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나를 사랑하려면 대가를 치러야만 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주방은 고요한 빗소리에 자욱하게 파묻히듯이
적적하고 외로울 정도로 조용했지만
식칼로 도마에서 뭔가를 써는 소리만
또각또각 정확하고 또한 정교하게 울려퍼졌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은 느닷없이 찾아오는 경우보다는
차츰 스며들듯이 이 왕국과 이 지방에는 찾아왔다.
그럼에도 이 추적추적 축축하게 내리는 차분한 가을비는
그 작은 빗방울들이 부서지는 소홀함과는 무관하게
기분을 우울하게 만드는
낙하하고 침몰하는 저조한 빗줄기였었다.
매년 그랬지만 그러나 그것을 겪는 사람들의 기분은
매년마다 적응을 하지 못할 만큼
그다지 현명하지 못했다.
무슨 방도가 있으랴.
무엇인가를 찌고 삶아내는지
수증기가 주방의 실내 공간을
그 면적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안개처럼 흐릿하고 뿌연 수증기 때문에
피부는 이상하게 습한 불쾌감에 시달려야만 하는
비 오는 날의 아침에
여자 한 명이 홀로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적어도 요리를 위한 여러 가지 준비나 혹은 과정에 있었다.
그 어른거리는 수증기가 올라가며 흩어지는
불규칙하고 예측불가한 퍼지는 여러 모습 속에서
얼굴에 망사 장식의 천을 덮어쓰고 있는 여자처럼
그녀의 모습은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차분한 집중으로 침착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오류와 실수 한 번 없이
안정적이고 숙달된 솜씨로
이런저런 조리 도구들을 다 만지고
차례차례로 그 조리 식기들과 식재료들이
불과 물을 통과하게 만들고 있는 그녀는
어린 소녀였다.
금발과 맑고 큰 두 눈이
투명하고 싱싱하게 빛나고 있는 희고 깨끗한 얼굴이
조리용 복장일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입고 있는 흰 옷들처럼
선명하고 담백한 인상을 불현듯 놀랍게 던지는
아름다운 순백색 매력이
이목구비에서 선들마다 빛이 번지듯이
조용하고 평온하게 흘러나오고 있는 미소녀였다.
그녀가 냄비들을 다 점검하고 난 뒤에
한 발을 뒤로 물러나서 그 모든 것들을
담담하고 부드러운 관조처럼 천천히 지켜보았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추듯이 바라만 보던 그녀가
뒤로 두세 걸음쯤 더 뒤로 물러서더니
치마의 앞에 있는 긴 주머니를 뒤져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먼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의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먼저 듣고 싶으십니까?"
그녀는 빙그레
매우 느리고 그렇지만 아주 아름답게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마치 꽃이 서서히 완만하면서도 완전한 피어나는 전개로
모든 벌어짐의 꽃송이로 변해가듯이.
그녀의 목소리는 물 속에 떨어진 별들처럼
아름답고 맑고 깨끗해서
음절 하나 하나가 반짝반짝 빛나는 듯이
싱그럽고 매끄럽게 들렸다.
나를 사랑하려면 대가를 치러야만 해.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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