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강 특) 격투기 피지컬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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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고블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3.09.18 16:36
최근연재일 :
2024.01.02 13:2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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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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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생각이 없었다

DUMMY

어두운 통로 끝에 마치 날벌레를 유혹하는 살충등의 LED 불빛처럼 환한 조명이 보였다.

수백 명은 족히 들어갈 넓은 연회장 전체가 어두컴컴했고, 오직 중앙에만 빛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 덕에 가운데 위치한 팔각형의 케이지 외에 그 어떤 것도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 키보다 높게 설치된 관객석은 옥타곤으로 향하는 길이자, 관객을 보호하는 장치가 되었다.

어둠과 높이가 합쳐지며 그 위에 누군가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지만, 실루엣조차 잘 파악이 되지 않게 만들었다.

무규칙 대회 참가자들은 절대 누가 관객으로 왔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의외로 관객들이 시끄럽네.

뭐 웃는 소리도 들리고....

돈 많은 사람들이 주된 관객일 거라, 점잖 빼는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구나?

오히려 여기선 어느 정도 비밀 보장이 되니까 사회에서 쓰고 사는 가면을 벗고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걸까.

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옥타곤 위로 올라갔다.

그 안엔 아까 룰 미팅 때 봤던 심판장이 서있었다.


“....”


나는 심판장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옥타곤 내부를 체크했다.

고무 코팅이 된 철망은 등을 부딪혀도 충격을 잘 흡수했다.

바닥은 제법 탄성이 있는 재질.

바닥을 덮고 있는 흰 캔버스엔 송충이 눈썹의 것으로 추정되는 핏자국이 옅게 남아 있었다.

케이지 안쪽 크기는 대략 폭이 10미터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상상하던 것보다 더 넓네.

대충 파악할 요소를 다 살핀 나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었다.

대기실에서 미리 몸 좀 풀어둘걸.

긴장감 때문에 워밍업 생각을 못했다.

내가 뒤늦게 몸을 움직이고 있는 사이, 맞은편에서 상대 선수가 등장했다.


-쿵, 쿵!


케이지에 들어서자마자 거칠게 발을 구르는 상대.

나보다도 큰 키에 근육질 몸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스포츠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 살벌한 눈빛이 더해지니 어디 특수부대원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상대는 맞은편에서 어슬렁거리며 날 위아래로 훑었다.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처럼.

나 또한 상대의 두 눈을 뚫어져라 봤다.

심판장은 양옆을 한 번씩 보더니 이내 경기 시작을 알려왔다.


“1라운드, 시작!”


심판장의 선언과 동시에 상대가 매섭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덩치가 전력으로 뛰어오니 무슨 덤프트럭의 돌진을 보는 것 같았다.


-후욱!


당연하게도 글러브 터치 따윈 없이 곧장 펀치가 날아왔다.

난 오른쪽으로 빠지며 주먹을 피했다.

그러자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뒤돌려차기를 연계하는 상대.

체구에 비해 제법 빠른 킥이었지만, 이미 난 거리를 충분히 벌린 뒤였다.


-철렁!


상대의 발바닥은 애꿎은 케이지만 때렸다.

뭔가 배운 사람인 건 확실하네.

평소 충분한 연습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는 발차기였어.

난 양손으로 가드를 올리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재차 날아오는 잽.

꽤 숙련된 주먹이었지만 내겐 닿지 못했다.

펀치고 킥이고 모두 관장님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으니까.


-휙, 휙! 팍!


근육질 남성이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 던지는 공격은 맞지 않더라도 위협적이었다.

만약 저기에 제대로 맞으면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오리란 게 예상됐다.

하지만, 상대의 공격을 무산시키는 과정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무서움이 아니었다.

재밌다...!

주먹이 광대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고, 발차기가 내 팔뚝에 막혀 힘을 잃는다.

마치 슈팅 게임에서 총알을 피하는 것처럼 그 하나하나가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흐흐...!”


“...!”


이에 흠칫하는 상대.

그 잠깐의 빈틈에 난 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후욱, 턱!


하지만 역시나 쉽게 통하지는 않았다.

상대는 내 팔 안쪽을 막아 공격을 방해했다.

때문에 한펀치TV 때와 다르게 가드를 때려 중심을 흔들지도 못했다.


-휙!


심지어 여유도 없이 돌아온 반격.

