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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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연재수 :
1,7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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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12,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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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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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말할 수 있는 곳과 나의 의지로 말할 수 없는 곳까지일 뿐이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축축하고 어두운 그러나 몹시도 가는 비가

주변을 물들이면서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들은 가늘어서 적신다는 느낌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엔 왜 오셨습니까?


잃어버린 걸 찾으러 왔습니다.

남자는 천천히 그리고 의미도 없는

평상적인 어조로 그렇지만 뚫어지게 집중된 어감으로 말했다.

어둠은 밤처럼 또는 새벽과 저녁처럼 두껍고 만연해서

남자의 얼굴도 상반신도 그저 흐릿한 같은 검은색의

그림자처럼 전체적인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안 팔아요


나도 돈도 없어요.

남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고 나서 간결한 정지된 침묵을 지켰다.


여기엔 왜 오셨습니까?

다시 재차 그 목소리는 묻고 있었다.


잃어버린 걸 팔러 왔습니다.

남자는 침착한 것이 아니라 침체되기 시작하는 분위기의

말투로 이제는 변해가고 있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상한 느낌이 드는 억양이었다.


어둠이 걷히기 전엔 항상,

남자는 왠지 자신의 말을 머뭇거리듯이 잠깐 끊었다.

그러더니 다시 중단했던 자신의 말을 해나갔다.

어둠이 걷히기 전에는 항상 구름에 해가 가려져 있는 법이죠


저한테 왜 이러세요?

묘지의 공간에서는 다시 질문처럼 대답이 돌아왔다.


구름을 가르고 첫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면,

저기 새들이 잠들어 있는

저 암울한 검은 둥지 안에도 드디어 환한 빛이 내려서

모든 것이 잘 보이게 밝아지죠


저한테 왜 이러세요?


그러자 이번엔 남자가 침묵을 지켰다.

마치 문에 빗장을 걸고 자신을 지키듯이.

그 닫힌 실내에서.


빛이 어둠을 이길 수 없듯이

먼지는 세월마저도 다 뒤덮어버립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남자는 항의라도 하듯이 묘지의 목소리에게

다시 물었다.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세상엔 깊이 패인 홈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리고

그 부분들에는

세상의 또 다른 진실들이 숨겨져 있거나 들어가 있죠.


어서 나오시죠

남자는 단호하지는 않았으나 더 듣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듯이

재촉을 했다.


뜻밖에 허공처럼 검고 짙은 빛들의 속에 들어가 있는 큰 비석 뒤에서

조심스럽고 주저하듯이 조금씩 조금씩 느리게 나온 것은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몰골의 두상을 가진

어린 소녀였다.


차갑고 냉정한 모멸 같은 축축하고 어두운 그러나

굉장히 견고한 시간이 무섭게 짓누르듯이

주변을 물들이면서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들은 가늘어서 적신다는 느낌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엔 왜 오신 거죠?



오면,

안 되나요?

남자는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자신 없는 몸짓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세상이 어둠 속에서 아직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의 모습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빛이 없는 어두운 시간이라고 해도

별 차이가 없었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점은 마찬가지니까.



추억은 그저 추억일 뿐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마세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과거로부터 떠나주세요.

당신을 보내면 나도 이곳에서 살 수 있어요.


당신은 과거가 아닌 곳에서도 잘 살 수 있지만.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이려는 듯

소녀는 낮고 가라앉은 말 한마디를 더 했다.




그렇지만...

보고 싶었어요. 난, 그냥...

남자는 가까스로 한마디를 했다.


여기엔 왜 오셨어요?


이번에는 남자가 고개만 숙이고 대답마저도 하지 못했다.

그가 오른쪽 각반을 다리로부터 벌리고

그 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단검이었다.


이걸 왜?


이게 필요할지도 몰라.

남자는 더는 할 말이 없는 듯

그저 빗방울들이 미세하고 가늘게 떨어지는

차가운 암흑의 묘지에서

그 묘지만큼 어두운 분위기였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한참이 그로부터 다시 시간상으로 지나갔다.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아.


그렇지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사랑 속에서 지금도


그러자 둘 다 말이 없었다.

마치 강물이 흐르다가 갑자기 멈추었고

내리던 비가 뚝, 삽시간에 그친 것처럼.


원래 그가 혼자서 말을 하고 있다시피

거의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있었지만

말의 흐름은 강물이 아닌

사막의 모래처럼 건조하고 갑갑하게 변해버렸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묘지의 소녀가 말했다.


