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용사는 핵무기가 필요해요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유진숙
작품등록일 :
2023.09.03 11:30
최근연재일 :
2023.10.06 13:05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958
추천수 :
8
글자수 :
118,856

작성
23.09.18 07:45
조회
200
추천
4
글자
13쪽

1화: 방화벽에서 이 프로그램의 일부 기능을 차단했습니다.

DUMMY

[보안 경고: 방화벽에서 이 프로그램의 일부 기능을 차단했습니다.]

[이름(N): 133,316,666]

[게시자(P): 알 수 없음]

[경로(H): C:Program Files:133,316,666133,316,666.exe]


딱 봐도 상당히 의심스러워 보이는 프로그램.

인디 게임을 하다 보면 으레 겪는 일이기에, 이 경고가 별로 대수롭진 않았다.

더구나 이 지독한 게임 불감증을 치료하기 위해선 당장 뭐라도 해야만 했다.


딸깍-


‘액세스 허용(A)’ 버튼을 누르자, 인트로나 타이틀 화면 하나 없이 곧바로 게임이 시작됐다.


[잊힌 사원: 증오의 회랑]


판타지 RPG 장르에서 으레 볼법한 버려진 사원. 사원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무너진 잔해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흔한 튜토리얼이나 조작키 설정도 없어, 장애물을 앞에 두고 점프 대신 구르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머리에 뿔이 난 은발의 마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푸하핫! 불쌍해서 더는 못 봐주겠네.”

“누구?”

“그 가여운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요새 게임은 초반에 뉴비 절단기를 넣는 게 대세라더니···.”

“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너한테 점프 키를 알려주려고 왔어.”

“가이드 NPC였잖아? 휴, 다행이다. 적인 줄 알았네.”

“뭣? 나는 NPC 따위가 아니다! 이 몸은 유혹의 악마, 마스테마라고 하지.

“응? 상호작용이 되네? 잘 됐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뭐, 뭐냐?”

“이거 전체화면 실행이 안 되는데?”

“어, 잠깐만···.”


나의 질문에 당황한 마스테마는 마도서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어디 보자···. 전체, 전체, 전체···.”

“아직 멀었어?”

“아! 알트 엔터 한번 눌러볼래? 저번에 고친다고 고쳤는데 왜 또 이러지? 해결됐어?”

“여러모로 엉성한 게임이네. 확 꺼버릴까.”

“자, 잠깐! 앞부분만 넘기면 괜찮아져. 그때까지만 제발 참아줘.”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이 게임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후후후···. 나와 계약을 맺으면 훨씬 더 재밌어질 거야.”


소위 게임 짬밥을 좀 먹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다 알 거다.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게임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NPC, 그것도 고유 칭호까지 가진 인물의 제안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간혹 어떤 게임은, 이걸 무시했다가 진행 자체가 막히는 불상사가 더러 일어나기도 하니까.


“좋아.”

“큭큭큭, 이로써 계약은 성립됐다.”

“···끝난 거야? 딱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운명의 모래시계는 이미 뒤집혔어. 10년 안에 이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하면, 넌 죽음을 맞이하겠지!”


# # #


벌겋게 충혈된 눈에 안약을 넣으며, 수북이 쌓인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찔러넣었다.


마스테마가 한 말은 결코 헛소리가 아니었다.

알트 엔터를 누르면 전체화면이 된다는 것 말고, 10년 안에 클리어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 말이다.

이걸 증명하듯, 하루라도 게임에 접속하지 않으면 죽을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물론, 유혹의 악마는 채찍과 당근을 함께 건네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이 게임을 클리어한다면, 나의 하인이 되어 죽을 때까지 봉사하겠다.

당연히, 이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의 이야기다.

잃어버린 지난 세월을 보상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손에 넣게 해주겠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이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인가.

다만, 이 계약엔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르바이트와 잠깐의 수면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모조리 게임에만 쏟아붓는 폐인 생활.

무려 8년째 이 짓을 반복하고 있었음에도, 게임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난 전생에 세키부네에 탔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했거나.


[현재까지 제거한 적: 44,912,431]

[남은 적: 88,404,235]

[남은 기간: 771일]


10년 안에 1억 3,331만 마리가 넘는 몬스터를 모조리 제거하려면, 대강 어림잡아 1년에 1천 333만 마리, 일주일에 25만 6천 마리, 하루에 3만 6천 마리, 한 시간에 1천 5백 마리를 잡아야 한다.

그것도 24시간 동안 게임만 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남은 적 88,404,235마리.

게임 설계상, 달성 불가능한 클리어 조건이다.