난 거의 주저앉듯 자세를 낮춰 훅을 피했다.

머리 위를 할퀴고 지나가는 주먹에 뒷목을 타고 짜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어후, 한 방에 갈 뻔했네.”


상대의 가슴팍을 밀어내면서 뒤로 빠져 거리를 벌린 나는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심장이 주체 못할 정도로 뛰었다.

피가 빠르게 돌면서 머리로, 눈으로, 손끝, 발끝을 자극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상대가 또렷하게 보였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상대를 공격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관장님이 스파링하기 전에 날 살려주려고 하는 거라 하시더니....

진짜 살려만 준 거구나?

뭐, 방법이야 찾으면 되지!

난 눈을 희번덕거리며 가드를 바짝 올리고 상대에게 붙었다.


-파박!


날아오는 공격은 팔뚝으로 커버하고, 막무가내 펀치를 던져보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 주먹은 번번이 중간에 가로막혔다.


-툭, 툭


내가 먼저 공격했는데 상대 주먹이 얽혀 들어와서 끊기니 답답했다.

서로의 타격이 통하지 않는 상황.

이래서 격투기에선 활용할 수 있는 무기를 많이 갖춰놔야 한다는 거구나...!

직접 경험을 해보고 나서야 너튜브 동영상에서 말하는 무기가 많은 선수라는 이야기의 의미를 깨달았다.

보통은 타격으로 제대로 안 풀리면 넘어트리는 테이크다운 시도를 하던데....

내가 테이크다운 기술을 모르잖아.

그래도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내야지.

격투기 경험이 별로 없는 내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은 한정적이었다.

난 다시 한 번 오른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내 팔 안쪽을 막아오는 상대.

그 순간 난 앞으로 한 발 더 나갔다.


“흡...!”


혹시 모를 안면 타격을 경계하며 숨을 들이켰지만, 다행히 상대가 당황하여 반격은 없었다.

난 왼손을 뻗어 상대의 겨드랑이 아래를 파고들었다.

깊게 들어간 왼손으로 상대에게 가로막힌 오른손을 붙잡아 상대를 팔과 함께 싸잡아버렸다.


“읏...?”


상대는 내 오른팔을 밀어내서 그립을 뜯어내려고 했지만, 난 우악스럽게 몸의 힘까지 이용해서 상체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런 뒤 허리 힘으로 상대를 들어 올리며 발목을 걷어찼다.

아까 송충이 눈썹이 나한테 쓰려던 와사바리를 조금 변형시킨 움직임이었다.


-슈우우- 쿵!


근육질인 상대는 예상보다도 더 대응을 못하고 쉽게 넘어져버렸다.

이거 완전 풍선 근육이었잖아?

괜히 경계했네!

상대를 껴안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기에, 난 한쪽 다리를 넘겨 상대의 배 위에 올라탔다.


“후흐흐!”


날 보며 오만상을 쓰는 상대.

아래에 깔린 사람이 으레 그렇듯, 상체와 골반을 튕기고 아래에서 주먹을 날려가며 반항했다.

하지만 상황을 뒤집을만한 효과는 없었다.

난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은 그냥 얼굴로 받아주며 왼손으로 상대의 턱을 잡았다.

그런 뒤 오른손을 힘껏 내리쳤다.


-쩍! 쩍! 쩌억!


한 번 때릴 때마다 입술이 터지고, 살이 찢어지고, 눈동자가 풀렸다.

몇 차례 파운딩을 치고 나니 상대는 거의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이제 끝내야 하는 거 아냐...?

너튜브에서 봤던 MMA 경기들에선 이미 심판이 말리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난 고개를 들어 심판장을 보았다.

빨리 경기를 중단시키라는 의미로.

하지만 심판장은 싸늘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


게다가 케이지 밖에선 관객들의 야유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했다.


“우우!”

“뭐하냐 지금?”

“빨리 끝내라고!”


그 순간, 아래에서 꿈틀하는 느낌이 들었다.

난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상대를 보았다.

상대는 여전히 눈의 초점이 흐릿했지만 이를 악문 채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


-부욱!


내가 주저하는 사이 대미지를 조금 회복한 상대가 손톱으로 내 눈을 노렸던 거다.

왼쪽 눈 위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 나와 왼쪽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


상대는 완전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대의 손끝을 통해 그 승리를 향한 집념이 전해졌다.

