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용사는 핵무기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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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유진숙
작품등록일 :
2023.09.03 11:30
최근연재일 :
2023.10.0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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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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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DUMMY

흉터투성이의 장교가 춤을 추고 있는 여급을 보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대여섯 명 되는 그의 부하들이 식탁에 비스듬히 총을 세워놓고 헤벌쭉 웃고 있었다.


“하하하! 잘한다, 잘해!”

“엉덩이를 좀 더 흔들어봐! 그렇게 우물쭈물하지 말고!”

“오줌이라도 마려운 거야 뭐야? 더 세게 흔들어보라니까?”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그 광경 너머로, 바닥을 닦고 있던 늙은 남자가 우리에게 걸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

“주인장, 저놈들은 뭐야?”

“쉿.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전 괜한 말썽에 휘말리긴 싫습니다요···.”


병사들의 모자에 새겨진 붉은 별을 보아하니, 슬로베스카군에서 탈영한 불한당인 것 같았다.


“저 새끼들은 우르사강의 칼바람보다 날카로운, 독전대의 채찍 처형이 두렵지도 않나?”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군요.”


주인장의 혼잣말 같은 넋두리를 듣던 한여름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에게 따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두고 보고만 있어요?”

“어쩌겠습니까···.”


맞다, 이 남자가 뭘 어쩌겠는가.

RPG 게임의 이런 NPC들은 현실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영웅과는 다소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그러나 한여름은 그런 주인장의 태도가 불만스러운 듯, 더욱더 날카롭게 그를 몰아세우기 시작한다.


“저기 저 여급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살아남으려면 못 본 척 바닥이나 닦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당신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에요?”

“···저라고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저도 미쳐버리기 직전입니다! 왜냐면···.”


안타까운 눈빛으로 여급을 한번 힐끔 쳐다본 주인장은, 그대로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떨궜다.


저 여급은 제 딸입니다. 제 아내입니다. 제 조카입니다.

흔히, 이런 상황에선 저런 전제가 깔려있기 마련이다.

너무나 뻔한 전개지만, 뻔한 만큼 친숙한 동정심이 피어오른다.


주인장에게 화를 내던 한여름이 순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살짝 붉히며,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앗, 저런···. 죄송해요···.”


한여름의 위로 섞인 사과에, 주인장은 꽉 깨문 입술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알아주시는 겁니까? 저걸로 한 푼도 못 벌고 있는 저의 딱한 처지를?”


뜻밖의 변화구에 맥없이 삼진아웃을 당한 타자처럼, 한여름이 주인장을 벙찐 표정으로 쳐다봤다. 당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내 두 귀를 의심하며, 얼얼한 뒤통수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한 푼도 못 벌고 있다?”

“예. 저 빌어먹을 작자들은 즐길 거 다 즐기면서, 제게 단 1코퍼도 주지 않습니다. 정말 괘씸하지 않습니까?”

“네가 분개하는 이유가 고작 그거라고?”

“조만간 기회를 봐서, 세게 한마디 할 겁니다. 재미를 보고 싶으면 1실버라도 내고···.”


짜악-


볼때기가 시뻘겋게 부어오른 주인장이,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벌벌 떨었다.


“뭐, 뭡니까! 대체 절 왜 때리십니까! 나쁜 짓을 하는 건 저놈들인데···.”

“너 이 새끼···.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정말로, 없던 인류애마저 사라질 정도다.

게임 내용이 어두워도, 너무 어두운 것 아니야?

그러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네놈들은 뭐야? 뭔데 흥을 다 깨뜨리고 있냔 말이야, 엉? 한참 즐기고 있는 거 안 보여?”


툭- 툭-


여급을 놀리고 있던 탈영병 중 하나가, 개머리판으로 내 가슴팍을 건드리며 시비를 걸어왔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이런 무법자 생활을 꽤 오래 한 것이 분명했다.


“곰의 자손이라는 슬라베스카군의 위용도 예전 같지 않네. 이런 쓰레기들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서 이렇게 방치하다니.”

“뭐? 쓰레기? 다시 말해봐. 뭐가 어쩌고저쩌고해?”


[→ 그 더러운 입 좀 다물지 않겠어? 악취 때문에 숨을 못 쉬겠으니까.]

