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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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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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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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미궁(迷宮) (3)

DUMMY

“그 이야기를 먼저 해야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엄두가 안 났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


득구가 말을 잃어버리자, 제갈민도 고개를 떨궜다. 애초에 반대를 무릅쓰고 ‘합류’라는 선택을 제안한 사람은 제갈민이었다. 그렇다면 결과를 책임져야 할 사람 역시 제갈민 자신이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손가락을 뻗어서 목표를 가리킨 사람은, 마땅히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문제라면, 그녀는 아직 선택의 책임을 져야 할 정도로 큰 실패를 맛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제갈민의 선택은 항상 옳지는 않았지만, 매번 좋은 결과를 냈다.


실패의 경험이 없다는 것.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이번의 실패를 맛보게 한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었다.


침묵하는 두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던 도종인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진목월이 우리의 목적을 묻지 않았군.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또 우리의 진짜 목적도 전부···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것도 맞아요. 저는 몇 가지 독에는 내성도 있고, 해독제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분들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요.”

“두 가지 의문이 있네.”


제갈민은 눈을 들어 도종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도종인의 표정에서 단지 그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말 대신 행동으로 하는 위로에 제갈민은 감사의 마음을 느끼며 찡한 코끝을 슥, 훔쳤다.


“무엇이지요?”

“하나는 뒤늦게 출발한 자네가 어찌 우리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이곳을 향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일세.”

“두 번째 질문에 먼저 답을 드리자면···. 제갈세가는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정보를 더 쥐고 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가운데에는 창영회의 본거지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렇군.”

“저희가 알고 있으니··· 무당이나 소림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을 거예요. 아마 화산도···.”

“···그렇군.”


도종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화산이야 확실히 천하십이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정도의 정보력은 가지고 있을 터였다. 화산의 제자이자 화산제일검이라 불리면서도, 정작 화산이 어떤 무기를 쥐고 있는지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만 하다니─ 처지가 기구하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물론 창영회의 도움을 받았죠. 세가의 이름도 좀 팔고···.”

“하하, 우리와 같은 수법을 썼군그래.”

“맞아요. 대신 상해에서 배편을 이용했거든요.”

“뱃길이라면··· 날씨만 따라줬다면 확실히 말보다야 훨씬 빨랐겠군.”


제갈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주에서 상해까지 가서 창영회를 찾아낸 것이다. 확실히 제갈세가의 신산다운 행동력이라고 할 만했다.


“우린···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음울한 목소리로, 득구가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제갈민의 표정도 우울해졌지만, 그녀는 목소리만이라도 밝은 어조로 말했다.


“에이, 보면 모르겠어요? 자연 동굴을 개축한 지하감옥이죠. 딱 보면 척 아녜요?”

“···그렇군요.”


득구답지 않은 그 답변에 제갈민의 어깨가 처졌다. 도종인은 그런 제갈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말했다.


“우린 그자, 진목월과 대면한 구룡성이 기억의 마지막 장면이라네. 자네는 독에 중독된 채로 혼절해서 끌려온 것은 아닌 듯한데, 대략의 위치라도 알 수 없겠나?”

“위치로 보면, 배를 타고 건너왔으니까···. 아마도 본토의 구룡반도는 아니고 처음 창영회의 백무원을 만났던 ‘이도’라는 섬일 가능성이 커요. 아마 이런 거겠죠. 더러운 일은 ‘이도의 백무원’이 도맡아서 하고, ‘진짜 백무원’인 진목월은 구룡성 안에서 평범하고 평온한 생활을 영위한다···. 뭐, 이런 느낌으로요.”

“지독할 정도로 치밀한 자로군.”

“그런 치밀함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겠지요.”


그때, 세 사람 중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조금 달라요.”

“···응?”

“이쪽이에요.”


그것은 진채염의 목소리였다.



* * *



이도는 본래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을 생산하던 섬이었다. 섬의 본래 이름이 대서산(大嶼山), 곧 산의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산세가 험준하여 수색이 어렵고, 지기(地氣)가 뛰어나서 양질의 아편을 생산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향산현에 포도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가공하는 아편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이도는 포도아 사람들과 거래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물론, 여전히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을 생산하는 걸 멈추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일 동안의 현상 유지 목적이었다.


