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금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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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2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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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0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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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010306 청색의 눈

DUMMY

3201년 3월 6일 화요일.


하.. 정말 오랜만에 일기란 걸 써본다. 떨리는 감정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지만, 애써 정신을 차리고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일단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나 자신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나의 이름은 나탈리 안보렌이며, 톨트림 남부지방의 소도시인 바르크바의 해변가에서 혼자 작은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 나이는 만으로 19살을 넘긴 상태다. 부모님은 어디 가고 갓 성인이 된 내가 여관을 운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곧바로 눈치챘을 거라고 믿는다. 두 분 다,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각자 다른 이유로.


이것에 대해선 앞으로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충분히 있을 테니까, 나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내가 지금 기록하고 싶은 건 나의 과거의 기억들이 아니라, 방금 일어난 현재의 일에 대한 거니까.


하... 3년 전까지만 해도 날마다 일기를 적었었는데. 그렇지만 고등학교 1학년이 지나가던 겨울을 기점으로 지금 내 빛바랜 일기장은 3년전의 그 날에 멈춘 채로 전혀 기록되지 않은 채로 먼지가 수북히 쌓여 저편 책장에 놓여져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6개월간의 방황과 어둠의 통로를 지나치는 과정에서 도무지 글을 쓸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고, 그 통로를 지나쳐 정신을 차리고 여관 주인이 되었을 무렵부턴, 늘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이 전혀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새벽에 꾼 너무나도 이상한 꿈이 3년만에 새로운 일기장을 펴게 만들었다. 그 꿈에 대한 충격이 여전히 내 기억속에 생생히 현실처럼 머릿속에 남아있지만, 꿈이기 때문에 바로 몇시간만 지나도 모든 내용을 까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지금 꿈의 내용을 글로 써서 기록해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그깟 꿈 한번 이상한 꿈을 꿨다고 무슨 유난을 이렇게 떠냐고 물어볼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맞다. 3년동안 살면서 오늘 외에도 많은 꿈을 꿔봤다. 어쩌면 오늘의 꿈도, 그냥 놀라서 잠시 깬 수많은 꿈들 중 하나일거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꿈과, 오늘의 꿈은 너무나도 다른 차이점이 몇개가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꿈이란 것은 무의식중에 남아있는 과거의 기억들이 뒤죽박죽 섞여져서 무의미한 환상으로 변해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간단했다. 꿈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게 되어 깨게 되면 환상처럼 흩어지며, 정말 몇몇 특별한 사람들의 경우가 아니면 꿈이 현실이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밤에 꿨던 그 꿈은 그런 평소의 꿈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일단 꿈이, 너무나도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꿈이라면 깨자마자 희미해져서 아주 극소수의 기억의 파편들만 기억이 나야 정상인데, 분명 지금 현실로 돌아왔는데도 오늘 꾼 꿈의 기억들이 마치 어제 진짜 일어난 일처럼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다. 꾼 꿈의 내용을 이렇게 온전하게 다 기억하는 경우는.. 과장이 아니라 오늘이 정말 처음이었다. 20살 평생 이 꿈처럼 이렇게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느껴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노라고, 유일신이신 마이더리스님께 맹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든 말든, 결국 꿈이 꿈에서 끝난다면 그래도 이 새벽 4시에 일어나 머리가 산발이 된채로 허겁지겁 이 일기장을 적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새벽부터 호들갑을 떨며 이 꿈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한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 꿈은 너무도 불쾌하게도, 나의 미래에 대한 너무나도 불길한 예언을 담은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 꿈이 정말 현실화가 된다면, 나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이 비참하게 파멸당한다는데.. 어떻게 이 예언에 대한 꿈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아니라, 내 소중한 친구들인 카트린, 안톤, 빅토르, 보리스, 알리치, 제미크 외 거의 모든 내가 사랑하는 마을 사람들이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진다는데.. 내가 어떻게 그 내용을 일기로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아니라.. 사랑하고 아끼는 내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을 위해 꿈에 대한 기록들을 적어놓으려는 것이다. 난 절대, 나의 미래는 물론이고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의 미래까지 어둠의 격랑속에서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파멸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젠장.. 서두가 너무 길어서 이미 조금씩 까먹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원래 좀 말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이제 쓸데 없는 말 다 걷어치우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하아.. 어디부터 말하는 게 좋을까? 바로 꿈으로 넘어가? 아니야.. 일단 자기 직전부터 천천히 묘사해보자. 나틸리 안보렌.. 침착하게 어젯 밤 기억부터 천천히 되새겨봐.. 어제 밤 자기 전엔 내가 어떤 기분이었었지?


그래.. 어제도 여느 때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 아니지, 다른 날보다 훨씬 쾌적했다. 술주정하는 손님 하나 없이, 신사적인 손님들이랑 재밌게 대화도 나누다가, 교대시간인 밤 12시가 되기 직전 엘비라랑도 재밌게 마을 소문에 대해 대화를 하고, 가뿐한 마음으로 씻고, 2층에 있는 작지만 아늑한 내 방으로 들어가서 눕자마자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때까진, 이렇게 일기로 기록할 필요가 전혀 없는 너무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하루로 끝날 것 같았고, 분명히 그래야 했다.


근데.. 지금이 4시니까.. 아무래도 한 2시쯤에 꾸기 시작한 그 꿈때문에 오늘 하루가 절대 잊을 수 없는 하루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침대에 누워, 1분도 안되서 잔 다음, 난 갑자기 눈을 떴다. 처음에 난 늘 그렇듯이 7시 까지 푹 잔 다음 잠에서 깨어난 줄 알았다. 그만큼 의식이 현실의 느낌과 별다를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머지않아 나 자신이 현실속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사방이 새하얀 안개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내 방 안에 안개가 가득 차 맨앞도 안보이는 경우가 있을수가 없잖아? 내방에 작은 난로가 있긴 했고, 거기서 연기가 이렇게 났을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연기에 질식해서 의식을 차리지도 못하고 죽었겠지.. 그건 절대 아니었다. 뭔가.. 뭔가 너무 이상했다.


천천히.. 이 곳은 절대 내 방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왠지 바깥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방에서 잘만 자던 내가 왜 갑자기 밖으로 나와 있는 거지? 나.. 설마 없던 몽유병이 생긴 거야? 그럴 리가! 요즘 스트레스 받는 게 단 하나도 없단 말이야! 요즘 월매출이 700블랑 이상 나가며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데! 그리고, 설마 갑자기 몽유병이 생겼다 해도, 2층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사이에 엘비라가 그걸 보고 놀라서 날 흔들어 깨웠겠지! 몽유병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난 왜 갑자기 뜬금없이 잘 자다가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안개속에 갇혀 있게 된 거야! 진짜!


