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강 특) 격투기 피지컬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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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고블린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3.09.18 16:36
최근연재일 :
2024.01.02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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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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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재능이 있는지도...?

DUMMY

눈앞이 캄캄하다.

분명 모니터 화면은 멀쩡하게 나오고 있었는데 마치 시커먼 먹지를 보는 것처럼 눈에 내용이 들어오지 않았다.

시각엔 문제가 없는데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이.

이거 왜 이러지?

가슴 위에 바위가 얹혀 있는 것처럼 답답해졌다.

그 구속감을 털어내려 깊게 숨을 내뱉어 봐도 뭔가가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듯 해소가 되지 않았다.

나는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겨우 얼굴만 물 위로 내민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숨을 골랐다.


“흐읍, 후우우...!”


그제야 눈꺼풀에 씐 검은 필터가 사라지고 시야가 돌아왔다.

모니터에는 이메일이 하나 띄워져 있었다.


[re: 차주기획안 송부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박강용 대리님.

보내주신 차주기획안 검토를 해보았습니다.

그 중 몇 가지는 시의성이 맞지 않아 다른 기획을 받아봤으면 합니다.

바로 발행되어야 하는 월요일 콘텐츠만 진행해주시고 그 외는 기획안에 표기를 해두었으니 수정 바랍니다.

첨부파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벌써 금요일이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최현아 드림


“...금요일에 기획안을 반려 당했는데 즐거운 주말이 말이 되는 소리냐.... 하아....”


나는 조금 전 이상증상의 원인이 뭔지 알아차렸다.

근래에 회사 업무가 너무 과중했던 나머지 머리가 잠깐 셧다운 되었던 모양이다.

사실 기획안이 한 번에 통과되는 일은 드물었기에, 특별히 극심한 스트레스를 줄 메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야근과 철야, 주말출근이 이어지다 보니 작은 자극에도 큰 타격을 받았다.

마치 가득 찬 물 잔에 물이 한 방울만 더해져도 넘치는 것처럼.

이럴 때 잠깐이라도 머리를 환기시켜주면 좋겠지만, 아직도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삐거덕거리는 뇌에 카페인이라도 때려 넣어 각성을 좀 시켜줘야겠네.


-꿀꺽, 꿀꺽, 꿀꺽!


카페인 고함량의 에너지드링크를 시원하게 들이키니 녹슨 머리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돌았다.

책상 한 구석에 마련된 음료 캔들의 공동묘지에 빈 깡통을 한 구 더 안장시킨 나는, 손깍지를 껴 스트레칭해준 다음 퇴짜 맞은 기획안 파일을 열어보았다.

그 순간, 귀에 못이 박이도록 지겹게 들은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강용 주임! 내 자리로 와 봐요.”


“네, 팀장님.”


나는 일단 대답을 해놓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또 무슨 일이야....

사무실을 울린 음성에 반응하여 모니터 한 구석엔 사내 메신저 알림이 요동쳤다.


[8팀 양우형 : 팀장님이 또....]

[8팀 최한솔 : 힘내세요 주임님 ㅠ 어제도 새벽 퇴근하셨던데]

[8팀 이정 : 저였으면 팀장님 일 다 받다가 골병 들었을듯요 강용 주임님 체력 대박 ㄷㄷ]


동료들의 걱정과 격려에 다 답하지는 못하고 쓴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말대로 팀장은 업무분장에 소질이 없어 일을 몰아서 주는 경향이 있었다.

아닌가?

혹시 내가 이 일에 재주가 없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끝날 줄 모르는 강행군 때문에 피곤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아프기라도 하면 그 핑계로 양해를 구할 텐데 병이 나지도 않았다.

하긴, 어렸을 때부터 감기조차 잘 안 걸리는 건강 체질이었지.

그게 억울한 날이 올 줄이야.

나는 우울한 낯을 감추고 박철호 팀장에게로 향했다.


“팀장님.”


“어, 강용 주임. 이따가 촬영하는 곳에 나랑 같이 지원 좀 가자고. 그, 이번에 5팀한테 넘겨받은 고객사 알죠? 한펀치TV. 아직 담당자가 배정 안 돼서 임시로 내가 땜빵하고 있거든.”


“예? 저 할 일이....”


“촬영장에서는 대리인 걸로 하고요. 5팀에서 사업 따낼 때 대리급 이상을 붙이기로 했다더라고.”


