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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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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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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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3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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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DUMMY

“리카드 씨부터 먼저 볼 일을 마치죠.”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으나 계속 신경이 가는지 리카드는 “아이는 셋! 집은 노을이 아름다운 한적한 곳!”을 외치는 세리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그녀를 건드리는 건 좋지 못하다. 잠시 시간을 줘야 할 것이다.


재차 다그치니 리카드는 마지못해 시선을 거뒀다.



“자, 그럼 어디가 막히는지 들어볼까요?”


막상 본인의 지적 호기심을 해결할 수 있게 되자 기대가 됐나 보다. 리카드는 단숨에 흥분한 기색으로 반짝거리는 눈을 향해왔다.



“그전에 우선 진척 사항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과제였던 마력의 압축은 제법 익숙해진 단계입니다. 마력레벨도 재차 측정한 결과 400대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리카드는 손에 압축된 마력을 모아 시범을 보여주었다.



“호오······. 제법 괜찮은 컨트롤이에요. 꽤 익숙해지셨나 보네요. 부분, 부분 압축되어있던 신체의 마력도 제대로 다 압축해놓으셨고.”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리아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시간 안에 잘 해내셨어요. 힘드셨죠?”

“예. 처음엔 익숙지 않았던 탓에 고생깨나 했습니다. 지속해서 의식하기가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더불어 알고는 있었지만, 가면 갈수록 마력을 안정화하는 시간이 늘어나더군요.”

“얼마나 걸리셨는데요?”

“어······ 한 6시간은 걸렸습니다만 지금은 2시간 정도로 단축할 수 있게 됐습니다.”

“――칫. 역시나 재능충.”

“예?”

“아뇨, 대단하다고요. 전 처음엔 하루 넘게 걸렸거든요. 그것도 리카드 씨보다 한참이나 낮은 마력레벨에서요.”

“그, 그렇습니까? 이스피리아 양은 꽤 이른 시기부터 압축했었군요······”

“네. 그렇지만 리카드 씨도 너무 자만하지 마시고 계속 정진하세요. 시간이 짧아졌다면 다시 길어지게 양을 늘리고요.”

“아, 알겠습니다.”


한순간 밝아졌던 리카드는 가득 군기든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조금은 기분이 풀려 괜한 화풀이를 했던 대가로 약간의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마력을 쌓는 거요. 그게 무엇을 위한 행위인지 리카드 씨는 알고 계시나요?”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리카드는 진지하게 고민에 잠겨 들었다.


이윽고 결론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리 자신은 없었는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그 주제에 대한 논의는 많이 있지만 제대로 된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육체를 마력에 적응시키는 훈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슷해요. 마력의 친화력을 높이기 위함이죠. 방법 자체도 다양하고요. 저희처럼 대기 중의 마력을 모은다든지, 혹은 육체적 단련을 통해서요. 이건 알고 계시죠? 음······ 그리고 안정시킨 마력은 상당 부분 처음보다 줄어있지 않나요?”

“예, 예! 그렇습니다! 아주 미세한 양이라 알아차리긴 어려웠습니다만 최근 들어 확연히 그 차이가 느껴집니다.”

“압축된 마력은 대기 중의 마력보다 강렬하기도 하고 양도 많으니 알기 쉬워졌겠죠. 더욱 마력량이 많아지신다면 그 차이가 더 잘 느껴지실 거예요. 아무튼 그 줄어든 부분까지가 현재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력―― 마력 친화도이죠.”

“다른 말로는 마력레벨입니까?”

“잘 알고 계시네요. 그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마력과 일체화하는 것이기에 힘든 건 당연하고요.”

“응? 저, 죄송합니다만 왜 힘들어지는 겁니까? 물론 아까도 말했듯 경험상 안정화에 집중력과 시간이 더욱 걸린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만, 정작 그 이유에 대해선 짐작이 안 됩니다.”


과연 학자답다고 할까. 상당히 예리한 질문이다.


‘솔직히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런 예상을 깨줬기에 칭찬도 해줄 겸 기분상으로는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혼자서 결정하기엔 아무래도 조금 꺼려진다.


――왜냐하면 자신 또한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돌아봤다. 자신에게 이를 알려준 이―― 에르를 향해.



“리아가 원하는 대로.”


시선을 받자 에르는 가볍게 이야기했다. 마치 내일 산책하러 나가는 걸 결정하는 것처럼 주저도 없다.


오히려 당혹스러워 다시금 물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응. 안다 한들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전에는 다 알고 있던 시기도 있었어.”

“엥? 그래요? 그런데 이전이라는 건······”


에르는 대답 대신 미소를 보여줬다.


‘아······ 무지하게 오래된 옛날이구나. 신화시대나 막 그런 때이려나?’


용왕인걸 모르는 세리오가 있기에 굳이 대답을 안 했겠지.


그 뜻을 안 리아는 별말 하지 않고 리카드에게 시선을 옮겼다.


리카드도 대강의 사정을 알아챘는지 기대심을 숨기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먼저 말을 꺼내진 못했고, 그런 그에게 물었다.



