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4:10
연재수 :
274 회
조회수 :
34,009
추천수 :
315
글자수 :
3,873,671

작성
23.01.28 12:26
조회
89
추천
0
글자
38쪽

180

DUMMY

자그마한 티도 없는 백옥과도 같은 피부에 비단처럼 윤기 가득 흐르는 흑발. 이 두 가지 요소만으로도 뭇여자들의 부러움을 사려만, 그의 빛나는 듯한 외모와 몸에 깃든 기품은 이조차 단숨에 불식시켜버린다. 마치 한 차원 다른 존재 같다.


‘부인들 사이에서 왜 그리도 말이 나돌았는지 이해가 되네요.’


아니, 부인들에게서만 말이 돈 게 아니다. 리아의 서훈식 때 참가한 여성이라면 누구나가 이 남성에 대해 거론했다.


지금도 그 열기는 크게 식지 않았다. 아낙네들끼리 모인 자리에선 이따금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들이 흘러나왔었다. 우스갯소리로 학원에 다니고 있는 자식과 바꾸고 싶다는 사람까지도 있다. 그러면서 꺅꺅거리는 건 덤이다.


정말 다들 소녀로 돌아간 듯싶다.


모두가 한결같은 소리를 하니 서훈식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들은 너무나 아쉬워하며 크게 좌절했었다.


저들끼리 계속 찬양해대니 얼마나 궁금했겠는가? 가진 자들의 특권인 양 요란 떠는 모습들이 어찌나 얄미웠을지······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고용. 초상화를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외부인은 출입 금지인 학원이라도 밖까진 관여하지 않는다. 밖에서 줄곧 기다리다가 그가 식료품을 구하러 나오면 얼굴을 기억하는 식으로 초상화를 제작했다.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최소한은 남아있었는지 직접 기다리면서 본다는 선택지는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우책이었다.


그 어떤 뛰어난 화가를 데려온다고 한들 이 남자의 아름다움을 모두 담아낼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장담할 수 있다. 눈앞에서 직접 본 자신이기에 단언할 수 있다. 그림으로는 담아내기에 역부족이다.


꿈에서 상상 속의 이 남자와 만났다는 부인들에겐 실로 안타까운 선택이다. 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의 경험이 낫다는 말도 있건만. 자존심 따위는 접어두고, 보는 각도에 따라 유혹하는 듯 고혹적이기도, 그 어떤 남자보다도 야성적이라며 떠들어대는 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다니······. 실로 아까운 짓을 했다.


아니다. 어찌 보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직접 대면해서 저 깊고 차분한 눈빛을 한 번 봤으면 그대로 남자의 포로가 될 아낙네도 더러 있을 테니 말이다. 가정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초상화를 택한 건 참으로 현명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리아는 그들과 같은 감정을 품기란 불가능했다.


확실히 떠들어대는 것만큼 잘생겼다. 그건 인정한다. 취향은 조금 갈릴 순 있겠으나 그런 이들도 대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지만 전설 속의 용왕이라는 걸 알아서인지 설렘은 조금도 생겨나지 않는다.


있는 마음이라고는 오직 하나―― 실수하지 말자란 결연한 다짐만이 전부였다.


‘리아 공이 새삼 굉장하네요. 그 용왕과 부부라니.’


대외적으로는 리아의 능력을 먼저 알아본 아크티알이 국빈으로 모셨다고 알려졌으나, 진실은 그의 정체 때문이었겠지.


가능성은 지극히도 높다. 오히려 그랬기에 대신들의 반발에도 불구 아크티알이 완강하게 밀어붙였던 거라 생각된다.


만약 그렇다면 리아의 엄청난 능력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는 뜻이다.


최고 국빈의 정당성은 얻었으나 속으로는 무척 당황하지 않았을까?


‘남 말할 처지는 아니죠. 저부터 일단 마음을 잡아야지요.’


마리아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가슴이 뛰는 게 느껴질 정도로 긴장됐다. 절대 거슬리는 짓을 해선 안 된다는 부담감이 어깨를 무겁게 했다.


꿀꺽.


조용히 마른침을 삼킨 마리아는 떠올렸다. 지난 베르다드에서의 보고를······


지금은 리아들에게 대놓고 거스르는 자들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이들이 처음 벨루디스에 왔던 초창기에는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왕족이 아닌 최초의 최고 국빈이기도 했으니.


그래서였을 것이다. 겁을 상실한 자들이 나타났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학년마저도 다양한 그들은 대뜸 거드름 피우며 그에게 말했다고 한다.


――궁상맞은 꼬맹이는 버리고 자신을 섬기라고.


본인에게 어울리는 주인을 섬기는 게 좋지 않냐며 권하는―― 반쯤 협박하는 자들도 있었다는 데,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귀족의 권위를 내세우는 거란 말인가.


딱히 용왕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최고 국빈은 아직 변변찮은 작위 하나 가지지도, 물려받지도 못한 반쪽짜리 귀족으로는 감히 넘보기도 힘들 정도의 벽이다. 집사여도 마찬가지다. 학원에 다니는 학생 따위보단 아득하니 높다.


극히 예외로 왕자 같은 비등한 이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최고 국빈이 뜻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기에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들은 공문을 제대로 알아들었었다.


집사를 포함한 그들 전원이 최고 국빈이라는 것을······


리아의 일행들 사이에선 위아래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전원이 최고 국빈인 거다. 그리고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될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들은······.


