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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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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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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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DUMMY

학원장실에 갔었던 리아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양피지를 펼쳤다.


양피지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상급의 물건으로, 거기에는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법 조항부터 갑과 을에 관한 조항이 어려운 말들로 줄줄이 적혀있었다.


그렇다. 펼친 양피지는 계약서다.


얼마 전 이클립스에게 써준 장난 같은 계약서 같은 게 아니다. 벨루디스에서 정한 양식에 따른 진짜 정식 계약서였다. 빼곡히 적혀진 문구에서도 그렇지만 양피지 자체의 크기도 상당했다. 가로, 세로 1m쯤은 넘을 듯하였다.


딱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계약서다.


누구라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물리적인 복제 방지와――지폐처럼―― 부폐 방지를 위한 처리가 되어 있었다. 후처리로 마법의 이중 보완도 해놨다.


술식도 마찬가지였다. 굉장히 섬세한 작업이 됐다는 게 눈에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계약 내용을 멋대로 바꿔 쓸 수 없게 하는 부정 방지의 마법이었다. 만약 계약 내용을 위조하려고 하면 그 순간 양피지는 불타올라 계약이 무효가 되어버린다.


원리는 술식을 과부하 시켜 마법 양피지가 수명이 다한 것처럼 만드는 것인데······



“최신식 기술이 들어갔네. 마광석 없이 무려 술식으로만 상시 유지된다니. 호오, 호오······ 이 부분이 마력량을 제어하는 거고, 이 부분이 마력을 저장하는 부분인가? 여긴 트리거고.”


술식은 기본적으로 마광석 가루로 그린다. 그래야 마력이 흐르기 때문이다. 다른 대체제는 없다고 한다. 있다고 해도 이만한 효율은 나지 않는다는 게 상식으로 자리잡혀있다.


물론 마광석 가루도 완벽하지만은 않았다. 가루가 된 마광석은 본래의 기능인 마력의 저장이 극도로 저하되는데, 이 탓에 마력을 주입하면 버티지 못하고 불타오른다.


하지만 이 술식은 그 점을 보완했다. 일정 수준의―― 술식을 그린 마광석이 불타지 않을 정도의 마력만을 흐르게 한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달팽이의 등껍질처럼 무척이나 길게 그려진 술식으로, 표면적을 늘려 최대한 많은 마력을 담을 수 있게 하였다.


양피지의 넓은 면적을 정말 제대로 잘 활용했다.


이리하여 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마력을 얻었고, 반영구적으로 마법이 발동되게 해놓았다.


실로 굉장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러 길게 길게 늘인 술식을 통해 마력을 확보하다니. 술식을 여기까지 고친 것도 그렇지만 그 독창적인 생각이 실로 굉장하다.



“이게 쌓고 쌓이는 학문의 힘인가. 진짜 대단하네······. 하지만 이 술식은 마광석 가루의 질이 좋은 걸 써야 했겠는걸? 못 해도 상급이려나? 분명 효율이 높지 않아서 그만한 품질의 마광석은 가루로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학원에서 실습 때 받은 물건 정도라면 진작에 불타고 남을 양의 마력을 품고 있다. 틀림없이 비싼 마광석이 사용됐으리라.


계약서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아마 이 술식과 양피지만으로도 상당한 값어치를 하겠지.



“달리 말하면 이 계약서가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라는 소리이겠지만······.”


흥미롭게 살피던 리아는 시야를 내려 양피지의 끝자락을 봤다. 거기에는 리아의 서명이 있었다.


흡사 나이 지긋한 학자의 글씨체인 양 고풍스럽게 쓴 이 서명에선 특이하게도 아주아주 연하게 풀린 리아의 마력이 담겨 있었다.


이는 마력을 담을 수 있는 특수한 잉크 때문으로, 본인을 인증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아무 때나 쓰는 건 아닌지라 나라 차원에서 아주 중요한 계약에만 사용된다고 한다. 잉크 자체도 계약서를 들고 온 왕성의 관리인이 가져왔고, 도난을 염려하여 호위도 3명이나 따라왔었다.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방울 흘린 건 없는지 철저히 검역한 다음에야 돌아갔다. 그래서 원료가 궁금하였지만 뭐가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마광석 가루가 들어간 건 확실하고, 나머지도 분자 구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역시 배합이겠지. ······응? 흡사 항공유랑 비슷하지 않나? 전투기에 들어가는 기름의 구성 성분을 숨기기 위해 철저히 관리한다던가 그랬던 거 같은데······”


잠시 생각하던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보다는 이거······ 내 마력이 노골적으로 느껴지는데 괜찮으려나? 괜한 소란은 사양인데. ······으음. 모르겠다. 귀걸이에 넣어놓으면 괜찮겠지 뭐.”


간단하게 결론을 낸 리아는 양피지를 접어 귀걸이에 넣었다.


계약 내용에 대해서는 큰 이상이 없다.


그저 상인 조합을 차려도 된다는 승인서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혹시 몰라 자세한 내용은 에르와 리카드, 아이까지도 확인해줬다. 불공정한 약정 같은 건 없는 듯했다.



“그러니까 사인한 거지만. ······근데 생각보다 빠르게 허가가 났어. 시대 배경 상 이런 일 처리는 늦을 거 같았는데. 최고 국빈이라 좀 서둘러 준 건가?”


