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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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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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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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음(無音)과 망각(忘却)과 무의미(無意味)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도시는 잠들어 있었다.

잠들 시간이라서 잠든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어야만 하는 목적이 있어서 잠든 것처럼.

그래서 잠든 도시는 또한 잠긴 공간처럼 보였다.

시간과 비밀을 그 속에 보관한 채로

무엇인가 모를 그 무엇이 잠가버린,

이야기와 사연과 감정들과 삶과 역사의 자물쇠.


어둠은 지독할 정도로 깊게 깔려 있었고

세상은 고요할 정도로 적적하고 음산해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이상한 밤안개가

물이 없는 도시의 건조한 지역들인데도

괴이하고 어딘가 모르게 두려운 비현실성을

늘 보던 대낮의 도시임에도 언뜻 언뜻

강렬하게 또 진하게 고독한 그늘을 멀고 넓게 그리고

아득한 높은 곳에서부터 밤의 도시 전체에 드리웠다.

도시에서 건물 사이에 피어난 장마로 생긴 밤아지랑이인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점점이 떨어져서 그윽하게 혹은 섬찟하게

존재하고 있는 도시의 밤그늘은

낮의 시원하고 고즉넉한 그늘과는 상관 없이

도시의 차갑고 비정(悲情)한 심상(心象)과 잘 어울렸다.

어둠은 은은하게 광대했고 그래서 그 암흑은 심오하게 적적했었다.

한낮이 추락하는 듯한 끝에서 결국엔 도달한 괴괴한 무음(無音)의 공간은

도시에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시간대의

섬세하고 신비로운 초자연적 공포를

자꾸 연상시켰다.

막연한 두려움이 도시라는 익숙한 공간에도 생길 수 있게

시간은 자꾸만 깊이 흘러가고 있었다.


광막하고 무료할 정도로 침울한 도시의 공간

그 침묵이 침침하게 고이고 있는 퇴폐스러운 밤의 거리를

어떤 점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둠이 온전하게 암흑처럼 가득 채우기만 해도

불온은 사람들의 감각까지도 엄습하는 것만 같았다.

불빛을 꺼뜨리지 말라는 것이 그래서인지.

아주 작은 그 점은 사람의 모습으로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깊은 암흑처럼 불빛도 몇 개 없는 어두운 거리를

어떤 여자 한 명이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다급한 것 같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익숙하고 잘 훈련된 가장된 방식으로

그녀는 침착하고 신속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그녀가 신은 긴 목의 가죽 구두는 그녀를 최대한 빠르게

그녀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걸어가게 도와주고 있었다.

어떤 색의 구두인지는

밤이어서 분간할 수는 없었다.

긴 치마가 빠른 걸음걸이에 자연스럽게 펄럭거렸다.

바람이 없는데도 걸음걸이 때문에 저절로 치마가

그 작은 폭의 움직임으로 흔들리는 모습은

여자의 심정을 왠지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늘 그렇듯이 느긋하지만 또한 한편으로는 곧 있을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설레여서 서두르는 듯한.







그러나 그녀는 남자였다.

가발을 쓰고 화장을 했지만

어두운 밤의 그늘 속에서도

남자의 이목구비다운 특징인

뚜렷하고 크고 굵은 눈 코 입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긴 머릿결의 가발은 잘 밀착이 되어서 자연스럽게

가볍고 경쾌하게 한들한들 흔들렸다.

입술에 뭔가를 얇게 펴서 바른 듯한 이질적인 느낌이

그의 두 입술이 맞물려서 굳게 닫힌 강한 선의 입매에서

어딘지 막연하고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가 혹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목적에서

이토록 심야(深夜)의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완전한 공백의 공간인

모두가 잠든 도시의 암울한 밤을

아주 조용히 뚫고 홀로 어디로 몰래 가려는 것인지,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듯이 집중하고 있었다.

은밀하게 다녀야 했으므로 경계에 모든 다른 감각을

다 활용하려고 모조리 투입하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위아래 아름답고, 비록 색채나 전체적인 모습은

윤곽을 제외하면 잘 알 수 없었지만,

긴 두 숙녀복은 멋진 옷들답게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는

신축성이 좋은 부드러운 옷감처럼 보였다.

그녀의 허리띠 왼편 속에는 단검이 손잡이 부분을 제외하면

밑으로 깊이 숨겨져 있었다.

언제라도 단검을 쓰기 위해서 허리띠 밑에 찔러넣고

휴대를 한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 문서를 가지고 가고 있었다.

이 문서는 서류라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인

전갈을 적어놓은 편지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편지이자 서류 같은 문서를

그 누군가에게 전달해줄 남자는

그녀 혹은 그의 애인이었다.