팀장은 내 얘기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자기 할 말만 쏟아냈다.

대외적인 직급을 한두 단계 올리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때로는 여러 고객사마다 다른 직급으로 알고 있어서 회의 때 실수하지 않으려 긴장의 끈을 단단히 붙잡아야 하기도 했고.

일주일의 대부분을 회사에 바치고 있는 나였기에, 내 삶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방금 기획안 반려 메일에도 문제없다,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나.

진절머리가 나는 생활이다.

이미 내가 함께 가는 걸로 확정이라도 된 듯 촬영할 콘텐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팀장에게 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팀장님, 저 대운학습 차주 기획안 수정 요청이 와서요. 다른 팀원을....”


“이따 다녀와서 처리하면 되잖아요? 오후에 촬영 지원 갔다가 복귀하면 시간 날 거 같은데. 왜, 못하겠어?”


“....”


순간 말문이 막혔다.

팀장의 말이 맞기 때문은 아니었다.

통상적으로 영상 촬영 현장에 다녀오면 아무리 빨라도 퇴근 시간에 임박했을 때일 테니까.

이건 그저, 내 고질병이었다.

무언가를 못한다는 말을 못하는 것.

그렇게 말하면 왠지 스스로가 무능한 것 같고,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승부에 지는 걸 죽기만큼 끔찍하게 싫어했기에, 과도한 업무도 다 끌어안고 쳐냈다.

덕분에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평사원에서 주임으로 최단기 승진을 했지만....

그만큼 해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계속 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거야.

한번 넌지시 말해볼까...?


“저, 팀장님. 오늘 금요일인데 제 업무만 해도 시간이....”


“강용씨, 이 불금에 영상 찍고 오면 편집하고 컨펌 받고 업로드 예약까지 하고 하면 나도 야근이야. 나도 힘들어.”


박철호 팀장은 소시오패스임이 분명했다.

자신도 불금에 야근하게 될 거라 이야기하지만, 어차피 촬영이 끝나면 영상팀에 편집 포인트만 집어주고 퇴근할 게 뻔했다.

그렇게 최종본이 나오면 폰으로 받아보고 업로드는 편집자한테 시키겠지.

무엇보다 이건 자기 일을 하는 거고, 나는 팀장의 업무를 돕고 돌아와서 내 일을 마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결국 인사고과와 앞으로 팀장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별 수가 없었다.

현대사회의 직장인은 목줄에 매이지만 않았을 뿐, 돈줄이 채워진 노예가 아니겠는가.


“...알겠습니다.”


난 본심과 다르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로 돌아왔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어차피 해야 하는 거, 최선은 다해야지.

현장으로 가기 전에 한펀치TV 채널을 살펴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업로드 된 동영상들의 조회수.

클라이언트들에게 보낼 보고서를 쓰던 버릇 때문에 생긴 직업병이었다.

한펀치TV의 영상들은 평균 조회수 30만 정도가 나오고 있었다.

주 콘텐츠는 일반인 지원자와 종합격투기 선수의 스파링, 선수들 인터뷰, 기술 강좌와 경기 리뷰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은근히 격투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구나...? 엄청 마이너 스포츠인 줄 알았는데.”


내가 별 흥미를 갖고 있지 않던 분야라 굉장히 의외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 정도일 뿐.

난 바로 한펀치TV의 인기 동영상과 인기 포인트 위주로 분석했다.

곧 촬영 지원 나가야 하는데 한가롭게 격투기의 매력이나 파헤칠 시간은 없었으니까.

보통 양아치가 참교육을 당하거나, 진짜 제대로 된 실력자가 나오는 영상이 조회수가 높네.

아무래도 격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구독자라서 그렇겠지.


“그나저나, 저렇게 가볍게 치는 주먹에도 고개가 휙휙 넘어가네.... 저게 목 힘으론 못 버티는 건가?”


동영상에서 일반인 도전자가 선수의 툭툭 치는 주먹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이 자주 나왔다.

평생 주먹다짐을 해본 적 없었던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얼추 파악이 되어갈 즈음, 박철호 팀장이 나를 불렀다.

촬영 현장으로 가자는 거겠지.

난 내 이마와 턱을 손으로 툭툭 눌러보며 나갈 채비를 차렸다.


* * *


회사 차에 팀장을 태우고 촬영 현장으로 몰고 가는 중에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뒷좌석에 앉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박철호 팀장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이씨.... 이거 감이 안 좋은데.”