“리카드 씨가 의아한 건 무엇 때문이었나요?”

“단순합니다. 마력을 쌓는 일련의 일들은 모두 마력에 대한 적응력과 친화력을 기르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면 갈수록 그 난이도가 점차 올라갑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느낌이랄까, 익숙해졌건만 점점 어려워지는 그 모순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하. 그렇게 받아들이셨구나.”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 알겠다.


‘응. 완전히 잘못 받아들였어.’


예리하게 문제를 짚어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번엔 학자 같은 면모가 강한 리카드이기에 범한 실수이지 않을까 싶다.



“리카드 씨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어떤 걸 말입니까?”

“마력의 친화력을 높이는 작업은 기술의 습득 같은 개념이 아니에요. 한번 익숙해지면 끝이 아니라는 거죠. 으음······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그래요! 리카드 씨가 연구하고 배우는 술식이요. 그 공부들은 위로 갈수록 쉽나요?”

“아뇨. 마법의 심연에 근접하는 것이니 당연히 더더욱 어려워―― 아. 그렇군요. 저는 조금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나요?”

“네. 마력의 친화력을 높인다는 건 마력과 일체화하는 거거든요. 절대 쉬운 게 아니에요. 리카드 씨의 연구만치 어려운 것들이라고 보면 돼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아까도 말씀하셨습니다만, 마력과 일체화한다고요?”

“네. 당도하는 거라고 표현해도 되는데······ 이건 다음 기회에 설명해 드릴게요.”


기껏 에르가 말해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느낌이랄까, 지금의 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 오히려 그의 성장에 발목을 잡는 일이 될 것만 같았다.


‘백방 모든 연구는 내팽개치고 마력 쌓는 일에만 주력하겠지.’


하지만 이후 리카드가 해야 할 일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집착과도 같은 잡념으로는 분명 제자리걸음만 할 것이다. 더욱이 여차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대참사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리카드의 성격상 모르는 상태에서 열심히 노력하게끔 유도하는 편이 좋아 보인다.


리카드도 호기심이 앞서는 듯했지만, 이쪽의 의도를 고려해준 듯 눈을 감아 평정을 찾으려 했다.


잠시 후 눈을 뜬 그는 차분하게 진정되어 있었다.



“우선 제 앞의 과제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

“너무 낙담하진 마세요. 스스로 알게 되실지도 모르고, 여차 때가 되면 알려드릴게요.”

“알겠습니다.”

“후후. 그러면 다음 과제를 드릴게요.”

“다음이요?”


리아는 설명 대신 손을 펼쳐 마력을 살짝 내보였다.



“이, 이건?!”


――이라며 놀랄 줄 알았건만. 리카드는 예상이라도 했듯 침착하게 육안으로도 보이는 농밀한 밀도의 마력을 내려다보았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라 리아는 몹시도 실망했다.



“알고 계셨나 봐요?”

“아, 예. 압축이 가능하다면 그 이상의 압축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추측은 했었습니다. 물론 최근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고 실물을 보는 것도 처음입니다. 하지만······ 역시 가능했었군요. 대단하십니다, 이스피리아 양.”

“어······ 별로 대단한 건――”


말을 멈춘 리아는 내보였던 마력을 거둬들이고는 오늘 중 최고로 진지한 눈을 했다.



“아뇨. 대단히도 어려운 게 맞아요. 저도 예전엔 조급한 마음에 서두르다가 오른팔을 통째로 잃었었거든요. 굉장히 위험하고 신중히 접근해야 해요. 절대 서두르면 안 돼요.”


리카드는 살짝 신음을 흘렸다.



“이게······ 제 다음 과제입니까?”

“맞아요. 전 이걸 편의상 2단계 압축이라고 부르죠.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보니까 리카드 씨 재능이 넘쳐서 금방 해내실 거예요. 아아. 그리고 따로 적응하는 훈련도 잊지 마세요.”

“마법의 위력 등이 이전과 현격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군요.”

“네.”


‘모르고 마력의 압축을 하셨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나 보네.’


생각을 정리할 요량인지 리카드는 잠시 말없이 고민에 잠겨 들었다. 그러다 여전히 웅얼웅얼 혼잣말하는 세리오를 힐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하죠. 하지만 이스피리아 양?”

“어, 네?”

“전 그리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뭐······라고요?”


자기도 모르게 눈빛이 싸늘해졌나 보다. 리카드가 허둥대면서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그 두 번째 과제 말입니다!”

“두 번째? 심상마법이요?”


고개를 갸웃하니 리카드는 제법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대답하였다.



“예, 그렇습니다. 실은 그 부분에서 막혀있습니다.”

“어디가 잘 감이 안 잡히시나요?”


말하기 어려운 듯 리카드는 머뭇거렸다.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이내 결심한 듯 리카드는 굳은 눈을 향해왔다.



“처음부터입니다.”

“처음······부터요? 아. 하긴 저도 처음에 전혀 감을 못 잡아서 반년이나――”

“――그게 아닙니다.”


