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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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연재수 :
1,744 회
조회수 :
1,187
추천수 :
9
글자수 :
512,582

작성
23.11.21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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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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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쪽

9월의 이빨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이젠 모든 것이 너무 늦은 뒤라서

당신의 환영(幻影) 같은 그림자는

더 이상 세상의 종소리가 되지 못합니다

지나간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아름다움이 저물듯 우리네 청춘도 이윽고는 사라지고,

사흘만이 더는 붙잡지 못할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 순수한 모순이여

오, 설원의 영광이여

계절의 왕관을 쓴 나무들은

이제는 아쉽게도 슬픈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의 망토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퇴장은 언제나 정해진 순서라고 가르쳐주듯이

슬쓸한 명상 속에 잠겨듭니다.

계시를 기다리는 순례자들처럼.









그녀는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손은 땅바닥에 내려놓듯이 대고

오른손은 반대편의 세워놓은 그 왼쪽 무릎에

살짝 덮듯이 올려놓고 있었다.

그녀의 흰 치마는 길고 길게 땅바닥을 끌고 쓸면서 덮을 듯이

그리고 사방으로 펼쳐지듯이 넓게 땅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서 가마에 새겨진 갸르스름하고 섬세한 골의 무늬만이

정수리를 따라서 빙글빙글 회전하듯이 고요하게

그리고 의외로 제멋대로 뻗어나가듯이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숱이 많고 탐스러운 금발이 섞인 갈색의 머리결들 속에서.


그녀는 그대로 그렇게 흰 옷을 상의와 하의로

상반신과 하반신에 모두 입은 채

무엇을 생각하거나 혹은 정신을 잃어버린 듯,

그저 잠자코 가만히 그냥 있기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무엇인가를 기억에서 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속절없고 쓸데없는 시간들이

차츰 차츰 쌓이는 아주 가는 눈발들처럼 쌓여만 갔다.

아니 흐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수직에서 낙하하듯 쌓이는,

수평에서 번져나가듯 흐르는.

그 어느 쪽이라고 해도 그녀는 그저 잠자고 고개만 숙이고

두 손을 각각 그렇게 대고서 땅바닥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더 긴 시간이 잘 알 수 없는 측정 단위로 흘러갔다.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정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갑자기 어두운 실내에서

탁자 위에 놓인 등불이 켜진 것처럼

반짝, 아주 크고 밝게 빛났다.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거의 몸을 일으키는 듯한 느낌도 없이

언제 몸을 바로 곧게 폈는지도 모를 만큼

그대로 일어서는가 싶더니, 바로 시위에서 팽팽하게

앞으로만 날아가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한줄기 투명한 빛살이 된 듯한 모습으로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부드럽고 너무 유연한 움직임과 동작은

변환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놀라울 정도로 폭발적인 속도였으며

아름다운 흐름의 경이로운 이동과 전환이었다.

그녀가 달려가고 있는 곳은

그녀가 처음부터 땅바닥에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던 곳처럼

태어나서 처음 보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어떤 배경이 될 만한 풍경도 사물도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도

그리고 사람도 없었으며

산이나 계곡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소리도 절대적인 무음(無音)의 공간처럼 제거가 된 것 같아서

어떤 사소한 음향들의 미미한 부스러기마저도

들리지 않았기에

시간마저도 증발되거나 강제로 뽑아낸 것만 같았다.

삭막하지만 그러나 이상하게 색채의 의미나 색채의 종류도

파악이 되지 않는 그곳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아름답다는

느낌만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드는 곳이었다.

그곳을 빛과 빛 사이에 일직선의 연결처럼

그러나 너무도 유연하고 너무나 부드러우며 몹시 우아하고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는 가벼운 속도로

영원의 극치에 도달하는 섬세한 점처럼

그녀는 멀리 멀리 달려나가면서

점점 더 작게 멀어지고 있었다.

레이피엘페이셔스는 오른손을 들어서

대저택을 방문한 손님이 소리를 울려서

저택의 안에 있는 주인을 불러낼 때 쓰는

쇠고리를 만지려는 것처럼

사각의 빛으로 이루어진 테두리의

자기 키보다 높은 곳 어딘가를

기어코 언젠가는 이르러서 결국엔 닿고 말겠다는

조용하고 겸허하지만 결연한 의지처럼

살짝 건드렸다.


빛의 투명한 장막이나 커다란 천 같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기묘한 공간이

그대로 확,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순간에

사각형의 길고 큰 그 직사각형의 테두리들마다 다 돌아가면서

빛을 발광해서 놀랍도록 선명하게 빛나면서

뭔가가 달라지듯이 혹은 그녀가 뚫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녀는 자기가 오른손을 들어서 살짝 갖다댄 높은 곳 밑의

어딘가를 바로 그 순간에 즉시 통과해버렸다.



얘들아, 난 이제 여자가 되었어. 어쩜 좋아?

이런 나도 사랑해줄 남자가 이 세상의 어딘가에는 있을까?


왜에에에? 너도 여자잖아? 너는 그게 문제야.

도대체 너도 뭐가 문젠데? 어디가 어때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널 좋아할 남자가 정말로 이 세상에 어디 단 한 명도 없을까?

왜 그런 미친 소리를 다 하는 거야?


아니. 오늘은 축하의 연회가 있는 날이지만

내가, 아직도... 연인 한 명조차 못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좀 우울하다고.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잔과 포크와 나이프가 챙강챙강

덜그럭덜그럭거리며 부딪치고 분주하게 옮겨지는 소음(騷音)들과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마구 섞이듯이

함께 뭉쳐지듯 떠돌고 있는

큰 방의 실내였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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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침묵으로 봉인된 이름 23.11.23 3 0 3쪽
29 이토록 간절한 슬픔의 가을 23.11.22 5 0 5쪽
» 9월의 이빨 23.11.21 10 0 5쪽
27 7월의 눈동자 23.11.20 6 0 6쪽
26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하는 한계, 23.11.19 6 0 7쪽
25 세계는 욕망들의 총체이지,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다 23.11.18 6 0 5쪽
24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말할 수 있는 곳과 나의 의지로 말할 수 없는 곳까지일 뿐이다 23.11.17 7 0 6쪽
23 보여질 수 있는 사랑은 말해질 수 없다 23.11.16 7 0 7쪽
22 언어는 사랑을 위장한다 23.11.15 6 0 5쪽
21 비와 당신의 묘지(붕괴와 시작의 서막) 23.11.14 3 0 7쪽
20 20회: 방황하는 가을날의 넋들 23.11.13 3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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