왕성과의 연결 고리는 달리 없다. 그래서 리카드에게 상담했는데, 그는 맡겨 달라며 무척이나 의욕을 보였었다. 참고로 이때 리카드는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이 크게 감명받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왜 그런 반응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어봐도 웃기만 할 뿐이고.


그게 5일 전이다.


주말이 돌아오기도 전에 부르길래 갔더니 왕성의 관리가 와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못해도 한 달은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터라 더욱.


덕분에 조금 일정이 앞당겨졌다.


리아는 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금방 끝날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흐름을 끊는 소리가 울렸다.


딱히 약속은 없었다.


의아하게 에르를 쳐다보니 그도 아는 바가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더더욱 의아해진 리아는 곧장 마력을 감지해보았다.



“으응?!”


놀라고 있자니 에르가 연 문을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름에 따라 방문하게 됐습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매우 정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퍼스트였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퍼스트를 부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최 누구의 부름을 받고 왔다는 말인가.



『알림. 아이가 연락을 취함.』

‘엥? 어, 언제······? 전혀 못 느꼈는데······.’

『······.』

‘아. 마, 말하기 싫니? 그, 그럼······ 왜 불렀는지는 물어도 될까?’

『답. 개체명―― 퍼스트가 필요로 하기에 부름.』

‘으음······ 혹시 번거롭지 않게 일면식을 가지기 위한 거니?’

『······긍정.』

‘아하. 그렇구나. 신경 써 줘서 고마워.’

『······.』


과연 아이리스 다음가는 마음씨를 지닌 아이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이리 알아서 일을 처리해준다니. 그야말로 감동이다.


‘그건 그런데······ 좀 많지 않아?’


느낀 마력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지금도 열린 문밖으로 여러 기척이 느껴진다.



『부정. 아이가 부른 건 개체명―― 퍼스트뿐임.』

‘어? 그러면 누가 다 데려온 거야?’


이건 아이도 잘 모르겠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뭐어······ 직접 물어보면 될 거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니 명랑한 여자아이 목소리부터 꽤 의외의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그들은 우르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이 넓었음에도 상당한 인원이 들어차니 제법 좁게 느껴진다.



“안녕하세요, 리아 님!”


인파를 뚫고 나온 여자아이가 아까도 들은 명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왔다. 그런 여자아이의 뒤를 허겁지겁 무장을 한 여자가 따라왔다.


리아는 가슴께에 두 손을 모으고는 방긋방긋, 활짝 웃는 여자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어서 오세요, 로즈 씨.”

“헤헤―― 아, 아니지. 흠흠. 갑작스럽게 찾아와 실례했습니다.”


뒤늦게 황손으로서 제대로 인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로즈린느가 조심스럽게 드레스 자락을 뒤로 넘기며 묵례하였다.


정식으로 예를 취하는 것이다. 가볍게 넘기는 짓은 할 수 없으니 리아도 마주 예를 취했다.



“근데······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리아는 바글바글한 손님들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최근 로즈는 제국에 다녀온 뒤로 매일 찾아오긴 했다. 그렇지만 이리 많은 인원과―― 하물며 타국의 인물들과 섞여 올 리는 없을 터였다. 이래 보여도 로즈는 명색이 제1 황손이니 말이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굳이 동석하진 않으리라. 실제로 호위인 유즈라는 몹시 신중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는지도 모르고 로즈는 순진무구하게 말하였다.



“작은 아버님께서 만나 뵈러 가자 해서 왔어요!”

“어······ 황자 전하께서요?”

“네!”


그건 그렇다 치자. 베르그와 로즈는 같은 국빈관에서 지낸다고 하니.


그렇지만······



“레스 씨랑 헤라드 씨는요?”

“오다가 만났어요!”

“오다가요······.”

“아아.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여러모로 답답했던지 찾아온 손님 중 한 명이 끼어들었다.


언뜻 청량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매우 온화한 듯하였다. 하지만 리아는 느꼈다. 안쪽 깊은 곳에 담긴 짜증을.


잘못한 것도 없지만 리아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온 그녀를 보았다.



“저기, 루비아 씨?”

“조금만 기다려보시어요, 리아.”

“어, 네.”


리아가 알겠다고 하자 루비아는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같이 찾아온 손님들을 쭉 둘러보며 말하였다.



“어차피 전원 같은 연유로 찾아왔겠죠. 그러니 서로 괜한 탐색은 그만두고 진위를 밝히도록 하겠어요. 이의 있으신 분은 죄송하지만 잠시 밖에서 기다려주시길. 걱정하시지 않아도 금방 용건을 끝내도록 하죠.”


당돌한 루비아의 말에 모두는 침묵했다.



“아무도 이의가 없으신바, 모두 동의하셨다고 봐도 되겠는지요?”


이번에도 전원 알겠다는 의미의 침묵을 하였고, 루비아는 다시금 몸을 돌리고는 다가왔다.



“간단하게 설명하겠어요, 리아. 이곳에서 찾아온 전원, 당신이 오토마타라 부르는 골렘을 제작하는 걸 보기 위해 왔어요.”

“엇?! 어, 어떻게 만들 거라는 걸 아셨어요?!”


어쩐지 루비아는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프로 연기자 뺨치는 그녀답게 가면을 깨뜨리지 않고 유유자적한 태도로 검지를 펼쳐 보였다.



