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일반소설, 판타지

새글

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연재수 :
1,744 회
조회수 :
1,177
추천수 :
9
글자수 :
512,582

작성
24.05.23 10:25
조회
1
추천
0
글자
11쪽

세월의 뼈, 고통의 화석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그는 얼굴에 마법의 향수를 바르고 있었다.

다시 얼굴을 지나 목과 어깨와 가슴팍과 배까지,

그는 두 팔을 들어올리고 다시 두 겨드랑이에 바르고

손이 닿는 한 등에도 두 손으로 번갈아가면서

보이지 않고 닿지 않지만 가능한 범위까지는 애를 써서

그리고 다른 부위에도 그랬듯이 공을 들여서

정성껏 느릿느릿 바르고 있었다.


눈(眼)은 과거에는 가끔 따가운 때도 있었으나

곧 그런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그리고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욱신거리고 따끔따끔한 통증은 그 오른쪽 눈에 찾아오지 않았다.

전쟁 아닌 전쟁, 전투 같았던 지옥에서의 체험이

이제는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희미한,

마치 남의 경험을 이야기로 들려주는 것들을 듣거나

그냥 그 옆에서 그 상흔(傷痕)이나 흔적을 구경하는 것만 같은,

아련하고 아득한 먼 옛날처럼 그때의 흐릿한 기억이 되어서

지저분하고 더러운 먼지가 가득한, 자욱하게

흙먼지 날리는 대지(大地)처럼

광막하고 광활하며 거대한 공허로 되새겨질 뿐이었다.

그 모든 것이 단지 몇 년 전이었음에도.


그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의 몸에서 튄,

블라스펙트 레페이케이퍼스의 혈액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액체가

아주 작은 물방울이 되어서

그의 오른쪽 눈에 그의 검술 실력으로는 손쓸 새도 없이

너무도 빠른 화살처럼 날아와서

박혀버리듯이 묻었다.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부상 아닌 부상이었다.

무척 뜨거운 불덩어리 같았다고

그는 그 액체의 감촉을 기억했었다.

눈은 거의 즉시 보이지 않게 되었었고

그 후로 다시는 그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

그 눈이 있는 한쪽 얼굴이 정말 깨지듯이 아팠지만

그의 앞에서 서서히 허물어지듯이

그리고 흩어지면서 또 쓰러지고 있는

어느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를

환영(幻影)이나 환상(幻像)처럼

그는 바라보면서

언제 자신의 아끼던 검(劍)을 뽑아버릴까

그것만 그저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그의 명검(名劍)은

전혀 이상한 점이 그 후로도

심지어 지금까지 없었고

그의 건강 역시 그 어떤 이상 징후가

여전히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는 그런 점들이 늘 이상했고

다시 말하자면

늘 마음에 걸렸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아직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 몇 가지 점들이.

원인들이 무엇 덕분인지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지만.

전혀 알 수는 없었으나 왠지 한두 가지 원인이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은 연속적인 듯했지만

띄엄띄엄 건너서 가듯

가끔은 다르게 흐르는 듯했지만

어쨌든 흘러만 갔다.

이래도 저래도 뭐라고 해도

어쨌거나 흘러는 가는 것이 시간의 속성인 것만 같았다.

인간 세상과는 무관하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 때문에

한쪽 눈을 잃어버렸지만

그 대신에 그는 다른 것들을 얻고 귀환했었다.

마법의 물질들 몇 가지도.


40대가 되고 나서

이제는 더 이상 삶에서 젊은 빛 속에는 결코 들어가있지 않다는 걸

어린애든 그 누구든 누가 보아도 알 수 있게 되자

그는 차츰 지난 날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그는 어떤 해답도 모르고 있다는 자신을

원망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어리둥절한 혼란처럼

혐오감과 증오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탄식을 하듯이 서글퍼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었는지도 몰랐다.

여러 가지의 이해하기도 힘든 복잡한 과정을 거친.









그는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풍경을 깨뜨리고 그 바깥으로 탈출하거나 진출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그에겐 있어야 할 풍경도 머물러야만 할 집도 딱히 없었고

그 둘 다 차이점도 없었다.

언제나 보던 이른 아침의 풍경이

초겨울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고

겨울이 되었다고 해서

창문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풍경이

그에게 새롭게 들어오는 것도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무슨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강렬한 시간은

느리게 느리게 의외로 흘러갔다.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었고

그러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달콤한 겨울 바람이

차갑고 매서운 냉기(冷氣)가 되어서

열린 창문의 틈으로 들어왔다.