지금이야 함부로 구는 어리석은 이들이 없어졌지만, 당시 이 보고서를 읽을 때는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정중히 그럴 수 없다는 그에게 감히 따르지 않느냐며 윽박지르는 자도 있었다는 구절에선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나마 그가 온건히 대응했기에, 흥분한 상대를 단숨에 마법으로 진정시켰기에――추정―― 망정이지, 자칫 그날이 벨루디스의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었다.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재차 강조하지만, 눈앞에 있는 존재는 바로 그 용왕. 분노를 사면 벨루디스쯤은 순식간에 재가되어 사라진다. 그리고 베르다드는 어찌 보면 가장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격전지다. 딸의 안위가 염려되어 조마조마한 건 당연하다.


최근까지도 내심 가슴을 졸였었는데······


‘괜한······ 걱정이었을지도요.’


간단한 담화 이후 나온 차로 목을 축이고 마리아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2학기 시험도 만점이셨다고요? 축하드려요.”

“당연하다는 생각도 드네만······ 축하한다네.”


엘리아드의 축하도 이어지자 리아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이를 묵묵히 지켜보는 그―― 찬크에르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너무나 부드럽다. 얼마나 애정이 깊은지는 일목요연. 그 순수한 미소에 주책맞게도 순간 넋이 나가기도 했었다.


그러한 모습을 줄곧 보인다.


한파가 몰아치는 듯했던 첫인상은 온데간데없다. 있는 거라고는 다정다감하고 상냥한 인상뿐이었다.


다만 이는 전부 리아에게로 한정된다. 다른 이에게는 여전히 찬 기운이 풀풀 풍긴다. 유일하게 라프리트만은 제법 안면을 텄기 때문인지 조금은 누그러진 태도였다.


이 모습을 보고 마리아는 깨달았다.


――조심해야 할 건 찬크에르가 아니라, 그의 아내인 이스피리아라고.


찬크에르는 아무리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그러려니,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그는 타고난 기질이 그러하였다. 하지만 그게 리아에게 향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아내에게 향하는 불의를 절대 참지 않을 것이다.


막연한 생각이지만······ 여자의 감이랄까, 그러한 느낌이 들었다.


이스피리아를 건들면 위험하다고.


‘나중에 폐하와 남편에게 알려줘야겠어요.’


물론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 알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 주의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무척이나 인간적인 용왕님이네요.’


인간과는 다르다는 사고가 깔려있었기 때문인가, 아내를 아끼는 모습에 친근함이 샘솟는다.


뭐어······ 여전히 무섭기는 해도······


피식 웃은 마리아는 엘리아드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과 함께 먼저 실례할게요. 아직 남은 일거리가 있다는 듯해서요.”

“아, 네.”

“아아. 앉아 계세요. 옷을 갈아입으려고 간 둘도 금방 돌아올 거예요.”


물론 일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저 딸과 오붓하게 놀라는 배려였다.


그런데 막상 빠지자니 좀 아쉽다. 모처럼 떼까지 써가며 초대했건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리아는 엉거주춤하게 선 리아를 향해 방긋 웃었다.



“리아 공,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딸과 함께 공과 시간을 보내도 될까요?”

“에? 어머님, 그게 무슨······?”


도대체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며 라프리트가 쳐다본다. 그렇지만 자주 있는 일이다. 신경 쓰지 않는다.



“저 아이가 친구를 데려오는 게 처음이기도 하고, 저도 리아 공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안 되려나요?”


고개를 내리며 최대한 불쌍하게 말꼬리를 흐리자 리아의 마음속 뭔가가 자극당했나 보다. 콧바람을 내뱉으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되고 말고요! 저도 마리아 씨와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웠어요!”

“어머나. 리아 공은 여심도 잘 잡으시네요.”

“헤헤.”


주책이라며 라프리트가 재차 눈으로 질책하지만 담아두지 않았다. 그뿐이랴, 오늘을 위해 준비한 다과들을 남김없이 선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만 했다.


‘물론,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고개를 돌린 남편에겐 이후 천천히 설교를 들려줄 예정이지만요.’


후후. 미소를 지은 마리아는 밝게 웃는 리아를 보았다.


세간뿐 아니라, 사교계에서도 화제의 중심인 리아. 그녀의 주위는 소용돌이가 잦아들 기미가 없는 태풍의 한복판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런 리아의 곁에 선 라프리트.


무척이나 의아했다. 라프리트는 당돌했지만 눈에 띄는 걸 그리 반기진 않았었기에.


그리고 부모로서 딸이 무척이나 걱정됐었다. 그곳만큼 달리 위험한 곳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시름 놓았다. 오히려 저곳이야말로 태풍의 눈이었다. 격렬한 흐름 속에서 유일하게 잔잔한 안전지대였다. 리아와 그 가족만 건들지 않으면.


처음부터 우호적으로 관계를 쌓았던 라프리트가 이제 와 적대적으로 대할 리가 없으니 걱정은 없다. 되려 용왕과 영웅의 가호를 받는 듯한 저 위치는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일지도 모른다.


위험해질 일 따윈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오늘의 제일 큰 목적을 확인한 마리아는 상쾌한 얼굴로 엘리아드와 방을 나왔다.











‘와. 긴장했다.’


