히 말하였다.



“그······ ‘결전’이요. 혹시······ 어떤 주제로 만들었나요?”

“주제?”

“네. 그냥 상상하신 건지, 아니면 뭘 듣고 만들었나 싶어서요.”


사실 정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야 이클립스의 뒤에 있는 메이어가 슬쩍 눈을 피하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듣기 전까진 모르는 일이다.


그런 희망을 품고 리아는 대답을 기다렸다.



“저번에 엄청 큰 마력 때문에 소란이었잖아? 여기도 어른들이 막 벌벌 떨고 그랬었거든. 뭐어······ 나랑 누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사람이 사룡을 물리친 거래!”

“어······ 결전은 그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건가요?”


거의 오픈 북 수준으로 답안이 공개되었건만 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응!”


얼룩 한 점 없는 순수한 미소에 리아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이클립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나 보다. 상당히 좋아하는 이야기인지 잔뜩 흥분하여 ‘사룡을 물리친 영웅님’의 모험담을 열성적으로 말해주기까지 했다.


리아는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결전에서의 주인공은 금속의 광택이 빛나는 갑주를 입고 검을 높이 치켜든 멋진 모습이었다.


즉 남자다.


어딜 어떻게 봐도 그렇다. 체구라든지 멋들어진 자세라든지, 이야기해주는 모험담 모두가 남자임을 시사하였다.


그렇기에 이클립스가 이름이 똑같다고 한 것이다. 차마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다.


아이의 꿈은 지켜줘야 한다.


루비아도 그러지 않았는가. 그게 어른의 역할이라고.


그 차갑디차가운 루비아조차도 그러하다.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그렸을 가상의 이스피리아를 지켜주기 위해 리아는 독하게 마음먹기로 했다. 다시금 떠올려본 결전은 이런 다짐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다.


‘응. 절대로 들키지 말자.’


있지도 않은 사룡을 물리친 게 된 것도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그 영웅이라며 칭송받는 이가 이런 위엄 없는 여자아이임을 알게 된 날엔 어찌 될까······


실망 가득한 얼굴로 힘없이 어깨를 떨구는 이클립스를 그린 리아는 주먹을 움켜쥐며 재차 다짐했다.


그 뜻을 담아 메이어를 보았다.


그녀는 역시 교양있는 사람답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차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한시름 걱정을 던 리아는 아직 흥분하여 영웅 이스피리아의 모험담―― 너무 굉장하다 못해 진짜 할 수 있을까 싶은 업적들을 나열하는 이클립스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 영웅님을 존경하는 이클립스의 마음은 알겠어요. 하, 하지만 오늘은 이쯤 하기로 하고, 다음에 듣도록 하죠.”

“아! 맞다! 어딜 간다고 했었지······”

“네. 여러분들도요.”

“우리도요?”

“당연하죠. 앞으로 배울 게 한두 개가 아닌데 여기서 어떻게 다니겠어요. 게다가······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역시 안전에 대해서도 조금 걱정이 돼요.”


육체적인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거라면 단순히 보호막을 펼쳐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정신적인 측면이 염려된다. 아무리 생활감이 좋게 꾸렸다고는 하나 어두침침한 움막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질 않았으니.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라도 이곳에서 지내면 좀 우울하게 변하지 않을까 싶다.


‘가끔······ 고향 집이 그리울 때나 들르는 정도로 충분하겠지.’



“리아······”

“괜찮아요.”


걱정스레 보는 에르에게 애써 미소 지은 리아는 밝게 말하였다.



“짐은 전부 챙기도록 할까요?”

“지, 지금 정리하겠습니다.”

“나도 도울게, 누나!”

“일일이 챙기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에르.”


고개를 끄덕인 에르는 단숨에 가구와 짐들을 모두 [차원수납]에 넣었다. 정확한 좌표 지정과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마력의 흐름이 일품이다.


허겁지겁 짐을 정리하려던 둘은 눈앞에서 짐이 사라지자 눈을 깜빡거리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수납]의 아티팩트에요. 나중에 여기 있는 에르에게 부탁하시면 그대로 돌려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이걸 전부······ 어, 엄청난 성능의 아티팩트네요······ ”

“아티팩트가 뭐야, 누나?”

“음. 엄청 좋은 마도구라고 생각하면 돼.”

“아하. 그렇구나. 이스피리아 누나는 부자네? 나도 고용해주고.”

“얘, 얘가. 니, 님을 붙여야지. 고용주이신데.”

“아, 아뇨. 아무렇게나 불러도――”

“응. 알았어, 누나.”


재빨리 끼어들었으나 늦었다. 순수한 아이의 얼굴로 돌아보는 이클립스에게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포기할 건 포기하도록 하고 이만 가보도록 할까.’


둘도 이견은 없는지 동의하며 따라나섰다만, 신난 이클립스와는 달리 메이어는 살짝 아련해졌는지 뒤를 돌아 쓰레기로 만들어진 움막집을 잠시 바라보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오니 그리핀과 기다리고 있던 기수가 보인다. 그는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일행들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던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왔다 갔다 정신 사납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북적거리는 인기척과 말소리가 좁은 골목길에서 들려오고, 곧 리아들을 발견한 기수는 표정을 밝게 하고는 다가왔다.


