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일반소설, 판타지

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연재수 :
1,744 회
조회수 :
1,199
추천수 :
9
글자수 :
512,582

작성
23.11.13 09:00
조회
3
추천
0
글자
8쪽

20회: 방황하는 가을날의 넋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사내는 부지런히 뭔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분주하지만 경건할 정도로 침착하고 전혀 부산하지 않은

몸가짐에서 비롯된 지속적인 그림자들이

그가 오랜 시간 요리를 했었던 사람으로

보이고 짐작하게 했다.

여기저기 널린 요리를 위한 식재료들은

알록달록한 총천연색 색채들로

도마와 도마 옆 주방의 탁자 위에서

계절을 알리듯 또는 계절과 무관하게

지금 일련의 과정이 무엇을 위함인지

알려주듯 놓여져 있었다.


가을비는 내려서

세상은 고요하고 침울한 부동의 침체로 가라앉아서

세계가 기울어가는 마지막 순서 같은 일년의 내리막길을

이제는 향해서 가고 있다는

확실한 우울한 감정이 느껴졌다.


사내가 있는 곳은 주방으로 보였다.

건물의 후미진 뒤쪽에 있는 주방은 문을 열어놔서

오히려 차가운 빗속의 공기가 밀려 들어왔으므로

피부에 와닿는 촉각이 신선하고 상쾌했다.

요리를 하고 있어서 수증기가 심하게 올라왔지만

비단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잘 보이지가 않았다.

있으나 있지 않는 것 같은

분명히 보이지만 잘 보이지가 않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내는 성실성을 다 해서 요리에 몰두하고 있었다.


키와 체격도 균형이 잘 잡힌 몸집은

표준적인 외양이어서

딱히 눈에 크게 띄는 특징이라고는 없었다.

하지만 사내에겐 뭔가 설명하기 힘든

기묘하고 낯선 느낌이 있었다.

비슷한 것 같긴 하지만

처음 보는 낯선 종류의.


요리를 이것저것 많이 했으므로

시간은 꾸준하고 쉼 없이 계속 잘도 흘러갔다.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누가 주문을 했는지 누가 먹을 것인지

사내는 요리를 열의를 바쳐가며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이윽고 거의 다 끝나가는 것 같았다.


내 삶은 방황이 어느덧 익숙해졌어.

그런데,


그 방식이 나는 마음에 들지가 않아.

세상의 세뇌가 싫어졌다고.


인생,

살기도 귀찮고

죽기도 불쾌하고


불만이 있는 자가

직접 스스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가 자신의 다리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종아리를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그가 몸을 숙이고 그 오른쪽 종아리를 만졌다.

누구의 허락도 없이.

바지를 걷어올린 후에 나타난

그의 오른쪽 종아리는

그의 뒷모습이었지만

조금도 하나도 이상한 점이 없었다.

털들만 북슬북슬하게 잘고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자신의 종아리를

세로로 된 찬장을 열듯이

위아래로 길게 난 부분을 수평으로 열었다.

흰 뼈와 붉은 피범벅의 살덩이들이 나타날 것만 같았지만

의외로 요동치는 살과 피의 뒤엉킴은 없었다.

차분하고 정리가 된 시가지의 구획처럼

뼈를 중심으로 그 주변의 살들은

안정되고 고정되어서

평온한 내부를 구조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마치 어떤 문제점도 없다는 듯이.


그가 손을 스르르르 뻗어서,

자신의 종아리 내부를 더듬듯이 어루만졌다.

차츰 차츰 돌아다니던 그의 손길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곳엔 찬란하고 선명해서

눈이 아플 정도로

보는 사람의 두 눈을 찌르는 듯한

강렬해서 맑고 투명하기까지 한 빛살을

온통 사방으로 내뿜고 있는

보석 하나가 있었다.

거의 무색(無色)에 가까운 흰색이었다.


사내의 얼굴에서,

비록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낮고 작은 웃음소리들이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에 갑자기

핏줄기들이 어지럽게 가로 세로로 마구 그어진 듯

겹쳐지고 뻗쳐진 각종 흔적들 같은

붉고 강렬한 색채와 그 모습들로 나타났다.

어디서 떠오르기라도 하듯이.

심연(深淵)에서 수면(水面)으로 우아하며 부드럽게

자연적으로 솟구치듯이.


그 섬찟한, 피로 뒤덮여진 얼굴은

만족스럽게 미소처럼 괴상하게 변한 가면처럼 웃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살아왔던 생애보다도 더 길고 더 오래된

언제 시작되었을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저 멀고 먼 건너편의 미지인 곳과

그 까마득한 처음부터의 지나쳐온 세월 동안에

내 몸에 축적된 세계와 생명의 원칙과

세상의 구조와 운동 작용에 의한 작동 방식과,


그렇게 내 욕망과 더불어 이토록 치열하고

그래서 이다지도 빛나는 고뇌의 조각 조각들 모음이다.



