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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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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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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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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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진목월(秦木越) (2)

DUMMY

어찌어찌 상황을 잘 넘기고 나서도 득구는 영 심통이 나 있었다. 아니, 잘 넘긴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득구는 그냥 어물거리면서 입을 닫았고, 백무원도 곧 도착이라며 더는 캐묻지 않았을 뿐이다.


정말 이걸로 괜찮은 게 맞나? 영 찜찜하기 그지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정인이라고? 그게 뭔 개 같은 소리야?’


흥, 흥,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도 득구는 ‘정인(情人)’이란 두 글자를 자꾸 곱씹고 있었다. 그 낯부끄럽고 손발이 간질거리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쿡쿡 쑤셔왔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고 있다. 득구도 바보는 아니니까. 이제 고작 15년, 짧은 인생이지만, 득구도 사내다. 봄만 되면 살랑이며 피어오르는 방향처럼 마음속에 꼭꼭 묻어둔 정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 때가 있는 법이다.


그야, 기억나는 가장 오래된 순간부터 함께 해온 인연이니까.


하지만 성채는 한현보의 아가씨고, 득구는 노비다. 설총은 이제부터 노비가 아니라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득구는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노비일 때와 아닐 때의 차이점도 아직은 잘 모르겠고 말이다.


아무튼 득구에게 성채는 여전히 아가씨다. 설명할 말을 알 순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래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이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다시 한현보로 돌아가면, 그때는? 그땐 어떻게 되는 건데?’


언젠가 이런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가주님의 자리에 설총이 있고, 한현보의 무사장(武士長) 남생의 자리에, 득구 자신이 있는 그런 그림을 말이다.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그것이 득구가 그릴 수 있는 가장 멋진 그림이었다.


그래, 멋진 그림. ‘무사, 득구’─ 좋다. ‘무사장, 득구’라면? 끝내주는 이야기다. 그러나 노비였던 득구에게 과연 그 자리가 허락될까?


설총의 말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냥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노비인 채로 썩도록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그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 말을 믿고 싶어진다. 제 주제도 모르면서 천하제일을 꿈꾸는 달구마냥 헛배가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소박하게나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한현보에 있는, ‘득구’라는 이름 두 글자가 박힌 작은 집무실과, 제자들 말이다. 아, 물론 진여송 같은 놈들은 좀 빼고.


설총이 말하는 한현보는 득구가 상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쯤은, 득구도 알고 있다. ‘군문세가’라는 딱지를 뗀 한현보. 무과에 급제하는 것 말고는 인생의 다른 목적이 없는 머저리들이 더 이상 한현보의 문호를 들락거릴 일은 아마 없겠지? 이 정도가 득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였다. 설총이 말하는 이후의 한현보는, 아직 득구에게는 어려운 이야기다.


그야,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득구가 생각할 수 있는 미래의 한현보는 지난 세월 동안 득구가 겪어본 한현보 뿐이다. 군문세가, 한현보.


설총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집이랄까? 누구나 제 소견대로 마음껏 짖어대는 곳 말이다. 가주도, 무사도, 스승도, 제자도 다들 자기 뜻대로 짖어대기에 바쁜 곳─


그런 한현보에, 노비였던 득구의 자리는 없다. 설총의 말은 가슴을 뜨겁게 하지만, 그의 말을 믿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가졌지만, 아직까지 득구는 그의 말을 전부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을 어떻게 알고 믿으란 말인가?


그렇기에 득구는 무사장 자리에 앉은 제 모습을 똑바로 그릴 수 없었다. 지금의 한현보는, 노비 출신의 득구로서는 무사조차 될 수 없는 곳이니까. 무사장? 턱없는 소리다.


노비 따위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나는 제자들 때문에 결국 무사장 자리를 내려놓고 한현보를 떠나는 모습이, 득구의 상상 속에서 그려지는 모습이다. 심지어 득구의 망상에서조차 그런 결말이 난다.


‘이걸 뭐라 그랬더라? 열··· 결? 아, 열등감.’


그렇다. 열등감. 설총은 득구에게 그 열등감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고 말했었다. 득구는 그런 거 안 키운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설총의 말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맞다.


그래서 득구는 성채 옆에 선 제 모습을 그릴 수 없었다. 성채는 한현보의··· 아니, 득구의 아가씨니까.


‘쓸데없는 생각이야. 도련··· 아니, 형님 해독제 찾는 거나 집중해.’


