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용사는 핵무기가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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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유진숙
작품등록일 :
2023.09.03 11:30
최근연재일 :
2023.10.06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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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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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3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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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DUMMY

빵 봉투를 든 여자는 조교를 향해 쏜살같이 뛰어가 양어깨를 붙잡았다.


“으악! 페르미 지금 뭐 하고 있어? 제정신이야?”

“나 원 참. 내가 오늘은 출근하지 말라고 했잖아, 슈뢰딩거.”

“오늘 제국군에서 중요한 손님을 데리고 온다고 했는데, 네 조교인 내가 어떻게 안 나와?”

“아이고 머리야···.”

“네 성격에 혼자 빈손으로 덜렁 있을까 봐, 유명한 빵집에서 줄까지 서서 이렇게 빵까지 사 왔는데!”

“아, 몰라. 너 때문에 다 망했어.”

“망한 건 바로 나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줄 서지 말고 아무 데서나 적당히 사고 더 빨리 올걸!”


그러니까 지금 조교 행세를 하는 이 붉은 머리의 인간 여자가 내가 찾던 교수, ‘페르미’.

빵 봉투를 들고 온 저 고양이 귀를 가진 아웨란(수인)족 여자가 그녀의 조교, ‘슈뢰딩거’라는 말인가?

통상적인 교수와 지도제자를 벗어난, 주객전도된 이 둘의 관계가 나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떨어질 듯 말듯 아슬하게 책상 위에 서 있는 빵 봉투의 붙잡고, 페르미 교수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 페르미 박사, 그리고 슈뢰딩거 선생···?”


슈뢰딩거라는 이름의 여자를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석사님? 현실이든, 게임 속이든 그런 호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하니, 나 대신 빵 봉투를 이어받은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냥 슈뢰딩거 양이라고 불러주세요. 아직 박사 학위를 못 땄거든요. 하하···. 페르미, 뭐해! 용사님 손 떨어지시겠어!”


슈뢰딩거의 재촉에 등 떠밀리듯 악수를 받아준 페르미가 머리를 긁적였다.


“예, 뭐···. 반갑네요.”

“여긴 그레고리 준장, 그 옆엔 그의 전속부관 콜린 중령. 나는 뭐···. 따로 소개 안 해도 되겠지?”

“그게, 저···.”

“음?”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이런 건 아니고, 그 나름의 사정이···. 일단 들어오시죠.”


페르미의 똘끼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연구실 의자에 앉아, 그녀의 입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가 더 가관이었다.


“그래서, 그 사정이라는 것이 뭔지 들어볼 수 있을까? 일부러 조교로 위장하면서까지 우릴 돌려보내려고 했는지?”

“아, 그거 말이죠? 사실은 여러분들을 시험해보고 싶었어요.”

“시험?”

“예, 시험이요. 용사님께서 주도하는 그 무기 개발 프로젝트에 제가 정말 필요한 것인지 한번 살펴보려 했다고나 할까요?”

“나의 절박함 내지 간절함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음, 그런 셈이죠.”

“만약 우리가 다시 연락을 주지 않았다면?”

“그러면 그냥 참여를 안 할 생각이었어요. 그건 제가 필요 없다는 뜻이니까. 근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겨서 상황이 이렇게 됐네요?”


삼고초려가 따로 없네. 자기가 무슨 제갈량인 줄 아나?

좋게 말하면 자신감, 나쁘게 말하면 오만.

얼마나 잘난 연구자길래, 최강의 용사인 나를 이리도 떠보는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다.


“···레바테인 프로젝트가 뭘 만들려는 건지는 대충 전해 들었겠지?”

“물론이죠.”

“생각해놓은 건 있고?”

“당연하죠.”

“그게 뭔지 잠깐 보여줄 수 있을까?”

“슈뢰딩거, 가서 분필 몇 개 좀 가져다줄래?”


탓- 타닥- 탓-


하얀 분필을 건네받은 페르미가 검은 칠판 가득, 마도학 공식을 적어나가기 시작한다.