친구의 부모님과 함께 차를 마시는 상황 같은 건 극히 드물었다. 있어 봐야 코흘리개 시절에 몇 번 있었던 게 다다. 그것조차도 오랜 세월이 지나 어땠는지도 가물가물하다.


현생에서는 처음으로 겪는 상황이라 엄청 긴장됐다. 더불어 뭔가 실수는 하지 않았나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한 생각을 하니 겉으로 티가 났나 보다. 한숨 쉬는 모습을 본 라프리트가 흐린 얼굴로 말을 걸었다.



“미안해요, 리아 양. 어머님이 억지를 부려서······”

“뭘요. 이런 말 하긴 그런데, 귀엽기만 하셨는걸요.”

“하아. 평소에는 좀 더 점잖은 분이신데······ 오늘은 정말 많이 기대하셨나 봐요.”

“좋은 게 좋은 거죠. 저도 반겨주셔서 기쁘고요.”


재차 사과하는 라프리트를 달래주고 있으니 아즈랄이 무척이나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기, 왜 그러시나요?”

“아, 미안하네.”


고개를 갸웃하니 아즈랄이 살짝 웃었다.



“라프리트가 저리 편한 얼굴인 건 정말 오랜만이어서 말이야. 무심코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군.”

“그래요? 아. 말씀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알겠네. 사적인 자리에서는 편하게 대하도록 하지.”


그리 말한 아즈랄은 라프리트를 한 번 보고는 빙긋 미소 지었다.



“이어서 말하자면, 맨날 땍땍대길래 친구는 안네가 전부겠거니 싶었거든. 그랬는데 마음을 터놓을 친구 생기고, 집에 데려오기까지 하다니······. 솔직히 지금 상황이 엄청 신선해.”

“오라버님, 쓸데없는 말씀은 삼가시길.”

“그래. 이거처럼! 무지하게 까칠해서 평생 친구는 안 생길 줄 알았다니까?”

“까칠하다뇨. 라프리트 씨는 별로――”


말을 하다 문득 평소 라프리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분명 어른스러운 모습대로 언니 같은 면모를 발휘하여 자주 챙겨주고는 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실로 고맙다.


그렇지만 설교―― 강습 시간에는 한없이 무서운 귀신 교관이 된다.



“――가, 가끔 까칠해지시긴 하는데, 그, 그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요······”


나름 친구를 감싸주기 위해 애썼으나, 강습 때의 번뜩이는 눈빛을 떠올린 리아의 목소리는 점차 수그러졌다.



“동생아······, 베르다드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니?”

“하, 하긴 뭘 해요?!”

“나야 모르지. 하지만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스피리아 공――”

“――리아면 돼요.”

“그래. 리아 공이 저리 죽을상이 될 리가 없잖느냐?”

“······.”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리는 라프리트다.


그렇게나 심한 얼굴이었나 싶었던 리아는 찻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맨눈으로 물질의 구조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시력인지라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찻잔에 반사된 얼굴을 본 리아는 탄식했다.


‘이야······. 심하구나.’


육체가 미성숙했기에 표정 하나 감추지 못하나 보다. 눈과 입꼬리가 축 처져 마치 아끼는 장난감을 잃은 듯한 꼬맹이의 얼굴이 되어있었다.


남이 보지 않더라도 이건 좀 창피하다.


리아는 찹쌀떡 만지듯 얼굴을 주물렀다.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최대한 웃는 얼굴로 만들려 했다.


만족할 수준으로 얼굴이 펴진 걸 확인하고는 미끄러지듯 맞은 편에 있던 라프리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놀라는 그녀의 팔을 껴안았다.


왜 이러한 짓을 하느냐? 당연히 라프리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솔직했을 뿐이지만 이러나저러나 그녀의 기분이 토라질 발언이지 않았는가.


‘그래. 절대 나중의 일이 무서워서가 아니라고?’


꽤나 찔렸던 리아는 마음속으로 변명을 늘어놓고는 ‘오해다. 결코 나쁜 뜻이었던 게 아니다.’라며 최대한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상당히 토라졌는지 라프리트는 쉽게 얼굴을 펴지 않았으나, 계속되는 파상공세에 결국 피식 웃게 되었다. 이 모습도 신기한지 아즈랄은 싱글싱글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평소대로 돌아와 잠시 떠들고 있으니 이클립스와 메이어가 돌아왔다.



“오. 꽤 잘 어울리네요.”


빈말은 아니었다. 흰 셔츠와 갈색의 베스트, 잘 다려진 바지의 세미 정장을 잘 소화해냈다. 제대로 적갈색의 넥타이까지 두른 이클립스는 발랄하면서도 지적으로 보여 색다른 매력을 뽐냈다.


리아를 시작으로 라프리트와 아즈랄도 잘 어울린다며 한 마디씩 해주었다.


칭찬이 쑥스러웠던지 이클립스는 옷매무새를 만지며 머리를 긁적였다.



“메이어 씨도 잘 어울리셔요.”

“감사합니다.”


양쪽의 치맛자락을 잡고 조신하게 머리를 숙이는 메이어. 완벽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예법을 배운 티가 난다.


그녀는 흰 셔츠와 푸른 치마 차림으로, 순박하고 청순한 마을 처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몸에 밴 예절 덕분에 잘사는 집안의 영애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용인들에게 빌린 건가?”


