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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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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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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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멈춘 곳에서 시간의 공백을 기다린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밤은 차츰 밀려왔다.

먼 곳으로부터 다가오듯 밀려오는 파도처럼

소슬하게 싸늘한 감각으로부터,

그리고 마침내 세상을 덮어버리듯

완전한 침묵의 검은 그림자 같은, 그래서

어두운 혼돈 같은 그 빛으로

드디어 다시 당도했다.

세상이 잠들어 있는 비밀한 시간에,

그러나 세계는 조용하지 않다.

또 다른 세계가 미만(彌滿)한 고독 속에서

암암리에 혼자서 열리고,

밤에만 활동하는 생물과 역시 그런 물질들이

온전히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스스로의 참다운 본질로서 존재한다.

어쩌면 근본적인 본질로서.


전날의 피바람과 분노의 눈보라와

시름에 겨운 서글픈 빗줄기들과

이별의 싸늘한 낙엽들이 서럽게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던

그 많은 과거들은 다 이제는

잠들어서 은닉되어 있듯이

세상은 평화롭게 위장하고 있었다.

평소의 모습들은 다 천막으로 덮어둔 창고처럼

또 다른 평소의 모습으로 비로소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 세상과 세계의 벌어진 틈 같은

깊은 밤과 밝은 대낮 사이에 놓여진 가느다란 다리 같은

잠깐의 짧은 간극 같은 위태로운 밤의 시간에

엔티레이미크는 홀로 있었다.

그가 깊고 깊은 검은 밤에

밤처럼 어두운 색깔과 모습으로

이렇듯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이 대도시의 시민들이 목격을 한다면

과연 어떤 표정이 될 것인지.


그러나 그는 얼굴에 가면도 복면도 전혀 쓰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심야는 외로울수록 더욱 고요해지니까

그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깊은 심해(深海)의 물고기처럼 그는 자유로웠고

그래서 그가 어느 곳을 다니든

보는 사람도 역시 없었다.

모두가 다 잠들어 있었으니까.





세상은 역시 평화롭군.

엔티레이미크는 어쩐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혼잣말은 차갑기만 한 검은 밤바람 속에서

먼지처럼 가볍게 멀리 멀리

흩어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만이 이렇게 따로 외떨어져 있군.


소년 엔티레이미크의 옆얼굴에 차분한 작은 미소가 살짝 지어졌다.

그의 얼굴이 바람 때문에 가끔 머릿결들로 뒤덮여서 펄럭거렸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지 검은 심연(沈淵) 위를 지나쳐서 건너오는

어둠과 미지의 느낌으로 싸늘했다.




모두가 사실은 그래.

다 같이 있어도 늘 생각들은 다르지.

그리고 모여서 함께 있어도

늘 외롭고...



언제나 곁에는 누가 없어.

원하고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


그의 독백은 바람 줄기들이 너무 심하게 자주 연속으로 밀려와서

공중에 흘러나가지도 못하고 자꾸만 뒤로 흩어졌다.


나에게도 세상에서의 공간이 있었지

사람들과 함께 하던 것들도

또 여러 가지 욕망과 소망들도...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지?




그가 있는 곳은

까마득하게 높고 높은 밤의 첨탑이 밖으로 보호막처럼

두르고 있는 난간의 위였다.

첨탑이 너무 크고 높아서

첨탑의 어느 곳인 그곳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낮은 아래를 구경을 하기 위해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곳에

밑으로 추락하지 말라고 설치한 난간들이

길고 길게 수평으로 뻗어나가다가

다시 수직으로 꺾여져서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첨탑과 그 첨탑이 속해 있는 건물은

너무 크고 높아서

그가 난간 위에 가만히 서서 흔적조차도 잘 분간이 되지 않는

저 아래의 검은 도시를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는

한밤의 심오할 만큼 깊고 어두운 풍경은

현기증이 날 만큼

차가운 전율이 일어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석연치 않은 이상한 감동이 있는

아름다운 공포감이기도 했다.


그가 갑자기 그 무섭고 위험한 난간 위를

미칠 듯이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 번의 삐끗할 위태로움이나 실수도 없이

그는 전속력을 다 해서

그리고 바람을 가르고 찢어버릴 듯이

매서운 분노처럼 심장의 심박수가 걱정될 정도로

시야에서 포착이 잘 되지 않을 속도로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이토록 멀리 와있다.

내가 알던 것들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내가 알던 것들과

내가 알고 있어야만 하는 것들,

그 사이엔

이토록 멀고 먼 거리가 있었다.







그가 달리고 있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이윽고 제어가 불가능해지며 통제와 계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속도의 한계마저 돌파한 듯 보였다.

그는 이미 어둠 속에서 희미한 한 점 불꽃만큼도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토록 까마득하게 높던 난간과

그 난간의 길이만큼

높이와 거리는

어느새 다 사라지고

그는 얼음 같기도 하고 은반(銀般) 같기도 한

또 동시에 신들처럼 잠든 깊은 밤의 호수 수면(水面) 같은

정적과 고요와 일종의 무미건조한 평화와 침체된 정지가

길바닥에 쌓인 눈처럼 부드럽고 은밀하게 깔린

무한대처럼 넓은 공간을 달리고 있었다.





거울처럼 평평하고 끝없이 앞으로만 놓여있는

잃어버린 낙원처럼 평안(平安)한 변화의 지대.

그곳을 그는 빛의 활시위에서 쏘아버린 빛살처럼

분노하여 폭발한 섬광처럼

날카로운 칼날의 휘둘러진 선(線)처럼

그러나 차츰 차츰 목적지에 도달한 휴식처럼 자꾸 자꾸

다가가고 있었다.

