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새글

백G
작품등록일 :
2023.07.10 20:20
최근연재일 :
2024.09.23 21:57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529
추천수 :
6
글자수 :
266,333

작성
24.01.15 23:59
조회
10
추천
0
글자
9쪽

27화

DUMMY

현재 이데아 수상 관저는 시끌벅적하다. 이데아 국립 악단은 알코즈의 전통 음악을, 알코즈 전통 악단은 이데아의 전래 동요를 연주 중이다. 그걸 배경 음악 삼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지만 화려한 외관 속에 음침한 실상이 숨겨져 있다. 평민 남성과 여성 수행원이 모인 1 층은 간단한 빵과 야채뿐이다. 음료도 물과 우유, 그나마 단 것도 탄산 정도다. 마엘리교의 교리를 존중한다는 명분이지만 대사관 직원과 귀한 신분이 배치된 위층은 기름진 음식 위주다. 그들이 쥔 잔에는 평범한 음료가 아닌 검붉은 와인이 따라져 있다.


“고작 저런 걸로 만족하며 아랫놈들을 비웃고 있다니, 쯧! 아주 배가 불렀군그래.”


물론 정상에서 군림하는 자가 보기에는 이 또한 우습기만 하다. 이를 증명하듯 귀빈실에 앉은 빈 제마는 독주를 들이키며 하층민들의 먹이사슬을 관람하고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데아의 여배우가 먹여 주는 체리를 으적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느라 나름 고생했어요, 왕세자.”


“그래 보입니다, 수상님. 이곳은 저놈들이 절대 보지 못하겠습니다.”


앙겔루스에게 대답하면서 빈 제마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총을 맞아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제조와 무역의 힘으로 열강의 반열에 선 이데아다. 적당한 식량 생산량과 괜찮은 해양 진출로가 있긴 하지만 아쉽게도 화석 자원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알코즈와 갈등을 빚기 껄끄러운 이유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료 수출국의 왕세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다른 수입로가 있음은 사실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손해다. 멀리 보면 어떻게 될지 미래를 알 수 없다. 거기다 방해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이데아의 성장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는 나라들이 몇몇 있는 탓이다. 특히 바르타니아 왕국과 같은 기존의 열강들이.


복잡한 국제 정세를 떠올리며 안심한 빈 제마는 체리 씨앗을 그릇에 뱉었다. 내용물이 사라진 그의 입가는 눈앞의 남자를 비웃듯 히죽거린다.


“그나저나 누구보다 바쁠 수상님이 친히 절 부르다니 의외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실망이네요, 무암. 잔이 비었잖아요!”


“수상님이 따라 주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무안함을 감추려 반박하던 빈 제마는 무언가 이상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저 남자가 자신을 부른 호칭이 달라졌다. 무암은 그의 사적인 이름이다. 지금처럼 외교적인 자리에서 언급될 게 아니다.


그런데 방금 상대국의 정상은 그 호칭을 입에 담았다. 문제는 빈 제마가 취기에 즉시 반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를 눈치챈 앙겔루스의 입가는 이미 올라가 있다.


“이데아의 체리는 참으로 달지 않은가요, 무암?”


“후······ 계집년은 꺼져라.”


“왜 그러시나요, 왕세자님? 제가 무슨 실수라도···”


“꺼지라고!”


빈 제마가 씨앗이 담긴 그릇을 벽에 집어던지자 여배우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처음의 설명처럼 귀빈실의 방음은 완벽하다. 아래층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여전히 즐기고 있다.


“어쩌자는 거지? 이데아가 강국이란들 이쪽의 연료가 없으면 공장을 가동하지 못할 텐데.”


“태도가 너무 바꼈잖은가, 껄껄.”


“그쪽이 할 소리가 아닌데.”


날선 비아냥에도 웃기만 하는 앙겔루스다. 그게 불만스러운 빈 제마지만 이 남자는 발을 빼기 힘들 정도로 물렸다는 걸 모르는 천치가 아니다.


“원하는 걸 말해.”


“한 국가의 원수가 바라는 건 국민의 안위 말고 다른 게 있겠는가?”


“그딴 목적으로 술맛을 떨어뜨렸다고!”


“함정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분노를 겨우 다스린 빈 제마는 앙겔루스의 얼굴을 살폈다. 진실로 모든 걸 알지 못한다는 표정이다. 물론 이를 믿을 사람은 없다.


정치는 보통의 낯으로 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에 오른 자라면 상상을 초월한다. 제 아무리 뛰어난 빈 제마라고 해도 앙겔루스 디아볼리와 직접 상대하는 건 쉽지 않다는 게 지금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을 속이는군.”


“속이다니? 무슨 말인가?”


“굳이 아까 그년을 왜 불렀지? 지금도 훌륭한 배우가 있는데 말이야.”


“오, 설마 왕세자는 배우도 했었나? 이건 나도 몰랐어.”


“진짜 역겹군.”


“이런, 큰일이야! 취했으면 진작에 말을 해야지. 화장실은 바로 옆에 있으니 가서 진정하고 오게.”


어떤 말을 해도 능글맞게 받아치는 앙겔루스를 보며 빈 제마는 넋을 놓았다. 예전에 만난 국제 회의에서도 범상치 않다는 걸 느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지금 자신의 그릇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현실을 인정한 빈 제마는 쓰디쓴 독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아이코, 그렇게 마시면 속 버리네.”


“이미 버리게 만들어 놓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나야말로 이해하기 힘들어.”