남은 2년 동안 그 많은 적을 어떻게 다 잡으라고?

젠장. 문자 그대로, ‘악마의 게임’이잖아.


결국,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압도당해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한다.

이 생활을 더 이어 나가다간, 악마에게 살해당하기 전에 병으로 먼저 죽는다.

무엇보다도 남은 인생을 모니터 앞에서 허비하고 싶지 않다.


[종료하시겠습니까?]

[예···? 그럴 생각 없는데요? / 아.]


게임을 종료하려는 나를 방해한 것은 아니나 다를까 마스테마였다. 그녀는 화면 한가운데 떠 있는 종료 확인창을 슬쩍 치우며 모니터 너머의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게임을 켜자마자 끄려고 해? 벌써 포기하려고?”

“처음부터 날 살려줄 생각 따윈 없었지?”

“흐응, 무슨 소리를 하실까?”

“쳇, 오리발 내밀긴···. 마음대로 해. 네가 뭐라 하든 난 인제 그만둘 거니까.”

“안 돼! 네가 떠나면 재미없단 말이야.”

“나만큼 재미가 없을까. 그러니까 진작에 작작 좀 했어야지.”

“···좋아, 그러면 내가 선물을 하나 줄게.”


선물을 준다던 마스테마는 느닷없이 화면 한가운데에 큰 원을 그렸다. 그러자 소위 포탈이라고 불릴만한 것이 생겼다. 포탈이 점점 커지는 동안, 그녀는 어떠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Risosah Ekho Origoy Lurikes Oz.”

“너 지금···?”

“네가 이렇게 무기력해진 건, 의자에 앉아서 ‘딸깍’거리기만 하니까 그런 것이 틀림없어! 지금부터 널 용사에게 빙의시켜줄 테니까, 나랑 같이 한번 열심히 해보자고!”

“뭐? 으아! 이 악마야! 이거 놔!”


그렇게 내 영혼은 모니터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게임을 끄지 못하게 게임 속에 처박아버린다.

과연 악마적인 발상이었다.


# # #


그 흔한 용사 파티 한 명 없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불쌍한 용사가 하나 더 있다고 들었지만, 별로 관심 가진 않았다.

어차피 난 현재 다른 용사를 도와줄 여유도, 도움받을 이유도 없는 상태였다.


[아이디: 라피엘 (Rapyel) / 이름: 오판호]

[종족: 인간]

[클래스: 용사]

[레벨: 255]

[특기: 한 손 무기 lv 30, 양손 무기 lv 30, 궁술 lv 30, 방어술 lv 30···(더 보기)]


나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산꼭대기에 있다.


[로라시아 대륙, ‘슈니스타’산 정상]


동행한 셰르파 한 명 없는 고독한 정상. 이곳에서 그나마 동료라고 부를만한 위인은, 지금 내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마스테마 뿐이었다.


“···이제 속이 시원하냐, 마스테마?”

“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난 널 도와준 거라고.”

“도와주긴 뭘 도와줬다는 거야?”

“생각해봐. 넌 이제 편의점에서 바코드 찍는 일을 할 필요가 없어. 왜? 용사니까. 하루에 4시간만 자도 팔팔하지. 왜?”

“용사니까···. 쳇, 전혀 위로가 안 되는걸.”

“거기다가 게임에서 흐르는 시간은 현실보다 2배 느리지. 빙의된 이후, 현실의 너는 시간이 멈췄겠지만. 뭐, 어쨌든 남은 기간이 두 배로 늘었는데 기쁘지 않아?”

“2년이나 4년이나···.”

“자꾸 그렇게 삐딱선 타지 마. 좀 섭섭해지려고 한다?”

“그럼 이왕 도와줄 거, 섭섭하지 않도록 좀 더 확실하게 도와주면 안 될까?”

“확실하게? 어떤 식으로?”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줘. 많이도 안 바라고 딱 하나.”

“흐음···. 어쩐다? 들어줄까, 말까?”

“싫으면 관둬. 누가 악마 아니랄까 봐.”

“에헤이! 알았어. ‘치트키를 알려줘’ 따위의 부탁만 아니라면 들어주도록 하지. 자, 어떻게 도와줄까?”

“그러면···.”

“그러면?”

“핵무기 만드는 걸 도와줘. 가능하지?”

“해, 핵무기?”


마스테마는 입을 벌린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과학의 자리를 마법이 차지한 이 세계에서 핵무기라니. 얼마나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만약 내가 그녀였더라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턱없이 모자란 시간 안에 목표를 달성하려면 대량살상무기가 꼭 필요했다.

이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핵무기. 내 상상력으로는 이게 최선이다.