그러다 ‘진목월’이 황제의 통풍을 치료하여 대명편작(代明扁鵲)이란 이름을 얻고, 천하에 크게 명성을 떨치면서 상황이 또 바뀌었다. 진목월이 천거한 인물들이 이 지역을 책임지는 관리가 되면서, 창영회는 더 이상 관을 피해 숨어다녀야 하는 조직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섬이 아닌 본토에서 자유롭게 아편을 거래하고, 구룡성채라는 멋들어진 성채까지 손아귀에 넣게 된 진목월은 이도의 쓰임새를 또다시 갈아치웠다.


수년 간 인부들을 동원하여 땅을 파고, 기관진식(機關盡食)으로 명성이 자자한 명사들을 불러 모아 지하에 거대한 미궁을 건설했다.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아는 이는 오직 진목월 단 한 사람뿐이었지만─


대략, 다들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수년에 걸친 긴 공사가 끝나고 이도에 처음으로 보내진 이들은 바로 창영회의 배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 명의 배신자 중 누구도 이후 다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 * *



“···기관진식이라니.”


도종인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이야기하자, 제갈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지하감옥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한 곳이었던 모양이군요. 미궁에, 기관진식이라니···.”


벽 너머에서 진채염의 음성이 들려왔다.


“단순한 감옥은 아니죠. 사람을 가둬 죽이기 위해서 기관진식까지 동원하는 건, 낭비가 너무 심하잖아요? 인상적인 소문으로는 이곳이 모종의 실험을 위한 장소란 소문도 있더군요.”


도종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모종의··· 실험? 도대체 무슨 실험을···.”

“흑도의 문파 중에는 제자를 도구로 취급하는 곳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후후후···!”


건너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천하십이본은 안 그런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적어도 제갈세가는 아녜요!”

“화산도 마찬가질세.”

“후후, 그럴까요?”


진채염은 보이지 않음에도 그 표정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천하십이본은, 그들 속에 속하지 못한 자들만을 도구로 취급하는 모양이로군요. 후후···. 도구치고는 깨나 인간적인 대접에 감사라도 드려야겠어요. 화검 대협과 그 제자분.”


도종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이번 거래에서 그녀를 진목월과의 만남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단 이번 일만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창영회는, 아니··· 강호의 무수한 중소 문파는 모두 천하십이본을 비롯한 강자들의 도구가 되어 살아왔어요. 설마 아직 모르셨나요?”


바늘 같은 그녀의 말에 도종인과 제갈민은 모두 찔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미안합니다.”

“···.”


갑작스러운 득구의 질문에 진채염의 목소리가 끊겼다. 진채염이 답을 하든 말든, 득구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천하십이본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뭐 그들을 대신해서 뭐라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에 있어서 백··· 아니, 진 소저를 속이고, 이용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적어도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회한이 묻어나는 득구의 어조에, 도종인과 제갈민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득구를 쳐다보았다.


“일전에 우리 도련님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영악함과 지혜로움을 헷갈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나는 여태 영악함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득구의 말에 도종인은 무언가를 크게 깨달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제갈민은 몹시 놀란 표정으로 득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틀렸습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건,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던 겁니다.”


득구를 이를 꽉, 깨물고 씹어 뱉듯이 말했다.


“결과라는 건, 결국 과정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제갈민은 놀람으로 벌어졌던 입을 닫고, 한층 진지하고 무거운 눈으로 득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이 소협을 여러 번 다시 보았지만, 이번만큼 새롭게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한 소가주는 이 사내의 이런 면모를 진즉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좋아요. 그 사과는 받아들이지요.”


벽 너머에서 진채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음성은 조금 전의 뾰족함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결국 생존이니까요. 과정이 얼마나 어떻게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아남아야 결과도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누그러졌는가 싶더니, 은근히 시비조에 가까운 언사에 득구의 눈썹이 비틀렸다. 조금 전부터 계속 득구를 지켜보던 제갈민이 그를 제지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진 소저라고 했던가요? 나는 제갈세가의 연화신산, 제갈민이에요. 비록 지금 상황이 곤란한 것은 사실이나, 제게는 지금 상황을 헤쳐 나갈 지혜와 능력이 있어요. 물론, 제 옆에 계신 화검 대협을 포함해서 우리 일행은 모두 그 능력이 탁월하죠.”