하지만 그 얼굴은 리아의 뒤에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고는 굳게 되었다.



“실례하옵니다만, 그분들은······”

“제 연구소의 직원――이 될 예정인 분과 그 가족이에요.”

“직원······? 예정?”

“네. 스카우트해왔어요.”

“아아. 그러십니까.”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기수. 그에게서는 혐오의 감정이 없었다. 보통 이러한 빈민가의 사람을 꺼리는 경향이 있기에 좀 신기했다.


그런 리아의 시선을 알아차린 기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저 또한 빈민가 출신이라······”

“어라? 그러세요?”

“예. 운이 좋게도 아가씨의 눈에 들어 리벨리타스 가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자긍심을 느끼는지 등을 곧추세우는 기수에게선 빈민가에 있었다는―― 교육의 미흡함 같은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상당한 노력을 했으리라 예상된다.



“그런데······”


슥. 말을 흘린 기수가 몰래 메이어를 곁눈질로 가리켰다.


빈민가 출신답게 곧장 알아차린 모양이다.


메이어, 그녀가 이곳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자세한 건 아직······.”


조용히 바라보던 기수는 묵례하였다. 염려하는 기색이 남아있긴 하였으나 딱히 따질 마음은 없는 듯하다.



“자. 그럼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너무 늦는다면 아가씨께 혼날 겁니다.”

“그땐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건 무척 감사드립니다만······ 자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핀에 있는 좌석은 2인용. 확실히 사람이 많다.


‘거기다······’


리아는 그리핀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그리핀 씨? 인원수가 좀 늘었는데 괜찮은가요?”


순간 그리핀의 눈이 번쩍였다.


아니,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이지만, 딱히 틀린 표현도 아니었다. 앞다리를 들고 날개를 펼친 그리핀에게선 무척 박력 넘치는 기세 같은 게 뿜어져 나왔으니. 커다란 날개가 벽면에 부닥치는데도 불구하고 신경 쓰는 기색조차 없었다.


삐이이익~!


하이 피치의 맹렬한 울음이 퍼져 골목길을 울린다. 거기에 담긴 감정은 언짢음으로, 그리핀은 ‘날 뭐로 보냐며.’ 화를 냈다.



“어, 그러니까 괜찮다는 소리죠?”


――삐이익!


그렇다고 한다.



“좋네요. 제가 에르 위에 앉고, 이클립스는 메이어 씨 위에 앉으면 될 테니까―― 응? 왜들 그러시죠?”


묻는 말에 허둥대는 이들 중, 특히 기수는 창백해져서는 황급히 곁으로 뛰어왔다.



“어,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이, 이런 아이가 아닌데······”

“아~ 착각하셨구나. 아니에요. 제가 자존심을 건드려서 그런 거예요. 거기에―― 미안하지만 그리핀 씨로는 저에게 상처를 입히기엔 역부족이에요.”


확고한 자신감이 담긴 리아의 말은 무거웠고, 이에 압도된 기수는 물론 메이어도 숨을 삼켰다. 이클립스만은 뭔 소리 하는지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반면 그리핀은 침착하게 날개를 접었다.


사람에게 길러지고 있다고는 하나 과연 마수. 이쪽과의 역량의 차이를 단숨에 깨닫고는 순순히 수긍한 모습이다. 어쩌면 첫 대면에 접촉을 허락한 것도 이를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핀은 무척 긍지가 높다기에 아닌 것도 같지만······.’


그냥 이 그리핀의 성격이 유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을 정리한 리아는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에르에게 눈짓했다.



“잠시 실례한다.”


메이어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딱딱하게 말한 에르는 그녀를 안아――올리지 않고 마법으로 띄어버렸다.


꺅하고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린 메이어가 옮겨진 곳은 그리핀의 뒷좌석. 그리고 바로 꺄르륵 아이 특유의 환성을 지른 이클립스도 그녀의 무릎 위로 옮겨졌다.


둘을 옮긴 에르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메이어의 옆좌석에 올라타 손을 뻗었다.


손을 맞잡으니 가볍게 끌어올려졌고, 붕 떠오른 리아는 그대로 에르의 무릎 위에 안착했다.


이걸로 모두 착석이다. [발판]을 만들어 날아가는 것도 고려했었지만 기왕 그리핀을 타고 온 거 끝까지 타고 가는 게 좋지 아니한가.



“그런 모습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떨어지지 않게 허리를 받쳐주는 에르를 보며 기수가 물었다.



“네. 만약 떨어지더라도 아까 봤었듯이 에르가 띄우면 돼요. 메이어 씨는요?”

“저도 괜찮―― 얘, 이클립스, 얌전히 있어야지. 그러다 떨어질라.”

“네에~”


몸을 숙여 어떻게든 그리핀을 만지려 했던 이클립스도 바로 앉고, 딱히 문제는 없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기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그리핀의 몸줄을 잡아당겼다.


상당히 좁았으나 그리핀은 한 번의 발돋음으로 공터를 빠져나오더니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일련의 동작들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던 탓에 흔들림은 거의 없었다. 첫 시승 때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승차감이다.



