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편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디라프
작품등록일 :
2023.05.12 23:43
최근연재일 :
2024.09.18 18:00
연재수 :
159 회
조회수 :
7,862
추천수 :
30
글자수 :
723,372

작성
23.07.23 18:00
조회
37
추천
0
글자
10쪽

무장 (3)

DUMMY

흉흉하게 물든 검을 본 이찬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마철이 이찬에게 이야기한 그 문장이 잊혀지지 않고 떠다녔다.


-이 검은 더이상 이찬, 당신의 것이 아니게 될 겁니다.


자신의 여정을 함께한 검.

사실 저 정도만 되어도 대단한 것이었다.

아무리 신병이라 한들, 날붙이는 무뎌지기 마련.

그런데도 이찬이 외형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이는 외상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외형은 방금 만들어진 마철의 공방에서 제련된 무기보다 빛났다.


사라락.


천막이 걷히는 소리가 들리며 마철이 공방의 내부로 들어왔다.


[이찬.]


이찬은 대답이 없었다.

결국 마철은 한번 더 이찬을 불렀다.


[이찬!]


이찬이 번뜩이며 깨어났다.


“아, 마철.”


짧게 고개 숙여 인사한 이찬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리······가능합니까?”


잠시 뜸들이던 마철이 고개를 서서히 끄덕였다.


[고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어보신다면, 가능합니다.]


이찬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나 그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어······예?”


[검에 스며든 마기는 저와 제자들이 수리하면 사흘 내로 새것처럼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마철이 황금빛 혜안을 빛내며 검의 고동(방패마기)을 응시했다.

응시한 눈빛의 끝엔 원래 새하얀 눈과 색의 차이가 거의 없던, 그러나 지금은 달 없는 칠흑 같은 밤의 색과 같은 검은 비늘이 자리할 뿐이었다.


[본디 이 검을 제가 이찬께 드렸을 때, 전대 야철신께서 만드셨던 구조에서 살짝 틀어 비늘의 격이 검에 스며들 수 있게 개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비늘에 들어있는 격은 전과 정반대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만큼 다릅니다.]


마철이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코로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이야기를 이었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총 두 가지입니다. 아니, 사실 한 가지라 해도 같은 말일 것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마철이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는 듯 말했다.


[첫 번째는 ‘기도’와 똑같은 검을 하나 만드는 것입니다. 검의 틀을 기도에 맞추어 제작하고, 그 틀에 기도와 완전히 같은 재료, 중량, 심지어는 색깔마저 같게 하면 탁하게 물든 이 비늘을 가지고도 이전과 같은 수준의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이찬이 당황하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건······.”


이찬이 말하려는 것의 의미를 이미 안다는 듯 마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관념》에서 가장 위대한 장인도 같은 검을 두 번 만들진 못합니다. 그런 장인도 불가능한 일을 제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죠.]


‘당신이 더 위대해 보이는데요.’라며 대거리 하려던 이찬이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 이게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입니다.]


이찬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이찬께서, 새 비늘을 구해오는 것입니다.]


순간 이찬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가 순식간에 돌아왔다.

뒤죽박죽의 머릿속에서 주를 이룬 내용은, 그가 용의 신언을 듣고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는 것뿐.

그런 이찬의 상태를 알아챈 마철이 말했다.


[혹시 이도 어려우시다면······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때, 마철의 눈에 이찬의 모습이 들어왔다.

몇 초 전까지 공포에 떨고 있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의 청소년은 그 자리에 없고,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룬 노장 같은 모습의 남자가 이찬 대신 자리한 듯 어마무시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이찬.]


“제가 가겠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찬이 편측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우습다는 듯 말했다.


“방법이 다 있죠.”


***


“으허엇.”


가스페르가 발작하듯 일어나며 주변을 살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이 고요한 방을 채워주고 있었다.


“으허엇.”