그들은 이 문서를 서로 주고 받는 의식이 정해져 있었다.

일단 그 전에, 밤의 어둡고 깊고 낮은 으슥한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서

반가운 재회의 의미로 다급한 입맞춤을 한 다음에는

그 후에는 다정하게 사랑의 밤을

육체의 시간 속에서 함께 보내기 위해서

곧 어디인가로 사라질 것이었다.

늘 예정된 순서대로.


도시는 창백하고 싸늘하게 어두컴컴했고

세상은 완벽하게 무미건조하고도 침침하게 고독했다.








피아노를 치다 말고 그녀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레이피엘페이셔스는 피아노 앞의 길고 평평하며 등받이가 없는

검은 의자 위에 앉아서 고개를 틀어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였거나.

왼쪽 벽으로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언제나 세상은 늘 그렇듯이 그대로였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도 인간세상의 모습도.

변하기는 하겠지만 자신이 언제나 관찰을 하지 않고

드문드문 관찰을 한 탓에 그 변화를 놓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의자는 검은 융단을 깔고 있는 고급스러운 피아노 전용 의자였고

그녀는 위아래로 전부 흰 옷만 길게 입고 있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결의 옷은 가을인데도 왠지 그녀와

아주 잘 어울렸고

그녀는 가을처럼 처연하고 쓸쓸해보였다.

본격적인 계절의 동굴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그녀는 언제부턴가 늘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동안에 붙잡고 있던 평정이 깨져버린 것만 같았다.

조각처럼 감정이 제거된 그녀의 옆얼굴은

창백하다고 하기보다는

수척하고 무생물처럼 생기가 없다고 하는 그 편이

더 맞았고 더 가까웠다

건조한 바람이 열어젖힌 창문의 빈 공간을 통해서

자꾸 들어왔다.

긴 머리칼들이 춤추듯 가끔 그녀의 어깨 뒤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바람을 별로 피하지도 않으면서 창문 밖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응시하는 모습이 무엇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확연한 특징이 있지는 않았으니까.

자꾸만 메마르게 변하면 낙엽이 되듯이

그녀는 짐작이 잘 가지 않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계절도 그녀도 자꾸 변해가고 있었다.

높고 차가운 하늘이 저 멀리서 새파랗게 조그만 크기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이른 아침부터 치고 있는 곡(曲)은

며칠 전 피아노 경연 대회에서

음악 학교가 지정한 공통곡이었다.

심사위원의 한 명이었던 그녀가

여러 제자들의 연주를 감상하고

그 각자의 실력을 평가했었던

<약속의 땅>이었다.


가리라

가리라

우리는 가리라

선조들이 약속했었던 그곳으로

우리의 이 모든 수난과 핍박이 다 사라진

눈물처럼 아름다운 그 옛날의 그 땅으로




그러나 이제는 그녀는 피아노보다는

다른 걸 하고 싶어졌다.

매일매일 일기에 쓰고 있을 정도로.

결국 피아노와 음악은 그녀가 아니었고

그녀의 인생은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그걸 요즘 들어서야 그녀는 싫어도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를 것 같았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그녀가 고개를 돌려서 다시 정면인 열려서 올라간

피아노 뚜껑의 검은 색에 반사된 그 흐릿한 무엇을

물끄러미 또 바라보았다.

불쾌하다거나 피곤하다거나 귀찮다거나

아예 어떤 감정이 엿보이지 않는 눈길로.


이젠 더 이상 과거는 그녀의 곁에 있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그녀가 짐작한 바로는 집안의 어른들이

돈을 주든지 그런 식으로 고용한 가짜 아버지였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연기하고 있는.

어쩌면 마법으로 만든 인형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느 가문이든 가문마다 집안에 가장(家長)인 아버지는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하니까.

그렇지 않다면 일단 상속 분쟁에 국가나 왕실이 끼어들어서

가문의 각종 영지나 재산을 놓고 친척끼리

볼썽사납고 추잡한 진흙탕 싸움은

싸움대로 추악하게 하면서도

엉뚱한 친척에게 저택이든 영지인 땅이든 뭐든

다 빼앗길 수도 있었다.

왕궁에 자주 드나들던 친척에게.

그런 가문 내에서의 토론이나 의논이 최종적으로

순순히 그리고 무리 없이 잘될 거라는 전망은 없었으니까.

그녀의 어머니만 그녀가 살고 있는 저택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의 짐작과 판단은 그랬다.

그녀의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그래서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은

그런 것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른 아침부터 새로운 날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상은 그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세상에게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거나 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의 눈부시게 희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게 풀을 잘 먹인 상의가

가끔 세찬 바람에 목둘레의 깃과 두 소매가

다 펄럭거렸다.

