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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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최근연재일 :
2024.09.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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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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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애

DUMMY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는 책들은 방 주인의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모습에서 부지런함도 엿볼 수 있었지만, 그 모양새가 너무나도 정갈한 것이 누군가 관리해주는 건 아닌지 의심할만했다.


창문 밖에 빽빽이 늘어선 고층빌딩의 모습에서 이곳이 번화가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널찍한 탁자 앞에 놓인 고급진 소파가 누군가의 집무실임을 알려주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책상의 인터폰을 통해 무미건조한 비서의 목소리가 하윤 일행의 방문을 알려오자 서류를 살펴보던 강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약속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건 평소의 강현답지 않았지만, 하윤과 같이 움직여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형~”


“부회장님!”


“삼가 부회장님을 뵙사옵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로 저희같이 천한 것들에게 고귀한 시간을 내주시니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부. 회. 장. 님.”


손위 형제만 보면 우는소리를 해대는 강현에 비해 깍듯한 하윤의 태도는 싸가지없이 비꼬는 것처럼 보였다.


“오냐~ 이 천한 것들! 그 천한 몸뚱어리가 짐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것을 환영하노라.”


양팔을 한껏 벌려 형제를 맞이하는 강인의 입가로 짓궂은 장난꾸러기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잠깐. ‘짐’은 아니지. 아빠 없다고 왕 노릇 하시게?”


“왕이 자리 비우면 세자가 왕 노릇 하고 그런 거지 뭐.”


“그거 엄마한테 말해도 돼?”


“아니!”


어머니가 거론되자 장난기 가득한 강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백연그룹의 부회장이 애들처럼 장난치는 모습을 어머니가 알게 되면... 음...


사적인 공간에서 형제끼리 장난치는 걸로 뭐라 하는 명 여사는 아니었지만, 괜히 찔리는 건 백 회장의 피를 물려받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시연은 시댁 형제들의 자리에 함께하는 것이 처음이 아닌데도 여전히 어색했다.


시연의 헌신을 높이 사서 친형제처럼 따듯하게 대해주긴 하지만, 아무래도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신이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형제들처럼 허물없이 장난치기란 쉽지 않았다.


남편을 위한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자리만 지키는 내성적인 성격도 한몫하겠지만, 아무리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도 재벌가의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무리에 끼워주는 것과 무리의 일원은 엄연히 다른 것 아니겠는가?


밖에서 이들을 본다면 다 같은 재벌가의 사람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골과 성골이 있고 브라만과 크샤트리아가 나뉘듯이 그들도 모르는 계급이 보이지 않는 벽으로 존재했다.


“앉아요. 제수씨. 얼마 전에 봤는데도 반가워요.”


환한 웃음과 함께 존댓말로 일관하는 것부터가 형제들과는 다른 대우였다.


“어머니는 여전하시고?”


“어. 제대로 꽂히셨나 봐. 방에서 나오질 않으시네.”


결혼과 동시에 분가한 두 아들에게 하윤의 존재는 어머니 심기 정탐꾼 정도의 위치였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저녁 식사에 참석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함께 사는 하윤이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두 아들 보다는 부모님의 상태를 정확히, 또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두 아들은 회사 문제로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하윤에게 먼저 연락해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 보고내용을 사전에 검열받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윤은 명 여사의 수문장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우습게 이게 또 뭐라고 하윤은 은근히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형. 나 완전 억울해.”


“뭐가? 왜 억울해?”


툭 건들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형을 붙잡고 신세 한탄을 시작한 강현은 자신의 잘못은 전부 도려내고 세무조사에 관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겨우 그 얘기하려고 온 거야? 다 처리했잖아.”


“전환사채 관련한 내용도...”


“그거까지 다 확인했어. 법무팀에서 불기소 처분 날 거라던데, 왜? 출석하래?”


비록 결정권 밖에 있는 문제였지만, 백연물류의 세무조사에 관한 사항은 강현이 도움을 요청하기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미리 모든 준비를 끝내두고 있었기에 못난 동생의 부탁을 받자마자 일사천리로 진행하여 혹시 곪아 터질지 모를 환부를 깔끔하게 도려낼 수 있었다.


붕대로 감싸두고 아물길 기다리는 중에 고름이 고였다고 말하는 것인가? 자신도 모르게 또 무슨 사고를 친 건가? 강현의 읍소는 몹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가서 벽 보고 서 있을래? 내가 얘기할까?”


“내가 할 거야!”


조곤조곤 다그치는 하윤과 발끈하며 주눅 드는 강현의 모습에서 강인은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또 무슨 사고를 쳤길래 사설이 길어? 형이다 생각하고 얘기해봐.”


“아니...”


강현은 비서의 횡령사실을 경찰에 신고한 일과 함께 모든 것이 자신의 실수였음을 이실직고했다. 진술이 끝날 즈음, 자연스럽게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친형이라도 실수한 게 있고 용서를 구하는 자리에서 평소처럼 편하게 있자니 본인도 불편했으리라...


자신의 실수로 세무조사가 시작되고 전환사채 건을 꼬리 잡히는 결과로 이어졌으니 무슨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게 뭐?”


강현은 물론 시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3박 4일 동안 훈계를 듣고 이틀 더 욕먹을 각오로 자수했는데, ‘그게 뭐?’라니?


“신고한 걸 잘못 했다는 거야? 빼돌린 걸 뉘우치는 거야? 어느 부분을 혼내야 되는 건데?”


“저기요. 부회장님? 전부 다 잘못한 일 아닌가요? 어느 부분을 혼내다뇨? 전부 다 혼내셔야죠.”


