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새글

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최근연재일 :
2024.09.19 08:00
연재수 :
64 회
조회수 :
1,487
추천수 :
16
글자수 :
333,106

작성
24.04.02 07:00
조회
10
추천
0
글자
11쪽

소고기의 위력

DUMMY

“자선 씨!”


자선은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던 듯, 경직된 팔다리에 떨림이 멈추자 힘없이 일어나 앉았다. 그렇다고 멀쩡한 상태라 하긴 힘들어 보였다.


두통이 심한 듯 관자놀이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인 모습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복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요? 자선 씨.”


“아... 괜찮아요. 쪽 팔리게...”


잠시 앉은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던 자선은 천천히 일어나 석주를 슬쩍 쳐다보고는 그대로 뒤로 돌아 경기장을 벗어났다.


“졌어요. 젠장...”


월동 준비를 마친 곰. 충분한 먹이를 섭취하고 잔뜩 몸을 불린 상태로 기분 좋게 돌아다니며 영역표시를 한 후, 아늑한 동굴 입구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는 여유로운 곰이 아닌,


하루가 멀다 하고 날은 추워지는데, 풀 한 포기 주워 먹지 못해 삐쩍 꼴은 몸으로 살아 숨 쉬는 동물이라면 무엇이든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길 준비를 마친 곰이 경기장 한가운데에 떡 하니 서 있었다.


“우워~~~~~ 다음~~~~~!”


180도 달라진 유연의 모습에 이 인간을 마취시켜 우리에 가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진 김 실장은 조심스럽게 석주에게 다가갔다.


“석주 씨...? 괜찮아요?”


“뭐가요? 안 해요? 빨리! 다음!”


그래도 의사소통이 되는 걸 보니 이성을 잃은 것 같지는 않지만, 이대로 진행해도 되는지 불안해졌다.


“우와~ 잘한다~”


“저 양반 화끈허네~ 남자다 잉~”


“뭐야~ 마음만 먹으면 잘하네~ 멋있다~”


어디선가 시작한 환호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갑자기 뜨거워진 분위기에 김 실장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 이 인간이 나서면 이목이 쏠리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나랑 한판 합시다.”


화끈하게 1승을 올린 석주를 보니 피가 끓었던 모양이지? 유도복을 입은 사내가 벌떡 일어나 경기장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조건 씨. 잠시...”


“뭡니까? 잠시는 집에 가서 찾고, 할 생각 없으면 물러나요.”


조건은 석주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김 실장을 거칠게 밀어냈다.


실력있는 사람이야 상대가 알몸이든, 중무장이든 별로 개의치 않겠지만, 유도란 도복을 입지 않으면 다소 불리한 종목이다.


하수나 그런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잡을 곳이 줄어들어 공격방법이 제한되니 도복을 입은 사람과 붙는 게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게 사실이다.


청바지에 흰 티로 패션의 근본을 고수하는 석주를 상대로 자세를 잡는 조건은 결코 하수가 아니었다. 이미 어디를 잡아 어떻게 메다꽂을지 백만 가지의 방법을 생각해뒀다.


“이~ 야~~~ 압!”


우렁찬 기합소리로 온몸을 일깨운 조건은 양손을 앞으로 뻗어 석주에게 달려들었다.


팔목, 어깨, 뒷목 어디든 잡히기만 하면 바닥에 메다꽂을 무서운 기세였지만, 석주는 살짝 몸을 숙여 피하면서 옆으로 돌아나가 한쪽 팔을 옆으로 쫙 펼친 채 힘차게 내달렸다.


“빠샤~”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낯선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마치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것처럼 조건의 눈앞에 보이는 장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사나운 짐승의 포효가 귀를 때렸다.


“우워~~~~~ 다음~~~~”


지겹도록 몸으로 익힌 낙법 탓일까? 이전 상대처럼 기절하지 않은 걸 위안 삼으며 조건은 말없이 일어나 자리로 향했다.


“우와~ 멋지다~”


“저 사람 뭐야? 택견 아니었어?”


“알게 뭐야. 이기라고 했지 고유무술 쓰라고는 안 했잖아? 시원시원하고 좋구먼.”


같은 공격으로 두 명을 꺾으니 사람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보기엔 그리 빨라 보이지 않는데, 순식간에 두 명이나 쓰러트리니 되레 상대가 약해 보일 정도였다.