목도 양쪽 소매도 다 단추를 제대로 채우지 않은 탓이었다.

창문은 열려있어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투명한 유리가 매끄럽게 빛나고 있는

화려하고 복잡하며 정교한 창틀 장식무늬의 철제 양쪽 문은

이 세상에게 열린 것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서

바람이 한껏 팽팽하게 불어들어왔다.


그는 기쁨에 웃고 있었다.

남자가 웃고 있는 모습은 미소를 띠고 있었음에도

왠지 무시무시하고 한편으로는 천진난만해보이기까지 했다.

머리칼들도 가끔은 심한 바람에 흔들리며 짧게 나부꼈다.

그가 창문을 향해서 걸어왔다.

창가에 도착한 그는 양팔을 벌려서 창틀에 두 손을 올려놓고는

창밖을 잠자코 잠시 바라보았다.

아무런 의미도 어떤 의도도 없이 그저 멍하니.

그의 미소가 다시 또 그의 입매에 나타났다.

잔잔하고 차가운 이상한 미소를 짓던 그가

구름이 먼 하늘의 점처럼 흘러가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

바깥의 풍경을 그만 내다보고 이윽고

자신의 오른쪽 종아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검은 색의 길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멋진 바지 속에서

호수의 수면 위로 급부상하는 물고기처럼

마치 거품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듯이

각종 빛들이 폭발하듯이 점멸하며

반복적인 끊임없는 이어진 빛의 행렬 끝에

길고 차가운 사각형 입방체의 보석이

점점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처럼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녀는 아름답고 그리고 부동(不動)의 자세로

그 비처럼 흘러내리는 폭포를 맞고 있었다.

그 비는 보석(寶石)이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는 보석수(寶石水)였었다.

여러 갈래의 흐름들이

온갖 눈부시고 찬란한 번쩍이는빛들이

서로 합류하거나 독자적으로 드러나듯이

천천히 장엄하게 또한 느리고 격렬한 숨막히는 혼돈처럼

끊임없이 그리고 놀라운 모습으로

그녀를 가두기라도 할 것처럼 일종의 차단막처럼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선명하고 오똑한 그녀의 얼굴과 육신에서 흐르고 있는

초절(超絶)한 미(美)는

흐릿해지다가 다시 선명해지면서

그렇게 반복적인 교체를 거듭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폭포는 그러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거세게 떨어져 내리고 있어도.












소녀는 드디어 두 눈을 아주 부드럽게 떴다.

밤의 장막이 열리고 새로운 아침이 당도하듯이

그녀의 주변이 일순간 변해버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는 섬세하고 길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작은 유리병을 쥐고 들어올렸다.

손목까지도 그렇게 생긴 것으로 보였다.

백조의 목처럼 길고 우아한 손목과 팔.

조심스럽다기보다는 고요하고 침착하게

그녀는 그 액체를 차분하고 느리게 마시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이 빵은,

눈물 젖은 빵,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괴물을 논하지 말라고

대시인이었던 르인테 괴르생크가 말했었는데.



그렇군

용(龍)의 눈물에 젖은 빵도 눈물에 젖은 빵이긴 하지

용(龍)의 눈물인지

용(龍)의 콧물인지

용(龍)의 오줌인지

용(龍)의 땀인지

용(龍)의 정액인지

확인할 길이야 없지만


마법의 액체도 액체는 액체니까

빵을 적실 수야 있지


또, 그 용(龍)이 수컷인지도 암컷인지도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러나, 이걸 확인할 수는 있지.

내게 온 편지니까.


소녀는 빵을 씹다가 나온 흰 종이 쪽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생전 처음으로 보는 종이 쪽지인 것처럼.

희고 매끄러운 작은 종이는 고급스러운 종이인 듯

몇 번을 접혀서 빵 속에 집어넣었는데도

견고한 초기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그 종이보다 더 희고 눈부신 마치 우유 빛깔처럼

흰색의 극치에 다다른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가락들로

그녀는 천천히 침착하게 종이 쪽지를 폈다.

빵을 먹다 말고 그녀는 아주 작은 크기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하핫. 나는 사랑을 사랑하지.


나를 사랑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소녀는 이상하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 웃는 모습은 조용하게 번쩍거리는 눈빛들로

왠지 모를 무시무시한 예감 같은 공포를 불러왔다.

바닥에 조용하게 깔리기 시작하는 잔잔한 연주곡의 첫 도입부처럼.

그녀의 두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흘러서 나올 때마다

그녀의 주변 배경이 무너지듯 괴이하게 분위기가 변해갔다.