[N 엘비라! 엘비라! 라즈찐! 얘네들, 도대체 뭐하는 거야! 여관 주인인 내가 갑자기 이런 이상한 안개 속에 갇혀 있는데, 직원인 너희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이 책임감 없는 녀석들! 다 짤라버릴까보다! 에이씨.. 슬슬 겁나는데? 도대체 여긴 어딘 거야, 정말?]


괜히 죄없는 엘비라와 라즈찐 탓을 하며, 난 주변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와.. 여관이 해안가에 있어서 비 잔뜩 온 다음 해안가에 안개가 잔뜩 있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이정도로 앞을 분간 못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필사적으로 사방을 이리저리 바라봤지만,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도대체가!


이 불길한 공간 속에서 계속 서 있다간 아무 일도 없는 건 물론이고, 왠지 정신도 나가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이 지독한 안개속을 성큼성큼 걸어나가며 뭐라도 보길 바라며 주변을 아주 샅샅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계속 발걸음을 옮겨도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날아다니는 날벌레 하나 보질 못했다. 여긴 정말..안개와 어둠만 존재하는 세상인 것 같았다.


이렇게 생명력 하나 없는 공간은 슬슬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죽음과도 같은 고요와 공허가 내 마음속을 천천히 짓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점점 미지의 공포가 스며들고 있었고, 이러다가 진짜 울어버릴 것 같았다. 아니, 이제 진짜 울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달려보기 시작했다. 성급하게 달리다가 뭐에 부딪쳐도 상관없었다. 당장 무서운 걸 도무지 참을 수가 없는데 뭘 어떡해?


그런 간절함이 마침내 통한 걸까? 안개가 약간 옅어지면서, 발에 뭔가가 느껴졌다! 내 갈색 신발 밑으로 기분좋은 돌의 마찰소리가 들려서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그러고보니 지금 나는 며칠 전 교회에 갔을 때의 평상복과 이쁜 구두를 입고 있었다! 뭐야.. 나 이 옷 분명히 3일 전에 입고 빨래해서 걸어놨는데, 어떻게 지금 입고 있는 거지? 엘비라가 입혀줬나? 아..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구! 도대체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내 밑으로 자갈길이 놓여져 있었다. 뭐야? 탈출구인가? 희망을 가지고 조금 더 걸어가자, 큼지막한 회색 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질반질해 보이는 원형으로 잘 깎여져 있는 돌들이었는데, 부잣집 마당에 깔려 있을 것 같은 그런 돌들이었다. 뭔가.. 이 이쁜 돌들을 걸어가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차분하게 그 돌이 놓여진 방향에 따라 길을 걷는데, 갑자기 안개가 완전히 걷혔고, 드디어 완전히 주변의 전경들을 볼 수 있었다. 와!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이, 하늘 뿐만 아니라 발 아래까지 아득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무지갯빛 오오라와, 아주 커다란 별빛의 무리까지 보였는데.. 그 전경은 나 혼자 보기 너무 아까워서 내 단짝친구인 카트린에게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 중학교 3학년때 카트린과 밤마다 별빛을 바라보며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때가 생각나, 난 아까전에 느꼈던 공포는 완전히 있고 입을 헤 벌리고 웃으며 그 별빛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아.. 이젠 왠지 무섭지가 않았다. 왠지 동화속 주인공이 되어, 별빛 가득한 하늘을 걸어 천사와 만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나 정도면 착하니까, 충분히 천사를 볼 만하지! 아니야, 저기 저 별자리가 된 반신들, 그러니까 유켈드 오리플, 성 엘지야, 미노스 타이즈벳같은 위대한 위인들이 나한테 말을 걸어줄려나? 난 오만가지 망상을 하며, 발랄한 걸음걸이로 그 별빛 속 돌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노래까지 부르며 걸어갈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몇분을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30분 이상은 걸었던 것 같다. 이제.. 드디어 저편에서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흰색 점 정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새하얗게 반짝이는 게, 누가 봐도 저건 절대 나쁜 게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돌길도 쭉 저 빛을 향해 나 있었다. 망설일 게 뭐가 있어? 저곳에 있는 누군가가 날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생각에, 나는 이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저 빛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 기대되서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N 아! 저기가 혹시 동화속에서나 보던 꿈과 환상의 성? 뭐 그런 거야? 천사들이 거주하는 성이 저곳일까? 아아.. 빨리 가보자, 빨리!


열심히 뛰었지만, 생각보다 거리가 너무 먼지 아직도 너무 작게 보였다. 하지만 그나마,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이던 것이 이젠 대략적인 형태정돈 보이기 시작했다. 직사각형의, 빛나는 흰색의 문! 그렇다.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소박한 데다가 반짝이는 흰색의 문이었기 때문에, 전혀 평범해 보이지가 않았다. 저 문 너머에.. 뭔가가 날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열심히 달렸다. 저기 너머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멀어도 너무 멀었다. 10분을 그렇게 달렸는데도 아직도 20분 이상은 족히 달려야 할 것 같았다. 아.. 불렀으면, 좀 가까이에 놓아주지 왜이렇게 먼 곳에 날 데려다 놓은 거야, 정말! 나는 짜증이 나면서도, 그래도 열심히 달렸다. 이렇게 30분 넘게 달렸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바로 욕을 할 줄 알아! 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낭만의 문은 닫히고, 비극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당장 그때는 차마 알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뭔가가 잘못되도 완전히 잘못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갑자기 주위의 기류가 순식간 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를 싸늘한 느낌이 등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누군가가 살의를 품고 날 쫓아오고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자마자, 사방에 드리워져 있던 그 아름다운 별빛 무리들도 순식간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빛 한 점 없는 칠흑같은 세상과 더불어, 안개까지 다시 슬금슬금 땅 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세상은.. 처음 이 세상에 왔을때와 똑같은 그 불쾌한 세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충격에 잠시 멈춘 나는, 혹시 그 흰색의 문마저 사라졌나 싶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 다행히 그 문은 여전히 반짝이며 왠지 모르게 날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천천히 빛을 잃어가는 게 보였다. 수많은 별무리를 삼켜버렸던 암흑이, 유일하게 남아서 버티고 있는 흰색의 문까지 잡아먹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안 돼, 그래선 절대 안돼지! 저 문의 빛까지 사라지기 시작하자, 당연히 본능적으로 나는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고, 잠시만 시간이 지나면 저 문을 열어볼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었다. 당연히, 필사적으로 사라져가는 저 문을 향해 뛰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틸리 안보렌, 이 똥멍청이 녀석아! 하.. 난 바보같이, 그 당시에 왠지 누군가가 날 쫓아오고 있다는 느낌에 필사적으로 그 느낌을 받고 있는 방향을 찾기 위해 멈춘 채로 주변만 바라보는 멍청한 짓을 했다.