자선은 첫판이라 힘이 남아돌았던 이유도 있지만, 아무런 방비 없이 정통으로 맞아 기절한 것이지, 쓰러지는 충격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조건은 미리 본 상대의 공격에 턱을 당겨 방어한 덕분에, 직격타를 맞아 기절하는 수모는 피할 수 있었다.


자칫 넘어지며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을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메치기 위해 메쳐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도는 낙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토록 숙련된 무술가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목을 때리는 건 무척 위험한 행동이다. 특히, 경동맥에 충격이 가해지면 뇌에 전달되는 혈류가 줄어들어 기절은 물론, 쇼크사도 할 수 있는 위험한 공격이다.


흔히 프로레슬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 기술은 그런 위험 때문에 목이 아닌 가슴 위쪽을 치는 식으로 충격을 완화한다.


하지만 소고기에 눈이 돌아간 이 인간은 그딴 거 없었다.


“어디 나한테도 한번 해 볼래?”


기골이 장대하다는 말도 모자랄 덩치의 사내가 나섰다. 주변 사람을 어깨 아래로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모습으로 석주의 앞에 서니 마치 다윗과 골리앗 같았다.


“재밌어 보이는데, 한번 해봐.”


걸걸한 목소리를 따라 한참 올라가야 마주할 수 있는 상대의 눈빛에 석주도 잠시 움찔했다. 사실, 투지에 불탄 것이지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었기에 감당하기 힘든 벽을 만나니 조금은 진지해질 필요가 있었다.


“왜? 높이가 안 맞아? 자!”


사내는 한쪽 무릎을 꿇어 석주의 눈을 정면에서 응시했다.


“야~ 허승찬! 장난하지 말고 제대로 해~ 난 너한테... 니 편이란 말야!”


돈 걸었단 말이겠지.


“그래~ 그냥 눌러버려! 꼼짝달싹 못하게!”


한손으로 눌러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야~ 쫄았냐? 똑같이 해봐~”


이자에게 투자한 인간이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하긴, 덩치로 보나 뭐로 보나 누구라도 그럴 것 같았다.


우뚝 솟은 승모근에 둘러싸인 목을 어찌저찌 때린다 해도, 육백 년은 넘게 자란 노송에 나무젓가락을 던지는 정도의 충격이라도 있을지 모르겠다.


“에라이~”


도발을 받고 물러서는 건 석주답지 않다. 하물며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런 치욕을 묵인해 줄 정도로 관대한 집단이 아니다.


하나같이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이 쓰러트려 보라는 상대를 두고 물러선 석주를 우습게 여길 것은 안 봐도 훤하다. 좋아. 해보라면 해봐야지.


석주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승찬에게 달려들자 사람들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소리 없는 함성을 질렀다.


승찬이 어떻게 이길지, 상대를 얼마나 처참하게 밟아버릴지 궁금해 미쳐버릴 것 같다는 시선들이 날아오른 석주에게 모여들었다.


미리 양팔을 들어 목을 막은 승찬은 뛰어오른 석주의 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똑같이 하는 척, 빈 곳을 노리는 같잖은 눈속임을 대비했지만, 석주의 팔은 아무런 속임수 없이 정직하게 날아들었다.


퍽!


묵직한 소리와 함께 팔을 때린 석주가 그대로 승찬을 타고 뒤로 돌아 등에 매달렸다.


한팔은 목을, 다른 팔로 후두부를 감아쥐어 몸쪽으로 당기니 ‘슬리퍼 초크’가 완성되었다. 게다가 두 다리로 허리를 감았으니 쉽게 떨쳐내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목을 방어하는 양손 위로 들어가는 바람에 확실하게 경동맥을 압박하여 탭을 유도하거나, 기절시키려는 시도는 힘들어 보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승찬의 손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게 뭐하자는 거야? 매미야? 똑같이 하랬잖아.”


“덩치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해요? 래리엇 막는 연습은 나중에 덩치 비슷한 사람 만나면 하고, 나랑은 이걸로 만족해봐요.”


같잖다는 듯이 비웃은 승찬은 손을 빼려 했다. 막은 손이 턱에 걸쳐 있어 움직일 공간도 충분했고, 조금만 비틀어도 쉽게 빠질 것 같건만,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잌~”


“못 풀어요. 내가 나름 힘이 좋걸랑요.”


석주의 말마따나 묵직하게 조여오는 힘이 다른 사람과 사뭇 달랐다.


“흥!”