“저, 저기,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하늘을 나는 건 처음인지 얼굴이 굉장히 붉게 달아오른 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적지의 위치를 모르는 건 리아도 매한가지라 대답해줄 수 없다. 고개를 돌려 기수를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그는 밑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기수가 말해주기로는 수도를 가로질러선 안 된단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 수도 있다나? 그게 아니더라도 하늘인지라 교통질서를 확립하기도 어려워 외곽으로 돌며 최단 거리가 됐을 때 찔러 들어가기로 정했다고 한다.


‘얼추 중앙을 점으로 찍고 바깥으로 나가고 들어가는 느낌인가? 확실히 그러는 편이 사고가 날 확률이 낮겠네. 모두 직선으로 움직이니.’


사고라도 날엔 밑으로 추락하여 2차 피해도 발생하기에 이 점은 철저하게 지키게끔 법령으로 지정되어 있다며 기수가 말하였다. 더불어 처벌의 수위도 상당하여 어지간해서는 다들 따른다고 했다. 단 긴급 지령인 자에 한 해 예외인 모양이다.


빈민가 위를, 그것도 거의 끝자락을 지나게 된 경위도 이 때문이었다.


덕분에 뜻밖의 곳에서 인재를 만남과 동시에―― 빚을 갚을 수 있었지만.


이렇듯 빙 돌아가다 보니 기수가 가리킨 목적지는 제법 멀었고,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가는 동안 이러한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호······. 저기가?”

“예. 아가씨께서 계시는 별장입니다.”


별장이라지만 사실은 본가처럼 쓰고 있다는 기수의 말을 들으며 리아는 날리는 머리카락을 붙들고는 고개를 내밀었다.


‘라프리트 씨네 집답달까, 생각보다는 검소하네.’


물론 내려다본 별장은 별장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넓은 부지를 자랑했다. 그렇지만 축구장처럼 넓진 않달까, 아네픽시르에 심심찮게 있는 작은 성 같은 호화찬란한―― 집이라 부르는 게 맞나 싶은 곳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둘 중 어느 쪽이 마음에 드냐고 하면 리아로서는 응당 이 별장이었다.


“우와”라며 탄성을 내지르는 이클립스의 목소리와 함께 그리핀은 넓은 정원 부지를 천천히 선회하며 고도를 낮췄다.






정원 한편에 마련된, 풀들이 잘 정리된 착륙장에 사뿐히 내린 그리핀은 탈 때와 마찬가지로 몸을 낮춰줬다.



“고마워요. 편안하고 좋았어요.”


훌쩍 뛰어내린 리아는 그리핀의 머리와 부리를 쓰다듬으며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거기에는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인지 굉장히 놀란 눈으로 절찬리 쳐다보는 중이었다. 더불어 옆을 쳐다보기도 했는데, 시선을 받은 기수는 공감한다는 듯이 아련한 눈빛을 보냈다.



“여러분, 왜들 그러시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주인의 뒤에 있던 중후한 생김새의 집사로, 그는 슬쩍 얼굴을 가깝게 해 속삭였다.



“라프리트 아가씨, 손님께 예가 아닙니다.”

“아, 그렇죠. 고마워요, 바탄.”


작게 헛기침을 낸 그녀, 라프리트가 얼굴에 가득 꽃을 피우고는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리아 양. 놀라는 바람에 인사가 늦었네요.”

“놀라······다뇨?”

“아아. 아시다시피 그리핀은 자존심이 센 마수잖아요?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리아 양에게 간단히 손길을 허용해서 다들 놀란 거예요.”


비슷한 반응을 했었던 기수도 동의한다는 듯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른 동물들과 달리 도망가지 않아서 너무 좋긴 했지만, 그건 이쪽의 일이다. 이렇게나 놀랄 이유로서는 부족하지 않나 싶다.


그게 리아의 솔직한 생각이었으나······ 뭐가 더 있나 보다.



“거기다······”


라프리트가 에르에 의해 마법으로 내려진 남매에게 눈길을 보냈다.


이 눈길로 인해 왜 이런 반응이었는지 드디어 이해됐다. 그야 누구든 갑자기 모르는 사람을 데려오면 놀라지 않겠는가.



“대화는 나중이다, 라프리트.”

“알겠어요, 아버님.”


비켜서는 라프리트의 앞으로 한 쌍의 부부가 왔다.



“오래간만에 뵙네, 이스피리아 공.”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리벨리타스 후작님.”

“――리, 리벨리타스?!”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뭐지 싶었던 리아는 뒤를 보았다.


소리를 질렀던 그녀―― 메이어는 황급히 입을 막아보려 했는지 둥그렇게 눈을 뜨고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들었던 대로 실패한 모양이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재빨리 손을 뗀 메이어는 넙죽――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원피스의 끝자락을 잡고는 사뿐히 예를 취했다. 굉장히 허름하다 못해 다 떨어져 가는 원피스임에도 나름의 기품이 어려있다.


그리고 이클립스는 주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누나를 따라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 죄, 죄송합니다.”


긴장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리벨리타스 후작은 시선을 내렸다.



“흐음. 이스피리아 공? 노파심에 묻네만, 혹여 어딜 가는지 저들은 몰랐는가?”

“어······ 그러고 보니 짐을 싸고 바로 왔네요.”

“······놀랄 수밖에 없겠구려.”

“죄송해요.”

“아니. 딱히 사과할 일은 아닐세. 그보다 소개를 부탁해도 되겠나?”