내가 쓰는 각성한 성검 ‘레바테인’도 세계관 최강급 무기였으나, 이걸로는 주어진 목표치를 도저히 채울 수 없었다. 비록 남은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났더라도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이쪽 세상엔 우라늄도, 플루토늄도 없다.

하지만, 마법의 힘이라면?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는 법이다. 역으로 말하면, 마법은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헬파이어나 메테오를 남발할 순 없단 말이지. 더구나 난 마법사 캐릭터도 아니고.

그러니 이것 말고는 딱히 뾰족한 수가 없겠어.

남은 것은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온 악마의 결정뿐이다.


나의 제안을 들은 마스테마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핵무기가 무엇인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길어지는 이 고민은 바로 그것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마스테마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건 승낙이 아닌 거절의 뜻이었다.


“그건 안돼. 치트키잖아. 그렇지···?”


애초에 ‘알았어.’ 따위의 대답을 들을 것이라곤 기대도 안 했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던져본 말이었기 때문이었으니까.

다만, 마스테마의 대답은 의외로 허술했다. ‘그렇지?’라고 나에게 되묻다니?

조금만 잘 구슬려보면 어떻게 될 것만 같다.


“치트키? 무슨 소리. 핵무기는 물리 공격이야. 즉, 이 세계의 공격 유형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당한 수단이라는 말이지.”

“그런 얄팍한 속임수로 날 속이시겠다?”

“뭘 모르나 본데 핵무기는 물리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물건이야. 원자폭탄을 가장 먼저 개발한 사람은 물리학자고. 내 말이 거짓말 같으면 한번 찾아보시던가.”

“그, 그런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이 세상에서 구현 불가능한, 존재할 수 없는 걸 만들어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도와줘.”

“흐음···. 그래도 그건 좀···.”

“아휴, 됐다. 내가 지금 누구한테 뭘 바라겠냐. 그냥 저기 나무 밑에서 잠이나···.”

“잠깐!”


옳거니. 역시 내 예상대로 마스테마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포기였다. 이 여자는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무척이나 아쉬워했었다.

또한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이상하리만큼 나를 총애하기도 했다. 장난감 취급이긴 하지만.


“알았어, 알았다고. 그동안의 인연이 있는데···. 도와줄게.”


이제 난 구원받았다. 그것도 악마에게서!


적절한 양의 핵무기만 손에 넣는다면 8천 8백만 마리든 8억 8천만 마리든 충분히 4년 안에 해치울 수 있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마스테마가 산통 깨는 소리를 해왔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나 핵무기 만드는 법 몰라.”

“···뭐?”

“내가 무슨 오펜하이머인 줄 알아?”

“이건 약속이 다르잖아? 아까 분명 핵무기 만드는 걸 도와주겠다고···.”

“난 도와주겠다고 했지, 만들어 주겠다고 안 했다?”

“아뿔싸.”


펑. 이건 핵폭탄이 아니라, 나의 구원행 열차가 터지는 소리.

어쩐지 일이 술술 풀린다 했다.

하지만, 마스테마는 나를 갖고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만렙 용사는 핵무기가 필요해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중단 안내 23.10.06 28 0 -
공지 주요 등장인물 소개 및 일러스트 23.09.17 69 0 -
21 21화 (연재 중단) 23.10.06 28 0 13쪽
20 20화 출범식 23.10.05 16 0 13쪽
19 19화 23.10.04 16 0 13쪽
18 18화 23.10.03 17 0 13쪽
17 17화 23.10.02 41 0 13쪽
16 16화 슬라베스카의 노예 사업 23.10.01 24 0 13쪽
15 15화 23.09.30 24 0 13쪽
14 14화 23.09.28 26 0 13쪽
13 13화 23.09.27 32 0 13쪽
12 12화 23.09.26 26 0 13쪽
11 11화 피바람은 우르사 강물을 마신다 23.09.25 34 0 13쪽
10 10화 뜬금없는 변심 23.09.24 32 0 13쪽
9 9화 23.09.23 32 0 12쪽
8 8화 루트리가 대학 23.09.23 34 1 12쪽
7 7화 23.09.22 30 0 12쪽
6 6화 [팁: 알고 계셨나요?] 23.09.21 36 0 12쪽
5 5화 23.09.20 44 0 13쪽
4 4화 23.09.19 62 0 12쪽
3 3화 ...하피? 23.09.18 92 1 12쪽
2 2화 23.09.18 102 2 13쪽
» 1화: 방화벽에서 이 프로그램의 일부 기능을 차단했습니다. +1 23.09.18 201 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