드물게 말을 잘라낸 리카드는 아까 허둥댔던 사람이 맞는지 여태 봐왔던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분위기를 풍겼다.



“줄곧 술식마법만을 배우고 써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감은커녕 저에겐 심상마법의 체계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 심상마법은 이해적인 측면으로 접근을 해야 할 게 아니라 감각적으로―― 아.”

“예. 저에겐 그 감각적인 부분이라는 게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술식마법의 폐해라고 해야 할지······.”

“그, 그럼.”


떨리는 물음에 리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심상마법은 쓸 수 없을 거라고.”


리아는 아니라며 부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때였다면 노력한다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 고향인 나트알도 제대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인 에이브안뿐이다. 그 외에 몇 명 더 마법을 쓸 수 있긴 했는데, 거의 기초마법 수준으로 제대로 된 심상마법이라 할 순 없었다.


애당초 마법은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문 것이다.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엔 마법을 쓸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며 굉장히 조마조마했었으니 말이다.


‘아마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게 술식마법이겠지.’


――리카드처럼 섬세한 마력조작이 가능하나 마법은 쓸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이처럼 뛰어나건만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마법을 쓸 수 없다니. 너무나 안타깝다.


실로 술식마법을 만든 사람의 기분이 공감되는 순간이다.


세리오도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이야기를 들었는지 굉장히 염려스럽게 리카드를 보고 있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심상마법을 못 쓰더라도 술식마법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아쉽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건 술식의 연구에 보탬이 될 수 있었기에 그런 것입니다. 오히려 맘 편히 지금처럼 술식마법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세리오 씨. 너무 미안해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리카드 님······”


분위기가 좀 무거워졌다. 앞에 있는 리카드도 이전과 같이 창밖에서 내리쬐는 역광을 받고 있어 그러한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건 제대로 보지 않았기에 느낀 착각이다.


우중충하고 슬픈 기색이 감돌았던 이전과 달리―― 지금 리카드의 입가엔 조금도 부정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 환하디환한 미소가 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보던 리아는 놀라면서도 되도록 밝게 말을 건넸다.



“세리오 선생님은 하실 수 있게 되셨나 보네요.”


말을 흐리는 세리오 대신 리카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훌륭하시게도 이스피리아 양께서 남겨주신 조언을 들은 다음 날에 곧잘 하시게 됐습니다.”

“와~ 대단하시네요. 전 아까도 말했듯 반년이나 제자리걸음이었는데.”

“세리오 씨는 노력가이시니. 평소에 흘린 구슬땀이 빛을 보았겠지요. 앞으로는 더더욱 크게 발전하실 겁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조용해진 학원장실은 열린 창문으로부터 나뭇가지가 흔드는 소리만이 조심스럽게 적막함을 깰 뿐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분위기를 살피던 리아는 가볍게 이야기하였다.



“으음. 그러면 앞으로 리카드 씨의 연구도 도와주시면 되겠네요. 심상마법은 술식이 자연스레 형성되니 분명 여러모로 힘이 될 수 있겠죠. 그렇지 않나요? 리카드 씨.”

“아, 예. 안 그래도 최근 연구는 술식의 해석에 어려움을 겪던 차입니다. 손을 빌려주신다면 저야 무척이나 감사할 일이죠.”


거기서 리아는 다시금 말을 받으려 했으나―― 리카드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에게서 강렬한 열의가 엿보인다.


――지금부터는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것이라고.


마치 그리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어찌 끼어들 수나 있겠는가. 잠시 물러나 지켜보기로 했다.


리카드는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고는 옆에 앉아 있는 세리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세리오 씨. 이전에도 말씀드렸듯, 세리오 씨가 저와 함께해주시길 바란다는 건 거짓이 아닙니다. 여전히 말려든 모양새라 면목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진심입니다. 세리오 씨, 부디 저의 곁에 있어 주시겠습니까? 아뇨, 제 곁에 있으세요. 저에겐 세리오 씨가 꼭 필요합니다!”


‘에······?! 이, 이건!!’


설마 맡기라고 했어도 리카드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애당초 이 두 사람의 사이가 이렇게나 진전되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럴만한 거리랄까······ 의심되는 정황은 제법 있었다.


예전 치유마법의 배포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을 때 왠지 세리오는 리카드를 사모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으니 말이다. 말아 올린 긴 갈색의 머리카락도 어느덧 풀어서 다니기 시작했고.


잘은 모르겠지만 여자가 머리 스타일은 바꾸는 건 의미가 있다고 들었다. 분명 최대한 리카드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겠지.


그런데 리카드도 같은 마음이었다니······.


그야말로 천생연분. 만화에서 볼 법한 일이 그대로 벌어졌다. 보는 이쪽이 다 새콤달콤함에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리카드 씨 조금은 다시 보이네.’


아무리 두 명뿐이고 부부라지만 자신이라면 남들 앞에서 이토록 화끈한 프러포즈는 감히 엄두도 못 냈을 거다. 전생에서도 머릿속에서만이 가능했었고.