“아, 네!”


리아는 쭈뼛대는 남매의 손을 잡고 이끌어 후작 앞에 섰다.


예정에는 없던 손님에 상당한 관심이 생겼는지 다들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쳐다보았다.


꺼리는 듯한 부정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 물론 마냥 호의적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빈민가의 사람이라며 경시하는 그런 분위기는 또 아니었다.



“어음. 해본 적이 없어서 좀 어색하지만······ 이쪽은 메이어 씨.”

“메, 메이어입니다······”


다시금 원피스 자락을 잡은 메이어.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었나, 손을 놓고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후작은 별말 않았고, 이클립스는 한 박자 쉬고 누나를 따라 치마를 잡는 모양새를 했다가 머리를 숙였다.



“타이밍은 좋았어요, 이클립스! 하지만 남자는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에르!”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대답한 에르는 즉각 올바른 예법의 시범을 보여줬다.


집사와 사용인, 후작 부부에게서 감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역시나 에르. 허리 앞과 뒤에 모은 손. 천천히 허리를 굽히는 각도 등등 순간 눈을 뺏길 만큼 우아한 기품이 담겼다.



“이렇게 하는 건데······ 처음부터 바로 완벽할 순 없죠. 그렇지만 어떤 일을 하든 기품을 갖추고 있어서 나쁠 건 없어요. 첫인상만큼 중요한 것도 달리 없으니 천천히라도 예절은 배워나가도록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이클립스는 어색하게 에르를 따라 했다.



“이, 이클립스 입니다!”


리아는 작게 묵례하여 무례를 끼친 것을 사과했다.


마음이 너그러웠던 리벨리타스 후작은 눈짓으로 사과를 받아들이고는 별말 없이 이클립스의 인사를 받아줬다.



“엘리아드 아포이 디안 리벨리타스다. 이스피리아 공의 손님이라면 우리의 손님. 귀하들의 방문을 환영하지.”

“무척이나 황송합니다, 리벨리타스 후작 각하.”

“화, 황송합니다.”


곱게 머리를 숙이는 메이어를 따라 이클립스가 복창했다.



“리벨리타스 후작이면 됐다.”

“――네네. 편하시게들 부르셔요.”

“이, 이보게······”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벨리타스 후작을 밀치고 나온 여성이 있었다.


2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은 에메랄드빛의 예쁜 머리카락이 눈길을 끌었는데, 머리카락만큼이나 수준급의 미인이었다. 그렇지만 인상이 조금 차가워 보인다. 단아하게 올라간 눈썹하며, 한일자로 그어진 고운 입에서 호된 호통이 나오지나 않을까 무섭다.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한순간이지만 후작을 째려봤는데, 자신에게 향한 게 아니었음에도 리아는 무심코 몸을 움찔 떨고야 말았다.


후작?


그는 말할 것도 없다. 투덜대던 입을 즉시 봉인하고는 얌전히 물러섰다.



“이이의 아내인 마리아나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여러분.”


후작도 30대로 보이기는 하나 후작의 팔에 손을 걸친 여성―― 싱긋 입꼬리를 올리는 마리아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살짝 농담을 보태 길거리에서 라프리트와 함께 봤다면 그녀의 어머니가 아니라 언니로 봤을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 부인.”


리아를 선두로 메이어들도 처음 뵙겠다며 인사를 올렸다.



“딱딱한 말씀은 됐어요. 부디 편히 마리아라고 불러주세요.”

“네. 반가워요, 마리아 씨.”

“······.”


주위가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어, 어라? 시, 실수했나?’


암만 리아라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편히 불러달란다고 냉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의 엄마가 아닌가?


자식을 보면 부모가 보인다는 말도 은연중에 있지 않나. 천사나 다름없는 라프리트를 낳은 어머니이기에 부담 없이 따를 수 있었던 거다.


겉보기와 달리 마리아는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겠지.


그래. 분명 그럴 터였다.


‘근데 이 분위기는 뭐다냐······’


기묘한 침묵을 뚫고 마리아가 다가왔다.


올려다본 그녀의 눈은 차갑게, 감정이 사라진 것처럼 고요했다.



“저, 저기, 죄송――”

“――귀여워.”

“에······?”


잘못 들었나 싶었던 것과 동시에 와락 안겨버렸다. 당연히 안은 사람은 바로 앞에 있던 여성, 마리아였다.


그녀는 리아를 품에 안고는 중얼거렸다.



“으흥. 정말 작고 귀엽네요. 저도 이런 착하고 귀여운 딸을 원했는데······. 혹시 리아라고 불러도 되나요?”


향긋한 향기와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을 뚫고 리아는 얼굴을 들었다.



“저······ 라프리트 씨는 충분히 귀엽고 착하신데요? ······그리고 이름은 편히 불러주셔도 좋아요. 하지만 전 작지 않아요.”

“어머. 실례. 귀가 밝으시군요. 그렇지만 라프리트가······? 아쉽게도 그 아이는 많은 부분에서 저를 닮았는데요?”

“그럼 마리아 씨도 귀엽고 착하신 분이겠죠. 성함도 마리아이시니.”

“마리아라서 라는 건 무슨 소리이신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눈엔 저 아이가 그리 비친다는 거군요.”


