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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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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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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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세상에 참된 평화 없도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잊고 있다가 그래서 잊고 있다가

마침내는 그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잊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마저도 잊어버리게 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적도 없게 되는 걸까

처음에는 있었으나 그 후로 잊어버렸고

잊고 잊다가 어느날엔 무엇인가를 잊어버렸다는 것마저

잊어버린다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똑같게 되니까

나중엔 그래서 그 어느쪽도 다 결국엔

똑같은 결과처럼


비슷하게만 남게 되니까...?




그녀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섬세하고 촘촘한 긴 속눈썹들이

역시 그런 얇은 두 눈꺼풀들처럼

애수 어린 침울한 침묵을 앞장서서 지키려는 듯이

고독한 그늘을 초청하듯 그녀의 두 눈에 매달려서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의 약간 세로로 긴 아름다운 흰 얼굴은

어느 정도 초췌해져 있었다.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다 공평해서

밤을 새운 그녀는 배가 고플 것이었다.



... 그러나

그녀는 음표들이 그려져 있는 인쇄된 종이들이

마구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책상 앞에 놓여진

아름다운 곡선의 갈색 나무 의자에 앉아서

다만 괴로운 상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그날 간밤 동안에 있었던 모든 활동이었다.



그가 우리 음악 학교의 일부이듯이

나도 음악 학교의 일부이다...


그가 함께 나와 한 시간들은 나의 일부이다

그도 나도 세상의 일부이며

우리들은 모두 이 세상의 일부이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남은 것이 없다


나는 진짜 이 세상의 일부일까

나는 정말로 이 세상 속에 속해 있는 걸까?



나는 그가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니다


나는 그는

나도 그도 다 이 세상의 일부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모든 것이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기에 우리가 그 속에 있다


그렇지만

그러나...




그녀는 잠든 것처럼 더욱 피곤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녀가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그녀의 허벅지 위의 치마 부분에 댄

그 의자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녀가 있는 방의 바닥에

괴이하며 처음 보는 낯선 복잡한 도형들이

빛으로 그려진 것처럼 조용하고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독특하면서도 낯설고 신기한 모습으로 타나나서

완전히 다른 이세계(異世界)의 어느 시공(時空)처럼

어느 순간 변해 있었다.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의자가 사라져서 허공에 잠시 떠있듯이

가볍게 그렇게 공기 중에 있었으나

아주 천천히 부드럽고 매끄럽게 그래서 공기 속에 떠돌던 깃털이

천천히 위아래로 회전하는 것처럼

곧은 수직의 상태로 몸이 펴졌다.

치마가 곧게 아래로 내려가고

두 팔과 두 다리가 차분하게 수직으로 늘여뜨려졌으나

그녀의 두 눈은 여전히 감겨져 있었다.

봉인된 신전의 입구처럼 그 피부의 막은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 밑으로

조금 어느 정도 허공에 뜬 공간을 사이에 두고

바닥에서 다시 지표면의 풍경이 변해버렸다.

바꾼 사람도 그 작용을 알 수도 없는 틈에

지극히 짧은 순간은 그 바닥을

검은색과 흰색의 두 가지 색으로만 된 대단히 단순한

그러나 마법의 빛처럼 생소하고 기이해서

눈이 부셔서 제대로 뜰 수도 없고 바라볼 수도 없는

흑백의 놀라운 장식이 가득하게 빛나면서 끝없이 반복되는

지극히 아름다운 실내와 바닥 평면으로

바꾸어버렸다.



다시 그 모든 것이 원래처럼 다 사라지고

그녀는 어느새 자기 방에서

책상 앞의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람 계곡의 묘지에서 심하게 싸웠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날이 흐리고 어두침침했었고

가을답게 스산하고 흐릿했었다.

둘은 격한 말다툼을 해서

결국은 그녀 혼자서 다른 사람들을 다 내버려두고

홀로 집으로 일찍 돌아갔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그와 같은 음악 학교에서

같이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젠 모든 것이

너무 달라져버렸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그가 아니었고

그녀도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어느 틈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젠 과거의 껍데기 같은

다 낡아서 해어져버린 옷 같은 추억들만 남아있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만 되었을까

왜 이렇게만 되어버렸을까...


그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머리가 터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할머니로 하루 아침에 늙어버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그만두기로 했다.

더 이상은 과거를 더는 생각하지 말자.

아예 뒤돌아보지도 말자...





그러나,

그녀는 몹시 격렬하게 오른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오른손의 가녀리고 아름다운 얇은 손날에서

푸르고 번쩍거리는 타오르는 듯이 붉은 섬광이

마구 삐쭉삐쭉 뻗어나와서 책상을 쪼개버리고

그 섬광들이 닿은 곳에서는

연기가 몇 줄기 피어오르며 어느새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경직되다 못해서 무섭게 차가워진

그러나 너무도 맑고 깨끗하게 씻겨진

그래서 그런 탓에 요염할 정도로 아름다워진 얼굴로

조각처럼 얼어붙은 나머지 거의 무표정해진

정념과 의지와 생기가 흩어지다 못해

제거된 것처럼 부동(不動)하는 인상을

자신의 체내에 구축한 것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말없이 그녀는 그 불타고 있는 책상과 그 위에 원래부터 있었던

음표와 줄들이 그려진 종이 같은 것들이

재와 연기로 차츰 차츰 변해가면서 동시에 면적을 넓혀가면서

스르르르 덧없이 공중으로 사라지고

또한 바닥으로 허물어지는

그 힘없는 변화의 과정을 다만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게

끝없이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세상에 참된 사랑 없도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참된 평화도 없도다...