그때 리아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혹시 일부러 우리에게도 보여주려고 한 건가?! 바로 앞에서 목격한 증인으로서 자신들의 새 시작을 축복해달라고? 호······ 리카드 씨 진짜 제법이네.’


연애는 알맹이가 텅텅 빈 쭉정이로 봤는데 말이다. 완전 예상을 깼다.


이 멋진 프러포즈의 결과는 보나 마나다.


역시나 세리오는 사랑에 빠진 소녀의 촉촉한 눈으로 조만간 자신의 남자가 될 그를 올려다봤――


‘······응?’


뭔가 이상했다······


착각도 아니다. 달콤 쌉싸름한 분위기는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촉촉이 젖어있던 세리오의 눈에서는 급격하게 빛을 잃어갔다. 그리고는 이내 중얼중얼 혼잣말을 늘어놨다.



“그러면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참. 난 또 뭘 기대했던 거람.”


매우 작은 소리였기에 옆에 있던 리카드도 듣진 못했을 거다. 하지만 분위기만큼은 전해졌는지 당혹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금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였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슥······


세리오의 가느다란 검지가 그의 입을 막았다.



“곁에 있을게요, 리카드 님이 무얼 하든지요. 근데 도대체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건가요. 벌로 제가 하고 있던 연구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돕겠어요.”


리카드의 눈이 커졌다.


그것을 보며 세리오는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그리 대단한 걸 하고 있진 않아요. 그럴 바에야 리카드 님의 연구를 돕는 게 보람차겠죠. 저도 그편이 배우는 게 많을 거고요. ――대신! 성과는 반반입니다? 저도 공동 저자 및 연구원으로서 같이 이름을 올릴 거예요. 알겠죠?”


크게 눈을 떴던 리카드는 흥분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앞으로의 과정에서 세리오 씨가 맡을 역할은 중대하실 터. 차라리 메인 연구자는 세리오 씨의 이름으로 하죠!”

“호들갑이에요. 부담스러우니 그런 건 됐고――”


말을 멈춘 세리오는 지긋이 리카드를 쳐다보았다.


뭔가 싶은 리카드는 긴장했고······


세리오는 덥석, 그의 팔을 껴안았다.



“제 요구는 이거예요.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이러고 있을게요.”

“저, 저······ 세, 세리오 씨?”

“안 되나요?”


금단의 필살기. 애처롭게 곁눈질로 올려다보기를 시전하는 세리오. 지금은 여자라서 그런지 남자였을 때는 영 알 수 없었던 끼가 잘 느껴졌다.


남자라면 이것에 당해낼 재간 따윈 없을 것이다.


리카드라고 예외는 아니다. 엄청나게 허둥대던 그는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에 잔뜩 굳어지더니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끄덕.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괜찮다고 하였다.


목적을 이룬 세리오는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기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똑 부러지는 외모와 달리 제법 약았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잘못 따윈 없다. 도리어 그녀의 용기에 찬사와 함께 잔뜩 응원하고 싶은 기분밖에 들지 않는다.


이쪽의 시선을 느꼈는지 세리오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가에 손가락을 세웠다.


모른 척해달라는 거겠지.


본인이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엔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 아니니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지만 리카드에게는 정말 크게 실망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둔감할 수가 있지?’


어쩐지 에르가 혀를 찰 듯한 기색을 풍긴다더니. 정말 만화에서나 겨우 나올 법한 극한의 둔감함이다. 이전 연기 레슨 때를 떠올려보면 본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닐 텐데도.


그런 주제에 튀어나온 말은 잔뜩 착각할만한 대사다.


일부러 노리고 한 거였다면 진짜 한 대 때렸을 것이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로 허둥대는―― 뒤늦게 청소년기를 맞이한 것 같은 리카드를 보노라면 그럴 리는 없어 보인다는 게 아쉽다.


왠지 의욕이 사라진다.



“그러긴커녕······”


혼잣말이 들렸는지 리카드가 쳐다본다.



“오, 왜 그러십니까?”

“――쭉정이.”

“예······?”

“아뇨. 아무것도.”


말을 돌리자 곧이어 에르가 한심하다는 듯 드물게 콧방귀를 뀌었다.


이러한 반응에 리카드는 고개를 갸웃했고, 세리오는 다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보다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아, 알겠습니다. 저기······ 세리오 씨?”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들 나누세요.”

“네. 대화하는 것뿐인데 별로 상관없잖아요?”


거드는 자신을 따라 에르도 눈빛으로 한마디 하듯 흘겨보았다.


본인을 뺀 모두가 한마음이자 리카드는 포기하기로 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계속 팔에 안겨있던 세리오는 기분 좋은 미소만을 내비쳤다.


리아도 살짝 미소 지었지만 리카드를 보는 순간 표정을 바로 굳혔다.



“자, 그럼 세 번째 과제는 어떻게 되셨나요?”