아즈랄의 물음에 함께 온 바탄이란 집사가 대답했다.



“예. 자식들의 옷 중 남는 것을 받았습니다.”

“음. 나중에 제대로 값을 치러주게.”

“알겠습니다.”

“······응? 왜 그런가?”


너무 빤히 쳐다봤나 보다.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게······ 조금 의외여서요.”

“아아. 이 정도는 그냥 받을 거라는 이미지를 품고 있었나?”

“실례지만, 네.”

“하긴 귀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연상이긴 하지. 실제로도 그렇고.”


오만하고 거드름 피우는 귀족이 많다며 아즈랄은 고개를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긴 다르다는 말씀이신가요?”


메이어가 조용히 물었다. 작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엔 적지만 적의가 담겨 있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잠시 메이어를 쳐다본 아즈랄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여기라고 다르지 않아. 나는 물론이고 아버님과 어머님도 귀족으로서 오만방자하시지. 기본적으로는.”


아즈랄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자자. 일단은 앉게나.”


눈치를 살피는 이클립스와 무슨 생각인지 모를 메이어는 배려에 따라 소파에 차분히 앉았다.


두 사람이 앉자 아즈랄은 이어서 말하였다.



“태생이라는 건 무시하지 못해. 못 사는 귀족 집안이라 하더라도 그래. 귀족으로서 살며 사고하지. 그렇기에 백성들을 이해하지 못해. 그대도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지?”

“······.”

“물론 백성들이 얼마나 힘든지, 한 끼의 식사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들인 노동이 얼마나 힘든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진정으로 공감했느냐 묻는다면 단언컨대 아니야. 왜냐하면 우린 지식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지.”

“그 일이······ 그 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공감할 수 있는 건 그것들을 겪은 자만이 가능하죠.”

“그래. 그리고 그런 생활을 겪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귀족으로서의 생이 끝난 거지. 복권이 가능한 귀족이 거기까지 내려갈 일 따윈 이곳 벨루디스에서는 없으니까.”


그렇기에 백성에게 진심으로 공감하는 귀족이란 없다고 하는 아즈랄.


메이어는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예외는 존재하더군.”

“예외?”

“그렇지······”


말을 끈 아즈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시선을 옮겼는데, 그 끝에 있는 건 새침한 표정으로 있는 라프리트였다.


별 반응이 없는 라프리트를 놔두고 아즈랄은 그립다는 듯 허공을 봤다.



“어느 날인가, 귀엽디귀여운 요정이 우리에게로 와 말하더군. 앞으로는 받은 만큼 베풀라고. 그때 난 이미 그러고 있다고 했지. 하지만 우리의 요정은 고개를 흔들더군. 절대 그렇지 않다며. 이후 내가 그 말을 깨닫는 건 수년이나 흐른 뒤였지.”

“오라버님······.”

“아아. 필요한 일이잖아?”


굉장히 듣기 싫은 기색을 뿜어대던 라프리트였으나 괜한 적의를 받고 싶지 않다는 말에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물러났다.


아즈랄은 작게 고맙다며 웃었다.



“이어서 말하자면······ 시간은 흘러 베르다드에 재직 중일 때로 가네. 동급생에게 물건을 빌린 적이 있었지. 뭐, 대단한 건 아니었어. 그저 [화염]이 담긴 마도구였으니까. 동급생과는 친구였기에 그도 선뜻 빌려줬어. ――아니. 나 혼자 그렇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어.”

“사실은 달랐겠죠.”


냉혹하게 말한 메이어에게 아즈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에겐―― 나에겐 [화염구]도 아닌, 1급의 [화염]이 담긴 마도구 따윈 별 대단한 가치도 없는 물건이야. 지금 생각해봐도 그래. 나에겐 값싼 마도구에 불과해. ······그렇기에 돌려준다는 걸 잊어버렸지.”

“최악이었네요, 오라버님.”

“안다. 지금은 반성하고 있단다.”


라프리트와 더불어 리아도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힐난의 눈초리들이 모이자 머쓱했는지 아즈랄은 주먹을 입가로 가져가 헛기침하였다.



“흠흠. 여하튼 어느 날인가 그 동급생이 찾아왔다. 몹시도 긴장했다는 게 한눈에 보였었지. 무슨 일인가 싶었어. 항상 쾌활한 그가 그러는 건 처음이었거든. 그런 나에게 동급생이 말하더군. 마도구를 돌려달라고. 그때가 되어서야 부랴부랴 책상 위에 올려둔 마도구를 돌려줬지.”

“그걸로 끝은 아니죠?”

“어떻게 알았는가, 리아 공?”

“여태 찾으려 하지 않았던 걸 받으러 온 거니까요. 필시 급한 연유가 있었을 테죠.”

“과연. 정확하다네······. 그는 할머니의 치료비가 필요했었던 거야. 빌려준 마도구를 팔아 금전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지. 하지만 그때도 난 이해하지 못했지. 왜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건지, 왜 그리도 고마워하는 건지. 그냥 본인의 물건을 가져간 것뿐이지 않나?”


당시를 떠올린 건지 아즈랄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감정을 정리하려던 것인지 묵묵히 있었다.



“내가 그의 본심을 깨달은 건 며칠 후였다네. 그 동급생이 다시 찾아왔었지. 그리고 원망의 말을 들었다네. 나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이지.”