손톱으로 내 안구를 완전히 후벼 파려던 지독한 악의도.

그러고 보니 왼눈이 조금 흐릿한 것 같기도 했다.

난 상대의 손을 붙잡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불완전한 시력 때문에 거칠게 움직이는 손을 막아내기 쉽지 않았다.

일단 상체를 세워 최대한 공격을 피했다.

얼굴 곳곳이 긁혀 화끈거렸다.

내게 짓눌린 채로 얻어맞아 호흡도 힘겨워 하는 상대.


“그으으...!”


하지만 여전히 날 해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살짝 풀려있는 두 눈엔 오직 악만 남아있는 것 같아 섬뜩할 지경.

이 경기는 나 또한 저 지독한 감정에 상응하는 결단을 내려야 끝이 날 거다.

상황은 내게 지금까지 사회인으로서 주입된 도덕관을 벗어나길 종용하고 있었다.

관장님은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던 거구나...!


-으득!


어느새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왼쪽 시야가 완전히 빨개졌다.

그 새빨간 세상 속에 들어온 상대에겐 조금 전처럼 미안함이나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주먹을 들어 있는 힘껏 상대의 턱에 파운딩을 박았다.


-쾅!


사람의 머리가 마치 농구공처럼 바닥에 튕겨 들썩였다.

하지만 난 손을 멈추지 않았다.

초점 없는 상대의 눈이 아직도 날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재차 주먹을 날린다.

다시 한 번.

또.

주먹을 내리칠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상대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힘없이 돌아갔다.

그럼에도 난 안심이 되지 않았다.

왼손으로 상대의 목을 붙잡고 주먹을 들어올렸다.

이어서 파운딩을 내리꽂으려는 순간, 심판장은 내게 와서 경기 종료를 알렸다.


“그만. 끝났습니다.”


“....”


난 기절한 상대를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심판장이 내 손을 들어 올리며 관객들에게 승자임을 선언했지만, 반응은 호불호가 갈렸다.


“어설프게 할 거면 꺼져!”

“다음엔 더 잘 하겠지.”

“그래도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실력은 좋더라!”


지금 내겐 관객들이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변의 소음보다 내 속이 더 시끄러웠으니까.

누가 심장을 쥐어짜기라도 하는 듯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심박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두려움 때문일까?

긴장?

아니면....

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정신없이 옥타곤에서 빠져나왔다.

일단 링닥터에게 간단한 지혈을 받고 안내원과 함께 의료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의사를 만나 눈 위의 상처를 꿰맨 나는 혼자서 호텔을 빠져나왔다.

밤거리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나는 호텔 앞 화단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했으니까.


‘어이구, 한쪽 눈 실명될 뻔했네요.’


의사가 내 상처를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살짝 뒤로 빼지 않았다면 손톱이 안구까지 긁을 뻔했다는 것.

그 설명을 들은 난 무규칙 경기 영상을 보며 했던 각오가 무색하게 공포심을 느꼈다.

손가락이 동공 한 가운데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던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됐다.

내가 가까스로 피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


내 입에서 한숨인지 실소인지 모를 소리가 나왔다.

이런 상황에 우습게도 난 내가 공격을 피한 것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안구 근처를 할퀴고 지나간 손톱보다 그 시도를 무력화해낸 일에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뿐만이 아니다.

상대의 펀치와 킥에 대응하고, 테이크다운을 성공시키는 모든 과정이 더없이 즐거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싸우는 내내 내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주먹이 계속 저지당해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도 방법을 궁리하는 게 재밌었다.

영구적인 장애가 생길 뻔했는데 실실 웃음이 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내가 복잡한 감정에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돌연 벨소리가 울렸다.


[BB짐 유경주]


체육관에 처음 나간 날 6시 반 수업에서 만났던 경주였다.

말이 많고 오지랖도 넓던.


“어, 경주야.”


-여보세요? 통화 괜찮으세요?


“그럼, 무슨 일이야?”


-아~ 별건 아니고, 저번에 한 번 뵈고 통 안 보이셔서요. 잘 지내시죠?


“회사 끝나는 시간도 있고, 여러 일...이 좀 있어서 요즘엔 9시부로 나갔어.”