여전히 달라붙어 있는 세리오가 신경 쓰였는지 리카드는 습관처럼 안경을 치켜올리는 행동을 취했다. 그렇지만 안경은 나트알에 온 뒤로 줄곧 끼지 않았다.


리카드도 손이 허공을 갈라 콧잔등을 누르자 그제야 깨달았는지――



――――지지직.



전파 수신이 잘되지 않는 것처럼 시야가 일그러진다.


갑작스러운 사태. 하지만 이윽고 시야는 되돌아왔다.


그리고 보이는 풍경은 학원장실이 아닌, 새하얀 벽이 인상적인 베르다드의 정문. 하늘에서 내리쬐는 빛에 안경이 반짝거리는 리카드가 곱고 지적인 눈을 이쪽으로 향했다.


다만 그와의 눈높이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게 다가온다. 아직 안경을 끼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렇군요······ 벨루디스가 자랑하는 학원, 베르다드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스피리아 양.”


상냥한 음색이다. 물론 실제 품고 있는 감정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지만 알 수 있었다.


――그 속엔 미안함과 죄책감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는 리카드와 마주하고 있는 자신도 알고 있었다.


정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손녀의 게임기에서 봤던 광경에 놀라고 있는 자신과 그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띤―― 착각하고 있을 게 분명한 리카드의 기분까지도.



‘이······건?’


의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꿈을 꾼 듯한 느낌에 멍하니 손을 들어 가슴팍으로 가져가 봤다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느껴지는 건 없었다.


대신 다른 게 느껴졌다.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하는 아이의 기척이.


‘아이――’



“리아?”


이 사태를 물으려 했다만 동시에 에르의 말이 들려왔다.


잠시 고민스러웠지만, 평소보다도 훨씬 염려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에르의 모습에 그만 고민을 접어두기로 했다.


‘급한 건 아니겠지. 가끔이기는 해도 자주 있는 일이니까.’



“요즘 조금 피곤했나 봐요. 잠깐 딴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그, 그러셨습니까.”


대충 둘러댔지만 에르는커녕 리카드마저 속일 수 없었다. 걱정스러운 눈빛들이 떠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티를 낼 순 없으니, 리아는 모르는 척 말을 받아준 리카드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그래도 이야기는 다 들었어요. 가끔 들르시기는 하는데 아직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고요?”

“예······ 괜히 의심 사지 않도록 지금처럼 연구하면서 지내라고만 하셨습니다.”

“저랑 사이좋게 말이죠.”

“그, 그렇죠.”


바로 옆에서 미소 짓는 세리오. 리카드는 얼굴을 붉혔다.


참으로 숙맥 같은 순수한 반응이다. 듣기로는 30대 중후반쯤이라고 하더니만. 물론 외형만큼은 이제 막 겨우 20대가 된 듯하여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피식 웃은 리아는 분위기 쇄신에 도움을 준 세리오를 쳐다봤다.



“세리오 선생님은 어떠세요? 막히는 부분이 있나요?”


여전히 리카드의 팔을 껴안은 채로 세리오는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직 심상마법에 대해 잘 아는 게 아니라 이렇다 할 궁금증은 아직 없습니다만······ 아, 맞다. 혹시 심상마법도 개인의 적성에 영향을 받나요?”

“적성이라는 건 불 속성이니, 물 속성이니 하는 거요?”

“네. 저의 주 적성도 불과 물이거든요.”

“아!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 분들을 듀얼 마스터로 부른다고. 셀레스테 씨도 듀얼 마스터랬어요.”

“이스피리아 양은 어떠신가요?”

“글쎄요. 저는 딱히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없어서. 제 적성이 뭔지 모르겠네요.”

“에······?”


세리오가 놀란 눈으로 리카드를 쳐다봤다.


시선을 받은 리카드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쿼드 마스터이시겠죠.”

“엘리멘탈――”

“――자, 잠시만요, 세리오 선생님! 그 별칭은 학원장님에게나 어울려요. 그런 창피······ 흠흠. 과분한 별칭은 저에겐 너무 벅차요.”


정말 그렇다. 저러한 별명이 따라붙는다면 앞으로 마법을 쓸 수 있겠나. 지금 세리오의 말을 막아선 것은 정말 최고의 선택이었을 거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데, 방금 건 킹 스페이드였을 거야. 진짜로 훌륭한 판단이었어.’


자화자찬한 리아는 짧게 숨을 토해냈다.



“어쨌든 루비아 씨가 말하기로는 전 4대 속성은 전부 쓸 수 있다고 하긴 했어요.”

“저기······”


리카드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말씀해보세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여 죄송하지만, 그······ 체험학습 때 통신 마법을 쓰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상호모습까지도 보이는 고도의 마법이었다고······ 그것도 수십 개나.”

“어······ 네. 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있었죠. 왠지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네요.”


살짝 웃고 있으니 앞에 앉아 있는 둘에게서 놀람이 전해진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은 것으로 보이는 리카드와 달리 세리오는 처음 들었나 보다. 눈을 부릅뜨고는 소리쳤다.