룸미러로 살펴보니 액정에 시선을 고정하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팀장.

그 말에 덩달아 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내 팀장은 전화를 받더니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친절하게 통화했다.

몸은 괜찮냐, 걱정하지 마라, 다음에 기회 될 때 다시 연락 줘라는 둥 갑자기 상냥한 사람이 되었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만.


-휙, 퉁!


박철호 팀장의 핸드폰이 신경질적으로 날아가 차 시트에 튕겼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룸미러를 통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있는 대로 구겨져 있었다.


“아니, 인터뷰할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갑자기 촬영 당일에 튀면 어쩌라는 거야!”


차내를 쩌렁쩌렁 울리는 짜증.

난 그 한 마디로 상황이 이해되었다.

오늘 한펀치TV에서 촬영하기로 한 스파링 도전자가 펑크를 낸 거다.

갑자기 몸이 아프다거나 뭐 사고가 났다는 핑계를 댔겠지.

팀장은 팀원들한테야 개차반처럼 굴지만 외부 사람들에겐 가면을 쓰니 뭐라고 하지도 않은 거고.

나는 조용히 눈치를 살피며 운전대만 잡고 있었다.

이럴 때 잘못하면 불똥이 튈 수도 있으니까.


“박강용 주임.”


물론 가만히 있으면 불똥을 피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의 해결책을 모색하던 팀장의 눈길이 어느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예?”


“그러고 보니까 강용씨 키도 크고, 덩치가 상당히 좋잖아. 평소에 운동 좀 하나?”


“아뇨, 아뇨. 제가 운동할 시간이 어디 있나요. 하하....”


“그래도 옷 입고 있으면 다부져 보이는데? 쓰읍.... 카메라에선 좀 더 불어 보이니까 그림 좀 나오겠어.”


팀장은 갑자기 손가락을 겹쳐 사각형을 만들어 그 사이로 날 보았다.


“아니, 오늘 섭외했던 출연자가 못 온다고 하더라고. 5팀에서 넘겨받자마자 문제가 터지면 고객사에서 뭐라고 생각하겠어? 우리 팀을 위해서 강용씨가 수고 좀 하자.”


“예? 그게 무슨...?”


나는 무슨 소린지 다 알아들었지만 일단 이해 못한 척해봤다.

당연하게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박강용 주임이 오늘 도전자 역할 좀 해줘. 예전에 춤도 췄었다면서? 그냥 가서 안무 같은 거 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건 그냥 대학교 때 동아리 활동을 했던 건데요.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애들끼리 모여서 노는 수준....”


“어허, 강용씨. 자꾸 이러면 앞으로 회사에서 동영상 쪽 업무를 맡길 수가 없어요. 언제까지 블로그 운영 같은 거나 할 거야?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야지. 점점 축소되는 업무만 하면 나중에 회사에서 강용씨를 어떻게 취급하겠어?”


“....”


나는 박철호 팀장의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업무만 떠안긴 게 누군데?

동영상 기획 쪽으로 넘어가고 싶다고 계속 어필을 해도 당장 처리할 일들이 많다고 무시했으면서.

우리 팀이 다른 팀에서 버린 고객사들 갖고 와서 짬처리하는 쓰레기통 팀인 건 전 직원이 다 알고 있었다.

윗선에선 골칫거리인 고객사를 처리해준 공로로 팀장만 좋은 평가를 받고.

팀원들은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발전도 못하고.

나도 주임으로 승진은 빨랐다지만 이대론 안 된다.

시원하게 승부 걸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다른 곳 알아보자.


“그러면 오늘 팀장님 부탁 들어드리는 대신, 담당 브랜드 줄이고 영상 기획 쪽 업무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갑자기 내가 딜을 걸자 팀장은 꽤 놀란 표정이었다.

평소처럼 밀어붙이면 편하게 써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던 모양.

입술을 우물우물 거리며 잠깐 뜸을 들인 팀장은 내 제안을 바로 수락하지는 않았다.


“강용씨, 기획자가 브랜드 파워 있는 곳을 담당했으면 그게 다 이력이 되는 거야. 지금까지 맡은 곳이 대운학습, 삼정증권, 뭐... DH홈쇼핑 그런 이름 있는 회사 위주로 맡겼잖아. 다 강용씨 잘 되라고 그런 거예요.”