득구는 되뇌었다. 자꾸만 도련님이라 부르게 되는 것도 이제는 좀 고쳐야 하는데. 그렇지만 어쩐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단 말이다.


‘에이, 제기랄 거!’


파도처럼 자꾸만 밀려드는 생각들을 억지로 밀어내며, 득구는 자신을 채질했다. 15년이나 그 모양으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바뀌겠어? 설총도 그러지 않았던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그래, 지금은··· 집중하자.’


이런 사소한 문제는, 설총의 해독약을 찾은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득구는 그렇게 되뇌고 또 되뇌었다.



* * *



선실에 매실 향이 가득하다. 뱃멀미로 고생하는 손님이 종종 있기에, 배의 선장이 매실청을 좀 담가두었던 게다. 차를 끓이는 건 백무원이 직접 하기로 했다. 그녀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선장이나 선원들은 아랫사람을 시키라 권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다구(茶具)를 빼앗듯 받아와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이런 건 결국, 마음 문제다. 남이 우린 차를 가져다주기만 하는 것과 직접 우린 차를 가져다주는 건─ 받는 사람은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다. 뭐, 생각할 것도 있고.


‘···아가씨라. 누굴 말하는 거죠? 어떤 의미로?’


백무원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로 몇 번이고 입가를 매만졌다.


‘어떤 의미로든··· 마음에 둔 여인이 있다─ 그건 확실하군요.’


조금 장난이 과했던 것 같지만··· 그동안 그녀가 한시우란 소년에게 계속 지분거렸던 것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정보가 없다. 화검의 제자임에도 ‘한시우’란 이름 석 자로는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가 없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이 사실로 짐작해볼 수 있는 정황은 두 가지다. ‘화검의 제자’라는 전제가 거짓이거나, ‘한시우’라는 이름이 거짓이거나.


물론, 둘 다 거짓일 수도 있고, 둘 다 진실일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은 ‘천하지회’가 열리는 도중이 아닌가? 하루가 멀다고 화수분처럼 화제를 쏟아내는 천하지회에 천하의 모든 이목이 쏠린 와중이라, ‘화검의 새로운 제자’ 따위의 정보는 뒷전이 되어버렸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평소라면, 아무리 화검의 이름값이 걸렸더라도 이렇게 불확실한 거래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성공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 실패했을 때의 부담이 더 크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실패의 부담을 짊어져야 할 이유가 있었다.


‘정주에서의 거래···. 화검이 물고 온 게 하필이면 ‘그 거래’니까요.’


창영회는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조직이지만, 그렇다고 하위 조직을 총괄하는 본산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흑도의 다른 문파들과 비교해보면 중앙의 권력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편이다.


그야, 창영회가 존속할 수 있는 이유인 ‘아편’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게 바로 창영회의 총본산이니까.


따라서 창영회의 모든 조직원은 언젠가 총본산으로 적을 옮겨 생활하는 걸 꿈꾸기 마련이다. 거기엔 대륙 전체에서 긁어모은 온갖 부와 재물, 그리고 권력이 있었다.


한 성의 성주조차 무릎 꿇릴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 오직 천하의 주인인 황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되는,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 말이다. 뭐, 애초에 황제가 창영회 같은 흑도 방파를 직접 찾을 일 따윈 없을 테니─ 사실상 그 누구에게도 머리 숙일 일이 없는 곳이라 하겠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런 권력을 아무나 누릴 수는 없는 법이다. 권력이란 것은 분산될수록 그 값어치가 떨어지기 마련이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닳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창영회의 ‘높은 자리’는 그 수가 많지 않다.


그리고 저번에 있었던 ‘정주에서의 거래’는 바로 그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건수였다. 안 그래도 적은 의자, 비좁은 자리에 또 한 사람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올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만약, 화검과의 거래로 그 자리를 빼앗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그녀의 인생은 그 계획을 족히 십수 년 이상 앞당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어쩌면 혹시 모를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주 기나긴 창영회의 역사 중, 처음으로 ‘여인이 그 이름을 이어받는’ 그런 일이─


흘깃, 백무원은 창밖으로 화검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뱃멀미가 있다더니, 확실히 어지러운 표정으로 먼바다를 바라보며 숨을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만 보면, 아무리 봐도 ’화검의 제자‘도, ’고수‘도 어울리지 않는 애송이란 말이죠···.’


