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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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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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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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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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지 #3

DUMMY

# 485-130


인간이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타인을 깎아내리고 비하하는 짓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족속이다.


더욱이 그 결과가 자신의 출세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그곳이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라 불리는 연구원들의 세계라면, 그런 작태는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를 모조리 보고하면 평소에는 점잖은 척 위선을 떨던 그들은 철저한 검증을 거친다는 핑계로 개떼같이 달려들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오히려 그런 깎아내리기 식의 반론과 이의 제기, 온갖 더러운 조작과 왜곡의 결과물이야말로 나의 성과를 더욱 빛나게 해줄 테니 마다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들의 치졸하고 살벌한 검증 따위는 완벽한 내 결과물에서 아무런 허점도 찾지 못할 것이다.


만에 하나, 혹시 존재할지 모를 오류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좀 더 보완하고 더 나은 결과를 얻으면 그만이다.


온갖 감언이설에 현혹되어 그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바보 같은 놈은 이미 버렸다. 두 번 다시 그들의 더러운 공작이 성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일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할 것이다.


단지, 공정한 결과를 위해 모두에게 골고루 나뉘어야 할 ‘샘플’이 그만큼 넉넉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한때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샘플’은 연구원의 숫자만큼 분열해야 할 테고, 그렇게 분열만 해대다가 ‘내’가 ‘내’가 아닌 상황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피실험체의 안위 따위는 수챗구멍에 흘려보내는 오물 정도로 취급할 놈들 이기에, 추가로 요구하는 샘플에 끊임없이 분열만 하다가 소멸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냥 대충 이런 게 나왔다.’는 식의 보고서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올라가는 서류에 묻혀 버릴 테니 그것 또한 원하는 바가 아니다.


‘연구소 최고의 루팡’이라 불리는 내 명성에 흠집이 나지 않으려면, 적당히 관심 끌고, 적당히 인정받아, 최대한 많은 지원을 받아내야 한다.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밝혀야 상부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 그래서 무엇이 부족한지 명확하게 말해야 ‘루팡’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이의 생각을 읽는다는 게 아싸의 삶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내겐 쉽지 않은 일이다.


맨날 자르고, 썰고, 섞어서 나온 결과를 분석할 줄만 알았지, 인간을 상대로 이런 고도의 심리전은 해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


이럴줄 알았으면 주변에 사람을 좀 둘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늦은 게 아니라고 했던가? 지금부터라도 협력자를 찾아보는 게 좋을까?


이 엄청난 비밀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관계를 쌓은 후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작당모의 하려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보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평소의 행실에 비추어 본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긴 시간을 고민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 심리학 전공한 놈 하나만 알고 지냈어도 많은 도움이 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진전이 없다면 움직여야 한다. 10일 정도 고민했으면 많이 한 거다.


안되는 걸 탓할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에서 해법을 찾는 게 옳은 일이다.




# 485-131


녀석은 ‘너와 똑같은 복제물을 내놔.’라는 말에 - 또다시 사춘기가 찾아왔는지 - 지 뭣대로 만든 샘플을 내놨다.


예전에는 말 잘 듣는 조수 같던 놈이 요즘엔 뭐만 하자고 하면 툴툴거리는 게 거울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처음 내민 샘플은 똑같기는 개뿔! 실험체에 이식하자마자 미친 듯이 날뛰며 온 실험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놨다.


지금은 좀 얌전해졌지만, 녀석이 처음 나왔을 때 - 솔직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 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랄 맞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깨진 유리 조각과 널브러진 시약을 치우기 위해 직접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 연구실에서 토끼가 비질하고 고양이가 걸레질하는 모습은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위에서 이런 모습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것만 해도 학술 가치는 충분할 텐데···.


하지만, 저것들이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면 녀석을 언급해야 한다.


절대 안 된다.


녀석의 존재 외에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복제물’이 있어야 한다.


녀석은 이걸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신과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게 불편한 걸까?


왜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어느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숲이 떠올랐다.


그 숲에 들어간 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편적인 기억을 가지고 똑같은 모습으로 분열하게 된다.


숲을 헤매다 분열한 자신을 만나면 문답 무용!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고, 사투 끝에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잃어버렸다.


계속해서 분열하고, 마주치면 죽이고···, 결국에는 단편적인 기억만 남은 불완전한 존재로 남아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는 소설에나 있을 법한 허황된 얘기였다.


자신과 ‘닮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은’ 존재를 만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소위 ‘도플갱어’라 불리는 존재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대학시절, 이 주제에 관해 토론을 벌인 적도 있었다.


너처럼 눈 뜨고 볼 수 없는 외모를 지닌 자와 마주치면 기분이 어떨 것 같냐는 가벼운 농담이 시작이었다.


파전에 막걸리 한 사발 놓고 동이 틀 때까지 열띤 논쟁을 벌인 결론은···. ’그런 일은 현실에 일어날 수 없기에 인간은 절대 알 수 없다.’로 끝났다.


닮은 사람은 있을 수 있다. 실례로 유명인과 닮은 사람이 발견되고 그들끼리 만나 친분을 이어간다는 소식은 간간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외모는 물론, DNA 대조 값이 99.9%도 아니고 100% 일치할 확률은 104자(10의 24승)분의 1이라고 한다.


전 세계의 인구가 104자 명- 104,000,000,000,000,000,000,000,000명 - 일 때, 나와 일치하는 DNA를 가진 인간이 1명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겨우 새내기 티를 벗은 학부생의 온갖 억측과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점철된 토론은 옆에서 묵묵히 듣기만 하던 조교가 알려준 사실 덕분에 허무하게 마무리되었다.


조금만 일찍 알려 줬더라면 집에서 잘 수 있었을 텐데···.