[저런, 오해가 있었나 봅니다. 제 말은 여관이 더럽다는 말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이 새끼, 말하는 본새 좀 보게? 야, 야!”


아까보다 더 세게 휘두르는 그 개머리판을 참다못해, 한 손으로 부러뜨리고서 거칠게 탈영병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겁쟁이 새끼들아. 탈영했으면 조용히 숨어지낼 것이지, 어디서 행패야? 고블린이 따로 없네.”

“커억, 컥! 이것 좀 놔, 놔···.”

“놔달라고?”

“수, 숨이. 숨이 막···.”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도록 하지.”


내 손끝에 애처롭게 매달려 바둥거리는 탈영병을, 놈이 있던 무리 쪽으로 집어 던졌다.


“뒈지고 싶지 않으면 냉큼 내 앞에서 사라져. 같은 인간끼리 괜히 칼부림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제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장교가 여급의 춤을 멈추게 만들고 일어났다.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내 턱밑에 들이밀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가? 감히 우리 슬라베스카군을 고블린이라고 모욕하다니?”

“모욕? 어이가 없네. 오크가 무서워서 따뜻한 여관으로 도망쳐, 여자나 괴롭히고 있는 놈들이 무슨. 그게 고블린이지 인간인가?”

“우린 조국을 위해 봉사한 대가를 조금만 돌려받고 있었을 뿐이야.”

“개소리는 그만하고, 애들 데리고 어서 여기서 꺼져. 난 쓰레기들을 머리맡에 두고 자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다시는 우릴 모욕하지 못하게, 그 주둥아리를 찢어놔 주지.”


말로 해선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기세다.

레바테인과 아스칼론의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다, 쓰러진 탈영병이 떨어뜨린 라이플의 총검을 주워 든다.

이런 버러지들에게 성검은 너무 과한 무기다.


장교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검에 비해, 너무나 작고 가는 총검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겨우 그딴 걸로 날 상대하겠다는 거냐?”

“찌르고 벨 수만 있으면 됐지. 이거면 충분해.”

“이거, 이거. 나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하는구먼?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 멀쩡한 검들은 요리할 때나 쓰는 거냐?”

“아, 그래? 마음에 안 든다 이거지?”


들고 있던 총검을 던져 나무 바닥에 꽂은 다음, 장교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사양하지 말고 덤벼.”


레벨이 255쯤, 되면 이런 하찮은 놈이 내뱉는 도발 따윈 아무렇지 않을 거로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건 틀렸다. 난 일부러 힘을 숨긴다거나, 약자 코스프레하는 짓 따위는 선호하지 않는다.

제대로 붙어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드려야지.


휙-


휘두르는 솜씨를 보니, 한 손 무기 레벨이 높아야 4 정도?

아니, 검에 체중을 실을 줄도 모르는 걸 보니 2 정도겠다.

그 조악한 횡 베기를 가볍게 피하고, 레바테인의 칼자루를 확 움켜쥘 때였다.


슝-


타락한 장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깨에 꽂힌 화살을 움켜쥐며, 고블린처럼 울부짖었다.


“으악! 어깨에 화살이, 화살이! 으학!”


의외인걸? 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면 한여름은 나서야 할 때를 아는, 그런 행동력 있는 여자인 것 같다.

핵무기 개발에 협력해달라고 했을 때, 흔쾌히 받아준 것만 봐도 그렇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녀가 짐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최소한 성격만큼은 내 동료로서 합격점을 주고 싶다.


좋은 동료를 얻었다는 마음에, 기쁘게 레바테인을 뽑으려는데 한여름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화살통에 손을 집어넣으며, 반대 손으로 레바테인의 칼자루를 움켜쥔 내 손을 붙잡았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써서야 하겠어?”

“응? 뭐 하러 귀찮게 그런 짓을 해? 소 잡는 칼로 후려치면, 닭은 더 빨리 죽는 법이야.”

“에이, 명색이 성검인데···. 사람 피를 묻힐 순 없잖아?”

“쓰읍,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한여름에게 설득당한 나는 레바테인에서 손을 떼며, 근처에 있는 나무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좋아, 어디 한번 너한테 맡겨볼까?”

“···같이 싸우는 것 아니었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쓸 순 없잖아?”

“아니, 내가 아까 그렇게 말한 건···.”

“참고로 말하자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내가 섣불리 나서진 않을 거야.”