“상인 조합 설립의 허가가 떨어졌다는 걸 들었다면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어요. 리아가 관리자를 구할 거라는 걸. 당연해요. 학생 신분인 리아가 조합의 관리 같은 걸 할 여유는 없을 테니까.”


거기에 더해 멀쩡히 운영할 자신이 조금도 없다는 게 추가된다. 루비아의 추론은 정확했다.



“하지만 어떻게 오토마타를 만들 거라는 걸 아신 거예요?”

“기본적으로 골렘은 주인을 거스르지 않아요. 다른 말로 하면 배신할 염려가 없는 완전무결한 종복이어요. 부정이 일어나기 쉬운 구조인 상인 조합을 맡기기엔 그만큼 안성맞춤도 없겠죠. 뭐······ 골렘은 그 정도로 높은 지적 사고를 못하는지라, 보통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방법이긴 하지만요.”


그리 말한 루비아는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 시선의 끝엔 훤칠한 기사가 있었는데, 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곧장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리아의 앞으로, 기사는 투기술로 잽싸게 사람들 위를 건너 뛰어온 것이었다. 물론 워낙 빨랐던지라 목격할 수 있었던 자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난 것처럼 느꼈을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놀라는 사람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기사는 무심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깊게 머리를 숙였다.



“인사가 늦어 실례했습니다, 시전자―― 이스피리아.”

“아니. 괜찮아. 너무 예를 차리지 않아도 돼. 굳이 시전자를 앞에 붙이지 않아도 되고.”

“알겠습니다, 나의 신이시여.”

“아, 아니! 그거야말로 진짜 아니니까 그만둬줘! 그냥 평범하게. 응? 평범하게 이스피리아 라고 불러주라.”


리아는 속으로 땀이 줄줄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는 신이 실존하고 명확하다. 숫자마저 딱딱 정해져 있다. 직접 만나기까지 해봤으니 부정하고 말 것도 없다.


그러한 세상에서 신으로 불린다는 건 어찌 보면 신성모독. 그다지 신앙심이 없는 사람마저 눈총을 주고, 심하면 종교 재판으로 넘겨지기까지 한단다.


이 방에 찾아온 손님들이 제아무리 관대한 사람들뿐일지라도 이건 아무래도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다. 깜짝 놀라 극구 만류하는 것도 당연하다.


리아는 몰래 눈알을 돌렸다.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이 있나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언짢아하는 기색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되려 알 수 없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로즈는 두 손을 모으고는 기도마저 드리는 형국이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런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곁눈질로 살핀 퍼스트는 살짝 머리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실례했습니다. 앞으로는 감히 이스피리아 님이라 부르도록 하겠나이다.”

“응. 응. 융통성 있게. 아직 기억하고 있지?”

“물론입니다. 이스피리아 님과의 대화는 사소한 것 하나 절대 잊지 않게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내심 말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강하게 나갈 수는 없었다. 본인이 그러겠다는데 어찌 말리겠는가. 안 그래도 뒤처리를 맡기는 느낌인지라 명령이 될 수 있는 짓은 되도록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받아들이기로 하고 리아는 루비아를 보았다.



“골렘 제작 과정을 보고 싶으신 이유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인가요?”

“비슷해요. 솔직히 말해, 리아의 골렘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방문하겠다는 말도 없이 찾아온 게 아니겠나요? 각자 속한 나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리아는 찾아온 손님들을 둘러봤다.


루비아의 말대로 방에는 세 나라와 세인트리안의 사람까지 모두 모여들었다.


벨루디스 쪽의 사람으로는 라프리트, 그리고 의외의 인물인 레오노반이. 루 몬테르 쪽은 루비아가. 제국 쪽은 레스와 헤라드, 로즈와 베르그가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세인트리안은 인도의 주교, 인디아를 필두로 케트로, 운, 리블리지의 세 심판관이 모두 따라왔다.


‘퍼스트가 그렇게 특이하나? 물론 내가 봐도 굉장하긴 하다만······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네.’


지대한 관심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딱히 못 보여줄 건 아니다. 애초에 퍼스트는 많은 학생들 앞에서 제작한 것이기도 하고.


루비아가 제작법을 남기지 말라고 당부하긴 했지만 그건 문제없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끝날 테니까.


술식이 뭔지, 무슨 마법을 쓴 것인지, 알아내려면 한번 알아내 봐라.


마법에 대해서는 제법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던 리아는 망설임 없이 사람을 물렸다.


퍼스트의 주도 아래 다들 일정 거리 멀어지고, 리아는 바로 손가락을 튕겼다.


이것으로 끝. 마법은 모두 발동됐다. 베껴갈 시간 따윈 있지도 않거니와, 애당초 겉으로 술식을 드러내는 미숙한 짓 따윈 하지 않는다. 마력도 하나 새지 않기에 처음부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리아는 만족스럽게 한순간에 만들어진 신체를 봤다.


이번에 만든 건 여성형으로, 외관은 세스의 하렘 중 한 사람을 따왔다. 사자의 귀와 꼬리는 당연히 뺐다. 퍼스트와 마찬가지로 머리와 눈 색도 살짝 다르게 하였다.


얼굴도 조금씩은 달라, 눈매는 좀 더 둥글게 하고 턱선도 매끄럽고 쫙 빠지게 조절했다. 취향에 맞게.


옷은 캐주얼한 마법사 복장으로 만들었다.