놀란 듯한 눈이었던 마리아는 차가운 인상조차 희미해질 다정한 미소로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딸이 무척이나 멋진 분과 친구가 되어 안심이네요.”

“저도요. 라프리트 씨처럼 좋은 분이 친구가 되어줘서 기뻐요.”

“후후. 정말 사람의 마음을 잘 잡는 달변가시네요.”

“어, 진심인데······”

“네. 그러니 달변가예요. 이리 사심 없이 솔직하게 말하기란 의외로 하기 어렵답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다. 사람이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쑥스러움이 많아져 낯 뜨거워지는 말을 하기 어려워지는 경향이 짙어진다. 전생에서도 남사스럽다며 말을 돌린 적이 많았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 연령으로만 따지자면 근 100세에 달한다. 그런데도 마리아의 말대로 술술 낯 뜨거운 소리가 나온다.


원인은 하나. 육체다.


과연 육체의 영향이 참 지대하다. 루시아스 덕분에 몸과 따로 떨어져 봤기에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 쑥스럽다는 기분이 들지 않기에 더욱.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달리 착각했나, 마리아는 빙긋 웃더니 리아를 놓아줬다.



“손님을 계속 밖에 세워두고 실례했네요. 따라오시죠. 안으로 모실게요.”

“아, 네. 고맙습니다. 근데······ 저분은?”

“아아. 저 아이가 있었죠.”


리아의 시선이 간 방향을 쳐다본 마리아가 굉장히 귀찮다는 듯이 말하였다.



“장남, 아즈랄 샬리온 디안 리벨리타스에요. 대충 아즈랄이라 불러주세요.”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걸음을 재촉하는 마리아. 하지만 어찌 그러하겠는가.


어색하게 웃은 리아는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웃는 남성―― 처음부터 후작 부부와 같이 있었던 아즈랄에게 사뿐히 예를 보였다.



“이스피리아입니다.”

“어머님께서 소개해준 아즈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스피리아 님.”


어깨 위까지 자란 연둣빛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아즈랄은 여동생인 라프리트와는 조금 이미지가 달랐다. 물론 핏줄이 어디 가진 않는다고 훤한 인상에 잘 생겼다. 머리색도 그렇지만 그의 얼굴에선 슬쩍슬쩍 라프리트의 모습도 엿보였다.


그러나 유약하다고 해야 하나? 부드러운 분위기 때문인지 당찬 라프리트와 달리 조금은 소심해 보인다.


‘뭐, 겉보기만 그러겠지.’


아즈랄은 리벨리타스 가의 차기 당주로 이미 확정이 된 몸. 현재는 가주의 대리자로서 영지를 다스리며 경험을 쌓고 있다고 루비아와 라프리트의 담화에서 들었었다.


마냥 유약한 자에게 영지를 맡길 리가 없다. 만만하게 볼 생각은 전혀 없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다.



“님이라뇨. 편하게 불러주세요.”

“이스피리아 공의 말씀대로······”

“······.”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예를 보이는 아즈랄.


같이 학원에 다니는 동급생이 아니라면 뭘 어떻게 해도 끝에 붙는 호칭이 떨어지지 않나 보다. 최대한 양보하고 양보한 마지노선이 공인 듯하다.


부담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최고 국빈의 이름값은 막강하다. 높은 사람 취급엔 제법 익숙해지기도 했고, 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몇 년이다. 조금만 참으면 되니 그러려니 하자.


살짝 좌절하면서 리아는 안내에 따랐다.











오종종종 걷는 리아는 어딘가 시무룩해 보이기도 했는데, 그런 것과는 반대로 가슴을 피고는 야무지게 행동했다.


그것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리아에게 했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작고 귀여운 딸을 원했었고, 라프리트가 태어났을 땐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귀족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생각임을 알고 있으나 딸과 오붓하게 지낼 나날들이 무척이나 기대됐었다.


하지만 그 꿈은 금세 무너졌다.


때는 라프리트가 4살의 생일이 지나고 한 달쯤이었다. 몸살 기운을 얻었던 딸이 기묘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사용인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는 게 아니겠는가.


당최 왜 그런지. 딸의 이상 행동이 걱정되어 불러냈다.


그날은 지금도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니. 기억할 수밖에 없다.


――딸은 더 이상 자신이 알던 딸이 아니게 된 날이니까.


마주 앉은 라프리트의 눈은 4살의 아이가 지닌 눈이 아니었다. 회한으로 깊게 물든······ 세상의 끝을 보고 온 사람처럼 공허하게 흐려져 있었다. 더는 기억 속의 순수한 딸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사람 자체가 바뀌거나 하진 않았다. 라프리트는 라프리트였다. 이따금 나오는 사소한 버릇들이 무언가와 바꿔치기 당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줬다.


얼마나 안심한 줄 모른다. 하지만 그토록 바랐었던 귀여운 딸과의 나날은 사라지게 됐다.


피는 속일 수 없달까. 라프리트는 냉혹하고 사납게 보인다는 자신을 점점 닮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은 웃음이었다. 그토록 해맑게 웃던 딸은 잔뼈 굵은 귀족처럼 거짓 웃음을 짓게 됐다. 얄궂게도 그 모습은 무척이나 어미를 닮아있었다.