하지만 그는 양주에서 제일가는 살문(殺門)인 묵월광(墨月光)의 상급 살수의 기척을 단번에 잡아냈다. 심지어 그는 묵월광에서도 특급살수가 될 인재로 찍어놓고 기르는 인재였음에도 저 소년의 이목을 가리지 못한 것이다.


‘최소 일류··· 어쩌면 절정의 벽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하니 벌써 공력을 개방한 ‘개문고수’의 반열에 올랐겠느냐마는─ 세상엔 ‘설마’란 말이 있다. 그리고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도.


그리고 이렇게 되면, 고작 얼마 전에 화검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년이 벌써 일류를 넘어 절정을 넘본다는 사실이 매우 의심스러워지지만···.


‘혹시 모르죠. 사실은 화산에서 비밀리에 키워낸 비밀병기일지도···.’


어느 쪽이든, 파란은 일어날 거다. 하루하루 공고해지는 ‘높은 자리’의 벽을 깨려면 때로는 모험과 도전이 필요하다. 도박꾼들이 역배당(逆配當)에 판돈을 거는 이유는, 그것으로 돈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판을 뒤흔들 선택이기에 역배당에 돈을 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리미리 호감을 얻어둘 필요가 있지.’


그래, 이것이 그녀가 지금껏 저 화검의 제자에게 지분거렸던 두 번째 이유다. 이제 와 보면,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썩 불편하게 느낀 것도 같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겠어요? 웃는 낯엔 침을 뱉지 못하는 법이죠.”

“···네?”

“드세요. 어지러움과 구역질이 좀 나아질 거예요.”


백무원은 직접 준비한 매실차를 건넸다. 소년, 한시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따듯한 찻잔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뭘요.”


생긋, 웃으며 한시우의 어색한 미소를 마주한다. 소년은 뱃멀미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인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찻잔을 받아 들자마자 살짝 몸을 돌려 정면에서 시선을 받는 것을 피하는 걸 봐서는 아마도 차 한 잔 정도로는 경계심이 옅어질 일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꼭 쥔 찻잔을 조심스럽게 기울여 매실차를 마시는 걸 보니, 적어도 최소한의 신뢰도는 확보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약간의 신뢰와 호감.


백무원이 노린 것은, 바로 이 약간의 신뢰와 호감이었다. 대화든, 거래든, 어디서든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약간의 호감이란 향신료 말이다.


철썩!


뱃전을 때리는 파도가 거칠어졌다. 이제 배에서 내릴 때가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도의 백무원’을 만날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복잡한 심경이 실타래처럼 꼬여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백무원은 입가를 매만지며 표정을 점검했다. 부드럽게 휜 입술과, 살짝 들린 입꼬리 끝에 방점처럼 찍힌 보조개. 가볍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소.


평소대로의 표정을 회복한 백무원은 발걸음도 가볍게 뒤를 돌았다.


“긴 여행길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다시 한번 창영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백무원은 할 수 있는 가장 자신 있는 미소를 담아 말했다.



* * *



“번거로우셨을 텐데, 양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화검 대협.”


드디어 만나게 된 과연 ‘백무원’은 천하에 악명이 자자한 흑도문파의 수장인가 싶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불혹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는 마치 몇 년 전의 한주윤을 다시 만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한 인상이었다.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으로 손꼽힌다는 창영회의 수장이 이런 백면서생이라니?


적당히 거친 수염과 살기가 들끓는 날카로운 눈매를 기대했던 득구는 당황한 표정으로 도종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도종인도 역시 그 예상이 빗나가기라도 한 것인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백무원··· 이신 겁니까?”

“그야 그렇지요.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로 여쭌 것이 아니오만.”

“하하, 그럼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이신지요?”


도종인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저 먼 양주에서부터 여기 구룡반도까지의 여정을 굳이 감내한 것은, 곧 진짜 백무원을 만나 뵙고자 함이었소. 혹, 화산이 좀 가소로우시오?”


명백하게 적개심이 드러나는 도종인의 어조에 백무원의 눈 꼬리가 살짝 떨려왔다.


“이런··· 고정하시길, 대협. 대협께서 왜 이리 화를 내시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도종인은 검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뽑아 들 기세로 말했다.


“나, 화검 도종인은 대리인 따위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오! 한 번만 더 이따위 장난을 친다면 결단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좌조(坐照)의 고수가 내뿜는 위압감에 백무원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여유가 사라졌다. 단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엄포를 놓는 것이라 보기에는 너무 진심이 담겨 있었다. 백무원은 축축하게 젖어 든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물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대리인’이란 표현을 쓰시는지 모르겠군요. 이곳에 도착하실 때쯤, ‘양주의 백무원’에게 설명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모든 백무원이 진짜 백무원이며, 다른 창영회의 구성원들 앞에서 스스로 백무원이라 자칭할 수 있는 백무원은 오직 그 지역을 대표하는 백무원뿐이라는 헛소리 말인가?”