잠시동안 그렇게 멍청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뒤늦게야 정신을 차리고 문쪽을 다시 바라보았는데, 문이 갑자기 잠시 열렸다. 그리고, 온몸이 빛나는 어떤 한 여자가, 나를 향해 손짓했다는 걸, 난 모든 걸 걸고 장담할 수 있다. 그걸 본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문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 여자를 만나야 해, 반드시!


이제 문은 빛을 완전히 잃고, 슬슬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난 중학교 체력장때 이후로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뛰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필사적으로 뛰었지만, 여전히 문은 멀어도 너무 멀리 있었다. 한 10분만 더 뛰어가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10분이란 시간이 더 주어졌으면 저 문이 사라지기 전에 분명히 그 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테지만, 1분 정도 더 달렸을 때, 그 문은 마침내 어둠에 완전히 잡아먹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이 세상 속에서 사라졌다. 물론, 발아래에 놓여져 있던 돌길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난 어둠의 세상 속에 다시 갇혀 있게 된 것이었다. 심지어 이젠 안개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왜 처음부터 뛰지 않은 거야.. 왜 중간에 이상한 느낌때문에 멈춰서 시간을 죽인 거야! 난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멍청한 짓을 한 나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지만, 그래봤자 한번 사라진 문은 더이상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난 다시는.. 그 문 너머의 나를 부르던 여자를 만날 수가 없으리라.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은 채로, 거의 30분을 달리기만 해서 지치기도 완전히 지쳐버린 난, 왠지 억울해서 울먹이며 주변을 바라보다가, 내 뒤편에서 다시 느껴지는 살의에 놀라서 뒤를 바라봤다가, 두개의 파란 불빛이 나를 향해 빠른 속도로 따라오는 걸 보고 놀라 비명소리를 지었다.


[N 꺄악! 저, 저게 뭐야! 저 불빛은 뭐냐구! 도대체!]


그 불빛은, 청색의 빛을 띠고 매우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온화함의 느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분노를 담은 것만 같은 불길이었다. 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게 도대체 뭔지 몰라서 한참 바라봤던 난, 잠시 후 그 두개의 불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청색의 두개의 불길은 바로, 어떤 ‘존재’의 눈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눈은 내 오감을 곤두서게 할 정도로 너무도 강렬한 악의를 가지고 나를 향해 따라오고 있었다.


아니,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저 존재가 날 죽일듯이 바라보며 따라오는 거야? 와.. 난 너무도 황당하면서도, 너무도 무서워서 차마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달리 도망쳐서 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유일한 탈출구로 보이던 곳은.. 내가 멍청하게 시간을 죽이다가 들어가지 못해서 사라져 버렸으니까. 다시 난 그 문에 들어가지 못한 나 자신을 한참 자책하면서도.. 도대체 저 새끼는 왜 나를 저런 눈빛을 보내며 추격해 오는 건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일어섰다.


&&&


하지만.. 멀리서 봤을때도 무서웠는데, 가까이서 보니 진짜 무서웠다. 악마같은 눈빛 두개가 날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눈앞에서 보여지는 그 적의와 위압감이 불러일으키는 그 공포는,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공포였다. 그 눈빛의 불꽃이 나를 집어삼켜버리거 해코지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 눈빛이 날 설마 어떻게 할까봐 덜덜덜 떨며 몸을 움츠린 채 눈마저 감아보았다.


근데.. 그렇게 잔뜩 겁먹은 채로 눈까지 감고 무력하게 서 있는데도, 저 눈빛은 나한테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자 나도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무섭게 다가와서는 가만히 서 있는 거야? 설마.. 말을 못하나? 에이,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눈도 아프고.. 쓸데없는 긴장도 계속 해야 되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난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다가오는 악을 두려워하면 악에게 잡아먹힐 뿐이다. 악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니가 먼저 검을 뽑아라라는 격언이 있잖아? 내가 검을 먼저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짝 눈을 뜬 후, 말을 걸려고 했는데... 어우.. 다시 보니 또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진짜로! 난 으악! 비명을 지르며 눈을 다시 감았다가, 고작 꿈인데 이 눈빛 두개가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해져서 다시 똑바로 눈을 뜨고, 정면 1,2미터 거리 내에서 엄청난 크기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존재를 나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아직도 너무 떨리긴 했지만, 아까전보다는 훨씬 낫긴 했다. 나의 용감한 반응에 약간 놀랐는지, 활활 타오르던 파란 눈빛이 살짝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존재가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 하찮은 존재여..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N 꺄악! 마, 말을 하잖아?]


사납고 거친 그 목소리... 마치 심연에서 울려퍼지는 것 같은 악마같은 불쾌한 목소리! 난 그 소리가 보내는 거대한 울림과 불쾌감에 압도되어 다시 눈을 감고 싶어졌다. 하지만, 또다시 눈을 감고 겁쟁이 행동을 하면, 이번엔 완전히 날 얕보고 뭔 짓이라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떨리는 눈을 억지로 뜨고 그 불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틸리 안보렌.. 용기를 가지자! 살면서 별의별 불행이란 불행은 다 겪어봤잖아? 이미 인생의 쓴맛을 잔뜩 본 주제에, 고작 꿈속에서 나온 이상한 눈빛따위에 굴복할 거야? 흥! 아무리 현실감이 느껴진다고 해도 여긴 꿈 속이야.. 저 놈이 해코지를 해봤자 꿈속이라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좀 용감하게 가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시절, 질이 나쁜 남자애들과 맞짱을 떠 코를 부러뜨렸을 때, 장장 3년간이나 빅토르 아버지한테서 그 지옥같은 훈련을 버텨냈던 때를 회상하며, 난 이성을 어느정도 회복했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저렇게 딱 봐도 악마같은 존재한테 내 인적사항을 함부로 말할 정도로 난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을 알게 되면 날 추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 이름이나 대기로 했다. 요즘 신문에 가장 이쁜 신인배우 이름이.. 카차.. 오르조프였었는데? 엘비라가 자기가 카차 오르조프 닮지 않았냐며 헛소리를 해서, 내가 속으론 웃음이 터졌지만 맞춰준다고 카차 오르조프보다 훨씬 이쁘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맞아.. 카차 오르조프랑, 엘비라랑 고양이 상인게 조금 닮긴 했지.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엘비라, 일기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니가 아무리 고향에선 가장 이쁜 축에 속한다고 해도 신문에 나올 정도로 이쁜 그 배우보다 이쁘진 않지..