무겁게 입을 연 아즈랄에게선 후회의 감정이 몰아쳤다.



“번듯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는 그리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던 게야. 당연히 마도구는 무척이나 비싼 물건이었어. 그에게는······. 사실 빌려주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고 하더군. 하지만 후작 가의 자제인 나에게 거역하기란 두려웠고 싫으면서도 건네준 거야.”

“돌려받기도 힘들었을 테고요?”

“그렇네, 리아 공. 평민이었던 그에게는 일생의 용기를 쥐어 짜낸 것이겠지. 그래. 실은 친구라 생각하고 있던 건 나 혼자만이었어. 하지만 난 일단 슬퍼하는 그에게 사과하며 위로해주었지. 그러나 속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네. 어째서 고작 ‘원금화 몇 닢’밖에 안 되는 마도구를 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탓이 되는지를······”

“고작이라뇨! 그 돈이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발끈하여 소리친 메이어의 말에 아즈랄은 동의했다.



“물론 그 돈이면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네. 여러 약을 사거나 의사를 알아볼 수도 있다는 것쯤은. 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어. 돈이 부족하다면 일을 해서 벌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 공부와 병행하는 건 분명 힘들겠지만, 가족도 있으니 어찌 될 수 있잖은가.”

“그게 얼마나 힘든데요! 안 그래도 넉넉하지 않은 집안이라면서!”

“그래. 나는 그 부분을 공감하지 못하겠다네. 그런 환경에 처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상상만 할 수 있지, 실제로 얼마나 힘든지는 조금도 와 닿지 않는군.”

“······.”


꽤 공감이 갔는지 메이어는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뻐금거리기만 했다.



“지금도 그렇다네. 대충 힘들겠거니 싶은 게 전부지. 이날의 일로 난 그걸 깨달았어.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뭐, 본인이 하는 일이 제일 힘든 일이라는 소리도 있지 않나? 그거랑 비슷한 것이지. 그래서 난 이후로 내가 가치를 내려치기 한 건 아닌가, 주의하며 우리 요정이 말한 대로 최대한 받은 만큼 돌려주려 한다네.”

“왜요?”

“미움받는 게 싫어서라네. 난 겁쟁이라서 말이야.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는 게 무섭더군. ――이걸로 대답이 됐는가?”


입꼬리를 올린 아즈랄. 그는 진작 알고 있었다. 메이어가 자신을 시험해 본 것이라고.


‘과연. 얕볼 수 없는 자로군.’


리벨리타스 가의 앞날은 탄탄해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눈을 감았던 메이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게 머리를 숙였다.


아까의 격양된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잔잔한 물에 뜬 연꽃과 같이 평온하였다.



“말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거듭된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리벨리타스 님.”

“아즈랄이면 됐네. 이곳에서 리벨리타스는 많지 않은가? 부모님도 그렇고, 라프리트도. 그보다는······”


아즈랄은 슬쩍 눈짓했다. 거기에는 분위기에 압도된 어리둥절한 이클립스가 있었다.


한순간에 미소를 지은 메이어는 부드럽게 동생을 안아줬다.



“미안. 놀랐지?”

“으응. 뭔 일이 있는 거야?”

“아니. 그냥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제 다 끝났어.”

“그렇구나······”


그냥 봐서는 사이좋은 남매로만 보이는 둘이다. 서로 무척 아끼는 모습만 보더라도 그렇다.


하지만 아니다. 둘은 친남매가 아니었다. 한눈에 보자마자 알았다.


어떻게?


그야 보이지 않은가? 혼이라든지 마력이라든지. 하물며 세포의 분자구조――DNA마저 마음만 먹으면 보이는 판국에 헷갈릴 일은 없다. 모든 정황이 둘은 피와 영혼을 나눈 남매가 아니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외형부터도 이클립스는 남색의 머리카락인 반면, 메이어는 연한 갈색빛이기도 하다. 물론 머리카락이 다른 친족들이야 수두룩하다만은······.


‘그나저나 나 어째 점점 인간에서 벗어나는 기분인데? 맨눈으로 분자구조도 보이고. 아니, 혼이 보인다는 시점부터 좀 그런가? 그렇지만 무당 같은 사람들도 보긴 하잖아?’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이 문제에 대해 고찰하고 싶으나 상황이 여의찮다. 개인적으로도 살짝 내키지 않기도 하고. 누가 본인이 인간에서 멀어지는 걸 반기겠는가.


기꺼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 리아는 본제로 돌아와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저택은 언제 안내해주시는 건가요? 모처럼 놀러 온 건데 딱딱한 얘기만 하고 있기는 좀 그렇잖아요?”


리아는 동의하냐는 듯 모두를 둘러봤다.


무거운 분위기를 버티기란 제법 힘든 법이다. 아즈랄이 제일 먼저 어깨를 주무르며 편승했다.



“확실히. 사담은 이쯤 하기로 하지. 나도 알아볼 건 다 알아봤으니. 라프리트, 너는?”

“저도요. 그나저나 오라버님은 언제까지 여기 계시는 거예요? 영지엔 안 돌아가시나요?”

“어머님처럼 노는 데엔 끼지 않을 테니 너무 그러지 말거라.”

“무슨 당연한 소릴 하시는 건가요?”


티격태격하는 둘을 뒤로하고 리아는 메이어를 봤다.