물결치는 옷감의 결이 인상적인 어두운 남색의 헐렁한 반바지, 그리고 그 밑으로 검은 타이즈가 살짝 내려와 매끈하고 가느다란 각선미가 부각됐다.


상의는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게 펑퍼짐하였다. 약간 헐렁해 보이지만 결코 큰 건 아니다. 보기와 달리 큰 가슴을 숨기는 용도나 귀여움을 강조하기 위함 등등 다 이유가 있었다. 물론 헤퍼 보이지 않게 하의와는 달리 긴 팔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기장이 짧은 단로브를 둘렀다. 디자인은 대충 별자리 같은 게 그려진―― 어딘가 만화에서 본 것을 참조했다. 머리에는 끝이 동그랗게 말린, 챙이 넓은 마녀 모자가 씌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모은 손에는 불에 그을린 듯한 흔적이 있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당연히 마법 지팡이로, 첨단이 달팽이처럼 말린―― 왠지 때리는 용도로선 굉장히 훌륭할 듯한 조형미를 뽐냈다.


전체적으로 이번 컨셉인 ‘귀엽고도 덜렁한, 그렇지만 의외의 순간에서는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그런 매력을 지닌 히로인과 딱 맞아떨어졌다. 신장도 훤칠한 세이라보다 좀 작게 하였기에 이상한 부분 없이 잘 어울렸다.――물론 비율이 맞게 머리라든가, 다른 신체 부위도 적적히 조절했다.――


이 정도라면 딱히 문제는 없는 듯하다.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했다.


‘이것보다 마법 소녀에 더 어울리는 주인공은 없어!!’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안경까지 씌어주고 싶다. 그렇지만 전생에 노안으로 안경을 껴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안경에 대한 낭만은 여전하지만, 본인이 쓸 것도 아닌데 남에게 강요할 순 없다.


아쉽지만 안경은 참도록 하자.


확인을 마친 리아는 하렘의 장녀인 세이라와 똑 닮은 신체의 손을 잡고는 마력을 주입했다.


아낌없이 들이부었다. 즉시 전력으로써 활용할 건 아니지만 왠지 따돌리는 느낌이 들어 퍼스트와 똑같이 마력을 주입하기로 했다.


어려운 일은 없었다. 퍼스트 때처럼 아이가 정보를 정리하여 집어넣어 줬기에 머리를 비우고 마력만을 보내면 됐다.


잠시 후 마력을 다 주입하고 리아는 한 걸음 물러섰다.



“안녕. 움직일 수 있겠니?”


말이 끝나자 인형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라프리트의 머리카락과 닮은 예쁜 초록색의 눈동자였다.


눈이 마주친 인형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이에 따라 양 갈래로 따서 묶은 애쉬 그레이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한동안 모두를 둘러보고 인형은 다시금 리아와 눈을 맞췄다.



“상황은 파악했습니다. 인사드립니다, 마이 마스터.”


세이라와 닮은 목소리를 낸 인형은 차분히 무릎을 꿇었다.


왠지······ 생각하던 거랑 성격이 좀 다른 기분이다.


머릿속에서 그렸던 이미지와는 제법 괴리가 느껴지는 모습에 리아가 당황하는 사이 아이가 [염화]를 썼다.


지난번처럼 아이는 분개하여 뭐라 의사를 보냈는데······ 무표정으로 모두 들은 인형은 코웃음 쳤다.



“대모님께선 무척이나 질투가 심하신 분이군요. 헌데 죄송하지만 따를 순 없습니다. 아뇨, 따르기 싫습니다만?”

『······.』


설마하니 거절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멍한 아이의 기분이 아주 선명히 전해져왔다. 덕분에 평소에는 감정이 잘 전해지지 않게 차단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다 이윽고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리아는 서둘러 중재하기 위해 나섰다.


무엇 때문에 둘이 대립하는지는 명백하다. 호칭 때문이다. 그거 말고는 다른 원인은 없다.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른다.


그 호칭을 없애버리면 그만이니 말이다.



“흠흠. 잘 들어보렴. 나는 마스터 같은 낯간지러운 것보단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싶거든. 기왕이면 리아로. ······혹시 무리이려나?”

“그럴 여부가 있겠습니까?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리아 님. 저의 모든 걸 당신께.”

“······어, 응. 고마워.”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산뜻하게 미소 짓는 세이라를 닮은 오토마타. 도대체 아까까지의 대립은 뭐였단 말인가.


허탈해진 리아는 어깨를 떨구었다.



“어. 그러니까······ 아. 이름이 아직이구나. 네 이름은 말이야. 세컨드로 할까 하는데, 혹시 마음에――”

“――들다마다. 물어보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이 세컨드, 리아 님께서 내려주신 이 이름에 맹세코 실망을 끼치지 않겠습니다.”

“아, 아니, 적당히 해도 돼. 느긋하게. 알겠지?”

“옛!”


진짜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무표정인 것과는 반대로 열렬한 눈빛을 보내는 세컨드를 의심스럽게 여기면서도 리아는 손짓했다.


부름에 퍼스트는 즉각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리아는 세컨드를 손수 일으켜 세우고는 둘을 마주 보게 하였다.



“이쪽은 퍼스트야.”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퍼스트.”

“세컨드, 서로 이스피리아 님께 보탬이 되도록 온 힘을 다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리아 님을 위해······”

“이스피리아 님을 위해······”


서로의 눈을 보며 뭔지 모를 다짐을 하는 둘.