[N 음..카챠 오르조프 입니다. 이, 이름 이쁘죠? 헤헤헤..]


솔직히 말하면, 신체쪽은 엘비라보단 내가 그 여배우랑 많이 비슷했다. 빨간 빛이 도는 머리와, 168CM의 여자치곤 큰 키가 나랑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모는.. 정말 다르긴 했다. 그래! 그 여배우가 훨씬 더 예뻐! 됐어? 그래서 저 놈이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눈치를 챌까 너무나도 두려웠지만, 다행히 저놈은 그런 쪽엔 전혀 관심이 없는지 아무 반응 없이 나를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거짓말로 둘러댄 이름이긴 하지만, 내가 먼저 이름을 말했으면, 너도 이름을 말하는 게 예의 아냐? 나도 저놈의 이름을 알고 싶어졌고, 이제 어느정도 용기가 생겨서 곧바로 그 눈빛에게 이름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그 사납고 무서운 파란 불길의 눈빛처럼 까다롭고, 사나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N 실례지만,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 하찮은 벌레같은 년, 넌 내 이름을 알 필요도, 물어볼 권리도 없다! 넌 그저 나의 질문에 대답할 권리만 있다! 다시 한번 나한테 질문하면, 난 더이상 널 신사적으로 대해주지 않겠다. 너의 온몸을 나의 눈빛의 불길로 갈갈히 불태워주도록 하지!]


[N 아, 죄, 죄송해요! 이제 절대 안 물어볼테니 제발 분노를 멈춰주세요!]


사그라들었던 강렬한 악의가 거대한 불빛으로 다시 활활 타올랐고, 맙소사! 내 눈앞으로 뜨거운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고통은 너무도 현실적이었고, 진짜 그 눈에 손이 닿으면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이제 저 눈빛이 실제적인 고통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분노 가득한 협박이 내 고막을 찢어놓을 것처럼 귓속에서 울려퍼지자, 난 다시 공포에 움츠려들며 울먹이는 표정이 되었다.. 아.. 내가 20살 평생 얼마나 착하게 살고 있는데, 이런 이상한 악마같은 놈이 갑자기 나타나 날 협박하고 있는거야, 왜, 왜, 왜!


난 저런 증오의 눈빛을 받아낼만한 잘못을.. 절대 한 적이 없었다. 그래..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아주 없다고 볼 순 없다. 고등학교 1학년때, 내 인생 최악의 동창이자 원수나 다름없는, 그 머리통이 소대가리처럼 큰 그년의 크고 표독스러운 눈빛을 학기말 내내 받아본적은 있긴 했다. 그마저도, 그놈이 잔뜩 잘못해놓고 괜히 나한테 증오의 눈길을 쏟아낸 거였지, 내가 잘못한 건 정말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이렇게 법없이도 살 만큼 떳떳하게 살아온 나한테, 왜 저놈은 저런 살의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거지? 난 알고 싶었다. 도대체 왜 저 놈이 나한테 와서 저 증오의 눈빛을 발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N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 저를 마치 철천지 원수를 보듯이 바라보고 있군요. 근데요.. 도대체 왜 날 그렇게 바라보는 거에요? 제가 댁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구요! 야, 너 설마 오블론스끼야? 고등학교때 그렇게 날 못살게 만들어놓고 또 나한테 와서 날 해치려고 하는 거야? 그런 거야! 이 망할 년아!]


[? 난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단단한 오해를 하고 있군. 난 인간이라는 한낱 미물의 존재가 아니다.. 딱 보면 모르겠느냐? 난 너를 벌레처럼 죽일수도 있는 힘을 가진, 인간 그 이상의 존재이다.]


[N 그래요..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어요. 눈빛은 좀 똑같아 가지구요. 그 하찮은 년이 이렇게 강력한 힘을 내뿜는 존재가 될 리가 없죠. 그러면.. 도대체 당신은 누구에요? 혹시, 이전에 한번이라도 만나본 적이 있는 사이인가요?]


[? 난 오늘 너를 처음 봤다.]


[N 저도 그런 것 같네요. 아니.. 오늘 처음 보는 거면.. 도대체 왜 생판 처음 보는 날 죽일듯이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러는 거에요! 도대체가! 제가 잘못한 게 혹시라도 있으면 빨리 말해봐요. 제가 진심으로 사과할테니 빨리요!]


그 말에 청색의 눈의 폭이 약간 좁혀졌다. 나의 짜증섞인 독촉에 제대로 당황함을 느낀 것 같았다. 이 쪼끄만한 게 겁도 없이 소리를 치네? 라는 심정이었을까? 어쨌든, 울먹임과 간절함과 답답함, 피로함의 감정이 한데 섞인 내 표정을 잠시 유심히 바라보던 그 불빛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이전보다는 차분함이 느껴졌다.


[? 처음엔 도대체 그놈들이 왜 너같은 하찮은 년은 이곳에 소환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군. 니년.. 여자치곤 너무 겁대가리가 없군.. 그놈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이야.. 과거의 역사의 수레바퀴대로.. 그 수레바퀴를 자기들의 방식으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용감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니년을 이곳으로 부른 거겠지.. 하지만, 저번엔 당했을지 몰라도 이번엔 결코 당하지 않겠다! 충분한 힘을 얻게 되면.. 니년과, 널 이곳으로 소환한 것들 모두! 고통과 지옥의 화업 속으로 데려가도록 하겠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누가 날 불렀다는 거야! 저번에 누군가한테 신나게 얻어터지기라도 했나? 그리고, 뭐? 역사의 수레바퀴를 내가 왜 굴려야 하는 건데? 하는 말이 죄다 수수께끼같은 말 투성이라, 난 너무 억울하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아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눈빛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좀 명쾌하게 말을 좀 해봐! 이 눈알악마야!