다음은 사고방식. 단호한 결단력과 실행력은 이미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냉철하게 본인에게 필요한 일들을 파악한 뒤 곧장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총동원하여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중에는 때때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일도 있었다. 그러한 일들은 굳이 어른들의 이해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떼를 써 들어줄 수밖에 없게 하였다.


버릇이 없다며 다그칠 행태였다. 분명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특히 귀족이라면.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며 다그치거나, 부탁을 안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야 아즈랄의 살해계획을 사전에 막은 전적이 있는데, 바보가 아니고서는 누가 딸을 막겠는가.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전율이 인다.


라프리트가 울며불며 떼를 써 억지로 해고하게 된 사용인. 그는 무척이나 성실하고 바른 청년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곳으로 발령을 보내주려 했는데, 짐을 정리하는 도중 그의 방 안에서 독약이 나왔다.


치명적인 맹독이었다. 한 방울만으로 사람 죽이는 것쯤은 아주 손쉬운 물건이었다.


그리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계획서가 그의 품에서 나왔다.


덕분에 누굴 노렸는지, 언제 실행하는지를 밝혀내어 관련된 자들을 모조리 붙잡았었다. 물론 현재는 전원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 우연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타이밍이 완벽했다. 암살자가 계획서를 처리하는 것보다 빨리 잡아낸 것이니. 그러한 일을 따라 할 수나 있겠는가.


이때부터 라프리트의 모든 떼는 들어주게 됐다.


그렇다고 가만히 들어주기만 한 건 아니었다. 찝찝함에 여러 뒷조사를 하였고, 의미 없는 행동 따윈 없다는 게 판명됐다. 그리고 라프리트는 미래를―― 신에게 계시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허무맹랑하단 건 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은 딸이 미래를 안다는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리거나 티 내지 않도록 모두와 단단히 약속하였다. 만약 누군가가 타인의 뜻에 의해 억지로 입을 열게 될 시 바로 자결하기로 했다.


미래를 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라프리트의 인생이 어찌 될지는 뻔하니······


가장 경계를 한 것은 세인트리안. 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특활공작부대가 필시 라프리트의 목숨을 노릴 터였다.


사랑하는 딸, 여동생을 위험에 빠뜨릴 사람은 이 집엔 없다.


아즈랄을 비롯, 가족 모두가 귀족이다. 죽음은 항상 각오했었던 것이기에 쉽게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다 옛날이야기다.


사상 초유의 사태―― 용왕의 등장으로 인해 라프리트의 힘이 필요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왕임을 알린 건 희대의 대마법사 리카드다.


절대 허투루 볼 수 없었고, 암룡왕에 대해 조사해달라던 아크티알의 부탁에 고심을 거듭하던 남편, 엘리아드는 모두를 불러 모아 폐하와 재상에게는 말해주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라프리트는 알고 있는 미래를 토대로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미래에 대해 알려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귀염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나 자신이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가, 실로 안타까웠다. 어쩔 수 없이 나중에 태어날 손녀를 기약해야 하나 생각하며 아쉬움만을 자아냈다.


그러던 때였다. 이변이 생겨났다.


집안사람 외에는 거짓 웃음만 짓는 라프리트가 먼저 다가간 사람이 나타났다는 게 아닌가. 그것도 환한 미소로.


주석으로 여느 또래의 영애처럼 사랑스럽고 귀여웠다며 써진 편지는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편지를 쓴 안네의 착각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폐하의 부름에 의해 돌아온 딸을 본 순간 틀렸음을 깨달았다.


안네가 제대로 본 게 맞았다. 무언가에 쫓기듯, 여유가 없던 딸은 이제 제법 어깨에 힘을 빼고 다니게 됐다.


누가 이리 바꿔놨을까.


그때부터 리아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무려 새하얀 요정이 강림한 듯한 귀여움이라고 하지 않는가.


고마운 것도 모자라 귀엽기까지?


그걸로 끝났다.


정말 무지하게 만나고 싶었다. 과연 얼마나 귀여울지, 얼마나 사랑스러울지 꿈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결국 참을 수 없게 되어 딸을 바꾼 이들을 초대하라며 반쯤 협박하게 됐다.


다만 무척 아쉽게도 딸을 바꾼 또 한 명의 인물―― 소베르비아 공주는 초대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리아는 최고 국빈이기는 하나 이례적인 것에 반해, 소베르비아는 명실상부 타국의 공주다. 그녀가 친구라며 찾아오기에는 주변에 끼칠 파장이 크다.


‘하지만 조금 안심이에요. 공국의 빛이 간판만 그럴듯한 게 아니라서.’


결과로 리아 혼자서 오게 됐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만족이었다. 천상 여자인 리아는 요정이란 말이 괜히 나오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척이나 귀여웠고, 행동 하나하나가 어쩜 그리도 보호욕을 자극해대는지······. 지킬 체통이 없었더라면 당장에 껴안고 마구 쓰다듬었을 것이다.


친해지기 위해 일부러 풀네임 대신 이름만을 말하였다. 그 노림수 덕에 애칭을 불려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음. 꾸미지 않은 순수한 귀여움이었어요. 아니, 꾸미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귀여움이었어요! 정말 이대로 데려와 키우고 싶―― 응?’