그 활짝 열린 공간만큼 투명하고 아름다운 슬픔이

다시 돌아온 계절처럼

그를 천천히 혈관 속에서부터 건드리고 다니다가

싸늘하고 부드럽게 떠돌며 머무르고 있던 온도로 냉각되었고

이윽고, 정확한 정지와 보이지 않는 진동이라는

혼돈과도 같은 동요(動搖)로 변해서

가장 고요한 곳에서부터 그의 마음을 자꾸 뒤흔들었다.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지금 죽이고 섬멸하며 없애고 있는 존재들이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라는 괴물이며 악령들이고 유령들인지

아니면 같은 편이라는 같은 왕국에서 살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인지.

잘 알 수 없는 것들은 이상하게 감미롭고 슬펐다.

그러나 잘 알 수 없는 것들이 인생에서 어디 한두 가지이던가.

그 쓸쓸함의 힘으로 그는 새로운 깨달음들을 얻었다.

과연 그런 종류들의 깨달음이 앞으로 도움이 될지는 알 수야 없었지만.



여러 번의 전투에서 놀라운 실적과 결과로

탁월한 명성을 기사(騎士)답게 자꾸만 얻어갔으나

그는 피(血)로!

계속 물들어가고 있었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빛은

그 자체로 전율스러운 도취였고 감미로운 자부심이었으며

어디에서도 대체하기 어려운 위대한 긍지였다.




이제 그는 살인(殺人)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누구를 죽여서 원한을 갚았든

그리고 향후에 다시 그에게 누가 또 똑같이 원한을 갚으려고

같은 방식으로 그를 죽이려고 하든.

그는 이제 그 고리의 원(圓)에서 결코 이탈하지 못할 것이다.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시작이 누가 먼저였는지

도무지 알 수도 없지만.

그 악순환의 원(圓)은 계속 돌고 돌아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끝으로 계속해서 되돌아갈 것이었다.











거부할 수 없이 맑은 빛들이 망각의 돌 위에도 내리비출 것 같은

맑은 그늘을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너무 부드러워서 차라리 강렬한 그 빛들은

나뭇잎들이 가지들에서 술렁이고 있는 풍경을 속속들이 스치듯이,

어떤 곳은 투과해서 지나치고

어떤 곳은 그대로 그 위에 머물면서

세상을 눈부신 환희로 또다시 설레이게 했다.

왕국은 보드랍고 결 고운 바람 속에서 예년과 같은 잔잔한 흥분을

천천히 느끼고 있었다.

세상이 오고 가는 것처럼

그래서 세상이 개인마다 각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능동적으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교실은 평화로운 듯 고요 속에 침몰하면서

빛의 계절이 다시 돌아온 것을 느끼게 하는

한낮의 낮잠처럼 나른해진 시간이 주는 편안함으로

무기력과 안락함이 뒤섞인 적막(寂寞)이 충만하게 채워져 있어서

부드러운 호수의 물결처럼 정지해 있었다.

왕립이라는 설이 있는 사립 음악 학교에도

새로운 수업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노인은 그렇게 피아노 위에 엎어져 죽어 있었다.

세상이 논리 속에 펼쳐져 있지 않듯이

노인은 음악이라는 예술 속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검은색의 윤기가 흐르는 피아노 뚜껑 위에 단 한 글자만을 남기고.

그 글자는 피(血液)를 찍어서 가까스로 쓴 것인지

이미 검은색이 섞인 자주색으로 거의 다 변색이 되어 있었다.



레.

라는 글자였다.

새의 부리가 새 얼굴에게 달려있는,

새의 왼쪽 옆얼굴을 닮은 철자.





왕국의 글자는 고대어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었는데

다른 국가들의 문자와 달리 모음과 자음이 결합된

자체적으로 독자적인 발음과 표기가

한 글자만으로 가능한 철자들이 다수 있었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가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 분류 체계인데

왕국의 문자 언어는 독특한 면이 몇 군데 있었다.

레라는 글자를 쓰려다가 말았는지

피(血液)가 글자가 되어 움직이던 모양의 진행은 도중에 멈춰있었다.





레라는 글자를 하여튼 많이 닮은 불완전한 혹은 불충분한

글자 한 개를 남기고

노인은 뚜껑도 열지 않은 피아노 위에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앉아있는 의자의 다리와 노인의 발밑

그 사이 어디쯤에 옷의 아주 작은 일부일 헝겊 한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봄날의 연하고 보드라운 새빛은 음악 학교

레페이스베트리엔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장소를 새롭게 다시 채우고 있었으나

음악 학교의 실내에서만은

맑고 눈부신 빛처럼 새 계절의 매끄러운 공기가 반짝반짝 빛나며

처음처럼 다시 흐르고 있는 매해마다의 가장 투명한 날들과는 달리

위험하고 불온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악(惡)이

자행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웬 낯선 남자의 방문에

음악 학교 교사 중에서는

가장 어리고 가장 재직한 기간이 짧은

젊은 여자가 다소 긴장한 모습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사내의 첫 인상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각이 진 얼굴에 눈이 번쩍번쩍 유쾌하게 빛나는 모습은

전체적으로 미남의 얼굴상이었다.