“하, 됐으니 목적을 말해라.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고.”


앙겔루스는 생각보다 더 무서운 남자다. 빈 제마가 이미 백기를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문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해를 못하겠어. 난 그저 손님들이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랄 뿐이네.”


“뻔뻔하기 그지없어.”


참다 못한 빈 제마는 짜증을 내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순간 앙겔루스의 입가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다면 말이야.”


“뭐?”


“이곳에서의 시간이 좋았다면 이쪽에 좋은 선물을 주고 가면 어떤가?.”


말을 마친 뒤 상냥하게 웃는 이데아 수상의 얼굴은 백년 묵은 여우보다 독해 보인다.




그로부터 10분 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수상실 직원이라 밝힌 남자는 앙겔루스 디아볼리를 호출했다. 앙겔루스는 국빈을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며 보좌관인 아디우토르나 담당 부처의 장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직원은 말을 듣지 않았다.


지독한 노인이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을 돌리는 왕세자다.


“끔찍한 시간이었군. 술 좀 끊어야겠어.”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게 술이 가진 중독성이다.


하지만 빈 제마는 술꾼인 데다가, 그 이상으로 정치적이다. 이 짧은 시간에도 무엇이 문제였는지 파악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술이 문제였다. 하지만 취하지는 않았다. 이게 참으로 애매하다. 빈 제마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어 혼자 술잔을 비울 정도다.


“내가 취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라······ 역시 늙은 여우를 대놓고 물어뜯는 건 아직 일렀군.”


사실 앙겔루스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다. 이 정보는 각국에도 알려져 있다. 그는 오히려 이 점을 이용했다. 술자리 중에 누군가가 앙겔루스 앞에서 빈틈을 보인다면 평소보다 훨씬 취한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이를 위해 시선을 분산시킬 조연도 섭외했다. 미인계에 익숙한 빈 제마는 걱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는 후계자를 위한 아내가 있다. 거기다 아내가 허락한 애첩도 있으니 그 상대는 이름난 모델이다. 때문에 빈 제마는 처음 본 여배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순수한 목적으로 접근했으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그 계집 눈깔은 죽이던데.”


“바닷물 같은 눈이 잊혀지지 않지?”


“누구냐?”


빈 제마는 자신의 혼잣말에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그 사람은 귀빈실의 출입문에 서서 실실 웃고 있다.


“이데아의 정보국장 칼비티움 라쿠스다.”


“천하고 버릇없는 놈이군.”


“여긴 그쪽과 달라. 성공하면 예의를 챙길 필요가 없다고.”


어깨를 으쓱한 칼비티움은 빈 제마의 옆에 앉았다.


“흠, 잔이 없어.”


“그럼 꺼져.”


“잔이 없으면 병으로 마시면 돼.”


주인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손으로 새 술을 꺼내는 칼비티움이다.


“이데아인치곤 맘에 드는군. 잔을 신경쓰지 않다니.”


“알코즈인치곤 이상한데. 거긴 술이 금지잖아.”


“시끄럽다.”


짜증내며 대답한 빈 제마는 술을 찾았다. 하지만 손수 잔을 채울 필요는 없었다. 그가 병을 들기도 전에 칼비티움이 술을 따라 주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데. 그래도 내가 윗사람인데 양손으로 따르지.”


“말하는 게 어디 동방에서 온 줄 알았네. 거기 사람들 말하는 투가 딱 그렇던데.”


“알코즈도 다례가 아주 빡빡한 편이지.”


“다례나 주례나 거기서 거기긴 해.”


갑자기 태도를 뒤바꾼 칼비티움은 술을 들이켰다. 목이 타들어 가고도 남을 지독한 술이 반이나 사라졌다. 하지만 칼비티움의 얼굴은 멀쩡하기만 하다.


“어이, 왕세자 양반.”


“싸가지 없긴.”


“진짜 싫었으면 경호원을 불렀을 사람이 왜 호들갑이야?”


빈 제마는 그의 지적이 사실이란 걸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칼비티움은 미소를 거두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떤 인간에 대해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관심 있어? 어딘가의 꼭대기에 있는 양반인데 말이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26화 24.01.08 9 0 10쪽
25 25화 24.01.01 11 0 10쪽
24 24화 23.12.25 12 0 12쪽
23 23화 23.12.18 9 0 11쪽
22 22화 23.12.11 12 0 12쪽
21 21화 23.12.04 9 0 10쪽
20 20화 23.11.28 11 0 11쪽
19 19화 23.11.14 10 0 10쪽
18 18화 23.11.06 7 0 11쪽
17 17화 23.10.30 12 0 11쪽
16 16화 23.10.23 8 0 10쪽
15 15화 23.10.16 12 0 12쪽
14 14화 23.10.09 9 0 12쪽
13 13화 23.10.02 13 1 10쪽
12 12화 23.09.25 11 0 9쪽
11 11화 23.09.18 10 1 13쪽
10 10화 23.09.11 12 0 11쪽
9 9화 23.09.06 11 0 12쪽
8 8화 23.08.28 13 0 15쪽
7 7화 23.08.21 11 0 13쪽
6 6화 23.08.14 12 0 11쪽
5 5화 23.08.07 13 0 11쪽
4 4화 23.07.31 12 1 11쪽
3 3화 23.07.24 15 1 13쪽
2 2화 23.07.17 17 1 12쪽
1 1화 23.07.10 39 1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