이거 제대로 인사를 나눈 건지 모르겠다.


여러모로 황당했지만 멍하니 있을 순 없었다. 아직 확인해야 할 게 있다.



“몸은? 이상은 없니?”


살짝 주먹을 쥐었다 편 세컨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퍼스트 때와 마찬가지로 그 외에도 여러 가질 물어봤는데 전부 이상은 없다고 한다.


최종 확인을 끝마치고 오토마타의 제작은 종료됐다.


리아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끝났는데, 도움이 되셨나요?”

“······.”

“루비아 씨?”

“어, 어. 고마워요. 잘 봤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릴게요.”


어느새 부채를 꺼내 입가를 가리고 있었던 루비아는 작게 머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그렇지만 어딘가 마음이 다른 곳에 있다고 할까, 왠지 건성이다.


이상해서 다른 사람들을 보았는데······ 모두 루비아와 비슷했다. 부릅뜬 멍한 눈으로 세컨드를 계속 쳐다보기만 하였다. 어지간해선 여유를 잃지 않았던 가베인마저도 놀란 걸 숨기지 않고 퍼스트와 세컨드를 번갈아 봤다.



“생명 창조······.”


인디아가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였지만 워낙 조용했던 터라 방안엔 크게 울렸고 여기저기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역시 리아 님······!”

“아, 아니에요, 로즈 씨. 생명 창조 같은 거창한 게 아니라구요.”


적극적으로 오해를 풀려 하였으나 이미 로즈 안에서는 확정인 모양이다. 듣는 척도 안 하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진짜 신실하네······ 이거 루시아스 님의 신상이라도 보여주는 날엔 난리 나겠는데?’


리아는 머릿속으로 놀라는 로즈를 그려보았다.


그런 식으로 리아는 현실에서 도피하였는데,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나 보다. 조용한 방안에 맑은 루비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리아, 이만 돌아갈게요.”

“어. 네.”

“여러분들도······. 원하시는 건 얻으셨으니 이제 돌아가시죠. 숙녀의 방에 이리 몰려든 것도 폐이어요.”


루비아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전원 중재에 따르기로 했다.


하나둘, 갑작스럽게 왔던 손님들은 그렇게 군말 없이 올 때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한명 한명 작별 인사를 받아줬던 리아는 도통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어 휑해진 방안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방문이 열렸다.


밖에서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가족뿐. 문을 연 사람은 아이리스로, 수업이 끝나 페리, 델리안과 함께 돌아왔다.


거실로 온 아이리스는 묘한 분위기와 홀로 서 있는 리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그게······”


이야기를 들은 아이리스는 똑똑한 아이답게 바로 어떤 상황인지를 이해하였다. 그러고는 별다른 동요도 없이 침착하게 세컨드와 대화를 나누기까지 했다.


세컨드는 언뜻 무심한 듯하지만, 마음씨는 퍼스트처럼 굉장히 좋아 입가에 작게 미소를 달고는 아이리스를 대했다. 태도 또한 굉장히 깍듯하고 부드러웠다. 그 상태로 델리안과도 친근히 대화했다.


페리만은 별로 관심이 없는지 지정석으로 가 드러누웠다.


《넌 진짜 지루하게 살 일은 없겠다.》


――와 같은 소리를 늘어놓으며.


약간 감탄마저 하는 것 같은 페리의 이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왠지 일을 키운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리아, 어떻게 할래? 오늘은 쉴까?”


다정하게 묻는 에르의 말에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진이 빠졌을 뿐이에요. 일을 미뤄봤자 좋을 건 없으니 바로 가죠. 약속을 깨기도 그렇고요.”

“알겠어. 무리는 하지 마.”

“네. ······세컨드, 나와 갈 데가 있단다.”


굉장한 친화력으로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세컨드는 곧장 다가왔다.


‘동물을 좋아하나 보네?’


잠시 내버려 두고 싶긴 한데······


은은한 미소를 짓던 세컨드의 얼굴을 떠올린 리아는 고민했다. 그렇지만 일정이 빠듯하다. 제법 할 일이 많았던 터라 미안하지만 서두르자.


그런 뜻을 담아 사과한 리아는 곧장 에르와 함께 세컨드를 데리고 베르다드에서 나왔다. 도중 경비병 등, 많은 사람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고고한 척 내숭 떨며 바쁘다는 분위기를 뿜어대니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 이번에는 제대로 인식 저해 마법을 걸고 걷던 리아는 얼굴에 힘을 풀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세컨드. 내가 무슨 일을 맡길지는 아니?”

“예. 상인 조합의 관리를 맡기기 위해 저를 창조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아. 근데 아무래도 그런 쪽의 지식이 부족할 거 아냐? 노하우라든가. 그래서 세컨드는 엔가나 씨네 머물면서 배웠으면 해. 유능한 선생님도 초빙했어.”


유능한 선생님이란 상인 조합의 부조합장을 맡고 있는 테츠 오르테를 말하는 것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부르라는 말에 따라 염치없이 도움을 요청하니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내밀어줬다.


과연 츠카의 아버지랄까, 책임감이 강하다.



“엔가나 씨도 굉장히 능력이 좋은 분이시거든? 배울 점이 많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설명해주며 개발지구에 있는 엔가나의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 앞에는 미리 마중이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스피리아 님.”

“어, 어서 오십시오!”


엔가나를 따라 어색하게 외치는 이클립스.


