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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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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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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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이것은 너의 음악이 아니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이것은 너의 음악이 아니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소년 피케메이엘레세이시엔은

놀란 것처럼 커진 두 눈으로 멍하니 스승을 쳐다보았다.




너의 음악은 너의 음악일 뿐.

왜 그런 것인지 정녕 너는 이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냐?


피아노의 위대한 스승이자

미소년 피케메이엘레세이시엔의 음악과 피아노의 스승이기도 한

메릴테이레트로피에스는

음침하고 동시에 침울하면서도 격렬한 눈빛으로

제자 피케메이엘레세이시엔의 내면을 파고 들어서

낱낱이 바닥까지 꿰뚫어보겠다는 듯이

정지된 자세와 정지된 채로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러나 오만하면서도 의연하게도

집중된 차분함 속에서 고요히 또 무섭게

제자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눈빛은

제자를 고요히 한 점 응결된 지점에서 훑어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게, 무슨 말씀, 이십니까?

어린 제자는 스승인 자신에게 할아버지뻘이 되는

음악계에서는 불멸의 존재이자 피아노의 신성한 교사인

위대한 거장을 공허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스승은 피아노 앞에 연주하기 위한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피아노 뒤에서 제자는 서 있었기 때문에

제자인 소년 피케메이엘레세이시엔이 내려다보고 있어야 했지만

왠지 소년이 스승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에 노인이 오른손 한 손을 피아노 건반에 얹고는

조용히 건반 한 개를 눌렀다.

빈 강당에 뭔가가 쏟아지면서 크게 울리듯이

그 작은 음(音) 하나가 둘이 있는 어둑어둑하고 침침한

늦가을의 텅 비어있는 교실에 울려퍼졌다.

작고 미세하고 흔한 평범한 소리였지만

오직 그 음(音) 한 개만

괴괴할 정도로 어두워져만 가는 정적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울려나와서,

물결이나 파도가 번지듯 밀고 나가지도 전혀 못하고

지극히 짧은 순간에만 존재했다가 삽시간에

사라지고 마는

그 짧고 단조로운 하나의 음(音)이


왠지 특별하고 상징적인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심상치 않게 들렸다.


이 소리가 네 귀에도 들리느냐?


그렇습니다. 당연히 들리죠.

저는 귀가 들리지 않는 청각 장애인이 아니니까요.



그렇겠지.

귀가 멀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노인은 짤막한 한 단어로 한마디 말만을 덧붙이더니

다시 오른손 한 손만 얹고 있는 그 상태에서

피아노 건반 위를 야생마들이 달리듯이

그 한 손만으로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딱히 피아노를 외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피아노의 건반을 집중하기 위해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경쾌하지만 격한 달리기도 아닌 그러나 부드러운 질풍처럼 빠르고

들판 위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섬세하고 조용하지만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계곡의 소(沼)에 일고 있는 차분함으로

지금 이곳이 아닌 곳으로 꿈꾸는 듯한 여행을 그는

이미 자신의 내면 속에서

떠나고 있는 듯했다.

짧지만 신비할 정도로 아름답고 단순한 곡을 연주하고

노인이 다시 말했다.


이 음악이 너의 귀에 들렸느냐?


네...

소년은 망연자실한 듯이 또는 바보처럼 멍청하게 대답했다.

그의 큰 키가 허공의 줄에 걸린 축 쳐진 빨래처럼

허무하게 맥없어 보였다.



그래, 어떻게 들리더냐?

노인은 추궁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표정하고 엄숙하게 물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따지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차갑고 건조한 얼굴은

마치 올빼미나 부엉이의 매서운 무표정한 몸짓처럼 보였다.


...그냥, 지극히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대단히 짧은 소곡(小曲)이었습니다만...


그렇겠지.

이 곡은 지상(地上) 어디에도 없으니까.

왜냐하면 내가 이 곡을 작곡을 지금 이 순간

확실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즉흥적으로 아무렇게나 쳐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어디에도 지금껏 없던 곡이었다.


노인은 다시 말을 끊고 한참을 제자를 올려다보았다.

노인에게서 나오는 말없는 침묵의 시선이

쏘아보는 듯한 차가운 불길로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갑갑하고 수상하며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로

자꾸 그 방을 몰고 갔다.


이 음악이 그러니까 너의 음악이더냐?


노인의 재차 이어지는 공격 같은 차가운 음성의 질문에

소년은 다시 힘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소년은 간신히 대답하는 것처럼 어렵게 말했다.


마찬가지다. 너의 음악도 역시 이렇다.

그리고,


노인은 이제는 피아노 건반에서 오른손을 완전히 치우고는

자신의 앙상한 오른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위아래 모두가 낡고 시커먼

검은 옷들이었다.

가끔 해진 구석도 있는 낡을 대로 낡은 헌 옷의 껍질과

그 속에 감추어진 심오한 정신과 위대한 예술이 깃든,

그러나 다 삭아서 스러져가는 가지 같은 쇠잔한 육체와,

불멸의 재능이 상시적으로 분출하듯 나오기만을 기다리면서도

애써 봉인하고 굳이 가리고 있는 듯한

검은 심연(深淵)처럼 답답한 검은색 의상들.