팀장의 말대로 난 거의 대기업 계열사나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브랜드의 담당을 해왔다.

하지만 온라인 홍보대행사에서 그런 곳들의 SNS 마케팅을 했어도 결국 나는 초라한 중소기업 직장인일 뿐.

나를 부품으로만 여기는 회사에서 내 전성기는 덧없이 흘러가고 있는 거 같았다.

그렇다면 우선 숨통이라도 터야지.


“팀장님, 요즘 저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는 거 솔직히 알고 계시잖습니까. 맨날 새벽에 퇴근하고, 철야 작업하고, 요즘엔 제안서까지 쓴 뒤에 직접 제출하라고 조달청이니 뭐니 출장까지 내보내셨잖아요. 이렇게는 도저히 못 버티겠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강경하게 나오자 팀장이 주춤했다.

애초에 이렇게 일을 주는 대로 다 받을 게 아니고 할 말은 했어야 했는데....


“어.... 그래, 강용 주임이 요즘 좀 빡셌지? 그럼...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촬영에 대충 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오늘 영상 조회수가 100만 찍으면 말한 대로 업무 조정합시다.”


“팀장님, 한펀치TV에 100만 찍은 영상이 뭐가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거세요? 채널 평균 조회수가 30만 정도니까 그거만 넘으면 급박하게 투입된 것 이상으로 성과 낸 셈이죠.”


“어음.... 그런가?”


팀장은 내가 근거까지 제시하며 조건을 바꾸자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디 사람 눈탱이를 치려고.


“그래, 그러면 30만 조회수를 기준으로 해요. 가면서 어떤 식으로 할지 미리 정해놓기나 해야겠네.”


결국 내가 영상에 출연자로 들어가게 되는 건 바꾸지 못했지만, 그나마 나한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틀었다.

어차피 다른 콘텐츠 만들 때도 모델비 따로 책정이 안 되어 있으면 내 손이나 어깨, 뒤통수로 때운 게 한두 번이 아니니까 이번에도 별 문제는 없겠지.

나는 촬영장으로 운전하면서 간략하게 어떤 콘셉트로 찍을지 팀장과 논의했다.


“...그렇게 하면 기존 지원자 대체되는 것도 해결되겠네요.”


“한펀치 쪽에서도 그림은 나오니까 컴플레인 걸진 않을 거야. 내가 먼저 가서 좀 봐주면서 하라고 얘기해둘 테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어느새 촬영장소 근처에 도착한 나는 먼저 팀장을 내려주었다.


“팀장님, 뒤에 촬영 장비들 있습니다.”


“어, 그래. 내가 뺄 테니까 트렁크나 열어줘요.”


팀장은 골칫거리가 간단하게 해결되어서인지 흔쾌히 자신이 움직이겠다고 나섰다.

마음에 비해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어이구, 강용씨! 와서 좀 도와줘야겠는데?”


차 뒤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라니, 팀장이 도움 요청을 해왔다.

난 운전석에서 내려 얼른 트렁크 쪽으로 가봤다.

거기엔 팀장이 상자 하나를 두고 씨름하고 있었다.

상자를 꺼내려면 약간의 턱을 넘겨야 하는데 그걸 못 들어서 저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 빼겠습니다. 잠깐 나와 보세요.”


나는 팀장을 옆으로 비키게 하고 상자를 꺼냈다.

조금 묵직하긴 하지만 다 큰 어른이 이거 하나 못 들어서 빌빌대나...?

나랑 한 다섯 살밖에 차이도 안 나면서.

팀장은 내 눈빛에서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무슨 장비를 한 곳에 모아서 담아놨대? 이거 두 명은 와야 옮기지, 안 돼.”


“제가 내려드렸으니까 그냥 들고 가시기만 하면 되잖아요?”


“끄응...! 아냐, 아냐. 몇 십 키로는 되겠구만. 촬영팀에서 두 명 정도 불러야겠어. 강용씨는 일단 가 봐.”


뭐 이런 걸로 사람을 둘이나 왔다 갔다 하게 하지...?

난 팀장의 사고방식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차에 다시 올랐다.

그런 뒤 주변을 천천히 돌다가 촬영팀 차량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경적을 크게 울렸다.


-빠아아앙!


“뭐야? 여기 주차 자리를 다 막아놓으면 어떡해!”


일부러 목청을 키워 소란을 일으켰다.