백무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종인이 손에 쥐고 있는 패가 무엇인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제대로 설명했군요. 혹시나 했습니다만···.”


어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백무원이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이곳 이도··· 아니, 구룡반도 전체에서 ‘백무원’이라 자칭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저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시겠지만, 창영회의 총본산은 바로 이곳이지요. 다시 말해, 저야말로 그 누구의 대리인도 아닌, 백무원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백무원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이런 식으로 위협을 일삼는 분인 줄은 몰랐군요. 화검의 이름도 땅에 떨어졌···.”

“다시 한번만 말하지.”


백무원은 여전히 고자세인 도종인의 어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에 도종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백무원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창영회의 수장, 대명편작(代明扁鵲) 진목월(秦木越) 대인을 만나 뵈러 온 것이오. 그 대리인인 백무원과는 이야기할 생각이 없으니, 진 대인을 뵙게 해주시오!”

“···!”


백무원은 벌어진 입을 더 열지도, 다물지도 않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그의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종인은 제 생각에 확신의 도장을 찍고서 말을 이었다.


“이도(離島)라는 지명에 얽힌 사연을 아는 자라면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법하지 않겠소?”


도종인의 단언에, 백무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창영회의 본문이 구룡반도··· 아니, 이도에 있다. 백무원은 마약 상인인 동시에 뛰어난 의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창영회에서 다루는 물건은 일반 상인으로서는 접할 수조차 없는 포도아국(葡萄牙國)의 특산품인 ‘태우는 아편’이다. 이 정도 정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진목월이란 이름 석 자를 떠올려야 마땅한 일이지.”


도종인의 말에 백무원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어쩐지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더라니. 화검 도종인의 명성은 지략이 아니라 무예에 있다. 즉, 창영회와 백무원, 그리고 진목월로 이어지는 스무고개를 화검 혼자 넘었다기엔, 장애물이 많다. 물론, ‘인위적인 장애물’이.


그렇다는 것은, 곧 누군가 화검 도종인에게 쓸데없이 친절하게 내어줘서는 안 될 정보를 내어줬다는 뜻이 된다.


“···진채염(秦彩琰)을 불러와라!”

“백무원께서는 굳이 수고롭게 아랫것들을 부르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백무원의 호통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발걸음으로 나타난 이는 바로 ‘양주의 백무원’이었다.


“···진채염.”


백무원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득구처럼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아니지만, 백무원의 목소리에는 짙은 살기가 깔려 있었던 탓에, 그녀의 이름 석 자가 마치 날카로운 쇳소리처럼 들려왔다.


백무원, 아니 진채염은 담담한 표정으로 백무원의 부름에 답했다.


“소녀, 진채염. 백무원의 부르심에 이리 달려왔나이다.”

“농담은 그만둬라, 진채염. 지금 네가 한 일이 어떤 짓인지 모르지는 않을 터.”

“소녀는 그저, 소녀에게 거래를 청해온 화검이란 ‘거물’께서 주신 질문에 성실히 답을 했을 뿐이옵니다만···?”

“그걸 지금 말이라고···!”


백무원이 높아지려는 언성을 붙잡은 것은 일종의 본능이었다. 절대로 가볍게 볼 수 없고, 가볍게 봐서도 안 되는 인물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사실을─ 이성은 놓쳤을지 모르나, 다행히 본능이 기억하고 있었다.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간신히 펴낸 백무원은 도종인과 진채염을 번갈아 쳐다본 후 말했다.


“···책임은 그분께서 물으실 거다. 구룡성(九龍城)으로 직접 모셔라.”


진채염의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녀는 굳이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명을 받드옵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닷!!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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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3 ky******
    작성일
    24.01.23 12:14
    No. 1

    작가님~ 화이팅입니다. 전 작품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고...'자유연재'에 올리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일반연재'로 승급해서 올리시면 작가님의 좋은 작품을 더 많은 분들에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해서 문의 드려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3 KaHaL
    작성일
    24.01.23 19:01
    No. 2

    아... 찾아보니 승급하는 방법이 또 있었군요...! 글만 쓸 줄 알지 다른 건 잘 몰라서...ㅠ 조언 감사합니다! 한번 신청해보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 ky******
    작성일
    24.01.24 09:30
    No. 3

    작가님~~ 극랑전 최신화 댓글이랑 방명록에 내용 적어 둡니다.