리아는 곁에서 작게 묵례하는 메이어에게 미소 짓고는 이클립스에게로 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제 좀 적응됐나요? 공용문자 공부는 잘하고 있고요?”

“응! 할아버지랑 아저씨 다 친절해서 너무 좋아! 공부도 재밌어! 읽고 쓸 수도 있어!”

“후후.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이리도 이곳 생활을 좋아하니 적당히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스피리아 님.”

“아!”


뒤늦게 말투가 돌아왔음을 깨닫고 이클립스는 풀이 죽었다.


딱 그 나이 때의 아이 같은 모습이다. 완벽히 적응은 한 듯하고 엔가나와 그의 노집사와도 원만히 잘 지내는 듯하다.


걱정을 던 리아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기 이 애가 말씀드렸던 아이예요.”


리아는 세컨드의 손을 잡아 앞에 세웠다. 동생 소개하듯 어깨를 잡아 세우고 싶었지만 암만 키를 줄였다고 해도 세컨드가 한 뺨 이상은 컸기에 그러지 못했다.


내심 시무룩해진 리아를 뒤로하고 엔가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세컨드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혹, 고명한 마법사인지?”

“글쎄요······. 저기, 세컨드. 어디까지 마법을 쓸 수 있니?”

“퍼스트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특화된 부분이 서로 다른바, 마법전에 있어선 제가 압도합니다.”


가슴을 펴며 말하는 세컨드. 겉모습 그대로 마법이란 분야에 뛰어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자신감답게 세컨드는 퍼스트와 동일하게 마력레벨 650의 초월자다. 딱히 잘 보이기 위해 부풀려서 말한 건 아닐 것이다.


본인이 만들고도 너무 모르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내용물은 아이가 담은 것이니.



“그렇군요······.”


대답을 들은 엔가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츠 씨는요?”

“와있습니다.”

“그럼――”

“――아아. 괜찮습니다, 이스피리아 님. 여기서부터는 맡겨 주십시오.”

“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류한 엔가나는 눈을 빛냈다.



“실은 지금 바로 교육을 시행할 예정입니다. 몹시도 죄송하지만, 이스피리아 님께서 계시면 집중을 못 하리란 생각이 듭니다. 세컨드도 못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진 않을 터.”

“아아. 교육방침이라는 거죠?”

“예.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기는 맡겨주시고, 이스피리아 님께선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차후 아티팩트를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세컨드는 괜찮겠니?”

“예. 문제없습니다.”


눈을 마주하며 든든하게 말하는 세컨드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이대로 돌아가면 됐지만 너무 정이 없다. 만들자마자 남의 손에 맡기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던 터라 리아는 몇 가지를 더 확인해 보기로 했다.



“조합을 세울 건물이나 토지는 알아보셨나요?”

“예. 미리 점쳐놓은 자리가 있습니다. 세컨드에겐 오늘 그것과 관련해서 알려줄 예정입니다.”

“바로 가시게요?”

“왕가의 허가도 났으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연구소에 물건을 납품할 업체를 구해야 하고. 거기에······ 여러모로 문의가 많다며 막시 씨가 죽을상이더군요.”

“멜리다 상회요?”


순간 사업 이야기로 고생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런 거라면 오히려 행복한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그 예상대로 엔가나는 뭐라 표현하기 애매한 얼굴이 됐다.



“이스피리아 님과 연락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전부 멜리다 상회로 몰려든 듯합니다. 연구소에도 제법 찾아들 옵니다.”

“상인 조합 때문에요?”

“그렇습니다. 무척 관심이 많은지 다들 언제 여냐고들 문의해오더군요. 멜리다 상회 쪽도 비슷합니다. 그 탓에 장사에도 차질이 있다며 매일 한탄하고 있습니다. ······아아. 물론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주일간 잠시 임시휴업하기로 했으니 말이죠.”

“엑?! 그래도 돼요?”

“예. 안 그래도 최근 너무 바빴던 탓에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려고 했었답니다. 게다가 지금은 혼란을 틈타 도둑질하는 녀석들이 많아진 터라 열어봤자 손해라고 합니다.”

“······되도록 빨리 조합을 열어야겠네요.”


엔가나가 서두르는 이유를 마음속 깊이 납득하게 된 리아는 더 이상 붙들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일을 맡기기만 하는 입장이다.


급격하게 면목이 없어진 리아는 얼른 볼일을 보시라며 빠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엔가나는 성실한 터라 이쪽을 두고 갈 순 없다며 고집을 피웠고, 결국 리아가 먼저 백기를 들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잘 부탁드려요.”

“예. 맡겨주시길.”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건넨 리아는 배웅해주는 모두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걱정된다. 그렇지만 세컨드는 똑 부러지는 아이다. 별일 없겠지. 엔가나도 믿음직하고.


타지에 아이를 맡기는 기분인지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다독인 리아는 무겁게 걸어 나갔다.


그리고 정말 불필요한 걱정이었다는 건 나중에 깨닫게 된다.











“으허허허······ 드디어, 드디어 아네픽시르구나······!”

“경박하게 뭐 하는 거냐. 역할을 잊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품과 함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던 남성은 동료의 핀잔에 혀를 찼다. 하지만 동료는 옳은 말을 했을 뿐이었다.


남성의 역할은 1급 신관이니까.