승찬은 자유로운 두다리로 벌떡 일어나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석주도 쉽게 풀지 못할 테니 그대로 깔아 버릴 심산이었다.


피하려고 팔을 풀면 좋고, 그대로 깔려도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조르는 힘을 흔들려는 생각이었는데...


감싸안은 다리를 풀어 허리를 차며 뒤로 뛴 석주가 조르고 있는 팔을 풀어 승찬의 머리에 가볍게 얹었다.


쿠우~~~~~~ 웅!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덩치가 있다 보니 본진을 포함한 여진까지 온 천지를 뒤흔드는 착각을 일으켰다.


얼굴을 덮고 있던 양손을 걷어내니 승찬의 평온한 얼굴이 나타났다. 마치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누구도 예상 못 한 상황에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체급차이가 있는데, 이렇게 가볍게 끝나다니...


아무리 실력이 비슷해야 덕을 볼 수 있는 체급차이 라지만, 라이트급이 슈퍼 헤비급을 이기는 건 만화나 영화에서 주인공 버프를 받아야 가능한 일이다.


“우와~~~ 석주야~~~~”


감격에 찬 함성이 튀어나왔다. 영진도 승찬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다. 그 큰 덩치를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이 승찬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는 와중에 영진은 석주에게 눈을 돌렸다. 왠지 모를 믿음? 석주가 눈먼 신앙심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인물은 아니다.


키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눈에 확 띄는 굵은 근육까지... 승찬의 외모는 모든 이의 쌈짓돈을 모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많은 판돈이 몰리니 배당률은 겨우 두 배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끝까지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있었다면 거짓말이고, ‘까짓 이십만 원! 기부한 셈 치지 뭐!’라는 심정으로 바들바들 떨며 석주에게 몰빵했다.


요령껏 피해 갈지도 모르고, 먼저 13승을 올리면 되는 게임이니, 꼭 승찬이 우승하라는 법은 없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냉정한 승부의 세계라도 변수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요행을 바라는 심산은 덤이었고...


이왕 하는 거 크게 한 몫 잡으려는 생각에 고르고 골라 석주에게 투자한 영진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전율이 일었다.


이제 겨우 3승, 아직 10승이나 남았지만 이미 우승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를 꺾었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깊게 생각해서 가볍게 투자한 것이 이런 결과로 이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석주야~~~~ 투뿔로 먹자~~~~”


‘투뿔’이란 두 글자는 자신이 한 짓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석주를 다시 불타오르게 했다.


“우워~~~~~~ 투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원치 않는 희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다시 이어가 볼랍니다. 24.03.21 26 0 -
공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4.02.07 18 0 -
64 회수하려는 자 vs. 확인하려는 자 NEW 4시간 전 1 0 11쪽
63 갈등하는 사이 24.09.18 2 0 12쪽
62 게 섯거라! 24.09.17 3 0 13쪽
61 고롱고롱 24.09.16 4 0 12쪽
60 산군, 때로는... 24.09.15 5 0 13쪽
59 과잉보호는 아니지. 24.09.14 7 0 12쪽
58 쫄? 24.09.13 9 0 12쪽
57 일지 #3 24.09.12 9 0 13쪽
56 다치면 서러워. 24.09.11 8 0 12쪽
55 발칙한 신입사원 24.09.10 10 0 12쪽
54 따놓은 당상 24.09.09 8 0 13쪽
53 소심하게 24.04.05 13 0 11쪽
52 RKO 24.04.04 11 0 10쪽
51 얼마 안 남았어! 24.04.03 11 0 10쪽
» 소고기의 위력 24.04.02 11 0 11쪽
49 서두를 거 있나? 24.04.01 14 0 12쪽
48 얼른 합시다. 24.03.31 15 0 11쪽
47 면접 또 봐요? 24.03.30 12 0 12쪽
46 여기 짱이 누구냐? 24.03.29 16 0 11쪽
45 수습. 그리고... 24.03.28 16 0 11쪽
44 바지사장 24.03.27 14 0 11쪽
43 형제애 24.03.26 19 0 12쪽
42 친절한 이웃 24.03.25 19 0 11쪽
41 우리 강현이 24.03.24 15 0 12쪽
40 오해 말고 이해 24.03.23 15 0 12쪽
39 아가야 24.03.22 16 0 11쪽
38 놓지마 정신줄 24.03.21 19 0 12쪽
37 그들은 24.02.07 21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