하윤마저 당황하여 평소 사용하지 않는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얘가 공금 횡령하는 게 한두 번이냐? 그동안 많이 깨져봤다고 나름 선은 지켰잖아? 그 정도면 칭찬해 줘야지.”


같은 실수 반복해도 배우고 나아지면 정상참작 해주겠다는 건가? 아니면, 아무리 뭐라 해도 고쳐지지 않으니 방법을 바꾼 것일까?


형의 반응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르자 강현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니, 그거 때문에 전환사채 건도 수사 선상에 올라갔잖아. 이게 작은 일이야?”


“얀마. 그 정도 일이 안 걸리고 평생 갈 줄 알았냐? 언제고 누군가는 걸고넘어질 일이야.”


그룹의 지주회사인 백연물산의 최고 경영자에게 올라오는 보고서에는 소송과 세무조사에 관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법을 전공하지 않은 강인으로서는 읽는 것조차 곤욕스럽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자주 접하다 보니 웬만한 법조계 인사들과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쌓였다.


게다가 조사가 들어와도 문제없도록 빈틈없이 대비한 다음에 진행한 일이기에 이 정도 사건에는 갑작스러울 것 하나 없는 태연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이놈 사고 치는 거 웬만한 건 다 알아. 계열사 사장이 어디 가서 뭘 하고 다니는지 명색이 부회장인데, 나한테 보고가 안 될 거 같냐?”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는 말이다. 이제 와 실토한다고 ‘이놈 쉐리! 니가 감히 그랬단 말이지?’하며 뭐라 하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다.


슬금슬금 일어나 소파에 걸터앉는 강현의 얼굴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다 알고 있었어? 누구한테 들었어?”


“누군지 알면 어쩌게? 쓸데없는 거 캐지 말고, 회사 운영에 신경 좀 써~”


끄나풀 붙여놓고 못난 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을 정도로 한가한 강인이 아니었다.


그룹의 부회장으로서,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백연물산은 물론, 계열사의 중점적인 사안은 경영전략실을 통해 모두 보고받고 있었다.


한두개가 아닌 계열사의 소소한 사안까지 감시하고 있진 않지만, 적어도 동생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꼬박꼬박 언급되었다.


더군다나 취미로 회사 다니는 사장을 둔 백연물류는 특히 주의할 대상으로 찍혀 모든 눈이 집중된 상태였다.


강현이 아무리 쉬쉬하고 돌아다녀도 사임하지 않는 이상 강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지가 그렇게 만든걸...


“네가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지,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면 밑에 있는 사람이 뭐하고 다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거야. 굳이 프락치 안 붙여도. 인마!”


“···”


하윤도 이해 못 할 말은 아니었다. 자신도 오 이사나 구 원장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가만히 있어도 알 수 있었으니까.


심지어 강현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시연조차 회사 내 헤드급 인사의 행동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오직 경영에 관심 없는 강현 도련님만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누가 첩자인지 의심의 레이더를 돌리는 중이었다.


“그 정도는 통제권 내에 있어.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신경 끄시고 일들 보세요. 넌 사고 그만 치고 일 좀 해.”


“헤헤~ 감사합니다. 형님!”


매번 뒷수습을 해주는 형제의 존재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강현 도련님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물론, 때에 따라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 주로, 강인에게 - 혼나기도 하고, 며칠은 앓아누울 정도로 - 주로, 하윤에게 - 얻어맞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든든한 모습으로 자신의 곁을 지켜주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시연의 존재까지 강현을 돕는 손길은 주변에 가득했다.


자! 강현아! 이제 너만 정신 차리면 된다!


“그럼 전 이만...”


볼일 다 봤으니 괜히 잔소리하기 전에 서둘러 일어서려는 강현의 손을 시연이 조용히 붙잡았다.


“이만 뭐? 용건 끝나셨으니 그만 돌아가시려고요?”


“아녜요. 아주버님. 화장실 가려는 거예요.”


지아비의 철없는 행동을 애써 무마하려는 시연의 노력에 손위 형제들은 강현의 무례를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흠··· 그럼 전 이만 혼자만의 시간을...”


하윤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시연은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강인은 핸드폰 두고 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시연을 봐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몇 달만 어디 절에다 처박아 놓자. 그러면 사람 되지 않을까?”


“아서라. 스님들이 무슨 죄냐? 부처님도 포기할 인물이야. 그래도 사장인데 몇 달씩이나 자리 비우면 회사는 어떻게 되겠냐?”


“오빠도 알잖아? 저 새끼가 할 일 올케가 다 하는 거.”


누가 모르겠는가. 대부분의 대표 결재 사안은 백수 한량 같은 강현보다 일 처리가 능숙한 시연이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었다.


“제수씨도 절에 있을 거 같진 않고?”


강현이 회사에 있기에 시연이 대신 업무를 보는 것이다. 만약 강현이 절에 있다면 시연도 절에 있을 것이다.


“와~ 재밌겠다. 둘 다 머리 밀고 절에서 108배 하는 거 보고 싶은데?”


“형님도 참...”


입을 가리며 조신하게 웃는 시연은 손위 시누이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호젓한 산속의 고즈넉한 절을 거니는 자신과 강현을 상상하던 시연은 서둘러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을 털어냈다.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출가한 불자들이 수행과 예불을 하는 장소에서 꽁냥거리는 모습을 연출할 수는 없었다.


뭇매 맞고 쫓겨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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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오해 말고 이해 24.03.23 15 0 12쪽
39 아가야 24.03.22 16 0 11쪽
38 놓지마 정신줄 24.03.21 1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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