-그러셨구나. 전 또 이제 안 나오시는 건가 해서 걱정했거든요. 아무래도 저희 체육관이 운동 처음 해보는 분들한텐 좀 불친절한 편이라....


경주는 안심이라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무규칙 격투기에 참가할만한 사람 물색하려고 만들어진 체육관이니 물갈이가 자주 됐겠지.

격투기도 좋아하고 떠들기도 좋아하는 얘 입장에선 자꾸 사람들이 그만두니까 아쉬웠겠고.


“신경 써줘서 고마워.”


-뭐, 별 말씀을요. 저도 가끔은 다른 시간대에 갈 때도 있으니까 체육관에서 시간 겹치면 또 봬요. 아님 언제 식사라도 한 번 하시죠.


난 순간 대답을 머뭇거렸다.

격투기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체육관... 음, 그래.”


그런 내 목소리에서 경주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모양이었다.

경주가 마무리되어가던 통화를 다시 붙잡았다.


-형,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요. 고민 있으시면 들어드릴게요. 제가 별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이게 가끔은 말하는 것만으로도 정리될 때가 있더라고요.


“어....”


딱 한 번밖에 안 본 녀석한테 내 나름대로는 심각한 문제를 이야기하려니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오히려 경주야말로 부담 없이 속내를 털어놓기 좋은 대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 큰 관계가 없는 사람이고, 사적으로 가깝지 않으니 좀 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속으로 지금 내 고민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말이야.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계속 야근하고, 밤새고, 주말에도 일하는 게 이어지니까, 내 인생이 너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 그렇잖아. 자고 먹는 시간 빼면 내 모든 삶을 회사에 갖다 바치고 있었거든. 근데, 그 대가로 받는 거라곤 겨우 중소기업 수준의 월급이 전부인 거지. 내 젊음의 값이 200만 원 정도라는 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고.”


-헉, 형 그거 우울증이나 뭐 번아웃 뭐시기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경주의 말을 들어보니 그랬을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에도 의욕이 없었고, 심지어 평소 좋아하는 음식조차 맛을 잘 못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럴 땐 일을 잠깐 쉬는 것도 방법이긴 하더라고요.


“퇴사도 고려를 안 해본 건 아닌데, 개인 사정으로 당장 막아야 하는 돈들이 있거든. 게다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못 버티고 그만두면 앞으로 내가 뭘 해낼 수 있기나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긴 병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몇 년 동안 이어진 어머니의 병환은 가족 전체의 경제력을 무너트렸다.

내가 버는 월급은 월세와 생활비를 제외하곤 거의 전부 병원비 때문에 생긴 대출 갚는 데에 들어갔다.

일을 그만둬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괜찮은 회사를 알아보기 어려웠고, 전 회사에 이어서 또 블랙기업으로 이직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진짜로 가슴이 뛰게 만들어주는 일을 찾은 거야. 와, 이걸 하고 있는 동안에는 내가 살아있구나 싶더라. 근데, 이게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라서 말이야.... 수입이 확실한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몸도 상할 수 있는 일이거든.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아, 남자가 진짜 하고 싶은 게 생겼으면 물불 안 가리고 도전해야죠!


경주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첫 문장만.


-...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말이고, 솔직히 저였으면 그냥 다니는 회사에서 이직 준비해서 안전한 일 찾아갈 거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지...?”


이어진 현실적인 대답에 난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치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야만 하는 부류가 있더라고요. 제가 격덕후라서 이게 적절한 예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격투기 프로 선수들 맨날 훈련하다 다치고, 재활하고, 수술하면서도 계속 도전하잖아요?


종합격투기 체육관에 다니면서 알게 된 녀석이라 그런지, 난 격투기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는데 격투기 선수를 예로 들었다.


-비스핑은 헤드킥 맞아서 한쪽 눈 멀었잖아요. 그런데도 계속 시합 뛰어서 챔피언까지 먹었으니 대단한 거죠. 멀리 WFC 얘기할 거 없이 우리나라 PFC에도 챔피언까지 올라갔다가 디스크로 하반신 마비 와서 벨트 내려놓고 회복한 다음에 다시 선수로 돌아온 케이스도 있고요. 타고 난 성향인 거죠, 솔직히. 또, 락홀드처럼 WFC 챔피언까지 먹은 양반이 은퇴 못하고 결국 맨손 복싱 단체 그 위험한 곳까지 흘러들어가는 거 보세요. 그런 사람들은 돈이나 안정을 원하는 게 아닌 거죠.