“메이어 씨도. 하실 말씀은 돌아다니면서 듣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탐험하는 거야?!”


메이어는 눈을 빛내는 이클립스의 머리를 쓸어줬다.



“그렇게 기대되니?”

“응! 여기엔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아서 공부가 돼. 수준도 높고.”

“호. 보는 눈이 좋군. 라프리트? 손님이 이리 말씀하시는데 얼른 안내해주는 게 어때?”

“누구 때문인데요?!”

“자아, 자아. 진정하세요, 라프리트 씨.”


라프리트를 말리자 아즈랄은 찡긋 윙크를 하고는 재빨리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이 분했던 라프리트는 작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어깨에서 힘을 뺐다.



“사랑받고 계시네요.”

“다들 너무 유난이지만요.”


라프리트 골이 아픈 듯 머리를 짚었다.


사실 메이어가 시험해봤듯 아즈랄도 시험해본 것이다. 여동생의 친구라는 사람과 같이 온 메이어들을······.


결과는 합격이었다. 동생을 남겨두고 떠났으니 말이다. 만약 불합격이었다면 아마 그는 온갖 이유를 붙여가며 따라다녔을 것이다. 이쪽이 돌아갈 때까지. 말한 것과는 달리······.


뭐, 어쨌거나 합격은 합격이다. 다들 환영해주는 분위기이니 눈치 볼 거 없이 이번 주말을 마음껏 즐기자.


그런 생각을 하며 리아는 즐거운 기분으로 라프리트를 달래었다.


잠시 후 평소대로 침착한 라프리트로 돌아오고, 그녀의 선도를 따라 방을 나갔다.


수도에 있는 별장이라는 라프리트의 말과는 달리 안의 세간들은 훌륭하였다. 얼마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 번쩍이는 항아리와 그림들로 꾸며진 복도는 흡사 만화를 뚫고 나온 듯했고, 그 중앙에 깔린 레드카펫은 사르르 몸을 바쳐주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중간중간 설치된 마도구도 훌륭하였다. 적어도 학원에서 볼 수준은 됐다.


하지만 집 전체에 설치된 결계에 비하면 매우 허접하다. 아이가 그린 그림과 프로 예술가가 그린 그림만치의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저 결계들을 살펴보고 싶다. 자꾸 구미가 당긴다. 그러나 기밀일지도 모르고, 혼자 무작정 억지를 부릴 수도 없었기에 속으로 삭였다.


아쉽지만 괜찮았다. 옆에서 우와 소리와 함께 눈을 빛내는 이클립스를 보노라면.


다방면에 재능이 넘치는지 이클립스는 걷는 내내 온갖 사물을 세세히 관찰했었는데, 하물며 계단의 손잡이나 문고리마저 뚫어져라 보는 통에 탐험의 속도는 무척이나 떨어지게 됐다.


현재는 수많은 군중을 향해 깃발을 들고 함성을 지르는―― 예상하기로 건국왕과 함께 당시 리벨리타스, 마르티즈, 파라디우스의 당주들이 벨루디스를 건국할 때를 그린 듯한 커다란 그림이 걸린 중앙 복도에 서 있었다.


대략 10m는 되어 보이는 장엄한 그림에 흠뻑 빠진 것인지 이클립스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닦달할 마음 따윈 처음부터 없었지만 너무나 진지한 빛을 띠고 있는 눈을 보니 차마 말을 붙이지 못하겠다.


라프리트나 메이어도 마찬가지여서 만장일치로 기다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서 있기는 그러니 이 틈에 메이어 씨의 이야기를 듣죠.”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착실한 이클립스다. 만질 생각도 없이 뚫어져라 보기만 하는 모습을 보고는 안심했는지 메이어는 알겠다고 하였다.



“자. 그럼 앉을까요?”


말을 함과 동시에 리아는 계단에 앉았다.



“자, 잠시만요, 리아 양. 의자를······”

“에이. 얼마나 앉는다고요. ······메이어 씨도. 치료는 됐지만 딱히 체력이 붙은 건 아니잖아요? 힘드실 테니 앉아요. 모처럼이니 나란히 앉아서 떠들어봐요.”

“······알겠습니다.”


열심히 표정 관리를 했으나 메이어의 몸상태는 치료를 한 이쪽이 더 잘 안다. 그녀는 금세 수긍하고는 옆에 앉았다.


한마디 더 하려 했던 라프리트도 이내 포기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 바탄이 뭔가 굉장히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눈빛이었으나, 상당히 찔렸던 리아는 못 본 척하였다. 참고로 라프리트와 오랜 시간 붙어 다녔던 탓인지 안네는 또 저지르는구나 싶은 눈이었다.


그렇게 모두 앉고 메이어가 본인의 배경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클립스에게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지 목소리를 낮췄다.



“여러분들 모두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한때 귀족 사회에 몸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작위는 남작에 불과했지만요.”


그리 서두를 땐 메이어의 이야기는 무탈하게 흘러갔다. 단란한 가정은 무척이나 화목하여 몇 명 없는 사용인들과도 가족처럼 지내는 등, 풍족하진 않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아갔다고 했다.



“그러던 때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제가 7살일 무렵에 집에 괴한이 들이닥쳤습니다. 밤에 침입한 그 괴한은 보이는 족족 사람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죠. 운이 좋았는지 당시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괴한은요?”