난 마도학의 ‘마’자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칠판 가득 적힌 공식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당연히 모른다.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페르미에게 이론 설명을 부탁한 것은, 그녀의 독창성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여러 교수들을 만나는 동안, 나중에 마스테마에게 전달해줄 요량으로 적어두었던 메모들과 페르미가 적어놓은 칠판의 내용을 비교해보았다. 중복해서 나오는 표현들이 꽤 많았으나, 확실히 내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이 있었다.


고순도로 농축한 에테르와 플로지스톤을 외부 충격으로 강하게 압축한다. 그 결과 마력 덩어리인 에테르와 플로지스톤이 임계질량에 도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연쇄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면, 쌓여있던 마나 에너지가 방출되며 거대한 마나 폭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페르미가 다시 의자로 돌아와 앉자, 칠판 옆에 있던 슈뢰딩거가 빨간색 분필로 ‘에테르’에 동그라미를 쳤다. 빵을 한입 가득 씹고 있던 그녀는, 그것을 물로 급히 넘기고 이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으흠, 물론. 흠, 흠. 에테르를 고순도로 농축하는 것보다 플로지스톤을 쓰는 것이 확실히 물량 확보에 용이합니다. 불에 타는 모든 것에서 추출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플로지스톤은 끊임없이 자연 발화하려는 성질이 있어 다루기가 힘드니까, 우선은 에테르를 중점적으로 쓰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페르미와 슈뢰딩거는 마스테마와 마찬가지로, ‘농축 에테르’와 ‘플로지스톤’을 핵심으로 꼽았다. 아까 낮에 만났던 나이 지긋한 연구자들도 그것들을 언급하긴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못했었다.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털어낸 페르미가 빵 하나를 집어 들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라피엘 님께서 개발하려는 그 무기는, 말하자면 이 빵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어요.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핵무기는 오븐을 터뜨릴 정도로 팽창력이 강하다 정도겠네요.”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너 혹시 사기꾼 아니야?]

[그러니까 만들 수 있다는 거야, 못 만든다는 거야? 요점만 말해.]

[→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인다.]


이럴 땐 그냥 알아들은 척 하는 게 상책이다.

어차피 검증은 내가 아니라 마스테마가 할 일이니까.


눈치가 재빠른 그레고리 준장은 나를 따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파이프 담배를 내려놓으며 팔짱을 풀었다.


“어떻습니까? 저 페르미라는 교수, 괜찮은 인재 같으십니까?”

“그 옆에 있는 슈뢰딩거라는 여자도 상당히 괜찮아 보이는데···.”

“예? 저 아웨란족 말씀이십니까? 저 여자는 좀···.”

“···뭐야, 너도 더러운 인종차별주의자였나?”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책임급 연구자에 박사 학위도 없는 사람을 세우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제 뜻은 그거였습니다. 인종차별주의자라니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어쨌든 페르미 교수를 발탁하도록 하지. 저 슈뢰딩거라는 연구원도 함께.”

“확실하게 결정하신 겁니까?”

“어.”

“알겠습니다. 상부에 그렇게 전하도록 하죠.”


이 짧은 면담 자리를 거치고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페르미를 책임급 연구자로, 슈뢰딩거를 거기에 준하는 인원으로 발탁하겠노라고.

마스테마를 도와 핵무기를 만들 인재가, 바로 이 대학의 후미진 구석에 둘이나 있었다.


그레고리 준장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마지막 하나 남은 빵을 집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볼일도 끝났겠다 가볼까요?”

“벌써?”

“오늘 제국 아케인 안보국 국장님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어서 말입니다. 용사님께서 더 계시고 싶으시면 더 계셔도 좋습니다만, 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같이 일어나자고. 나도 슬슬 돌아가려던 참이었으니까.”

“저희와 함께 이동하시면 여러모로 불편하실 테니, 모실 차량을 따로 요청해놓도록 하죠. 그럼 바빠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레고리 준장을 따라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자, 페르미 교수가 슈뢰딩거를 불렀다.


“용사님 가신단다. 잘 배웅해드리고 와. 자, 여기 빵도 좀 싸서 드리고.”