“사, 상위 속성도 다룰 줄 아시나요?!”

“상위······요?”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고, 뒤를 이어 리카드가 대답하였다.



“빛과 어둠 속성을 말하는 겁니다. 번외 속성이라고도 말하는데, 특히나 빛 속성을 다루는 자는 아주 드뭅니다. 저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자를 보긴 처음이고요.”

“응······?”


감각적으로,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뭔가 거창하게 이야기가 흘러갈 가리라는 것을.


그렇지만 상위 속성이라는 게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진짜 할 수 있는 게 맞긴 한 건가 싶기도 하고.’


심한 내적 갈등 끝에 저울은 호기심 쪽으로 기울었다.


확인도 할 겸 떠오른 이미지를 토대로 마법을 사용해봤다.


피드백으로 문제없음을 확인했고, 손가락을 튕기자 학원장실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겨 들었다.


물론 어둠 속에 잠겨 들었다고는 했지만 리아에게는 너무나 잘 보였다. 하지만 앞에 있는 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미안해요. 커튼을 꼼꼼히 쳤다는 느낌으로 마법을 쓴 건데, 혹시 이게 어둠 속성이라는 건가요?”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했던 리카드였지만 금방 상황을 눈치챘는지 침착하게 이쪽을 보았다.



“[암막]입니까······”


리아는 마법을 해제했다.



“어라? 비슷한 마법이 있나 보네요. 어둠 속성은 제법 쓰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어둠도 드물긴 하지만 제법 있긴 합니다. 적긴 해도 어둠 속성의 마법도 좀 있고요. 대체로 정신계 쪽에 치중되어 있긴 하지만.”

“[암막]도 그중에 하나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리카드 씨도 어둠 속성을 쓸 수 있나요?”

“어둠 속성의 마법은 그 수가 적어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당히는 할 수 있습니다.”

“빛 속성은 모르고요?”

“예. 애초에 빛 속성 사용자가 적다 보니 알려진 술식이 거의 없습니다. 소문으로는 비전으로 전하는 가계나 단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말 그대로 소문의 영역인지라.”


‘손전등에 사용된 [광구]도 아마 빛 속성이지 않나? 어쨌거나 엘리멘탈 마스터라는 이명답게 리카드 씨는 어둠 속성도 쓰실 수 있구나. 하지만 참 묘하단 말이지. 술식마법이라도 속성이라는 걸 타기도 하고.’


흠흠. 리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옆을 쳐다봤다.



“에르, 오리진이라고 했던가요? 그거 좀 남은 게 있나요?”

“응.”


뜬금없는 주문이었지만 에르는 선뜻 [차원수납]을 열어 손을 넣었다.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 느낌이다.


세인트리안의 사람들과 달리 리카드와 세리오는 오리진을 모르는지, 둘은 고개를 기울이며 에르가 꺼내는 오색빛깔의 금속을 신기하게 보았다.



“이쁜 금속이네요. 이걸로 무얼 하시려고.”


빛깔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은 들떠 보이는 세리오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서프라이즈인데 알려버린다면 그 놀람이 반감되지 않는가.


이후 반응을 상상한 리아는 즐겁게 손가락을 튕겼다.


다들 한 번씩은 본 [성형]이건만 구불구불 형태를 바꿔 가는 오리진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였다. 이윽고 처음의 금속 원형에서 크게 형태가 바뀐 오리진을 보며―― 특히 세리오가 눈을 빛냈다.


‘내가 봐도 훌륭하니 저러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드물게 잘난 듯 으스대는 리아. 테이블에는 그 자신감의 원천인 두 개의 팔찌가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실제로도 내뿜고 있다――


바늘도 통과하기 어려운 루비아의 엄격한 심의를 수차례나 받은 자신이다. 단련은 되어 있었고, 개인적인 취향과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이쁘다고 생각할만한 디자인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물이 저 어여쁜 디자인의 팔찌다.


에르도 슬쩍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이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제법 괜찮은 만듦새이지 않을까 싶다.


기대대로의 반응에 리아는 만족스럽게 팔찌에 마법을 부여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근처에 있는 서류 더미를 가리키며 물었다.



“리카드 씨, 이 서류 이면지로 써도 되나요?”

“예, 예. 거기에 놓인 건 다 처리한 안건들입니다.”


그러면 진작 치워놓지.


어째서인지 흠칫한 리카드에게 속으로 불평을 한 리아는 다시금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제대로 됐나 확인한 리아는 남은 오리진을 에르에게 돌려주고, 한 장의 이면지와 함께 팔찌를 둘에게 내밀었다.



“저기······ 이건?”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둘을 보며 리아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드리는 거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카드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세리오가 소리를 높였다.



“정말 주시는 건가요?!”

“네.”

“우, 우와······”


준다는 이야기에 세리오는 붙들고 있던 리카드의 팔도 놓고 달려들 듯 팔찌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겨우 벗어나게 된 리카드는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선물이니 당연하죠. 하나는 리카드 씨의 것이라고요.”