그렇지만 분명 저 청색의 눈의 답변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게 하나가 있었다. 누군가 나를 이곳으로 소환해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존재는 당연히, 아까전에 문을 열고 나한테 손짓하던 그 사람인 게 분명해 보였다. 아아.. 저놈의 반응을 보니, 그 문을 열고 그 존재를 만났어야 했어! 난 다시 너무 후회가 되서 얼굴이 일그러진 채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N ...아까전에 문이 하나 보이던데, 그 문 너머에 있던 사람이 날 부른 거죠? 눈깔 아저씨, 맞아요? 아니에요?]


[? ...]


[N 맞군요? 거기서 내가 누군가를 만났어야 하는 거군요... 맞죠?]


[? ...]


[N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맞나 보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 니년.. 날 가지고 놀고 있구나.. 난 더이상 너같이 벌레같은 년의 조롱을 참아줄 생각이 없다.. 이 참에 죽여주겠다! 비극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년이라면 바로 여기서 제거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말한 후.. 순식간에 다시 눈빛이 타오르며 온몸이 뜨거운 고통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이 작열통이라더니.. 그 말이 정말로 사실이었다! 순식간에 온몸의 혈관과 신경에 타고든 끔찍한 고통에 난 정신을 잃고 내가 들어도 끔찍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고통과는 별개로 몸은 아주 멀쩡했다. 불길 속에서 고통은 온전히 다 느끼고 있는데, 몸통은 어쩜 이렇게 깨끗할 수가 있지? 아..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거지? 꿈이면.. 설마 내 상상력으로 물을 만들어내 이 불길을 끌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나 싶어서 하늘 위로 물이 쏟아지길 바랬는데.. 생각했던 그래도 차가운 물이 쏟아지며, 내 전신이 축축해졌지만 동시에 시원해졌다. 아, 꿈 맞네!


망할.. 저 개눈깔 때문에 잘 자다가 무슨 봉변이야? 이게? 편했던 잠자리를 고통스런 악몽으로 만든 저 눈깔에게, 난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 ...어떻게 버텨낸 거지? 도대체 어떻게 버텨낸 거야!]


[N 뭐! 이 개새끼야! 꿈속이니까 당연히 버텨내지! 이 ○발놈아! 오우! 아파 뒤지는 줄 알았네! 꿈속인데 왜이렇게 고통이 진짜같은 거야?]


[? 뭐? 나한테 개새끼라고? 쓰레기만도 못한 년이.. 나한테 개새끼라고! 다시 한번 그 불길의 고통을 느껴보게 해줄까? 이년아!]


[N 아, 정말 죄송해요! 욕해서 미안해요! 너무 아파서 정신을 좀 놓아버렸나 봐요!]


참 비굴해 보이겠지만.. 잠시지만 진짜 죽을 것처럼 아팠기 때문에, 난 다시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무릎까지 꿇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참.. 한심해 보이지? 내가 봐도 좀 그래 보인다. 하지만 너무 아픈 걸 어떡해! 어쨌든, 다행히도 그 눈빛은 싹싹 빌고 있는 나를 오만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휴.. 지친다, 지쳐! 저 눈빛이랑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 거야?


[N 위대한 존재시여.. 제가 너무 궁금한 게 많아서, 질문 좀 몇가지 하고 싶은데.. 해도 되나요?]


[? 해봐라. 단, 단 두개만 받도록 하지. 난 시간이 별로 없다. 질문을 다 받은 후, 너에게 마지막 선고를 하도록 하고 난 떠나야 한다.]


선고라니? 그 선고라는 말이 너무 불쾌하게 느껴졌지만, 난 일단 궁금한 것부터 물어보기 시작했다.


[N 여긴 분명히 꿈 속인데, 어떻게 이렇게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거에요? 아까전에 몸이 불타올랐을땐, 진짜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아파서 정신줄을 놓을 뻔 했어요. 전 살면서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은 처음이에요! 진짜? 위대한 존재시여.. 여긴 그냥 단순한 꿈이 아닌거죠? 여긴 설마.. 영혼의 세계, 뭐 그런 거에요?]


눈빛은 차분한 눈빛으로, 일정한 음조로 답변을 했다.


[? 그렇다. 이곳은 단순한 꿈의 공간이 아니다. 넌 니 자신이 가진 정신적 힘을 매개체로 해서,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다른 차원으로 소환된 것이고, 이 곳에서 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이곳뿐만이 아니라 현실에도 분명히 실재하는 존재다. 니가 허튼 짓을 하게 된다면.. 그날부터 난 널 추적하기 시작할 것이다.]


낮은 음조지만 사악한 협박의 내용이었다. 나는 무서워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니, 현실에서도 존재한다고? 정말이야? 어휴! 다행이다! 정말! 아까전에 실명을 그대로 말했으면, 정말 내 인생이 그 실수 하나로 완전히 망해버렸을 지도 모르잖아?!


[N 어휴.. 허튼 짓 안하면 될 거 아니에요! 자.. 이제 두번째 질문이에요. 아까 전에 전 빛나는 흰색의 문에 들어가려다가 놓쳐버렸거든요? 그 곳 너머에, 도대체 누가 있는 거에요?]


그 말을 하자마자, 다시 눈빛이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한 질문이 그렇게 화낼 일이야? 난 당황스러우면서도 또다시 그 고통을 느낄까 두려워 열심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 알 필요 없다. 죽을때까지, 넌 그 문 너머의 존재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만나기라도 하면, 그리고 그 정체를 알게 되기라도 한다면, 넌 그날부터 나의 완전한 적이 될 것이다.]


역시.. 두번째 질문은 절대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게 되겠지..


[N 안 만날게요.. 안 만나면 되잖아요! 그럼, 이제 당신의 마지막 선고가 남았네요. 그 선고란 게 뭔가요? 도대체 나에게 무슨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데요?]


[? 그래.. 이제 마지막, 너의 미래에 대한 선고의 말만이 남아있군.. 앞으로 내가 할 말을.. 넌 계속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막대한 불행의 그림자가 죽을 때까지 너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붙게 될 테니까.]


[N 알겠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에요?]