소녀는 천천히 수가 놓여진 조각들을 바느질로 붙여나갔다.

조각 조각 떨어져 있는 무늬들을 계속 이어붙이듯이

보자기를 계속 만들고있었다.

그 보자기는 작은 조각들을 서로 서로 연이어서 붙이듯이

바느질로 함께 붙이고 있었다.

바늘과 바늘에 꿰어져들어가있는 실은

경계와 경계를 넘듯이 서로 다른 조각들을 계속 꿰매어서

하나의 다른 큰 보로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얌전하지만 엷은 오싹함이 느껴지는 미소로

계속 바느질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의 옷만큼 아름다운 흰색의 보에 각종 색상의 실들로

무늬가 수를 놓아져 있었다.

도형들의 무늬는 좀처럼 알 수 없는 무늬들이었다.











심야의 거리에서 병약한 미소녀의 친오빠 엔티레이미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거의 흡사하게 닮은 외모와 둘 다 놀라울 만큼 굉장한 미모로

이름이 높은 두 남매는

그러나 한 명은 방에만 갇혀있듯이 지내고 있고

다른 한 명은 이렇듯 거리를 마구 돌아다니고 있었다.

밤의 고양이처럼 어두운 도시의 위험하고 불온한 곳곳을.

날카로운 밤 공기는 싸늘한 도시처럼 차갑게

도시 전체에 내려앉아서

마치 모든 암흑의 공간을 얼려버리기도 할 것처럼

밤의 도시는 무겁고 어두컴컴하게 내려앉아있었으나

엔티레이미크는 태연한 것처럼 오만하고 초연하게

단지 벽에 기대어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렇게 거리의 아무 지점에나 시선을 주고 있던

엔티레이미크는 이윽고 무의미한 상념의 시간을 끝내고는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밤의 거리에서 어떤 지나가던 남자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편지를 읽는 엔티레이미크의 표정은 그냥 무미건조했다.

왕국에서 그 존재를 아무도 모르고 있는

신성기사단(神聖騎士團)에 소속된

소년 기사(少年騎士) 엔티레이미크는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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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다정한 어리석음은 이렇게나 달콤하구나 24.05.28 2 0 12쪽
48 쓸데없는 욕망의 시체들 24.05.27 3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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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소리를 잡아먹는 고양이 24.05.24 3 0 15쪽
45 세월의 뼈, 고통의 화석 24.05.23 1 0 11쪽
» 무음(無音)과 망각(忘却)과 무의미(無意味) 24.05.22 2 0 15쪽
43 약속의 땅 24.05.15 3 0 14쪽
42 검은 물 위에서 연주하는 음악 24.05.13 5 0 6쪽
41 세상의 낯선 음악 24.05.12 2 0 15쪽
40 기억이 멈춘 곳에서 시간의 공백을 기다린다 24.05.11 3 0 11쪽
39 빛을 잃은 약속과 다가올 운명들 24.05.10 2 0 13쪽
38 세상엔 참된 요리도 없도다 : 불가사의한 마법의 맛 23.12.06 4 0 9쪽
37 세상엔 참된 계절도 없도다 23.12.05 4 0 5쪽
36 세상에 참된 평화 없도다 23.12.04 2 0 8쪽
35 내일은 비록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23.12.01 6 0 8쪽
34 추억처럼 고통스러운 미래 23.11.30 9 0 7쪽
33 봉인된 장미의 열쇠 : 기억 저편에서 불어오는 노래 23.11.29 3 0 5쪽
32 가버린 날들의, 흩어진 추억들 23.11.28 2 0 6쪽
31 예전보다는 지금을, 지금보다는 먼 훗날에 23.11.27 3 0 7쪽
30 침묵으로 봉인된 이름 23.11.23 3 0 3쪽
29 이토록 간절한 슬픔의 가을 23.11.22 5 0 5쪽
28 9월의 이빨 23.11.21 9 0 5쪽
27 7월의 눈동자 23.11.20 6 0 6쪽
26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하는 한계, 23.11.19 6 0 7쪽
25 세계는 욕망들의 총체이지,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다 23.11.18 5 0 5쪽
24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말할 수 있는 곳과 나의 의지로 말할 수 없는 곳까지일 뿐이다 23.11.17 6 0 6쪽
23 보여질 수 있는 사랑은 말해질 수 없다 23.11.16 6 0 7쪽
22 언어는 사랑을 위장한다 23.11.15 5 0 5쪽
21 비와 당신의 묘지(붕괴와 시작의 서막) 23.11.14 3 0 7쪽
20 20회: 방황하는 가을날의 넋들 23.11.13 3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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