내가 제아무리 위대한 음악을 연주한다고 한들,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 쪽의 귀와 그 의식 속에서는


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그가

정면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제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제자를 올려보고 있었으나

제자인 손자뻘의 소년은 고개를 너무 숙이고 있어서

피하려고 피한 것이 아니라 노인을 저절로 외면하듯이

조금도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마다 천차만별로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전혀 음악을 아름답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음악에 문외한인, 예술과 음악을 혐오하고 경멸해서

멀리하는 그런 부류부터

음악에 생사를 걸고 목숨도 내던질 수 있는

감정적인 과장으로 점철된 성격 탓에,

음악에 대한 광기(狂氣)로 가득 찬 광인(狂人)들까지

다 제각각 다르게 그 음악에 대한 감상이 다를 것이다...

모두 다 다른 것이다,

아무리 약간씩만 서로가 다 다르다고 하더라도...


노인은

잠시 말을 끊듯이 멈추고 제자를 계속 응시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제자는 초라한 모습으로

스승인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고

어딘가 막연한 곳을 의미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것이라도 하고 있겠다는 듯이.


그렇다면,

내가 한 곡(曲)을 연주하고 있는데

그 피아노 곡을 동시에 어딘가에 모여서 듣고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는


내 음악은 어떤 음악들일까?

내 음악이 그들 각자마다의 음악들과

과연 같은 음악일까?


제자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피아노의 건반 위에 널린

먼지들 몇 점들을 일일이 숫자라도 전부 세고 있는 듯이

침묵으로 스승에게 응대했다.


내가 왜 이 말을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저는 진짜 잘 모르겠습니다.


가거라.

오늘 수업은 다 끝났다.

먼 훗날 언제 어디서라도 내 말이 기억에서 문득 떠오른다면

그때는 혹시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제자는 그러나 떠나지 않고 계속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고집스레 침묵으로 시위와 반항이라도 하듯이

한동안 그곳에 서서 떠나지 않는

어리고 어린 제자와 나이 많은 위대한 교사인 노인네가

서로 대결이라도 하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그렇게 대치만 하면서 속절없이 시간만 자꾸

시간과 공간의 어딘가 서로 맞물린 알 수 없는 틈새로

새어나가듯이 빠져나갔다.

이상하게 숨막히듯이 답답한 시간을 최초로

이윽고 깨뜨린 사람은 어린 제자였다.


스승님,

하지만 저는 스승님을 만난 걸


단 한 번도,

지금까지 언제의 순간에도 정말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소년은 이 말을 하고 나서

비로소 고개를 들고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이 내려다본 곳에는

언제부터인지 똑같이 노인이 소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라.

가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너의 음악이 바람처럼 자유로워진다면

너는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넘어선

너 자신만의 음악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노인의 두 눈은 해가 빨리 떨어지는 계절의 실내라서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섬세하고 은은한 섬광 같은 것이

멀리서 보이는 횃불처럼 고요히 그 자리를 지키듯이

투명하고 난해한 색채의 불길처럼

어둠 속에서 마치 잘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스승님은 제 음악이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그러나 제자의 이 마지막 물음에

스승은 그때에 결코 대답해주지 않았었다.

그날을 떠올리면 소년은 뭔가 답답하기도 하고

이상한 울분 같은 분노가 치밀어오르곤 했었다.

그러나 노인의 죽음을 확인한 이후로는

자신의 스승이 죽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뭔가 달라진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착각과 그것에서 비롯된 중압감의

막연하고 모호한 큰 부담감이 아닌

그저 왜 나를 버린 걸까, 하는 그런 쓸쓸함이었다.

인정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외면과 소외를 시킬 것이라면 처음부터 나를 제자로

왜 받아들여서 굳이 애를 써가면서까지 가르쳤는지,

하는 그런 이해가 불가능한 측면에서 오는

원망이었다.

어쨌거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승님이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가장 뛰어난 제자였던 자신의 음악도

인정을 거의 하지 않았던

그 모든 점들이 제자였던 피케메이엘레세이시엔에게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아침은 어느덧 찾아와서

이른 아침은 눈부시도록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심신과 세상을 영혼까지 정화시키겠다는 듯이

세상에 밀려왔다.

가벼운 비가 어젯밤에 내려서

세상은 투명한 물로 섬세하게 씻겨진 것처럼

청신(淸新)한 날의 새로운 장(章)을 열려고

다시 똑같지만 다른 시간을 펼치고 있었다.

열어놓고 잤던 창문으로

숲의 정령들이 거닐며 마시고 있는 듯한

신비스러울 정도로 맑고 깨끗한 공기가

소년의 정신을 차갑게 깨웠다.


좋은 아침이군.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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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회: 음악은 영원하다. 그러나... 23.11.07 4 0 4쪽
14 14회: 연금술의 비밀 23.11.06 4 0 5쪽
13 13회: 나는 누구인가 23.11.05 5 0 5쪽
12 12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와 소년 23.11.04 7 0 7쪽
11 11회: 한낮의 음악 학교 23.11.03 46 0 5쪽
10 10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 23.11.01 6 0 12쪽
9 9회: 노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23.10.30 9 0 9쪽
8 8회: 연금술에 대하여 23.10.27 13 0 15쪽
7 7회: 칼 판매상의 마지막 이야기 23.10.26 16 0 9쪽
6 6회: 내게는 뭔가가 없었다네 23.10.25 18 0 12쪽
5 5회: 칼 판매상과 도시 23.10.23 29 1 15쪽
4 4회 : 내 이름은 엔티레이미크 23.09.19 47 1 4쪽
3 3회 : 금지된 마법서 +1 23.09.18 50 2 10쪽
2 2회 : 세상에서의 처세 +1 23.09.13 95 3 10쪽
1 1회 : 시장에서 +2 23.09.12 268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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