“갑자기 말입니까?”

“어음······ 여러 가지 알려준 답례랄까, 평소 이래저래 신경 써주셨잖아요. 앞으로도 신세를 질 텐데 미리 감사도 할 겸해서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주세요.”

“그럴 순 없습니다. 이미 이스피리아 양에겐 치유마법의 술식도 받았건만 이 이상 어찌――”

“――떽!”


‘해도 될 말이 있지!!’


설마 이렇게나 둔감할 줄이야. 똑같은 생김새인 한 쌍의 팔찌를 보면서도 전혀 느껴지는 게 없단 말인가.


둔감증만큼은 연애 소설 주인공 뺨치는 리카드를 너무 쉽게 봤다. 도리어 자신이 세리오의 눈치가 보일 지경이다.


다행이라면 세리오가 황홀한 표정으로 팔찌에 정신이 팔려있다는 건데······


더는 리카드가 만행을 저지르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언제 세리오의 관심이 이쪽으로 돌아올지 모른다.


독하게 마음을 먹은 리아는 간만에 엄격, 근엄, 진지하게 표정을 다잡았다.



“치유마법의 배포는 애당초 저도 함께하는 일이었어요. 리카드 씨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그런데 혼자만의 것으로 하다니. 그건 함께 한 저에게 꽤 실례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과, 과연. 너무 제 입장만 생각했나 봅니다. 이스피리아 양께 실례인지도 모르고.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순순히 사과하는 리카드를 보며 리아는 눈을 빛냈다.



“선물이라고 했지만, 사실 약간의 속셈도 있어요.”


그리 말한 리아는 이면지를 가리켰다.


이면지에는 기형학적인 도면 같은 게 그려져 있었는데, 리카드는 뭔가 말하려는 것도 멈추고 흥미롭게 관찰하였다. 누가 천직이 아니랄까 봐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한다.


잠시 뒤 주변도 보이지 않게 되었는지 진지한 얼굴로 혼잣말을 흘렸다.



“새로운 유형의 술식이군요······ 으음. 하지만 차분히 보면 정신계와 근본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알림과 전달······ 아니, 연결입니까.”


정작 그려준 자신도 전혀 이해가 안 되건만 리카드는 차근차근 어떤 술식인지 맞추어나간다.


과연 해박하다.


이대로 놔둬도 금방 알아낼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리카드를 뒤흔들어야만 했다.


잔뜩 놀랄 그의 반응이 아쉽긴 하지만 먼저 정답을 밝혔다.



“이거 [염화]에요.”

“아, 그렇군요! [염화]였습니······ 엇?! 이, 이스피리아 양? 이만한 것을 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기대했던 것보다는 약하지만 오늘 중 제일 리액션이 좋다. 나쁘지 않은 점수를 줄 만하다. 심적으론 역시나 불만족스럽지만 말이다.


서류를 돌돌 말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은 리아는 말했다.



“네. 아까도 말했듯 속셈이 있어서요.”

“어떤······ 것입니까?”

“긴장하시지 않아도 돼요. 그냥 연락망 같은 걸 갖추려고 한 거예요. 간단한 걸 물어보고 싶다거나 할 때 일부러 찾아오긴 좀 수고스럽잖아요? 그러니 리카드 씨도 알고 계시면 여러모로 편할 거 같아서요. 나름 메이저한 마법 같기도 하고요.”

“메이저? 주류라는 말씀입니까······?”

“네. 델리안―― 저번에 저와 함께 오신 분 있죠? 아, 그러고 보니 델리안이 머물 수 있게 힘써 주셨다고 들었는데 감사도 안 드렸었네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리아는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리카드는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아뇨. 폐하께서도 손쉽게 허가하셔서 별로 힘든 것도 없었습니다.”

“폐, 폐하께 올라갈 만한 사항이었군요······ 응? 어쩐지 파티에서 내가 먹을 것들이 제법 있다 했더니 그것도 신경 써 주신 건가?”


단순한 추측이었을 뿐이었지만 정답이었나 보다. 리카드가 긍정해준다.



“아마 그럴 겁니다. 이스피리아 양에겐 이래저래 감시가 붙어있을 테니. 음식의 취향 정도는 파악해두었겠죠.”

“감시라······ 확실히 따라붙는 기척들이 제법 있긴 했죠.”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조만간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리아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다시 만날 아크티알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도 제대로 기억해뒀다.



“돌아가서, [염화]를 알려드리는 건 문제 없어요. 루비아 씨에게도 얼마 전에 뜯겨―― 흐흠. 건네줬거든요. 그리고 아까 말했던 델리안도 할 줄 알아요. 딱히 감출 것도 아닌 듯하니 리카드 씨도 알아두시라고요. 거리에 따라 마력이 더 많이 드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편리하잖아요?”

“그렇게 말씀은 하셨지만, 쉽게 떠벌릴 물건도 아닙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욱이나.”

“루비아 씨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거리에 따라 마력이 더 많이 드는 [염화]로 알려드리는 거예요. 이러면 그럴 경우가 조금은 줄어들겠죠. 군사작전이라는 건 보통 전장이 넓으니까요.”