“···갑자기?”


얼굴에 철판을 깐 게 아닌가 싶은 수준으로 뻔뻔스러운 제갈민의 말에 득구는 저도 모르게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득구의 옆구리를 꼬집은 제갈민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외치듯 말했다.


“진 소저가 아직 생존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가진 패를 우리에게 걸어보는 건 어때요? 여기선 함께 협력하죠.”


득구는 여전히 멀뚱한 표정으로 제갈민을 쳐다보았지만, 도종인은 그녀의 태도가 급변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갈민은 나름 ‘설득의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자신감 있는 어조, 확신에 찬 답변. 상대방의 신뢰감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태도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은 곧 제갈민이 진채염을 회유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느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채염은 아까 분명, 이곳이 ‘기관진식을 동원한 미궁’이라고 말했다. 그 말인즉, 이 미궁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제갈민이 아무리 기관진식에 대해 아무리 방대한 지식을 갖췄다 하더라도, 무슨 기술이 쓰였는가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매우 크니까.


도종인의 생각대로, 제갈민은 억지 미소를 띠고 진채염이 있는 방향의 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현재 그녀의 마음이 썩 여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도종인은 초조함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며 제갈민과 함께 벽을 쳐다보았다.



* * *



“송청양의 눈 밖에 난 화검은 그렇다쳐도, 제갈세가의 연화신산은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딱!


진목월(秦木越)은 들고 있던 바둑돌을 점 위에 착수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자네가 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군.”


‘이도의 백무원’─ 방도룡(房都龍)은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온 진목월의 바둑돌에 신경을 써야 할지, 아니면 상황을 너무나도 무신경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에 신경을 써야 할지 고민하면서 말했다.


“연화신산은 그 담하가 온 천하에 공표한 자신의 후계자입니다. 아무리 조카라 할지라도, 여식을 후계자로 삼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여, 자네는 이 사람이 실수라도 했다는 말인가?”

“···!”


방도룡은 즉시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버님께서는 고정하시옵소서.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결단코 아닙니다.”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과, 미세하게 떨리는 손등을 굽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진목월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 사람, 참. 장난일세, 장난이야. 늙은이가 장난 한번 쳤다고, 응? 그리 정색을 하고 그러시는가?”


방도룡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서 일어나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방도룡은 정7품의 지현(知縣)이며, 광동성 동완현(東莞縣)의 적법한 지배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저 광동진가(廣東陳家)를 몰아내고 광동성의 진정한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는 광동방가(廣東房家)의 가주이며, 광동방가가 운영하는 방가상회의 실질적인 주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모든 것, 그리고 그가 이룬 모든 것이, 어느 하나 빠짐없이 진목월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진목월은 고아였던 그를 데려와 의술과 학문을 가르쳤고, 장사하는 법을 알려주었으며, 광동방가에 데릴사위로 보낸 후엔 직접 그의 정적을 제거하여 가문을 장악하고, 가주 자리까지 차지하게끔 만든 이도 진목월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 지엄하신 황상 폐하께 그를 천거하여 동완현의 지현 자리에 앉게끔 손을 쓴 이도 바로 진목월이다.


그런 진목월이 방도룡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친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아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그가 바로 진목월이니까.


방도룡은 가슴속에 치미는 불만의 싹조차 모조리 뽑아버리고서 공손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라곤 하나, ‘신산’의 이름을 거머쥔 자입니다. 게다가··· 그 일행은 하오문의 향림각 소속입니다. 지금쯤이면 염천호는 연화신산에 관해 알아야 할 소식은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진목월은 손을 들어 백무원의 말을 멈추게 하고, 시비를 불러 식은 차를 다시 덥혀오도록 시켰다. 시비가 다시금 차를 대령하자, 진목월은 자신과 백무원 앞에 찻잔을 놓고서 말했다.