묻는 말에 메이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야습이었던데다 전원 다쳤던 터라 붙잡을 여력이 없었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아쉬워했지만 일단 살아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죠. 하지만······ 불행은 그때부터였습니다.”

“불행이요?”

“예. 모두가 쇠약해지기 시작한 겁니다.”


다쳐서 그런 건가 싶었다만······ 그게 아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메이어가 눈으로 생각하는 바가 맞음을 알려줬다.



“처음에는 다들 기분 탓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치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상처가 낫고 난 다음에도 변하지 않았고―― 아뇨. 오히려 더더욱 상태는 나빠져만 갔습니다. 그때 가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겠군요.”

“예. 아시다시피······. 치유사와 의사들은 쇠약해진 원인조차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렁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상한 의식을 하는 자들마저 불러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죠. 그렇게 손쓸 방도도 없이 하나둘 숨이 다하기 시작했고, 저만이 그나마 생을 연명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근데 어쩌다가 빈민가에······”


조심스럽게 묻자 메이어가 쓴웃음을 지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시점에서 가세는 진즉에 기울었으니까요. 돌아가신 사용인 분들의 가족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고 나니 정말 남는 게 없더라고요. 그렇게 집도 팔고 어찌 흘러가다 보니 빈민가에 도달하게 됐죠. 그리고 그런 상황까지 가서야 알게 됐습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먹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몸소 체험했죠.”

“뭐······ 본디 고등 교육이란 시일이 걸리는 것이니깐요. 거기다 몸 상태도 나빴고······.”


리아는 힐끔 눈치를 보며 물었다.



“발은 어쩌다가 다치신 거예요?”


메이어는 다 나은 왼쪽 발목을 쓰다듬었다.



“빈혈 때문입니다. 영양 상태가 나빠서였는지,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한순간 띵하더군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길 한복판에 쓰러져있었죠. 그리고 그때 맞은편에서 마차가 오는 게 보였습니다.”

“설마?”

“······가까스로 피하긴 했는데 발목이 깔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를 떠올렸는지 메이어는 크게 숨을 토해냈다.


딱히 할 말은 없다. 라프리트도 굳은 표정으로 별말 없이 경청하였다.



“솔직히 그땐 많이 좌절했습니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치료할 돈이 없어 정말 막막했었습니다. 참다못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는 거냐고. 도대체 무얼 잘못했냐며 신께 묻곤 했었죠. 그러한 나날을 보내던 때에 이클립스를 만나게 됐습니다.”


메이어는 시선을 옮겨 아직 열중하고 있는 이클립스를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작게 미소가 그려져 있었는데, 얼마나 이클립스를 아끼는지 잘 느껴졌다. 그리고 그리움이 담긴 목소리로 이어 말하였다.


이야기는 제법 쌀쌀해진 가을 녘 때로, 메이어는 그날도 굽은 발을 질질 끌며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떤 소리가 들려왔는데,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귀를 기울여보니 분명 아기의 울음소리였고, 저는 홀린 듯이 그곳으로 갔습니다. 도착한 곳은 쓰레기 처리장으로, 다 떨어진 자루 안에 생후 1개월이 갓 지났을 듯한 아기가 들어있더군요.”

“그 아기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아기를 안고 은신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클립스란 이름까지 붙이고는······”

“후후. 서로에게 좋은 만남이었군요.”


눈을 크게 떴던 메이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드래곤 슬레이어는 달라도 뭔가가 다르네요. 어리신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눈치가 빠르십니다.”

“어리다뇨? 저 이래 봬도 16살! 성인이라구요!”

“네?”


리아는 가슴을 폈다.



“성인이요!”

“아, 네······. 근데······ 실례지만, 저, 정말로······?”

“물론이죠!”


리아의 대답만으로는 미덥지 못했는지 메이어는 눈으로 라프리트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달라질 일은 없다. 그렇다며, 베르다드에 같이 다니는 동급생이라며 라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꽤 충격적인 이야기였나, 메이어는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였다.


뭐······ 약간 기분이 오묘했지만, 그걸로 괜찮았다. 이다음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되니.


너무 뻔한 이야기다.


사실 당시의 메이어는 한계였을 것이다. 가뜩이나 부모도 없이 어린아이 혼자서 사는 것도 힘든데, 저런 시련까지 몰려오면 버틸 재간이 없다.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러던 때에 만나게 된 이클립스.


본인 스스로 살기 위한 명분을 붙이려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메이어 자신도 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메이어는 아기를 키우기 위해 안 좋은 생각을 떨쳐내고 최선을 다했다. 그야말로 몸이 쓰러지기 전까지. 순수하게 웃는 이클립스의 미소가 이를 일목요연하게 표현했다.


다리가 굽었다며 손가락질하는 것쯤이야 웃으며 넘겼으리라······. 분명.


라프리트도 같은 생각에 도달하고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넘겼다.



“아프셨다고 하셨는데, 혹시 파상풍 같은 병이었나요?”

“아뇨······. 병은······ 아닐 겁니다. 아마도. 오히려 그에 대해선 저보단······”


메이어는 공손히 옆을 가리켰다.



“이스피리아 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제 가족을 모두 앗아간 그 병을 치료해주신 유일한 분이시니······”

“리아 양이?”

“어, 네······. 어쩌다 보니. 하하.”

“하긴 리아 양이라면······.”