체통이 있기에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었다. 더군다나 단순한 1급 신관이 아니다. 무려 성기사단의 단장을 보필하는 신관이었다. 더더욱 행동 하나하나 신경 써야만 했다.


지금도 동료의 번쩍이는 갑옷과 수려한 용모 덕에 많은 이목을 끌고 있는 와중이다. 체통은 실시간으로 깎고 있었다.


잘못한 건 어딜 어떻게 봐도 남성 쪽이다.


남성은 멍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똑한 축에 꼈다. 그러니 당연히 알고 있었다. 본인의 행동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하지만 이젠 한계였다. 혼자 다니며 주변에 눈치 같은 걸 볼 필요가 없는 생활만을 해왔던 남성에겐 더 이상 금욕적으로 지내기란 무리였다.


물론 남성도 처음에는 괜찮을 줄 알았다. 역할을 쉽게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어디를 가도 시선이 따라붙는 동료 때문에 잘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몸가짐을 조심해야 했던 터라 미칠 지경이었다.


익숙하지도 않은 그런 생활이 2개월을 넘기고, 3개월째에 돌입하니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당장 때려치웠다고.”


툴툴거리는 남성을 보며 동료―― 성기사단의 단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는 남성의 태도에 재차 핀잔을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억지를 여태 따라준 건 남성 쪽으로, 제법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라 단장은 좋게 타이르기로 했다.



“여기가 마지막이다. 여태까지의 시간이 아깝다면 조금만 더 참아라, 가이란.”

“헹. 나도 그럴 셈이네요. 하지만 너무 팍팍하지 않아? 조금만 긴장 좀 풀자고.”

“문전박대 당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라.”

“에이. 네가 있는데 그럴 리가.”

“난 타국으로 오는 일이 거의 없다. 있더라도 주교들의 호위로서 올 뿐이지.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 찾아온 것이다.”

“진짜 너인지 확인할 거라고?”

“못해도 신분 검사 정도는 하겠지. 그런데 그때 네 경거망동한 행동이 알려져 봐라. 도대체 어느 1급 신관이 그런 짓을 한다고······. 절대 믿으려 들지 않겠지.”

“흐음. 과연 그럴까 싶은데······”


미심쩍다는 듯이 말하는 남성―― 가이란. 가벼운 태도를 보이나 그는 겉모습보다 사려가 깊고 참을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심판관 중 최고의 자리인 제1 위상이 될 수나 있었겠는가.


오랫동안 그와 알고 지냈던 단장―― 리시타 비론 브리타스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앞길을 나아갔다.



“걱정하지 마라. 이곳에서의 조사는 금방 끝날 거다.”


가이란은 부디 그랬으면 한다며 뒤를 쫓았다. 그렇지만 크게 기대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여정 때문이었다.


들르는 도시마다 자인 디바오러에 대해 묻는 성기사 단장이란 아무래도 화제가 되기 마련이지 않은가. 굳이 정보가 빠삭하지 않더라도 알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만나려는 목표―― 이스피리아도 예외는 아니다. 이스피리아의 주변에는 제법 유능한 인물들이 있다 보니 이쪽의 움직임은 진작에 파악당했을 거다.


그러니 정보를 은폐하기란 무척이나 쉬웠을 것이다.


시간까지 넘쳤던 터라 제아무리 주 활동 영역인 아네픽시르라 한들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으리라.


가이란의 생각은 이러했었다. 그래서 아무 기대도 없이 이번에는 몇 달이 걸리려나, 베르다드의 방학 전까지는 갈 수 있으려나 같은 걱정들을 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스피리아의 정보가 바로 들어온 것이다.


뭔 대단한 곳에서 가서, 대단한 사람에게 묻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시민을 붙잡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스피리아에 대한 정보가 나왔다.


오히려 유명한지 알려준 남자 이외에도 주변에서 너도나도 알려줬다.


뜻하지 않은 상황에 어안이벙벙해진 채로 가이란과 리시타는 시민들이 알려준 곳으로 걸었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자주 찾나? 네가 왜 이스피리아를 찾는지 아무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네.”

“최고 국빈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리 쉽게 정보를 얻을 거라고는······”

“그건 그런데, 여기도 자인 디바오러에 관한 건 아무것도 나오지 않네.”

“이제 정보를 찾기 시작한 거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일러.”

“아무렴. ······음? 여긴가?”


발걸음을 멈춘 둘의 시선이 한 점포로 향했다.


점포는 여러 물건을 파는 만물상 같은 곳으로, 별로 크지 않은 소도매상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장사는 상당히 잘되는 모양인지 손님의 줄이 제법 있었다.


언제나처럼 잔뜩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가이란과 리시타는 잠시 서서 점포를 살펴봤다.



“암만 봐도 그냥 점포인데?”


속삭이듯 작게 이야기한 가이란의 말에 리시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범한 점포로군.”

“그렇지? 장사는 꽤 잘되는 모양이지만······ 이런 작은 곳에 이스피리아가 과연 관련되어 있을까? 이것보단 한참 큰 상회랑 놀 거 같은데······.”

“흰 날개 같은 곳 말이냐?”

“어. 그래! 그 여자라면 왠지 그런 곳에 뻔뻔하게 발을 들일 거 같은 느낌이야. 이런 데가 아니라.”

“뭐, 가보면 알겠지.”


반신반의하며 둘은 점포를 향해 갔다.