경주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결국 저 같은 사람들이 격투기에 인생을 바친 선수들한테 열광하는 이유가 그런 거 아니겠어요? 나는 하지 못한 선택, 혹은 재능이 부족해서 이루지 못한 걸 그들이 하고 있잖아요.


얘도 격투기를 어지간히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관련된 이야기만 하는데도 이렇게 흥분해서 말을 쏟아낼 정도였으니까.

경주는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오버했다고 느꼈는지 아차 하며 사과했다.


-어우, 형 일 걱정하시는데 제가 너무 격투기 얘기만 신나서 했네요. 죄송해요, 하하....


“아냐, 진짜 큰 도움이 됐어. 고마워, 나중에 체육관에서 보자.”


빈말이 아니었다.

심각한 부상의 위험이 있음에도 경기를 하던 순간에만 마음이 쏠리던 내가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 거다.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나중에 봬요, 형!


경주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니 머릿속이 정리됐다.

역시나 난 격투기를 해야겠다.

실제로 몸에 문제가 생긴 선수들의 사례를 들으면서도 마음속에서 걱정이 커지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격투기를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경주가 말한 ‘그런 사람들’에 해당되는 거였다.


-투둑, 툭


경주랑 통화를 하는 사이 어느새 비가 거의 그쳐갔다.

여전히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건물 처마 밑에서 벗어났다.


“경주 말대로 재능까지 받쳐주는 사람인지는 이제부터 알아보자고. 체육관으로 돌아가서.”


오영웅 관장님은 내 경기가 끝나고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다.

내가 부상을 입은 거에 죄책감을 느낀 건지, 아예 싸우는 걸 보지도 않고 집으로 가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관장님을 순순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

무규칙 출신 WFC 현역 선수랑 주먹 섞을 기회가 어디 흔한가?

무규칙 격투기든 정식 MMA든 모든 시합에 맞춰 준비하기 좋은 사람은 국내에서 관장님 제외하곤 찾기 힘들 거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지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연승을 좀 쌓거나, 너튜브에서 수익이 좀 나오기 시작하면 회사도 그만두고 운동에 전념해야지.”


근래에 무규칙 경기 준비한다고 동영상도 못 올리고 채널 관리를 내박쳐놨다.

너튜브도 내가 격투기를 할 수 있게 보조해줄 수단인데 너무 소홀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신경 써야겠어.

난 며칠 만에 너튜브 채널 관리 앱을 켜봤다.

먼저 어떤 댓글들이 달렸나 확인했는데....


“뭐야, 이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핸드폰 액정을 다시 봤다.

내 동영상의 최근 댓글들 대부분이 같은 단어로 도배되어 있었으니까.


“빡꾸노...? 이게 뭔데 내 채널에 댓글 테러를 해놨어?”


한 명도 아니고 적어도 수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빡꾸노]라는 댓글을 달아 놨다.


작가의말

히히 못 놔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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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무기 23.12.16 1,058 17 16쪽
18 누구 말이 맞는 거지? 23.12.16 1,092 16 17쪽
17 소싸움 23.12.15 1,115 19 11쪽
16 난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23.12.14 1,122 20 15쪽
15 투우양성소 23.12.13 1,184 18 18쪽
14 사고 쳤다...! +1 23.12.13 1,222 19 14쪽
13 BJ빡꾸 23.12.12 1,187 22 14쪽
12 복싱이 뭐냐 23.12.11 1,194 21 16쪽
» 생각이 없었다 23.12.10 1,238 21 20쪽
10 스위치 23.12.09 1,305 22 15쪽
9 하고 싶은 이유 23.12.09 1,383 16 17쪽
8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1 23.12.08 1,518 22 14쪽
7 아까워서 그래요 +1 23.12.08 1,593 21 11쪽
6 이게 되네? +2 23.12.07 1,685 29 18쪽
5 재능충 23.12.06 1,734 24 16쪽
4 처음 +2 23.12.05 1,801 30 17쪽
3 불씨 +1 23.12.04 1,966 27 13쪽
2 제 무덤을 팠구나 +4 23.12.03 2,212 28 15쪽
1 재능이 있는지도...? +13 23.12.02 2,901 4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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