[? 내가 왜 너같은 하찮고 벌레같은 너같은 년과 귀중한 시간을 들여 독대를 하고 있는지.. 넌 정말 궁금하겠지? 이제 그 이유를 말해주지. 난 아까전에 그랬듯이, 언제라도 널 죽이고 싶다. 그것도 잔인하게, 고통스럽게 말이지.. 그 이유가 뭘까? 생각보다 간단하다. 나의 미랫속을 비추는 예언의 거울속에서.. 니가 내 인생 최악의 적이 될 것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언의 그림이.. 나의 눈에서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널 가만히 놔두겠는가? 장차 너에게 주어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니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너는 나의 운명과 치명적으로 얽히게 될 것이며,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여야 끝나게 되는 이야기의 시작점을 밟게 될 것이다.]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저 눈깔악마의 인생 최악의 적이 된다니! 야, 나 그냥 여관 주인일 뿐이야! 뭐.. 빅토르 아빠한테 호신용으로 3년 정도 배운 게 있긴 한데, 벌써 4년 전이라 다 까먹었다구! 도대체 무슨 쓰레기같은 예언의 거울을 봤길래, 이런 민간인 여자가 최악의 적이 될 거라는 예언이 나온 거래? 난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 새끼가 뭘 잘못 쳐먹었나 라는 말을 표정으로 하고 있었다.


[N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아저씨, 전 민간인에다가 여관 주인일 뿐이에요!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아저씨를 죽이겠어요?]


[? 너.. 정말 아무것도 배운 게 없냐?]


난 거짓말을 했다.. 빅토르 아빠한테 무기쓰는 거나 근력, 기본 체력훈련을 중학교 3년간 나름 지독하게 받은 걸 그대로 말하면, 저 놈이 나한테 뭔짓을 할까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N 음.. 네! 없어요! 저 진짜 검이라고는 식칼밖에 쓸 줄 모르는 완전 쌩 여자 민간인이에요! 맨날 여관에서 손님 응접하고 요리하고 계산만 할줄 아는 제가 어떻게 아저씨의 인생 최악의 적수가 되겠어요?]


그래!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을 제외하면, 내가 좀 무기를 쓰는 방법을 알긴 하는데.. 정말 아는 정도에서만 그칠 뿐이지, 완전 아마추어나 다름없다구! 이 눈깔 아저씨.. 왜 나한테 온 거야? 우리 고향에서 제일 힘이 쎄고 20살 내내 아빠한테 지옥훈련을 받아온 빅토르면 몰라? 아.. 그래! 빅토르한테 가야 하는 걸, 주소를 잘못 찾아 온 게 아니야? 빅토르 정도면, 저런 눈깔악마랑 멋지게 싸워서 쓰러트리는 그림이 이쁘게 나올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서, 난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니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 당연히, 정보를 넘겨주면 큰일나니까 이름과 주소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N 저기요, 눈깔 아저씨, 번지수를 완전 잘못 찾아오신 거 아니에요? 제 친구가 진짜 쎄거든요. 중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주먹으로 진 사람이 한명이 없었던 데다가, 검술도 진짜 뛰어나거든요. 걔한테 가야 되는데 뭔가 잘못되서 저한테 오신 거 아니에요? 마침 주소도 번지수 앞자리까진 완전히 똑같거든요!]


그래.. 빅토르가 친구들 중 가장 가까운데서 살아서 주소가 뒷자리 빼곤 완전 똑같지? 그러고 보니? 거기서 난 확신했다. 저 놈, 빅토르한테 가야 되는데 나한테 잘못 찾아온 거야! 난 그 추측이 맞을 것 같아서 자신있게 물어보았고, 저놈이 착각했다고 말하면 곧바로 짜증을 낸 후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분명해! 내가 아니라 걔가 분명하다구!


하지만, 나의 말은 오히려 그의 악의와 분노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오히려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청색의 두 눈이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며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 영혼까지 뚫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불길이었다. 아니.. 진짜 나야? 착각한 게 아니라?


[? 날 뭘로 보는 거냐! 난 번지수를 결코 잘못 찾지 않았다! 난 분명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니년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야! 너같은 하찮은 년이, 내 앞길을 가로막게 될 최악의 장애물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지만.. 예언의 거울이 그렇게 말해준다니 믿을 수밖에 없군. 이제, 선고를 하도록 하지.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들을.. 넌 결코 흘려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구? 난 이제.. 너의 운명과 미래에 대해 예언하고, 경고를 할 것이니까 말이지. 난 이 세상의 시작점부터 태초의 악의 씨앗이 움트고, 그 씨앗이 거대한 열매로 성장할때까지 그 열매를 키워왔던 자다. 그렇기에, 나에겐 어느정도 미래를 들여다볼 힘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나의 말을 결코 흘려듣지 마라. 믿기 힘들겠다면, 난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임을, 저 망할 마이더리스 개자식에게 맹세하도록 하지.]


유일신 마이더리스한테 개자식이라고?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이구나? 아니지, 어쩌면 저렇게 마이더리스한테도 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신적인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건지도 몰랐다. 맞아.. 방금 전, 세상의 시작점부터 악의 씨앗을 키워왔다고 말했었지? 악신인가봐! 맙소사! 저 악신이.. 도대체 무슨 불쾌한 예언을 나한테 하려는 거지? 난 이제 예언의 내용이 뭘까 싶어서 가슴속이 콩당콩당 뛰었다. 결코 좋은 말을 해줄 리가 없어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 떨고 있군.. 불안정하게 떨고 있는 너의 영혼의 파장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해지는군. 그래.. 넌 이 운명을 받아들일 만한 녀석이 아닌 것 같군. 그놈들이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게 틀림없다. 그러니, 너에게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기회를 한번 주도록 하겠다. 이 기회를 받아들인다면, 너는 앞으로 나를 볼 일이 결코 없을 것이며, 운명 역시 평탄한 바다처럼 평화롭게 이어질 것이다.]


[N 어, 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해야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을 수 있죠?]


[? 앞으로 다가올 운명적인 선택지를.. 필사적으로 거부해라. 그러면 된다.]


앞으로 다가올.. 운명의 선택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조만간 인생에서 뭔가 변화가 생길지도 몰랐다. 운명의 선택지를 필사적으로 거부해라고? 일단 알겠어.. 나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이 머리속을 계속 멤돌았다. 과연, 그 선택지를 받아들인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N 좋아요.. 유념하도록 하죠.]


[? 아주 좋은 생각이군. 하지만.. 이 말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나의 말을 거역하고 그 운명의 선택지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너의 삶은 반드시 내가 말한 그대로 흘러갈 것이다!]