속으로 환호를 지르고 있던 마리아에게 문득 조용한 리아가 눈에 띄었다. 물론 헤실거릴 것만 같은 입가는 제대로 단속했다.



“왜 그러시나요?”


정원은 상당히 작다. 다른 귀족들과 비교하면 정원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부지가 좁다. 걸어도 15분이면 대문에서 별장 정문까지 갈 수 있다. 더군다나 그리핀이 내린 착륙장은 더 가까워 5분이면 도착한다.


그래서 마차도 타지 않고 걸었는데, 주변이 신기했던지 리아가 굉장한 기세로 둘러봤다.


이런 정원이 처음이기에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리아는 왕성도 가봤다. 화려하고 볼거리가 풍성한 건 단연 왕성 쪽이다.


여기엔 달리 특별한 눈요깃거리는 없다.


정원은 중앙엔 대리석으로 만든 정자. 화단에 기르고 있는 관엽수와 꽃들은 간단명료하게 잘 보이도록 꾸몄고, 회양목으로 깔끔하게 길을 내어낸 정도에 불과했다. 어딜 봐도 평범하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적당한 느낌으로, 집주인의 검소하면서도 절제된 성격 같은 게 전해졌다.



“굉장해서요.”

“마음에 드셨나요? 남편 취향의 볼품없는 정원인지라 살짝 염려스러웠는데.”

“물론 정원도 마음에 들어요. 깔끔하니 보기도 좋고요. 하지만 더 눈길을 끄는 건 마법으로 만든 시설들이네요.”

“아아. 과연 그런 쪽에 먼저 눈길이 가시는군요. 그런데 둘러보시는 것만으로 아실 수 있는 건가요?”

“마법의 냄새――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니깐요. 그걸 따라가면 핵이 있고, 어떤 마법인지 판별해낼 수 있어요.”

“엄청······나시군요. 소문대로.”


리아의 능력에 대한 건 안네를 통해 차근차근 보고되어왔다. 그리고 그 능력 하나하나가 모두 믿을 수 없을 만치 굉장하여, 판단하기로 리아는 혼자서 국가를 전복시킬 가공할 힘을 지녔으리라 생각한다.


이 집에 설치된 마법을 파악하는 건 땅에 떨어진 돌을 줍기보다 쉽겠지.


그런데 리아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아뇨. 오히려 엄청난 건 여기에 있는 마법들이에요.”

“나름 심혈을 기울였다고는 생각하지만······ 리아 공의 성에 차진 않을 텐데요.”


단언할 수 있다. 엄청난 마력의 파동을 일으켰던 사룡을―― 그것을 무찌른 자의 관심을 끌 만한 건 없다고.


하지만 아니었나 보다.


리아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히 즐거운 낌새다.



“점잖이 너무 과하시네요. 학원은커녕, 왕성보다도 고도의 마법들을 설치하셨으면서. 여기가 성에 차지 않는다면 벨루디스에선 성에 차는 곳이 없을걸요?”

“······네?”

“아. 혹시 비밀이었나요? 그 불경죄라든가······”


신하인 후작이 국왕보다 더 엄청난 시설이 깔린 집에서 사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무척이나 불경한 짓이 아닐까――


아마 이런 걱정을 하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는, 가족 중에 아는 이라고는 움찔 몸을 떤―― 라프리트밖에 없건만 그 누가 고발할 수 있겠나.


‘고발해도 별건 없겠지만.’


멍한 얼굴을 푼 마리아는 피식 웃고는 리벨리타스 후작과 팔짱을 껴 그를 당겼다. 그리고는 살짝 인상이 찡그려진 후작을 가리켰다.



“이이가 보기엔 그렇지만 폐하의 동생―― 계승권을 가졌던 제2 왕자였어요. 지금은 그럭저럭인 평범한 아저씨가 됐지만요.”

“아하. 형제사이니 너그러이 묵인하셨군요?”


전혀 아니지만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주위에 알려지는 것도 눈치가 보이니······”

“네. 비밀로 할게요. 입 꾹.”


리아가 입을 지퍼로 담그는 동작을 취하며 뒤를 보니 메이어들도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하였다. 과연 빈민가와 사정이 있는 아이답게 눈치가 빠르다.



“그런데······”

“네.”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마법들이 설치되어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발걸음을 멈춘 리아는 철문으로 된 대문부터 별장의 터를 쭉 가리켰다.



“여기에 결계가 있어요. 일정 이상의 악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발을 디디면 불편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 거예요.”

“부지 전체에 영향이 있는 건가요?”

“네. 그 외에도 밤에 누군가가 침범하면 정원에서 헤매도록 해놨네요. 미로에 빠진 것처럼.”


정원에 있는 회양목들은 기껏 해봐야 무릎 위를 살짝 넘는다. 절대 헤맬 수가 없는 구조다.


이를 가능케 하는 마법은 정신계 계통일 터.


하지만 정신계 쪽은 특성상 수수하기에 민간에서는 그다지 연구되지 않은 학문이다. 반대로 왕성에서는 그 은밀성과 효과 때문에 깊게 파고들었지만.