쑥스럽다는 듯이 웃는 리아를 보며 라프리트는 바로 수긍했다.



“그런데 당최 무슨 병이었나요?”


가볍게 묻는 말에 리아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는 생각했다.



“그쪽 방면은 공부하지 않았는지라 정확한 병명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꽤 특이했어요. 아니, 정확히는 그걸 병이라고 분류시키는 게 맞나 싶어요.”

“어째서요?”

“그야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아프게 만든 거니까요.”

“응? 저주 같은 건가요?”

“아뇨. 어음······ 뭐라고 해야 하나? 저주는 아니고 괴롭힘이라고 하면 될까······. 네. 괴롭힘이에요. 아주 악질적인 괴롭힘이요.”

“뭘 어떻게 했길래······”


보다 쉬운 설명을 위해 리아는 자신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는 서로 반대쪽으로 당겼다.



“제가 가려는 길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면 당연히 멈추겠죠? 이거랑 같아요. 몸 안에서 이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죄송한데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어. 우리 몸이요. 사실 우리들의 몸에선 마력들이 천천히 순환해요. 주로 심장과 머리를 부근으로 돌지만, 일부분은 사지를 타고 손과 발끝까지 가요. 이것들은 가만히 있어도 벌어지는 행위죠.”

“즉 살아있는 존재라면 반드시 하는 생명 활동이란 말씀이시죠?”

“오. 맞아요. 역시 라프리트 씨에요.”

“아뇨. 그리 대단한 건······. 저도 단순히 관련 논문을 본 적이 있기에. 하지만 머리와 심장이라······ 분명 흐름에 대한 건 아직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았죠?”

“엣?! 그래요?”

“아!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리아 양. 그보다 그 생명 활동이 어떻다는 거죠? 방해를 받았다는 소리인가요?”

“맞아요. 마력이 순환하지 못하도록 붙들어 맸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심도 높은 마법사라면 마력의 제어권을 뺏어올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이들도 몸속에 있는 마력을 제어하기란 불가능할 텐데······”


아니. 이 부분은 라프리트가 잘못 알고 있다. 아무리 몸 속이라 한들 딱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상대방보다 압도적으로 마력 조작을 잘한다면 강제로 제어권을 뺏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전 마력의 폭주 때 에르가 곧장 마력의 제어권을 뺏으려 했었다.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에르가 그리 행동할 리가 있겠는가.


물론 여간 압도적으로는 안 된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수준의 차이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래서 에르도 제어권을 가져가는 데 실패했던 거고.


이러나저러나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지금과는 그리 상관없는 이야기인지라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방법―― 좀 더 현실적이고 이번 사건과 관련된 방법을 입에 담았다.



“붙드는 방법은 많아요. 굳이 제어권을 뺏지 않더라도 말이죠.”


잠시 고민하던 라프리트의 눈이 커졌다.



“설마······?”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력엔 마력. 자신의 마력을 주입하여 흐름을 방해하는 거죠.”


말이 끝나자마자 라프리트는 동그랗게 뜬 눈을 안네에게로 향했다. 안네 또한 놀란 눈으로 자신의 주인인 라프리트와 리아를 번갈아봤다.


그리고 라프리트는 리아의 어깨를 덥썩 잡았다.



“리아 양! 안네를······ 안네를 치료해주세요!”


부디 하며 간곡히 부탁하는 라프리트의 외침은 처절하였다. 어깨를 잡은 손도 힘이 잔뜩 들어가서는 덜덜 떨고 있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다들 설 명절 잘 보내셨나요? 맛있는 음식은 많이 드셨고요?

저는 뭐, 많이 먹었습니다. 조금 걱정 될 정도로...

하핫... 당분간 다이어트를 해야 할지도. 따듯해지면 좀 본격적으로 해야할 듯 싶습니다!

여하튼 다시 뵐 수 있어서 기쁘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만렙 히로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15 183 23.02.17 93 0 40쪽
214 182 +1 23.02.11 87 0 42쪽
213 181 +1 23.02.03 98 0 45쪽
» 180 23.01.28 90 0 38쪽
211 179 23.01.20 99 0 42쪽
210 178 23.01.12 96 0 39쪽
209 177 23.01.05 117 0 40쪽
208 176 +1 22.12.27 123 0 45쪽
207 175 22.12.20 107 0 50쪽
206 174 22.11.18 130 0 37쪽
205 173 22.11.09 143 0 38쪽
204 172 22.11.01 119 0 30쪽
203 171-2 22.11.01 103 0 19쪽
202 171 22.10.24 144 0 34쪽
201 170-2 22.10.18 108 0 15쪽
200 170 22.10.13 139 0 39쪽
199 169 22.10.07 144 0 53쪽
198 168 22.09.07 215 0 30쪽
197 167 22.08.31 157 0 44쪽
196 166 22.08.24 125 0 41쪽
195 165 22.08.18 109 0 45쪽
194 164-2 22.08.11 121 0 25쪽
193 164 22.08.11 108 0 20쪽
192 163 22.08.06 114 0 30쪽
191 162 22.08.06 107 0 19쪽
190 161 22.08.01 107 0 35쪽
189 160-2 22.07.29 110 0 18쪽
188 160 22.07.27 127 0 23쪽
187 159 22.07.25 97 0 21쪽
186 158 22.07.22 129 0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