예언이라! 마이더리스한테 맹세까지 할 정도라면, 이 예언은 거짓으로 하는 예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운명의 선택지를 받아들인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길래 이렇게 겁을 잔뜩 주는 거야! 난 떨리면서도 부릅뜬 눈빛으로, 내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청색의 눈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그 예언의 내용에 대해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일기를 적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그 청색의 눈의 예언의 선고가 시작되었다.


[? 장차 너에겐 필연적으로 삶을 뒤바꿔놓을 그런 운명의 선택지를 받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지에서 어떤 길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너의 미래는 너무도 극단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나의 경고를 새겨듣고 그 운명을 거부한다면 앞에서 말했듯 지금까지 바다처럼 평화롭게 이어져 오던 삶을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쓸모없는 만용으로 그 무모한 운명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면, 너의 인생은 반드시 비참하디 비참한 어두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N 참.. 서술하는 말이 왜이렇게 길어요! 그렇게까지 맹세한 그 예언의 내용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겁을 잔뜩 주는 거에요! 경고는 충분히 했으니까 이제 그 선택지를 받아들게 되면 제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나 말해줘요! 마이더리스께 맹세코.. 전혀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죠? 그렇죠?]


어우.. 앞에 꾸미는 말이 왜이렇게 긴 거야? 정말? 내가 그 선택지를 받아들이는 게 어지간히도 겁이 나시나봐! 예언의 내용이 궁금하면서도 두려워 죽겠는데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자, 내가 짜증이 나서 소리를 쳤다가.. 다시 내몸을 불태우기라도 할까봐 말미에 급하게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아.. 아까전에 그 고통은, 느껴본 사람만이 안다! 정말 아파서 정신줄을 놓아버릴 것 같았거든..


[? 성급한 년. 안그래도 지금 말하려고 했다. 운명을 받아들였을 시, 너의 미래는 반드시 이렇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하는 본격적인 예언의 말들을 수년간은 너의 마음속에 새겨놓고 살길 바란다. 보잘것없는 필멸자인 너가 쓸데없는 용기와 사명감에 취해 어떤 운명의 선택지를 받아들게 된다면, 너의 삶은 필연적으로 이런 식으로 끝장날 테니까!]


[N 알겠으니까 빨리 좀 말해봐요! 답답해 죽겠네!]


[? 끝없는 죽음의 위협이 죽을때까지 널 그림자처럼 쫓아갈 것이며, 너의 그 선택으로 인해 너의 인생에 엮인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친구? 동료? 그 뿐만이 아니야. 니 딴엔 선의의 마음으로 행한 행동으로 인해, 수십,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너를 저주하고 원망하며 마이더리스의 심판대로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수백만명의 타인을 죽게 만든 너 역시, 그 사람들과 똑같이 온몸이 능욕당하고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25살의 어린 나이에 지독한 슬픔과 후회 속에 굴욕적인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장차 너의 인생 앞에 드리워질 운명의 선택지에서, 단 한번이라도 그 길에 들어서게 되면, 너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예정된 비극속으로 휘말리게 될 것이다. 보잘것없고 하찮은 니년의 삶을 평화속에 끝내고자 한다면, 앞으로 너에게 강제적으로라도 쥐어지게 될 지 모르는 바로 그 운명을, 필사적으로 거역해야 할 것이다! 니가 그 운명의 선택지를 받아들고 나의 적이 된다면, 난 니년과 너의 친구들, 그리고 너의 도시, 너와 인연을 맺은 사람 모두를 적으로 여기고 비참한 파멸로 이끌 것이다!]


[N 뭐? 그 선택지를 받아들이면, 내 주변 사람들을 해하겠다고? 이게 예언이야? 이게 예언이냐고! 예언은 무슨! 협박이잖아! 이 새끼야! 니가 무슨 권리로 내 친구들을 ...으.. 으아악!]


다시, 온 몸이 불타오르며 끔찍한 고통이 생생히 피부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까전보다 더 강렬한 청색의 불꽃이 온몸을 휘감으며 정신을 잃게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정신줄을 다잡은 나는, 다시 마음속으로 물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다시 나의 몸 위에서 폭포수처럼 물이 쏟아졌다. 잔존한 고통때문에 몸을 엎드리고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나는 분노의 눈길로 눈앞의 청색의 눈을 바라보았다.


[N 정말.. 그 선택지를 거부하면, 내 인생에 평화가 보장된다는 거지? 나도, 내 친구도, 내 도시도 안전한 거지?]


[? 그래.. 장담하지. 그러니, 오늘 너에게 선고한 예언의 말을 최소 몇년동안은 반드시 가슴속에 새기고 살길 바란다. 그러면, 넌 다시는 나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하하하하!]


[N 알겠어.. 예언의 말대로 하도록 할께. 그럼, 이제 날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어둠 밖으로 내보내줘. 제발.. 부탁이야.]


[? 그렇게 하도록 하지. 현실이 아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온몸이 불타는 끔찍한 고통을 두번이나 버텨내다니.. 그리고 겁없이 나한테 욕을 하고 반항을 하다니.. 하하하! 참 재밌는 만남이었어. 하지만, 이 만남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좋겠군.]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청색의 눈은 사라져버렸다. 이윽고, 어둠속에서 다시 안개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더니, 갑작스런 피로가 몰려와 나는 그 불쾌한 회색빛의 안개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


[N ...헉...헉.. 무슨 꿈이 이래! 어흑! 어흐윽!]


그렇게 정신을 잃자마자 꿈에서 깨어났다. 침대에서 벌쩍 상체를 일으킨 후, 불타올랐을 때 느꼈던 고통과 청색의 눈에 대한 공포, 그리고 불길한 예언에 대한 두려움이 급격히 몰려와, 나는 애처롭게 새벽 밤중에 흐느꼈다. 4년전 불행 속에서 다시 일어서, 이제 다시 행복을 되찾고 살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런 끔찍한 꿈을 꾸게 된 거야! 아직도, 방금전에 느꼈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해서, 혹시나 온몸에 화상자국이 생겨났을까 싶어 온몸을 필사적으로 더듬어보았다. 땀에 잔뜩 절여진 몸은, 다행히 멀쩡했지만 그럼에도 그 고통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고통스러웠으니까.