완전 무장의 건장한 기사와 마찬가지로 건장한 체격의 신관이 다가오니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주목했다. 그러다 서서히 리시타의 가슴팍에 새겨진 정십자의 문양과 특유의 무장들을 본 이들은 성기사 단장임을 깨닫고는 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며 의심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1급 신관의 복장인 가이란을 뒤늦게 확인하고는 진짜라며 소리쳤다.


사칭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감히 성기사단의 단장과 1급 신관을 사칭할 어리석은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둘의 관록이――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압력들이 가짜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잠시 지나가겠소.”


기다리던 손님들은 군말 없이 길을 터줬다. 감히 새치기냐며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줄이라 하더라도 그리 길지는 않다. 성기사 단장과 굳이 마찰을 일으킬 필요 따윈 없는 것이다.



“실례하오만.”


그렇게 수월하게 앞을 나아가던 리시타는 막 점포에서 나오는 모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기분 좋게 나서던 여성은 완전무장의 리시타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는 그 탓에 땅으로 떨어졌다.



“어이쿠, 위험해라.”


순간 튀어나온 가이란이 봉투가 땅에 닿기 직전에 받아냈다.



“여기, 받으시죠.”

“네. 가, 감사합니다.”


가이란이 미소와 함께 봉투를 돌려줬다.


상당한 덩치의 가이란이었지만 생김새는 나름 준수했다. 도움을 받았다는 상황과 맞물려 여성의 볼이 살짝 빨개졌다. 신관 복장인지라 위험한 사람으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성의 아들도 그러하였다. 엄마의 반응으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까마득하게 높은 둘을 올려다보며 신나 소리쳤다.



“커! 엄마, 이 아저씨들 아빠보다 훨씬 커!”

“얘, 얘가. 죄, 죄송합니다. 아직 철이 안 들어서······”

“아니오. 사죄는 놀라게 한 우리가 해야겠지. 마음에 두지 마시오.”


그리 말한 리시타는 몸을 숙여 남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말썽부리지 말고 엄마 말을 잘 듣거라. 그래야 키도 쑥쑥 크고 그러는 거란다.”

“에? 먹을 걸로 크는 게 아니었어? 엄마가 그러던데 편식하면 안 큰다고.”

“맞다. 가리지 않고 잘 먹어야지 키가 큰다. 엄마의 말대로 말이야. 근데 말썽부리면서 편식하면 어떻게 되겠나?”

“안 커!”

“그래. 그러니까 엄마 말씀을 잘 듣거라.”

“응!”


밝게 웃는 아이의 머리를 재차 쓰다듬은 리시타는 철컹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다정한 리시타의 태도에 완전히 마음이 녹은 여성은 고맙다며 머리 숙여 감사를 전했다.



“괜찮소. 그보다 물어볼 것이 있네만.”

“아, 네. 어떤 용무이신가요?”

“방금 막 이 점포에서 나오던데 무얼 샀는가 싶어서 말이오.”

“아~ 그거요?”


단박에 이해했다는 얼굴이 된 여성은 아까 떨어뜨린 종이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줬다.


재차 실례하겠다며 들여다본 봉투 안에는 리시타가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손전등이랑 손풍기, 분무기에요.”

“혹시 마도구이오?”

“손전등이랑 손풍기는요. 여기 분무기는 아니에요.”

“호오. 그렇군. 보여줘서 고맙소.”

“어······ 괜찮으신 건가요? 더 설명해드리지 않아도?”

“거기까지 실례하기엔 면목이 없소. 상회주에게 볼일이 있었으니 그때 듣도록 하겠소.”

“그렇군요.”

“붙잡아 미안했다오.”

“뭘요.”


미소 짓고 떠나는 여성에게 리시타와 가이란은 감사를 전했다. 남자아이에게도 친절하게 손을 흔들어줬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다정한 이 모습에 역시라며 탄성을 흘렸다.


그러한 주변과 달리 리시타와 가이란은 상당히 진지한 분위기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의견은 같았다.


이 점포엔 무조건 이스피리아가 연관되어 있다.


아까 여성이 보여준 물건의 완성도지만, 떠나는 모자들의 대화가 판단을 내리는 결정적인 요소가 됐다.


모자 중 엄마가 꽤 흥분한 어조로 혼잣말을 했던 거다.



“역시 최고 국빈이 직접 만들었다는 물건이네. 설마 성국에서 사람을 보내다니. 그것도 성기사단의 단장님을······. 손전등은 벌써 2개째 사는 거지만 몇 개만 더 사둘까? 다른 것들도.”


물론 여성만의 이야기였다면 혼자 잘못 알고 있었다거나 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여성만 이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었다. 바로 정면에 있는 입구 너머에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게 드래곤 슬레이어가 만들었다는 물건이냐는 소리가.


확신하게 된 둘은 망설임 없이 점포―― 멜리다 상회의 문을 열었다.


작가의말

네~ 그들이 드디어 오랜 여정 끝에 리아가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아, 참고로 인내심이 바닥나 보였던 가이란은 사실 밤마다 사복으로 나가서 각 도시의 술을 탐방하며 제법 편하게 지냈답니다.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슬슬 살찌는 계절이 돌아오겠군요. 벌써 위험한데 큰일입니다. 진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리 창고에 박혀있던 자전거를 꺼내 닦아놨습니다.

조금만 날이 더 따듯해지면 한강 쪽에 라이딩 다닐 거 같은데, 여러분들도 부디 살과의 전쟁에서 이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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