다만 값비싼 고급스러워보이는 옷들과 달리

그의 머리카락은

그다지 잘 정돈되어 있지 않았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웃는 분위기가 뭔가 좀 이질적인 느낌이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상대방이 약간씩 색다른 느낌을 그에게서 받는 것은.


아, 다름이 아니고요


무슨 일이야? 누가 오시기라도 했어?

그때였다.

음악 학교의 1층 대청에서 낯선 방문자를 맞이하고 있는

어린 여자의 뒤에서 레이피엘페이셔스가 나타났다.

섬세하고 여리며 서글픈 아름다운 음성의 뒤에서.


아, 전에도 이미 편지로 말씀드렸고 저도 또 답신의 편지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이 학교의 피아노와 가구를 교체하는 문제로 왔습니다.

남자는 마치 봄의 산들바람에 머리카락이 막 나부끼는

들판에 서 있는 것처럼

심상(尋常)하고 명랑하게 말했으나,

실내에 봄이건 가을이건 딱히 무슨 큰 차이가 있고

무슨 큰 상관이 있는가.

실내에 그리고 무슨 바람이 불어오는가.


아...! 그렇다면 가구상이신가요?

약간은 의문이 풀렸다는 듯이 아니면 약간은 의심스러워하는 듯한,

여전히 눈살을 아주 미세하게 찌푸린 그 모습 그대로

도저히 알 수 없는 미묘하게 헷갈리는 표정이 되어

레이피엘페이셔스가 물어보았다.

역광(逆光)에 그녀의 얼굴이 드문드문 보이는 부분마다

순간적이고 흐릿한 번쩍거림으로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닙니다. 제 영지(領地)에서 나오는 목재로

피아노와 기타 가구들을 만드는데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악기 제조공과 가구 만드는 장인들을,

제가 이 학교에 소개를 해드렸었습니다.


이 왕국의 가장 좋은 목재는 제 영지(領地)의 나무들이지요.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9 다정한 어리석음은 이렇게나 달콤하구나 24.05.28 2 0 12쪽
48 쓸데없는 욕망의 시체들 24.05.27 3 0 10쪽
47 더 많은 배가 필요한 밤 24.05.26 4 0 15쪽
46 소리를 잡아먹는 고양이 24.05.24 3 0 15쪽
» 세월의 뼈, 고통의 화석 24.05.23 2 0 11쪽
44 무음(無音)과 망각(忘却)과 무의미(無意味) 24.05.22 2 0 15쪽
43 약속의 땅 24.05.15 3 0 14쪽
42 검은 물 위에서 연주하는 음악 24.05.13 6 0 6쪽
41 세상의 낯선 음악 24.05.12 2 0 15쪽
40 기억이 멈춘 곳에서 시간의 공백을 기다린다 24.05.11 3 0 11쪽
39 빛을 잃은 약속과 다가올 운명들 24.05.10 2 0 13쪽
38 세상엔 참된 요리도 없도다 : 불가사의한 마법의 맛 23.12.06 4 0 9쪽
37 세상엔 참된 계절도 없도다 23.12.05 4 0 5쪽
36 세상에 참된 평화 없도다 23.12.04 3 0 8쪽
35 내일은 비록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23.12.01 6 0 8쪽
34 추억처럼 고통스러운 미래 23.11.30 9 0 7쪽
33 봉인된 장미의 열쇠 : 기억 저편에서 불어오는 노래 23.11.29 3 0 5쪽
32 가버린 날들의, 흩어진 추억들 23.11.28 2 0 6쪽
31 예전보다는 지금을, 지금보다는 먼 훗날에 23.11.27 4 0 7쪽
30 침묵으로 봉인된 이름 23.11.23 3 0 3쪽
29 이토록 간절한 슬픔의 가을 23.11.22 5 0 5쪽
28 9월의 이빨 23.11.21 9 0 5쪽
27 7월의 눈동자 23.11.20 6 0 6쪽
26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하는 한계, 23.11.19 6 0 7쪽
25 세계는 욕망들의 총체이지,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다 23.11.18 5 0 5쪽
24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말할 수 있는 곳과 나의 의지로 말할 수 없는 곳까지일 뿐이다 23.11.17 6 0 6쪽
23 보여질 수 있는 사랑은 말해질 수 없다 23.11.16 6 0 7쪽
22 언어는 사랑을 위장한다 23.11.15 6 0 5쪽
21 비와 당신의 묘지(붕괴와 시작의 서막) 23.11.14 3 0 7쪽
20 20회: 방황하는 가을날의 넋들 23.11.13 3 0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