상체를 일으키며 반사적으로 땅을 짚은 가스페르의 왼손에 무언가가 잡혔다.

서 있을 기력도 없다는 듯 녹초가 되어 앉은 가스페르가 왼손을 펼쳐 숙취해소제와 동봉된 쪽지를 읽었다.


-마철의 공방으로 가 있을게요. 정신이 드시면 숙취해소제 마시시고 공방으로 와 주세요.


가스페르가 한 장을 넘겨 다음 쪽지를 읽었다.


-우리 행성에 들렀다가 공방으로 감. 사흘 정도 소요될 예정. 이노도 데리고 감. 주정뱅이들에게 맡길 수 없음.


저자가 쓰이지 않았지만 누가 남겼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푸흡.”


메모를 구분하는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웃겼던 가스페르가 숙취해소제를 들이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숙취에 절어있던 그의 정신을 말끔하게 회복시켜 주었다.


“출발해볼까?”


호기롭게 별관의 현관문을 열고 출발하려던 가스페르는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다.


“어? 근데······공방이 어디지?”


공방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

당황도 잠시, 가스페르의 얼굴에 해바라기가 만개했다.


어차피 모르는 거. 둘러보면서 찾지 뭐!


벌컥 별관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바깥 바람을 시원하게 한 번 맡은 뒤 가스페르가 별관의 왼쪽으로 박자를 맞춰 걸어갔다.

······공방은 오른쪽인데.


“촵촵촵. 쩝쩝쩝쩝쩝.”


가스페르가 오른손으로는 종이컵을 들고 왼손으로는 이쑤시개를 들어 종이컵을 쑤시며 말했다.


“에이, 벌써 다 먹었네.”


종이컵엔 남은 고추장 양념과 파 쪼가리가 남아있었다.


“딱벅이? 맛있네.”


우사에게 용돈으로 받은 상상력을 펑펑 쓰며 간식거리를 마구마구 입에 넣으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공방의 위치와는 정반대로 걸으며 가스페르가 중얼거렸다.


“아니, 이 조그만 애가 나한테 알아서 찾아오라고 쪽지만 남겨놓고 가면 다냐?”


꼬르륵.


아직도 배가 고픈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던 가스페르가 한 가게의 간판을 발견했다.


우렁이 국밥.


국밥이 무엇인지는 어제 이찬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맛있다는 국밥을 먹어 볼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가스페르가 국밥집의 문을 열고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가게의 안쪽에 자리한 큰 덩치 무리에게서 따사롭지 않은 눈빛이 밀려들어왔다.

애써 무시한 가스페르가 문과 가까이 탁자에 앉았다.


“주문이요!”


식당의 점원을 불러낸 가스페르가 돼지국밥을 한 그릇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뜨겁고 자욱한 연기에 휩싸인 국밥이 뚝배기에 담겨 나왔고 가스페르가 입맛을 다시며 국물을 한 숟갈 떠 먹었다.

밀려드는 사골의 맛이 가스페르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뱃속에서 여전히 행패를 부리는 숙취를 말끔히 제압했다.

숙취해소제는 정신을 맑게 해 주었을 뿐, 오장육부 곳곳에 스며든 술을 모두 제거하기엔 그 양이 너무 작았다.

하지만 국밥은 그의 속에 있던 모든 술기운을 떨쳐낼 수 있도록 했다.


“캬!”


이 감동을 잇겠다는 듯 바로 밥을 국에 말더니 숟가락으로 한 숟갈 크게 퍼 뜨거운 상태 그대로 입안에 넣었다.


“흐어!”


뜨거운 듯 연신 입김을 내뿜었다.


“후루루루룹.”


왕족의 품격이라곤 단 일도 찾아볼 수 없는 가스페르의 식사가 계속되었다.

마침내 흡입을 끝낸 뚝배기가 식탁으로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가스페르는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까 그에게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보낸 장정들이 가스페르를 둘러싸고 있었다.


“뭐야?”