무의미한 밤샘토론을 통해 얻은 지식은 평생 가는 법이라며, 이런 바보 같은 짓거리도 젊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조교형은 덕분에 즐거웠다며 술값을 계산하고 밝아오는 태양 속으로 홀연히 떠나갔다.


어린시절 나눴던 쓸데없는 토론에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녀석 앞에서 어깨를 으쓱일 수 있게 된다.


치기어린 짓거리라 해도, 이런 것이 지친 삶을 살아가는 작은 활력소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히 일치하는 복제물을 만들어 내 앞에 세워야 하는데... 이 새끼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는 게 문제다.


어쩌면 똑같은 ‘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 불편한 게 아닐까? 서로 증오할까 봐? 서로 다치게 할까 봐? 서로 소멸시키려 할까 봐?


잠깐, 혹시 이 녀석은 답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 485-132


건방진 쉐리.


장장 반나절이라는 긴 시간을 고민해 얻은 가설을 묵묵히 듣고 있던 녀석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아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라는 핀잔은 들었으니 무시는 아닌가?


녀석은 완벽히 똑같은 세포를 만든다는 것부터 되짚었다.


생물이 가진 DNA 구조를 늘어놓는 녀석의 잔소리는 학창시절 지겹게 암기했던 것을 그대로 읊어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DNA를 통째로 복사하는 ‘단성생식’은 부모와 자식세대가 일치할 수밖에 없고, 감수분열된 생식세포 두 개가 결합해 온전한 DNA를 만드는 ‘유성생식’은 완벽히 일치하는 DNA가 발현될 수 없다.


이 두 가지 방식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녀석의 말은 잠시 학생 시절로 돌아가 묵묵히 듣고 있던 내게 부푼 희망을 안겨주었다.


들뜬 목소리로 ‘닥치고! 어떻게든 똑같은 걸 내놔!’라는 말에 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 원하는 게 뭐야? 복제물이야? 쌍둥이야? 아니면 DNA가 일치하는 제3의 객체야?’


녀석의 말은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그러게? 난 뭐가 필요한 거지?




# 485-133


적당한 선에서 보고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샘플이 필요하다.


어느정도가 적당한지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작정 내놓으라고 닦달만 하고 있었으니 녀석의 한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단순 복제물을 보고한다면, 준비고 자시고 그냥 올리면 된다. 거를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다. 단···.


뛰어난 재생력을 가진 생물을 보고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0조각 넘게 도륙을 내도 재생하는 ‘플라나리아’와 죽지만 않으면 심장과 뇌까지 재생하는 ‘아흘르톨’과 뭐가 다를까?


그저 재생능력이 뛰어난 새로운 종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 상부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가장 높은 곳에서 눈부시게 빛나야 할 내 업적이 겨우 편형동물이나 도롱뇽 취급을 받게 할 수는 없다.


쌍둥이를 보고하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으려나?


같은 DNA를 보유한 쌍둥이라면 조금은 흥미를 끌 수도 있겠지만, 녀석의 핵심기술인 ‘세포분열’과 ‘DNA 조작’을 뺀다면, 분열된 플라나리아와 뭐가 다르지?


결론은 ‘DNA가 일치하는 제3의 객체’가 필요한데···. 그걸 만들지 못해서 몇 날 며칠을 고생한 거잖아···.


결국···. 다시 원점이다.




# 485-140


보고도 귀찮고, 연구도 무의미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오랜 연구로 지친 삶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줄 성과를 얻었건만, 세상에 나가 많은 이의 환호를 받을 수 없다면 그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자고 싼 것과 다르지 않다.


연구실도 가지 않고 거의 일주일을 침대에서 뒹굴 거리는 모습에 측은지심이 들었는지, 녀석은 침대 옆 탁자에 샬레를 내려놨다.


함부로 실험실 밖으로 가져와선 안 되는 샬레 안에는 아주 작은 점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의도를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리는 내 입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했어. 나머진 네 몫이야.’


내 몫? 그게 뭔데? 이제껏 뽑아낸 샘플과 다른 거야? 뭐가 다른데? 어떻게 다른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 485-141


답은 알고 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녀석이 뽑아낸 샘플에서 부족한 것은 인간···. 정확히 말하자면 ’나’였다.


지금까지 거쳐온 온갖 생물의 DNA와 모든 특성을 재현해 낼 수 있는 녀석은 오로지 ‘내’ 정보만 다루지 못했다.


반복된 실험으로 얻은 결론으로 녀석도, 나도,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차마 실행에 옮길 수 없을 뿐이지···.


지금 녀석은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압박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인간성이라도 지키기 위해 이대로 묻을지, 대의명분과 인류의 발전을 핑계로 인두겁을 쓴 악마가 될지···.


결정할 시간이다.




# 485-149


신은 죽지 않았다. 발버둥치는 어리석은 인간을 위해, 그 비루한 인간이 내세우는 인류의 발전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에 힘을 실어 주신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이토록 적절한 시점에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실험체를 얻게 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인큐베이터 안의 실험체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지만,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흉부의 움직임으로 내 수고가 헛짓거리로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주사를 놓는 수고도, 실험체로 유도하는 노력도 필요 없었다.


난 그저, 인큐베이터 안에 놓여 있는 샬레의 뚜껑을 열었을 뿐이다.


답답한 유리용기를 벗어난 작은 점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실험체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이대로 이식이 성공하면 강한 재생력만큼이나 높은 생존본능으로 부족한 장기를 수복함과 동시에 튼튼한 신체를 얻게 될 것이다.


이젠 기다림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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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오해 말고 이해 24.03.23 15 0 12쪽
39 아가야 24.03.22 17 0 11쪽
38 놓지마 정신줄 24.03.21 19 0 12쪽
37 그들은 24.02.07 2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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