온몸이 열기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고, 땀이 잠옷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그래서 도둑이 들까봐 자기 전에 반드시 닫아놓는 창문을 새벽임에도 활짝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내 피부를 적시고, 밝은 초승달과 수많은 별빛들이 잔잔한 밤바다 위에서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럼에도, 그 꿈으로 인한 공포와 서글픔은 여전히 내 마음을 꼬집고 때리고 있었다. 운명의 선택지를 받아들인다면.. 내 친구들, 마을사람들이 죽게 된다니! 난 괜찮아. 난 어차피 가족도, 친척도 없는 몸이라 언제 죽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초등학교때부터 같이 꿈을 키워 나가던 카트린과 안톤, 중학교때부터 훈련을 받으며 지금까지도 가족처럼 지내는 보리스와 빅토르, 그리고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쭉 나에게 기둥이 되준 오빠들인 알리치, 제미크, 로슈아, 내 여관 직원들인 엘비라, 라즈찐, 옐레나가 나때문에 잘못된다면.. 난 그건 정말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때문에 그 어떤 보석보다도 소중한 존재들이 해를 입는다면, 그건 내가 비참하게 죽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N 그 선택지가 뭔진 모르겠지만.. 반드시 거역해야겠어. 고작 나같은 놈 하나 때문에 친구들이 잘못되는 모습은 절대 보지 않을거야! 그래.. 꿈의 내용을 일기에 적어둬야겠어! 일기장.. 일기장이 어디 있지?]


난 급하게 침대에 일어선 후, 책상에 앉아 지금까지 쉬지 않고 빠르게 일기장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일기장의 내용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나의 미래에 대해, 저주와 협박이 잔뜩 섞이긴 했지만 하나의 거짓도 없음을 맹세까지 한 후 예언을 했다. 난 역사서에서, 그런 끔찍한 예언들을 들은 영웅들의 삶이 어땠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영웅들의 대부분의 삶은, 아무리 벗어나려고 악을 써도 결국엔 그 예언의 결말대로 흘러갔다. 운명을 벗어나려다 오히려 예언 이상의 더 비참한 결말로 끝난 비극작품들을.. 내가 한두개 읽어 본 게 아니었다. 그래.. 한낮 하찮은 여관주인인 내가, 그런 예언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어. 역사속 위대한 영웅들도 벗어나지 못한 예언을 내가 무슨 수로 벗어날 수 있겠어! 나틸리 안보렌, 괜한 용기 가지지 말고, 그 선택지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자.


아.. 그런데, 도대체 그 선택지가 뭐야? 그 선택지가 도대체 뭔지는 알려주고 떠나야 할 것 아니야! 이 눈깔악마새끼야! 그 선택지가 도대체 뭘지 한참 머리를 굴려봤지만, 당연히 아무 답도 찾아낼 수 없었다. 뭐.. 1년 내로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긴 하겠지. 그때가 되면, 이 꿈의 내용을 적어놓은 일기장이 큰 역할을 하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래.. 나틸리 안보렌, 일어나서 눈꼽도 떼지 않고 허겁지겁 적긴 했지만, 그 덕분에 아주 생생하게 꿈의 기록을 남겨놓았으니 잘 했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날이 찾아오면, 그 땐 이 일기장이 큰 역할을 하게 될 거야.


나의 만용과 어리석은 선택으로 인해.. 내 소중한 친구들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게 하지 않을 거야. 에도르로 가서 빛의 성기사가 될 거라던 빅토르, 일등 항해사가 되서 엄마랑 동생들과 편하게 살 거라는 보리스, 최고의 과학상을 타고 싶다며 지금쯤이면 대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안톤, 그리고 내 인생의 영혼의 친구이자, 어릴때부터 별빛 아래에서 서로 열심히 꿈을 키워나갔으며, 내가 꿈을 잃어버린 후엔 늘 나를 위로해주며 친구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줬던 카트린이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빛나는 성인으로서의 미래를 맞이하게 될 내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 망정 방해는 되지 않으리라. 빛나던 문, 그 문 너머에서 나에게 손짓하던 존재가 누군지는 이제 더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난 운명의 선택지를 필사적으로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고향에서 친구들이 성장하고 꿈을 키워나가는 모습들을 바라보며 저 밤바다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운 삶을 죽을때까지 영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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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의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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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1-117: 010601 영혼 결합 24.09.19 1 0 18쪽
117 1-116: 010601 건물 내부와 이상한 가루 24.09.19 1 0 19쪽
116 1-115: 010601 휴식 24.09.18 4 0 21쪽
115 1-114: 010601 사도와의 전투 B 24.09.09 7 0 31쪽
114 1-113: 010601 사도와의 전투 A 24.09.09 6 0 30쪽
113 1-112: 010601 다시 이공간으로 24.09.07 7 0 15쪽
112 1-111: 010601 알리치 집 24.09.07 4 0 23쪽
111 1-110: 010601 석궁 시험/교장실 24.09.05 6 0 31쪽
110 1-109: 010601 석궁 소동 24.09.04 6 0 24쪽
109 1-108: 010601 안톤의 데모 24.09.04 7 0 28쪽
108 1-107: 010601 알리치 집들이 2 24.09.01 9 0 31쪽
107 1-106: 010601 알리치 집들이 24.08.28 6 0 27쪽
106 1-105: 010601 새 기숙사와 급식 24.08.28 8 0 29쪽
105 1-104: 010530 네스터 모드니노프 24.08.28 7 0 16쪽
104 1-103: 010529 사도와의 전투 24.08.22 7 0 26쪽
103 1-102: 010529 하수구 던전 B 24.08.22 8 0 22쪽
102 1-101: 010529 하수구 던전 A 24.08.22 8 0 21쪽
101 1-100: 010529 모드니노프 가 24.08.21 8 0 25쪽
100 1-099: 010528 총경님과 만남 B 24.08.20 10 0 34쪽
99 1-098: 010528 총경님과 만남 A 24.08.20 7 0 24쪽
98 1-097: 010528 격려 24.08.13 10 0 26쪽
97 1-096: 010528 교장 선생님과 협상 24.08.13 8 0 21쪽
96 1-095: 010527 안톤의 억지 24.08.09 7 0 20쪽
95 1-094: 010527 방 배정 24.08.09 8 0 20쪽
94 1-093: 010526 종결 24.08.09 7 0 27쪽
93 1-092: 010525 사도의 기억 3 24.08.06 10 0 21쪽
92 1-091: 010525 사도의 기억 2 24.07.27 8 0 21쪽
91 1-090: 010525 사도의 기억 1 24.07.27 8 0 20쪽
90 1-089: 010525 엉망진창 추격전 24.07.17 11 0 18쪽
89 1-088: 010525 사도와의 전투 24.07.17 6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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