이 뜻은 곧 궁정 마법사가 아닌 한 이만한 정신계 마법을 쓴 결계는 구축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한 걸 어떻게 라프리트가······’


수수께끼가 많은 딸이다 싶었지만 정말 매번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진짜 굉장한걸? 너무나도 깔끔해. 여태까지 본 술식들은 다 어딘가 투박했는데 이건 마력의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


그렇게 중얼거린 리아는 슬쩍 그의 집사를 올려다봤다.


저리 요란을 떨 일인가?


의견을 주고받는 듯한 둘을 보자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그렇게나 대단한가요?”

“직접 봐야지 알겠지만······ 격이 다른 느낌이네요. 아아. 술식은 학문적인 느낌이 강하니 달리 표현하자면 쌓은 시간이 다르다고 하면 될까요? 비로소 실용적인 단계에 진입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실용적이라니······.


실로 굉장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회 전반 곳곳에 마법을 활용하는 만큼 이쪽은 실용적이다 아니다를 따질 생각조차 하지도 못했건만.


엘리아드랑 아즈랄도 같은 의견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리아 공에겐―― 현재의 마법과는 다른 상위의 마법을 쓴다는 그녀의 눈엔 한참 부족하나 보군요.’


그런데 그걸 뛰어넘었다고 한다. 이 집에 설치된 결계가.


순간 마리아의 뇌리가 번뜩였다.


‘그렇군요······. 미래. 미래에서 온 지식인가요?’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그곳에서의 마법이나 기술 등의 지식도 안다는 소리다. 즉, 라프리트는 현재 그 누구보다도 앞선, 진보된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을지 조금 궁금하다.


사룡을 잡은 자에게 실용적으로 됐다는 판결을 받아내야 하는 수준이다. 그 정도라면 세상이 변하는 시기―― 특이점을 구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터다.


그걸 혼자서 이룩했다기엔······


미안하지만 딸은 조금 미덥지 않다. 반드시 누군가 전수해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수십 년 후에는 평범한 기술인지라 별로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요. 뭐, 어찌 됐든 상관없겠죠. 딱히 뭔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마리아는 지금의 고민들을 모두 멀리 던져버렸다.


어떻게 초대한 건데 딴생각할 여유 따윈 없다.


싱글벙글 미소 지은――그래봤자 입꼬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올라간 정도에 불과하다.―― 마리아는 걸음을 재촉했다. 리아도 딱히 이의는 없는지 별말 없이 따라왔다.



“자자. 어서들 들어오세요.”


정치적으로 높은 손님이 올 경우 최선을 다해 모신다는 의미로 모든 사용인이 나와 손님을 맞이한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대기시켜놓지 않았다. 이는 라프리트의 의견으로 리아가 절대 반기지 않을 거라며 극구 말렸었다.


딸의 의견은 정답이었다. 리아는 처음보다 꽤 편안해진 모습으로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마음을 놓은 마리아는 집사를 불렀다.



“바탄, 두 분을 부탁할게요.”

“예.”


누구를 지목한 건지 헤매지 않고 바탄은 바로 상대에게 향했다. 보통 집사를 보내는 게 아니라 사용인을 붙였을 테지만, 성의를 보인다는 의미에서 그를 보내기로 하였다.


역시나. 바탄이 직접 오자 메이어란 소녀가 당황한다.



“실례합니다. 두 분께선 절 따라오십시오.”


둘 중 어린 남동생이 불안한지 시선이 방황했다.



“괜찮아요, 이클립스. 여긴 제 친구의 집이에요. 해를 끼칠 건 없으니 편히 다녀오세요.”

“네. 남편이 말했듯이 여러분도 똑같이 저희의 소중한 손님이에요. 정중히 대할 것을 약조해 드릴게요.”


아이를 안심시키는 건 자신이 없었으나 리아의 확답이 있어서인지, 이클립스는 산뜻하게 태도를 바꿔 당당하게 바탄을 따라갔다. 동생이 가니 메이어는 불안해하면서도 발걸음을 옮겼다.



“두 분은 옷만 갈아입고 금방 오실 거예요. 차림새는 딱히 신경 쓰지 않으나, 기왕이면 새 옷을 입는 게 좋잖아요?”

“감사합니다. 제가 할 일이었는데······”

“뭘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둘에게 작은 선물쯤은 줄 수 있잖아요?”

“익숙하신가 봐요?”

“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 대부분이 라프리트가 데려온 사람들이니깐요. 여러분을 태우고 왔던 기수처럼 빈민가 출신도 제법 되죠.”


리아가 쳐다보자 라프리트는 쑥스러워졌는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편히들 앉으세요. 아아. 물론 집사님―― 딸에게 찬크에르 씨라 소개받았는데, 당신도 편히 앉으세요.”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 집사와의 합석은 있을 수 없다. 이는 당연한 일이자 상식이다. 제아무리 직급이 낮은 하급 귀족이더라도 마찬가지다. 대리인으로서 협상 같은 걸 하지 않는 이상에야 집사와 마주 보며 앉을 일 따윈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상대는 무려 암룡왕이다. 앉게 하는 건 당연하고, 되려 마주 앉은 것에 황송한 기분마저 든다. 엘리아드도 긴장한 듯 조금 딱딱하게 소파에 앉았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설 명절 다들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도 오랜만에 가족과 친구들 좀 만나면서 잘 쉬다 오겠습니다!


아! 물론 연재는 늦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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