마치 꿈결처럼 그리고 환상처럼 또한 머나먼 겨울 눈나라처럼

모든 소음(騷音)과 모든 풍경과 모든 감각이 차단된 곳

유일하게 시각만이 허용되어있는

그런 이세계(異世界)와 닮은 곳...




그는 멈추어섰다.

측정이 불가한 속도로 달리던 평온한 광기(狂氣)와

질주하던 무서운 폭발력은

어디에 내다버려서 치운 것인지

그는 놀랍도록 침착하고 차분했다.

지극히 단정하고 말쑥하며 멋진 그의 평상시 모습 그대로.




그는 큰 거울 앞에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래서 그의 흐릿한 모습은

거울 앞에서 선명한 빛을 받았음에도

무한의 공간과 암흑의 시간 같은 그 기이한 장소에서는

거울만이 또렷하고 분명한 윤곽과 신기할 정도로 찬란한 빛들에

휩싸여 있어서 오직 존재감은 거울에만 가득했다.

직사각형의 신비스러운 빛들이 연기처럼 또는 물결처럼

또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끝없이 그러나 느리고 거대한 조율로 끊임없이

거울로부터 뿜어져나와서

물결치듯이 혹은 흔들리는 파동처럼

사방의 모든 공간으로 퍼져나가면서 동시에 채우고 있었다.



그는 잠시 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과 그는 서로 무관심한 듯

외면이라도 하는 분위기처럼

막막하고 낯선 순간이 찾아왔다.

한참을 그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듯이

거울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 속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밀어넣듯이

아주 가볍고 부드럽게 천천히 집어넣었다.

손은 그대로 물 속에 집어넣는 것처럼

그렇게 들어갔다.

다시 팔까지 들어갔다.

엔티레이미크는 팔과 어깨를 지나서

다른 몸의 부분에 이르기까지

다 거울 속으로 아주 유연하고 매끄럽고 부드럽게

어떤 부작용이나 반발과 그래서 생기는 소음(騷音)들도 없이

그대로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모습은 다 사라지고

거울 속에서 피어나오는 듯한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연기 비슷한 빛줄기들만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떠다니는

그 공간만이 남겨졌다.








얼음에도 여러 가지 종류들이 있다.

그리고 그 얼음들은 그럼에도 본질적으로는 결국엔 다 같은 얼음들이다.

모든 좋은 얼음들은 다 같은 모습과 상태의 얼음들이나,

나쁜 얼음들은 제각각 무수히 다른 조건과 상태를 요소로서 가지고 있다.

구성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마시고 있는 이 한 잔의 얼음물은,

결국엔 얼음들이 떠 있는 차가운 물 한 잔이다.

이 잔 속에는 얼음들로 차가운 물이 한 잔 용량만큼 담겨져 있고

그리고 그 수면에는 얼음 조각들이 고요히 떠 있다.


레이피엘페이셔스는 침착하고 신중한 부드럽게 느린 몸짓과 그 속도로

아주 천천히 얼음물이 든 잔을 들어서 마시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느린 속도였다.

그 몸짓엔 어떤 감정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없었다.

레이피엘페이셔스는 끝까지 물을 다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남김없이 마셨다.

물을 다 마시고 난 후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만 가만히 서 있었던 그녀는

그래도 끝까지 도자기로 된 찻잔을 쥐고

그대로 우두커니 멈춰있었다.

이윽고 한참이 지난 후에 그녀가 중얼거렸다.



마침내 얼음들은 다 결국엔 녹기 마련이겠지?






그리고 다시 그 말이 끝나고 난 후에는

그 말을 했었던 레이피엘페이셔스는 고개를 숙이고

어둡고 창백한 아름다움으로 어둡고 흐리게 빛나는 얼굴로

잠자코 실내의 땅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흘린 얼음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져서 그렇게 녹고 있는지

살펴보기라고 하는 것처럼.


그녀가 천천히 다시 말을 또 이어나갔다.

아름다운 음(音) 같은 청순하고 결이 곱고 가는 목소리였다.


나는,

이렇게 얼음들처럼 분리되어서

이렇게 따로 녹아 내리고 있겠지...?



나는 얼음일까?

그녀는 울고 있었다.

눈물 방울이 하나 둘 그녀의 눈매 끝에 매달리고 있었다.



미소는 거짓,

진실은 아픔,

용해되는 마음이 나를 부럽게 한다



죽음의 끝은 부활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두 눈꺼풀이 세상과 그녀 사이의 아주 얇은 두께의 차단막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그녀의 두 눈매 끝에서 제각기 다른 속도로

양쪽에서 번갈아 시간차를 두고 눈물 한 방울이

서로 떨어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작고 나지막하고 곱고 섬세한 얇은 목소리로.

자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서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표정은 미묘하고 복잡해서,

그래서 이상하기까지 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들이야

결코 돌아올 수 없지


그녀는 눈물을 닦지는 않았으나

눈물은 어느 틈엔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결코 다시 돌아와서도 안 돼.



그녀는 다시 웃는지 슬픈 울음인지 모를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또 말했다.

슬프고 처연하고 아름다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지금은 이렇게 내가 혼자 있지만,

그러나...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날에도 나는 역시 혼자겠지?


그녀는 더 이상 그 어색한 슬픈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 슬프도록 쓸쓸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그 표정은

마치 여운처럼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 남아있었다.


다시 또 긴 시간 같은 짧은 정적이 흘러갔다.

그녀가 홀로 있는 빈 방에서는 흘렀는지 멈췄는지도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같이 있을 수는 없을까?

왜, 사람들은 늘 따로 따로 떨어져 있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팔짱도 꼈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워보이는 흰 두 팔은

반팔 소매로 된 긴 드레스 때문에

그 팔 부분만큼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걸까...?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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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세상의 낯선 음악 24.05.12 2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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