    아래 메시지 참고해서, 꼭 작가 승급신청도 하시고, 유료화도 도전해 보셔요. 화이팅입니다.

    저야 전작부터 무료로 봐서 좋았지만...ㅠㅠ 유료화도 하실 수 있는 작품이에요. 지금 문피아 시스템상 100화가 넘으면, 작가 스스로 유로화를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물론 일부 조건을 충족해야 하지만).

    작가님은 이미 일반연재에 글을 쓰실 수 있고, 작가 연재에도 글을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 ㅠㅠ 작가연재나 일반연재에서 글을 올리시면 훨씬 많은 분이 작가님께서 쓰신 글을 읽으실 수 있고, 또 유료화가 되면 작가님 글 쓰시는데, 필요한 '수익'이라는 동력을 얻을 수 있고요.

    정리하면

    1) 고객지원 게시판을 통해 '승급'요청
    2) 현재, 무조건 일반연재에서 글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임
    3) 첫 작을 비공개로 돌린 후, 리메이크해서 '일반연재'에서 재연재 -> 30화 이상 연재 / 선호작 1,000개 이상일 경우, 작가님 스스로 유료화 가능.
    4) 첫 작을 종결시킨 후에 '작가연재' 취득. (유료화가 되었을 전제)
    5) 그렇다면 현재 연재중인 극랑전을 '일반연재'는 물론 '작가연재'에서도 올릴 수 있게 됨.
    -> 첫 작의 유료화 여부와 상관없이, 현재 극랑전은 ‘일반연재’에서 바로 연재 가능.

    -> 많은 분들께서 작가님의 글을 읽고, 또 작가님도 '수익'이라는 동력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건필입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3 KaHaL
    작성일
    24.01.24 14:28
    No. 4

    아이고, 감사합니다. 제가 문피아 시스템을 잘 몰라서...ㅠㅠ 일반연재 승급 신청은 다행히 통과가 되었습니다!ㅎㅎ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마터면 완결낼 때까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쓸 뻔했네요ㅠㅠ

    무엇보다 이렇게 응원해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매우 큰 동력이 됩니다! 수익화까지는 아직 미달성인 조건이 많아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네요ㅎㅎ; 일단은 열심히 쓰고, 상세하게 알아보고 차근차근 밟아보겠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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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51화. 운명(運命) (2) 24.02.06 323 7 16쪽
170 51화. 운명(運命) (1) 24.02.05 326 8 13쪽
169 50화. 예언(豫言) (2) +1 24.02.04 324 10 13쪽
168 50화. 예언(豫言) (1) 24.02.03 332 7 14쪽
167 49화. 소영암향무(疎影暗香舞) (6) +2 24.02.02 325 8 14쪽
166 49화. 소영암향무(疎影暗香舞) (5) +2 24.02.01 319 7 14쪽
165 49화. 소영암향무(疎影暗香舞) (4) 24.01.31 311 7 15쪽
164 49화. 소영암향무(疎影暗香舞) (3) 24.01.30 314 9 14쪽
163 49화. 소영암향무(疎影暗香舞) (2) 24.01.29 330 7 14쪽
162 49화. 소영암향무(疎影暗香舞) (1) 24.01.28 345 8 17쪽
161 48화. 미궁(迷宮) (3) 24.01.27 336 6 19쪽
160 48화. 미궁(迷宮) (2) 24.01.26 322 11 14쪽
159 48화. 미궁(迷宮) (1) +1 24.01.25 332 9 15쪽
158 47화. 진목월(秦木越) (3) 24.01.24 326 9 14쪽
» 47화. 진목월(秦木越) (2) +4 24.01.23 360 8 18쪽
156 47화. 진목월(秦木越) (1) 24.01.22 367 6 15쪽
155 46화. 두 번째 기회 (2) 24.01.21 352 8 16쪽
154 46화. 두 번째 기회 (1) 24.01.20 351 6 16쪽
153 45화. 원수(怨讐) (2) 24.01.19 342 7 17쪽
152 45화. 원수(怨讐) (1) 24.01.18 353 6 16쪽
151 44화. 도박(賭博) (3) 24.01.17 346 7 15쪽
150 44화. 도박(賭博) (2) 24.01.16 354 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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