“흠, 일리 있는 말일세. 계속해 보게나.”

“담하의 집권 이후, 제갈세가는 군웅칠세 중의 필두로 발돋움했습니다. 아직은 제갈세가와 대적할 때는 아니라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진목월은 말을 마친 백무원에게 찻잔을 권하고, 자신 역시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켠 후에야 그의 말에 답했다.


“그렇군, 그렇군. 옳은 말씀일세.”


진목월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턱짓으로 바둑판을 가리켰다.


“한데, 안 두나?”

“···예?”

“이 사람, 참. 계속 기다리고 있잖은가.”


방도룡은 얼빠진 얼굴로 바둑판을 내려다보고는 허겁지겁 바둑돌을 집었다. 이미 바둑판에서 관심이 멀어졌던 탓에 다시 들여다봐도 좋은 수가 나올 턱이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그나마 가장 나아 보이는 곳에 돌을 내려놓았다.


“쯧쯧쯧!”


그리고 방도룡은 진목월의 혀 차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자충수를 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네가 배워야 할 것은 이것이라네.”

“···바둑 말씀이십니까?”

“물론, 바둑도 더 배우셔야지. 매번 둘 때마다 이리 재미없게 끝이 나버리면 이 사람의 삶의 낙이 하나 줄어드는 것 아닌가.”


그제야 방도룡은 진목월이 바둑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떤 상황이든,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자네에게 더 오랜 삶을 영위하도록 해줄 거라네. 아시겠는가?”

“···명심하겠습니다.”

“심지어 이 사람이 자네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하더라도 말일세.”

“예?”


진목월은 검지를 뻗어 찻잔을 가리켰다.


“이 사람에게 보여주게나. 자네가 이 사람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그 마음에 새겼는가를.”


그 순간, 방도룡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새로 덥혀온 차에는 단지 찻물만 끓고 있었던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채염이는 좋은 소질을 가진 아이였지. 위로 오르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든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이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무니까 말일세.”


진목월은 찻잔을 들어 향기를 즐기며, 천천히 찻물을 들이켰다. 후루룩, 소리가 울려 퍼지고 차향에 흠뻑 젖은 한숨을 내뱉은 후, 그는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는 아이였다네.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니, 심히 아까운 마음이 드는구먼그래.”


시간이 갈수록, 백무원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핏물이 입안을 가득 메우고 점점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오는 것이다. 백무원은 핏물을 뱉지도, 삼키지도 않은 채 버티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표정만큼은 얼어붙은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차향이 좋군.”


진목월은 자신의 찻잔을 백무원에게 내밀었다.


“자네 것과 내 것이 좀 다른 것 같은데··· 맛을 한 번 보시겠는가?”


백무원은 진목월이 내민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찻잔을 들고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버님, 아니 대인께서 거둬주시지 않았으면 진작 죽었을 목숨, 대인께서 거둬 가시는 것이 이치일 것입니다.”

“후후, 후후후···.”


진목월은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좋은 판단일세. 확실히 가르치는 보람이 있구먼.”


백무원의 새하얗던 낯빛은 어느새 조금씩 붉은 기를 되찾고 있었다.


“수읽기가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꿰기 전의 구슬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네.”

“명심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듣기로는, 천하지회에 연화신산을 자칭하는 이가 제갈세가의 대표로 참석했다고 하던데, 자네는 이 일을 어찌 생각하시는가?”


백무원의 표정이 일변했다. 진목월이 말하는 연화신산이 ‘가짜’라는 것은 이미 확인을 마친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목월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천하지회에 ‘가짜 연화신산’이 참석했을 리는 없겠지요.”

“후후, 이 사람 또한 그리 생각하네.”


후루룩, 찻물을 들이키는 소리가 울려 퍼진 후, 진목월이 물었다.


“아직 문제가 남았는가?”

“아닙니다.”


진목월은 턱짓으로 바둑판을 가리켰다.


“한 수 정도는 물러주겠네. 새로 한 번 둬보시게.”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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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49화. 소영암향무(疎影暗香舞) (2) 24.01.29 330 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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