서두르는 격렬한 불안과

조급함에서 오는 곤란한 흥분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또 그런 약간의 흔적도 없이

단정하고 엄숙하면서 집중된 조용한 위엄으로

차근차근 찾아가면서


사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른 아침이어서

이슬 방울들이 매달린 정원에서부터 밀려오는 차가운 공기가

비 그친 다음 날의 새로운 예고를 조성하듯이

전과는 다른 설레임을 비밀하고 눈에 띄지 않게 시작하고 있었다.

세계의 작동 원리라는 보편적이고 정해진 방식대로.





내가 이토록 방황하는 가을날의 넋이 되어

한낱 가련한 전투에 뛰어든 용병처럼

싸늘하고 서글픈 몰락에 몰리게 되는

그렇게 함부로 쓰이다가 결국 버림이나 받는


그런 슬픈 짐승이라면


나를 인정하고 내게도 인간적인 애정으로

참다운 감정을 맛보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는 있을까?



장황하고 장려하면서도 그래서

휘황하면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연극 대사 같은

혼잣말을 우수 어린 어조로 낭송하듯이

작고 나직하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읊고 있는

그의 방에는 아무도 없어서

그가 하는 말을 들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는 진지하고 또 그만큼 고독해 보였다.


약속의 땅에서,

내가 그렇게 고생하며 찾았으나


이 세상에 참된 평화 없고

이 세상에 참된 사랑과 참된 연인은



없었다.








이제 남자는 상의의, 두 소매에 있는 단추들을

각각 하나 하나씩 채우고 있었다.


옷은 이제 거의 다 상하 모두 입은 것 같았다.

남자가 몸을 돌려서 전신 거울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갑자기 모든 동작을 우뚝 정지하고 거울 앞에 마주한 채

그는 모든 상념이 제거된

살아있는 시체나 조각상처럼

또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말없는 침묵으로 뒤덮인 무생물처럼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어떤 사소한 동작의 변화도 없이

그저 거울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그의 방에서 시간과 공간이 모두 하나로 합쳐져서

전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만 같았다.

공간은 시간을 흡수한 무의미하고 낯설기만 한

일종의 무시간적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가

갑자기 그의 얼굴에 핏줄기들이 세로로 가로로

그어지고 직조되듯이 겹쳐졌다.

잠시 후에 그 핏줄기들이 무늬 전체가 다 사라졌다.

그리고 또 한 번 독자적인 방향으로 가로로 세로로

격자창의 장식처럼 마구 그어지고 뻗어나간

얼굴을 온통 다 뒤덮은 어지러운 피의 무늬들이

다시 붉고 붉은 공포처럼 나타났다.

슬픔처럼 강렬하고 분노처럼 불타오르는 듯한

일종의 가면 역할을 하는

상처로 만든 얼굴 장식 혹은 분장.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오늘 이 아침,

나는 다시 태워놨다.


내 운명의 모든 시작과 끝을.


오늘은 내 생(生)의 가장 젊은 날

그리하여 앞으로도 남은 많은 날들은

불타오르는 슬픔으로 가장 화려한 불길이 되어


오우예~ 씨몬이 나를 부른다

지상(地上)의 흉포한 악마

불길한 검은 그림자

씨몬.

그 악마이자 괴물이.




두 번 다시 내 쇼츠에 나타나지 마라

이건 내 마지막에서 두번째 경고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지럽고 흉험한 핏자국들의

세로와 가로로 마구 그어진 분장들이

다시 어디론가 또 사라져서

평온하고 평범한 표정의 남자 모습으로

원래처럼 돌아왔다.


빛나는 아침 햇살에

어제 옷을 모두 벗고

젊음의 새옷을 갈아입자


가자, 젊음이여~!


벤벤 더크래프켈을 쥐고 그는 돌아서서

방을 나가기 위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 19회: 나를 사랑하려면 대가를 치러야만 해 23.11.11 5 0 3쪽
18 18회: 나는 한낱 과거에 사로잡힌 유령일 뿐이다 23.11.10 2 0 4쪽
17 17회: 이것은 너의 음악이 아니다 23.11.09 4 0 10쪽
16 16회: 내 삶의 여로(旅路) 23.11.08 24 0 7쪽
15 15회: 음악은 영원하다. 그러나... 23.11.07 4 0 4쪽
14 14회: 연금술의 비밀 23.11.06 4 0 5쪽
13 13회: 나는 누구인가 23.11.05 5 0 5쪽
12 12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와 소년 23.11.04 7 0 7쪽
11 11회: 한낮의 음악 학교 23.11.03 46 0 5쪽
10 10회: 블라스펙트 러페이케이퍼스 23.11.01 6 0 12쪽
9 9회: 노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23.10.30 9 0 9쪽
8 8회: 연금술에 대하여 23.10.27 13 0 15쪽
7 7회: 칼 판매상의 마지막 이야기 23.10.26 16 0 9쪽
6 6회: 내게는 뭔가가 없었다네 23.10.25 18 0 12쪽
5 5회: 칼 판매상과 도시 23.10.23 29 1 15쪽
4 4회 : 내 이름은 엔티레이미크 23.09.19 47 1 4쪽
3 3회 : 금지된 마법서 +1 23.09.18 50 2 10쪽
2 2회 : 세상에서의 처세 +1 23.09.13 95 3 10쪽
1 1회 : 시장에서 +2 23.09.12 268 2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