“다른 [염화]도 있습니까?”

“마법은 무궁무진하잖아요? 효과는 같지만 구성되는 원리라든지 차이를 달리한 거죠.”

“참고로 다른 [염화]는 어떠한 방식입니까?”

“음······ 초기 마력의 소비는 지금 알려드린 것보다는 좀 있긴 한데 거리에 따라 소비량이 증가하거나 하진 않아요.”

“하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겠죠.”

“네. 가장 큰 문제는 어렵다는 거겠죠. 애당초 술식 자체도 복잡하고요. 알려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먼 거리일수록 더더욱 어렵고요.”


이야기를 들은 리카드는 인상을 쓰고는 정말 받아도 되는지 고민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줄 마음은 없다. 곧장 다그치듯 말했다.



“리카드 씨니까 믿고 드리는 거예요. 아니면 함부로 남용하실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런 일은 단연코 없을 거라 맹세합니다.”


선서하듯 말하는 리카드의 모습에 리아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뒤흔들기가 잘 먹혀들어 갔다. ――루비아에게 알려준 시점에서 한 명 더 알려준다고 한들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건만.


혼란스러운 리카드는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는다. 이제 와서 이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으니 더욱 박차를 가하여 마무리 짓기로 하자.



“좋아요! 그러면 이제 궁금한 게 생기면 [염화]로 연락드릴게요. 리카드 씨도 사양 말고 저에게 연락하시고요.”

“저에겐 너무나 감사한 말입니다만······ 이스피리아 양께서 제게 도움을 얻을 게 있나요?”


리카드는 힐끔 에르를 봤다.



“뿌뿌. 여심을 너무 모르시네.”

“그, 그렇습니까?”

“네. 몰라도 너무 몰라요. 여자는 말이죠? 아니, 모든 사람은 좋아하는 분에겐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법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의지만 하면 꼴불견이잖아요. 가끔은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야죠.”

“화, 확실히. 드, 듣다 보니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 거예요. 저도 오늘 마침 궁금한 것들이 생겼거든요. 속성의 분류라던가요. [광구]도 빛 속성인데 다들 아주 손쉽게 하잖아요. 그래서 속성과 개인 간에 무슨 상관관계라도 있나 궁금하네요.”

“심오한 주제군요. 그 주제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있는바, 토론을 나눈다면 반드시 제법 시간을 잡아먹겠죠. 그렇기에 [염화]를 알려주신 겁니까?”

“틈틈이 시간 날 때 물어보는 편이 좋잖아요. 몰아서 묻는 것보단.”

“말씀대로입니다.”


역시 리카드는 이러한 학자스러운 부분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면 수긍이 빠르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리아는 힘을 빼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와 동시에 하나 말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아, 참고로 팔찌에도 [염화] 비슷한 마법을 부여했어요. 한 번 써보세요.”

“혹시 [완전부여]를 하신 겁니까?”

“그럼요. 선물인데 마력이 다 되면 사라지는 [부여]를 걸어드릴 순 없잖아요?”

“이스피리아 양이라면 그러실 거 같았습니다만······ 마광석이 없네요.”

“심상마법은 마광석이 없어도 개념을 고정하는 방법으로 [완전부여]를 할 수 있거든요. 물론 술식마법과 크게 다를 바는 없어서 뒷받침되는 소재여야만 하지만요.”

“좀 호기심이 동하네요. 나중에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네. 시간 나실 때 연락하세요.”


이제 진짜로 잠시만 느긋하게 있자며 리아는 깊게 깊게, 눕듯 소파에 몸을 맡겼다.


매번 앉을 때마다 느끼지만 소파마저 심혈을 기울였는지 기분 좋은 푹신함이 일품이다. 이러한 물건에 서류나 쌓아 올린 리카드의 패기가 놀라울 정도다.


그렇게 만끽하고 있으니 에르가 어느새 준비했는지 달달한 딸기우유를 건네왔다.


눈치 빠르고 상냥한 멋진 남편에게 적잖이 감동하고 리아는 받아든 딸기우유를 쭉쭉 빨아들였다.


새로운 신식인 에르 특제의 딸기우유는 과연 언제 먹어도 그 맛이 끝내준다. 원재료인 우유의 공수가 좋았던지 목 넘김이 곰보 코코넛 못지않게 깔끔하다.


‘캬하. 극락이로구먼. 근데 리카드 씨는 왜 가만히 있는 거다냐?’


모처럼 누아르 영화 속 조직 보스의 기분을 한껏 느끼고 있었건만. 좋은 구경거리인 그가 가만히 있어서야 분위기가 죽는다.


역할에 깊게 심취한 리아는 무리하게 손바닥을 밑으로 하여 잡은 컵을 살살 흔들면서 쳇, 혀를 찼다.



“뭐가 잘 안되나요?”


너무나 껄렁한 모습에 리카드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몰라서······”


작가의말

힌트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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