그녀는 돌아섰다.

머리가 어느새인가 활활 불타오르는 불길처럼

광란하듯 하염없이 아름답기까지 한

일종의 환상(幻像)이나 환영(幻影) 같은 역광(逆光)처럼

머리결들마다 다 위로 공중을 향해서 뻗쳐서 올라가서는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처럼 생소하지만

또한 너무도 아름다운 기이한 모습으로

교묘하고 찬란한 빛들로 온통 휩싸여서

대단히 천천히 그리고 무척이나 현란하고 공포스럽게

자꾸만 너풀거렸다.



그녀가 외쳤다.


추억

사랑

회한

분노

실망

절망

후회

증오

추악

환멸

혐오

혼란

혼돈

상처

상심

광란

광기

자살!


그녀는 그런 거의 실성한 듯한,

외마디로 되어있는

한 단어로 된 문장인지 단어 한 개인지

이상한 말들을 미칠 듯이 분노한 어조로

두 눈이 파랗고 날카로운 미친 듯이 맹렬한 맑은 화염처럼

변한 눈동자로 변한 상태에서

허공을 향해서 화살처럼 폭발적으로 반복해서 내뱉으며

그러나 그녀의 육체는 그런 화살보다도 몇 십 배는 더 빠른

빛의 맹렬한 화살처럼 강렬하고 예리한 섬광처럼 화(化)해서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질 만큼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앞으로 폭발하듯 뛰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름답고 애절한 높고 가는 목소리로

그러나 무섭고 끔찍한 원망을 담아서 소리 높이

그리고 높은 허공으로 마치 흩뿌리듯이 외치며 달려가는 그 모습은

곧 아주 희미하고 작은 점처럼 너무도 멀리 작아졌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외치는 말이 들려왔다.


살인!




그녀는 분노로 불타오르는 차가운 얼굴로

어떤 소리도 전혀 내지 않고

도무지 경험해본 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상한 시공간을

질주하는 신마(神馬)나 비상하는 신조(神鳥)처럼

오로지 광기(狂氣)의 속도로 끝없이 앞만 향하여 치달리고만 있었다.

그녀가 계속 하염없이 달리다가 어떤 건물의 벽을 마주보게 되었다.

그녀는 부수려는 동작은 일절 하지도 않고

그냥 그 벽을 향해서 달려만 갔다.

곧 그 벽은 놀라울 정도로 환한 빛의 그만큼 면적으로 변해버렸고

그녀는 그 벽을 열린 문의 공간처럼 그 빛으로 변한 면적의 공간을

그냥 통과해버렸다.

물결이 한 번 찰랑이듯이 그녀는 그 반쯤 투명한 빛의 문을

지나서 어느새 어디론가 도착해 있었다.


꽃들이 만발한 화원이었다.

바람 계곡의 묘지는 아니었다.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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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무음(無音)과 망각(忘却)과 무의미(無意味) 24.05.22 2 0 15쪽
43 약속의 땅 24.05.15 3 0 14쪽
42 검은 물 위에서 연주하는 음악 24.05.13 6 0 6쪽
41 세상의 낯선 음악 24.05.12 2 0 15쪽
40 기억이 멈춘 곳에서 시간의 공백을 기다린다 24.05.11 3 0 11쪽
39 빛을 잃은 약속과 다가올 운명들 24.05.10 2 0 13쪽
38 세상엔 참된 요리도 없도다 : 불가사의한 마법의 맛 23.12.06 4 0 9쪽
37 세상엔 참된 계절도 없도다 23.12.05 4 0 5쪽
» 세상에 참된 평화 없도다 23.12.04 3 0 8쪽
35 내일은 비록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23.12.01 6 0 8쪽
34 추억처럼 고통스러운 미래 23.11.30 9 0 7쪽
33 봉인된 장미의 열쇠 : 기억 저편에서 불어오는 노래 23.11.29 3 0 5쪽
32 가버린 날들의, 흩어진 추억들 23.11.28 2 0 6쪽
31 예전보다는 지금을, 지금보다는 먼 훗날에 23.11.27 3 0 7쪽
30 침묵으로 봉인된 이름 23.11.23 3 0 3쪽
29 이토록 간절한 슬픔의 가을 23.11.22 5 0 5쪽
28 9월의 이빨 23.11.21 9 0 5쪽
27 7월의 눈동자 23.11.20 6 0 6쪽
26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하는 한계, 23.11.19 6 0 7쪽
25 세계는 욕망들의 총체이지,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다 23.11.18 5 0 5쪽
24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말할 수 있는 곳과 나의 의지로 말할 수 없는 곳까지일 뿐이다 23.11.17 6 0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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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언어는 사랑을 위장한다 23.11.15 5 0 5쪽
21 비와 당신의 묘지(붕괴와 시작의 서막) 23.11.14 3 0 7쪽
20 20회: 방황하는 가을날의 넋들 23.11.13 3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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