“헐, 설마 나 혼자 보내려고?”

“지금 막 프로젝트 관련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단 말이야. 까먹기 전에 메모해놔야지.”

“아, 그러시겠지. 알았어, 나. 혼. 자. 갔다 올게.”

“비꼬기는···. 부탁해.”


# # #


슈뢰딩거의 배웅을 받으며 타고 갈 차량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라피엘 님?”

“무슨 일이지, 슈뢰딩거 양?”

“외람된 말씀이지만,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답해줄 수 있는 거라면 답해주도록 하지.”

“라피엘 님은 왜 그런 어마무시한 무기를 만들려고 하세요? ‘핵무기’ 말입니다.”

“공문을 자세히 안 읽어봤나?”

“아뇨, 아뇨. 제가 알고 싶은 건, 용사님의 생각이랄까요?”


학자라서 그런가, 별것이 다 궁금하네.

여태껏 나에게 마왕군과 싸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온 사람은 없었다.

슈뢰딩거의 질문에 할 이야기가 많이 있었지만, 일단은 적당히 답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 마왕을 해치워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오호, 그래서 뿌리까지 모조리 뽑으려는 생각으로?”

“뭐, 그렇지. 난 용사니까.”

“용사니까라···. 별로 제 기대만큼 재미는 없네요.”

“맞아. 별로 재미없어.”


슈뢰딩거는 구두로 자기 앞의 흙을 파고 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떠돌던 용사와, 평생을 상아탑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던 학자.

그 어떤 접점도 없는 둘 사이엔 침묵만이 맴돌고 있다.


이 분위기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슈뢰딩거가 땅을 파다 말고 나를 다시 불렀다.


“라피엘 님?”

“또 무슨 일이지?”

“기다리는 동안, 제가 이야기나 하나 해드릴까요?”

“···뭔데?”

“옛날 옛적, 에버가드 바깥에 살던 어떤 여자아이에 관한 이야기예요.”

“해 봐, 한번.”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었나? 이름도 없는 어느 마을에 한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어요.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양분 삼아 무럭무럭 크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마왕군이 쳐들어왔고, 마을은 쑥대밭이 됐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던 순간, 기적이 일어났어요. 용사님이 제국군을 이끌고 온 것이에요. 비록 부모님을 잃었지만, 목숨은 건지게 된 아이는···.”

“···혹시 네 이야기냐?”

“페르미 이야기예요.”

“너무 차갑게 느껴지더라도 오해는 말고 들어. 내가 그런 식으로 구한 사람이 4열 종대 앉아 번호로 루트리가 광장 두 바퀴 반이야. 그녀를 기억 못하는 건 당연···.”

“아니요.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만약 스카우트 제의가 다시 안 왔어도, 페르미가 제 발로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을 거라는 말이죠. 마왕군을 향한 그녀의 복수심은 플로지스톤보다도 뜨겁거든요.”


끽-


언제 도착했는지, 검은 차 한 대가 내 앞에 정차해있었다.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나를 마중하며 고개를 숙였다.


“라피엘 님. 저는 그레고리 장군님께서 보낸···.”

“어, 뭐시기 하사나 중사겠지. 와줘서 고마워.”

“앗, 예···. 어서 타시지요.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슈뢰딩거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서둘러 차량에 올라탔다. 출발하기 직전, 뒷좌석 창문을 내려 그녀에게 빵 봉투를 건넸다.


“참, 돌아가면 페르미에게 전달해줘.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어도 좋다고.”

“예? 빵은 안 가져가세요? 이거 정말 맛있는···.”

“오늘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준 너에게 주는 답례야. 그리고 아까 보니까 너 빵을 엄청나게 좋아하던데.”

“하하···. 그럼 조심히 가세요.”


부릉-


복수심.

그것은 지성체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슈뢰딩거의 이야기 덕분에, 페르미를 이 프로젝트에 참여시켜야겠다는 결심이 한층 더 견고해졌다.


이른 저녁이 되어 도착한 대저택의 입구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한여름이 일찌감치 저녁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환상적인 음식들이 차려진 저녁 식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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