이 정도면 안쪽 마이크에 내 목소리 잡히고 있겠지?

팀장과 미리 짜둔 콘셉트가 이거였다.

돌발 상황 때문에 기존 도전자는 자리를 피했고, 현장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스파링을 하게 되는 흐름.

팀장이 미리 잘 얘기를 해놨는지 촬영팀도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고 나오고 필요한 컷들을 땄다.


“아니, 촬영하는 게 무슨 벼슬이야? 민폐 끼쳐도 되는 자격이라도 받았냐고!”


내가 화를 내는 장면.

촬영팀이 나와 말리는 컷.

상황 및 콘텐츠 규칙을 설명하는 내용 등.

고객사인 한펀치TV 출연진들도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의심은 하지 않고 잘 넘어갔다.

어쩌면 나 의외로 연기에 재능이 있는지도...?


“뭔 놈의 쌈박질하는 게 대수라고....”


격투기를 쌈박질이라고 표현하는 발언엔 순간적으로 살벌한 눈총이 쏘아져 나와 움찔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론 자연스럽게 내가 스파링을 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사전 인터뷰 같은 것은 진행되지 않고 빠르게 스파링으로 넘어갔다.

양아치처럼 구는 모습은 충분히 보여줬으니까, 적당히 참교육을 당하면 30만 조회수는 나올 거다.

근데... 박철호 팀장 눈빛이 좀 요상했다.

분명 오늘 스파링을 하는 선수한테 봐주면서 하라고 말해놓기로 했는데 왜 저렇게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아까 조회수로 실랑이할 때 조금 괘씸해하는 기색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팀장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내 머리엔 헤드기어와 마우스피스, 손에는 복싱 글러브, 다리엔 정강이보호대가 채워진 채 격투기 선수와 마주서 심판의 설명을 듣고 있었으니까.


“니킥, 엘보우 금지. 후두부, 척추라인 타격 금지. 낭심 조심하고. 그라운드 없이 타격으로만. 오케이?”


“음.”

“예? 아, 예.”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선수의 눈빛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평생 주먹질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팀장의 제안을 수락했을까...!

요즘 너무 힘들어서 잠깐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게 분명해.

살살 해주라는 말, 분명히 전달이 된 거겠지...?

선수 분, 표정 연기가 아주 일품이시네.

누가 보면 진심으로 싸우려는 줄 알겠....


-팡!


내가 잡다한 생각을 하는 사이 스파링이 시작됐다.

어정쩡하게 올리고 있던 내 손을 상대 선수가 강하게 후려쳤다.

가죽이 터져 나가는 듯한 굉음에 깜짝 놀랐다.

이거 적당히 하는 게 아니잖아...!

종합격투기 선수는 첫 타로 내 손을 치워버리고는 곧장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후욱!


위기의 상황에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나?

나는 주먹이 내 왼쪽 턱에 꽂히는 걸 천천히 인지했다.


-뻑!


가죽과 솜으로 만들어진 글러브를 끼고 때렸음에도 뼈끼리 부딪히는 것 같은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응...?”


다만, 생각과 다른 점은 소리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무시무시한 소리에 비해 실제로는 별 충격이 없었다는 것.

마치 고무공에 맞은 듯, 머리를 가누기 위해 힘을 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시 말해, 상대의 주먹은 ‘약했다’.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상대 선수를 보았다.

선수는 당황인지 경악인지 모를 감정에 두 동공이 잔뜩 확장되어 있었다.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은 일그러져 마치 커다란 괴물 같았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글고블린입니다.

격투기물로 다시 인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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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고 쳤다...! +1 23.12.13 1,222 1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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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생각이 없었다 23.12.10 1,238 21 20쪽
10 스위치 23.12.09 1,306 22 15쪽
9 하고 싶은 이유 23.12.09 1,383 16 17쪽
8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1 23.12.08 1,518 22 14쪽
7 아까워서 그래요 +1 23.12.08 1,593 21 11쪽
6 이게 되네? +2 23.12.07 1,685 29 18쪽
5 재능충 23.12.06 1,734 24 16쪽
4 처음 +2 23.12.05 1,801 30 17쪽
3 불씨 +1 23.12.04 1,966 27 13쪽
2 제 무덤을 팠구나 +4 23.12.03 2,212 28 15쪽
» 재능이 있는지도...? +13 23.12.02 2,903 4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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