“어휴, 내가 괜한 소릴 했네.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둘걸···.”

“일종의 튜토리얼 같은 거라고 생각해.”

“튜토리얼? 뭘 대비하는 튜토리얼인데 이게?”

“앞으로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들은 이 자식들보다 훨씬 더 포악한 놈들이니까, 이참에 미리 훈련하는 셈 치자고.”

“예, 예. 정말 눈물이 나게 고맙네요.”

“고블린보다 못한 놈들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혼내주고 와.”


# # #


쪼르륵-


뱁새눈을 치켜뜬 채 내 잔을 채우고 있던 주인장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방 눈을 풀고 실실 웃었다.


“더 따라드릴까요?”

“됐어. 넘치겠다, 새끼야. 섞어 마실 거니까 적당히 따라.”

“끄응···. 그렇게 하겠습니다요···.”


비굴하게 몸을 숙이는 주인장을, 한여름이 거칠게 밀어내고 내 앞에 앉았다. 그녀는 눈두덩이에 멍이 들고 팔다리에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칫, 고블린보다 쉬울 거라더니···. 거짓말쟁이!”

“어허, 거짓말쟁이라니. ‘보다 못한 놈들’이라고 했지, ‘쉽다’라고는 안 했다?”

“정말 너무해도 너무 한다, 너!”

“내가 뭘?”

“그냥 하는 소리인 줄 알았더니, 진짜로 안 도와주네? 아고고, 눈탱이야···.”


구시렁거리며 인벤토리에서 치료 약을 꺼내는 한여름을 따라, 나도 인벤토리를 열었다.


[‘여명의 엘릭서’ 1개를 사용하였습니다.]


여명의 엘릭서 한 병의 가격은, 웬만한 상급 회복 포션 25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싸다.

물론 가격이 가격인 만큼, 효과도 그만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영롱한 보랏빛이 맴도는 엘릭서 병을 열어, 잔에 담긴 크바스(Kvass)와 섞어 한여름에게 건넨다.


“이거 마셔.”

“이게 뭔데? 소맥이야?”

“···소맥도 좋지만, 이건 여명의 엘릭서라고 불리는 포션이야. 회복 효과가 상당하지.”

“근데 그걸 왜 여기다 섞어서 줘? 그냥 마시면 되잖아.”

“전에 마셔본 적 있어? 이런 종류의 엘릭서?”

“아니.”

“그럼 내가 해주는 대로 마셔. 맛이 엄청나게 독해서, 처음 마시는 사람들은 토하고 난리가 나거든.”


미심쩍은 표정으로 잔을 받아서 든 한여름이, 크바스와 섞인 엘릭서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입가에 묻은 것을 혀로 날름 닦던 그녀의 안색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우욱, 이거···.”

“내 말이 맞지? 원액으로 마시면 토하고 난리가 난다니까?”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덮는다. 이건 뭐 그런 개념으로 만드는 건가···. 윽···. 화, 화장실이 어디···.”

“어, 조금만 참아. 다 토해내면 약효가 없단 말이야.”

“···나중에 네가 말아주는 소맥은 절대 마시지 않겠어. 비율 한번 더럽게 못 맞추네···.”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한여름을 애써 붙잡아놓고 있을 때였다. 쇠고랑을 차고 입마개를 한 고블린 두 마리를 끌고 온 어떤 남자가 여관으로 들어왔다. 거대한 도끼를 맨 그는 손에 쥔 쇠사슬 목줄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바닥의 핏자국을 닦던 여급을 향해 물었다.


“이봐, 아가씨! 가게 꼴이 엉망인데···. 장사하는 거 맞아?”

“저기, 그···.”

“아, 정상 영업하는가 보네. 저기 벌써 손님들이 계시네!”


여급에게 숙박료를 지불한 남자는 고블린을 질질 끌며, 우리가 앉아있는 곳으로 성큼 뛰어왔다.


“날도 추운데 모여앉아 온기를 나눠야지 않겠어?”


고블린 노예상 레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이 남자는 우리의 허락도 없이, 덜컥 한여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남자지만, 굳이 쫓아내진 않을 생각이다.


왜냐고?

게임의 법칙 하나.

자기 멋대로 말 붙이며 다가오는 NPC는 십중팔구 중요한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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