...




대답이 없는 공간을 향해서 소녀가 다시 말했다.

여기로 더 이상 오지 마세요.

여긴 달라요.


우리는 한낱 타인들의 그림자들이거나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 사람들의

사소한 꿈속 풍경이나 맡겨놓은 욕망들의 잔해(殘骸)에

불과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나와 당신?

그러나 어떤 대답도 묘지에서는

남자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단검은 공중에 그대로 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소녀가 그 전에 단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의 공중에 떠 있는 단검은

기묘하게도 그 흐릿한 금속성의 희미한 빛 때문에

조각달인 어두운 밤하늘의 초승달처럼 보였다.

사방이 어둡기도 했으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잠든 채로 꿈꾸고 있는

어두운 밤의 낯선 풍경처럼

그 사람들을 대신해서

다른 곳에서 다시 살아가고 있는,

깨어지고 스러지고 불태워져서

세상이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옛 소망들과 버려진 욕망들의 이름으로

우리는 오직 파편 더미들입니다.


먼지들의 무덤에는

더 이상 오시지 않았으면,

하네요




소녀는 조용히 돌아섰다.

마치 검은 그림자가

그나마 있던 달빛이 구름에 가려져서

더 크고 더 짙으며 더 진한 그늘 속에

완전히 파묻히듯이 흡수되어서

종래에는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지듯이.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말할 수 있는 곳과

나의 의지가 말할 수 없는 곳까지일 뿐이다.


그리고 그 각자 다른 영토들이 환상(幻像)처럼 너울거리듯이 겹쳐지는

온갖 다층적인 복잡함 속에서

고요한 외피를 뒤집어쓴 한계 너머로

평화롭게 단일한 통일성을 구축한 척,

연극이라도 하듯이

비정한 항존성(恒存性)으로서 존재한다.

너와 나는 같지 않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 갈림길이 어디서부터 출현했는지는

알 수도 없지만.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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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다정한 어리석음은 이렇게나 달콤하구나 24.05.28 2 0 12쪽
48 쓸데없는 욕망의 시체들 24.05.27 3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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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소리를 잡아먹는 고양이 24.05.24 3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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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무음(無音)과 망각(忘却)과 무의미(無意味) 24.05.22 2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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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검은 물 위에서 연주하는 음악 24.05.13 6 0 6쪽
41 세상의 낯선 음악 24.05.12 2 0 15쪽
40 기억이 멈춘 곳에서 시간의 공백을 기다린다 24.05.11 3 0 11쪽
39 빛을 잃은 약속과 다가올 운명들 24.05.10 2 0 13쪽
38 세상엔 참된 요리도 없도다 : 불가사의한 마법의 맛 23.12.06 4 0 9쪽
37 세상엔 참된 계절도 없도다 23.12.05 4 0 5쪽
36 세상에 참된 평화 없도다 23.12.04 3 0 8쪽
35 내일은 비록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23.12.01 6 0 8쪽
34 추억처럼 고통스러운 미래 23.11.30 10 0 7쪽
33 봉인된 장미의 열쇠 : 기억 저편에서 불어오는 노래 23.11.29 3 0 5쪽
32 가버린 날들의, 흩어진 추억들 23.11.28 2 0 6쪽
31 예전보다는 지금을, 지금보다는 먼 훗날에 23.11.27 4 0 7쪽
30 침묵으로 봉인된 이름 23.11.23 3 0 3쪽
29 이토록 간절한 슬픔의 가을 23.11.22 5 0 5쪽
28 9월의 이빨 23.11.21 9 0 5쪽
27 7월의 눈동자 23.11.20 6 0 6쪽
26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하는 한계, 23.11.19 6 0 7쪽
25 세계는 욕망들의 총체이지, 사실들의 총체가 아니다 23.11.18 5 0 5쪽
»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말할 수 있는 곳과 나의 의지로 말할 수 없는 곳까지일 뿐이다 23.11.17 7 0 6쪽
23 보여질 수 있는 사랑은 말해질 수 없다 23.11.16 6 0 7쪽
22 언어는 사랑을 위장한다 23.11.15 6 0 5쪽
21 비와 당신의 묘지(붕괴와 시작의 서막) 23.11.14 3 0 7쪽
20 20회: 방황하는 가을날의 넋들 23.11.13 3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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