순간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인지할 새도 없이 장정들 중 두목 격으로 보이는 이가 말을 걸었다.


“네놈도 켈트에서 왔나?”

“켈트?”

“그래. 보나마나지. 또 그 빌어 처먹을 새끼들이 행패를 부리러 왔군.”


<켈트>는 영국 신화에 근거지를 둔 성단이다.

<태극>과는 전혀 연관이 없기에 그 이름을 들어 볼 기회조차 드물 터인데, 어째서 이들은 켈트에 그토록 타오르는 증오를 발하는 것인가.


“저는 켈트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복장이 누가 봐도 ‘나 켈트에서 왔어요’하고 있지 않은가.”


그 말에 가스페르가 급히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봤다.

마치 옛날 영국 귀족들이 입을 법한 의상에 가스페르는 납득을 하고야 말았다.


“아······. 지금 제 옷이 이래 보여도 저는 여러분이 잘 모르실 타 행성에서 왔거든요······?”


가스페르가 열심히 변론했으나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잔말 말고 밖으로 나와라. 다시는 <태극>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 주지.”

“아니 그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일곱의 장정 무리가 가스페르의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나갔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나선 가스페르가 식당의 앞 연무장에 발을 들였다.

얼떨결에 활도 없이 맨몸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닥친 가스페르가 전투 전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저는 진짜 맹세코 켈트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이 점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두목으로 보이는 이가 명했다.


“동하. 네가 나가라.”

“예. 스승!”


동희라고 불린 남자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손 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다.”


벽창호와 대화하는 기분을 느끼며 가스페르가 눈을 감고 격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의 전신이 반짝이는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며 격의 위력을 끌어올렸다.

감은 눈을 치켜뜨고는 서서히 쥔 주먹에 자비를 지웠다.


“갑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스페르의 인영이 동희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미지의 편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0 종이부시 (3) 23.12.08 64 0 10쪽
69 종이부시 (2) 23.12.06 90 0 10쪽
68 종이부시 (1) 23.12.03 67 0 10쪽
67 원행의 끝 (2) (1부 完) 23.09.10 34 0 10쪽
66 원행의 끝 (1) 23.09.09 27 0 10쪽
65 백룡 (5) 23.09.04 33 0 10쪽
64 백룡 (4) 23.09.03 48 0 10쪽
63 백룡 (3) 23.09.02 38 0 10쪽
62 백룡 (2) 23.08.28 37 0 10쪽
61 백룡 (1) 23.08.27 41 0 10쪽
60 바빌론 대혁명 (9) 23.08.26 29 0 9쪽
59 바빌론 대혁명 (8) 23.08.20 33 0 10쪽
58 바빌론 대혁명 (7) 23.08.19 38 0 13쪽
57 바빌론 대혁명 (6) 23.08.14 39 0 10쪽
56 바빌론 대혁명 (5) 23.08.13 35 0 9쪽
55 바빌론 대혁명 (4) 23.08.12 40 0 10쪽
54 바빌론 대혁명 (3) 23.08.07 34 0 11쪽
53 바빌론 대혁명 (2) 23.08.06 34 0 12쪽
52 바빌론 대혁명 (1) 23.08.05 55 0 10쪽
51 무장 (8) 23.07.31 41 1 11쪽
50 무장 (7) 23.07.30 41 1 10쪽
49 무장 (6) 23.07.29 40 0 10쪽
48 무장 (5) 23.07.24 40 0 9쪽
47 무장 (4) 23.07.24 61 0 10쪽
» 무장 (3) 23.07.23 38 0 10쪽
45 무장 (2) 23.07.22 43 0 10쪽
44 무장 (1) 23.07.17 41 1 9쪽
43 뇌봉전별 (3) 23.07.16 38 0 10쪽
42 뇌봉전별 (2) 23.07.15 42 0 10쪽
41 뇌봉전별 (1) 23.07.10 42 0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