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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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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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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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DUMMY

베르의 등장에 맞춰 태준의 눈동자도 흰자위가 사라지며 블레이드가 전면에 등장했다.


[내가 나눈 세포에 무술에 관한 정보는 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싸움기술에 관한 건 전달한 적 없었어.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사라진 후, 많은 연구가 진행됐다. 훨씬 많은 연구원이 붙어 몇 배나 많은 실험이 이루어졌다.]


고작 몇 년 지나지 않은 시간에 클론을 발전시키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얘기인가?


하긴, 베르와 함께 했던 연구원도 집단 지성을 능가할 만큼 높은 지능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고만고만한 교육과정으로 공장에서 찍어내듯 생산되는 연구원이라면 한 명보다 여러 명이 성과가 좋겠지.


[검술은 어떻게 얻게 된 거지?]


[책과 매스 미디어를 통해 원하는 정보는 어디서든 보고 배울 수 있다. 그러는 넌 어디서 정보를 얻었지? 다른 방법이 있었나?]


베르라고 별반 다른 수가 있었을까?


산과 들을 누비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중, 인기척이 드문 한적한 곳에 은둔한 천하제일 무림고수를 만나 비전 절기를 전수받았을 리가 없잖아?


그도 당연히 쉬는 시간에 접하는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무술을 익히는 방법이 전부였다.


하지만 베르에게서 분리된 클론은 주어진 정보 이외에 다른 것을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면 안 된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베르는 자신을 제외한 클론은 학습능력을 봉인하는 게 옳다는 결론을 내렸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기생체가 학습능력까지 갖추고 진화를 거듭한다면 늘어나는 개체 수로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고,


정작 모체 격인 베르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자멸하게 될 거라는 것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무언가를 학습하는 능력, 살아 숨 쉬는 동물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발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변화를 통한 진화와 퇴화를 반복하다 도태되는 일반적인 생태계의 법칙은 이들에겐 적용되지 않아야 할 남들의 얘기가 되어야 했다.


[어디까지 진화했지?]


[어떻게 설명하길 바라지? 네 능력과 비교하길 바라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처음보다는 너에게 가까워졌다 할 수 있다.]


블레이드의 대답에 베르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세포 분리도 가능하단 말이야?]


[아니. 그것만은 어떤 방법을 써도 익힐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온통 시커먼 베르의 얼굴이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좋아. 하나하나 실험해보면 알 수 있겠지.]


베르의 팔이 흐물흐물해지며 한여름 엿가락처럼 늘어지더니 블레이드의 손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렇게 빠르지 않은 공격이었지만, 피할 생각조차 없는 블레이드는 채찍처럼 날아오는 베르의 공격을 별다른 저항 없이 묵묵히 받아냈다.


깔끔하게 잘린 손목에서 끈적하게 흘러내린 검은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려는 손을 다시 붙이려 하자, 베르의 팔이 다시 날아들어 같은 자리를 잘라냈다.


[재생할 수 있지?]


잘린 손을 잡아채며 무심하게 뱉은 베르의 말에 블레이드의 손목이 있던 자리에서 몇 줄기의 검은 액체가 흘러나와 이리저리 방황하더니 잘린 자리에 모여들어 뭉툭한 형태를 만들었다.


[시간이 걸리지만 가능하다.]


남의 손을 가져가 이리저리 돌려보던 베르는 크게 입을 벌려 들고 있던 손을 한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오드득... 뿌득...


일부러 크게 뼈 씹는 소리를 내며 꿀꺽 삼킨 베르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괜찮은데?]


마치 오랜만에 방문한 단골 맛집에서 그리운 음식을 한입 먹은 듯한 말이었지만, 비릿한 미소와 음산한 목소리는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세포를 흡수하는 방법이 꼭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베르의 행동은 블레이드를 향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마음만 먹으면 너 따위는 한입에 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협박이랄까?


그런 베르의 행동을 묵묵히 바라보는 블레이드의 표정에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먹든지 말든지, 죽이든지 살리든지...


태준의 몸에 기생하는 블레이드도 떨어져나온 시간이 오래되었다 뿐이지, 애초에 베르에게서 분리된 세포 중 하나였다.


오랜 시간을 오리지널과 떨어져 있었기에 원래 정보 따위 잊힌 지 오래였고, 반복된 실험의 결과로 조금씩 자아가 생기자 다른 클론과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들만의 사회에서 독립개체로서의 삶을 누리던 중, 뜻하지 않게 오리지널을 만나 숙주를 잃었다.


개체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숙주가 바뀌면 적응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전 숙주의 삶은 버린다고 해도,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새로운 숙주의 삶을 모방해 살아야 하기에 온갖 기억을 합치고 정리, 숙지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다른 클론에 비해 이런 경험이 없다시피 했던 블레이드는 특별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혼란스러운 시점에 쳐들어온 오리지널의 세포는 안 그래도 복잡한 블레이드의 정신세계를 공황상태 직전에 이르게 만들었다.


다행이랄까, 불행이랄까.


검을 익히며 함께 체득한 강인한 정신력 덕분에 자존심이 강한 블레이드는 끝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문제는 모든 힘을 정체성 유지에 사용하는 바람에 블레이드의 멘탈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사정없이 흔들리는 상태가 되었다.


칼집 없는 칼잡이, 예를 잊은 검도가, 스팀팩 없는 마린... 마지막은 좀 다른가?


[흥! 놀고 있네. 가까워졌다고? 용케 학습능력은 익힌 모양이지만 그게 전부야. 멀었어]


세포를 통해 정보를 흡수한 베르의 얼굴에 알게 모르게 안도감이 나타났다.


우려와 다르게 엄청난 진화를 거친 흔적도, 자신이 이해 못 할 정보도 없었기에 베르는 클론에 대한 걱정을 덜어냈다.


블레이드의 말처럼 자신과 근접한 상태로 발전했다면 지금부터 상대해야 할 클론들은 제법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원래 주어진 능력은 차치하더라도, 어떤 경험을 통해 어떤 능력을 키웠는지 하나하나 파악해가며 상대하려면... 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더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만약의 상황은 제쳐놓고 눈앞의 결과를 확인할 차례다.


[한 손 없다고 못 싸우는 건 아니지? 자세 잡아.]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제거하고 싶은 건가?]


[닥치고 자세 잡아.]


한 손을 활짝 펴서 아래로 힘껏 휘두른 베르의 손에서 검은 액체가 튀어나와 서슬 퍼런 태도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블레이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군...]


들고 있던 검을 바로잡고 중단세를 취한 블레이드와 정면으로 검을 들어 올려 중단세를 취하는 베르의 동작은 거울에 비친 듯 똑같았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혀 몸쪽으로 바짝 당겨 잡은 검을 가로로 베어 들어가는 베르. 검을 빗겨 들어 자신의 옆구리로 향하는 검로를 흘려보내는 블레이드.


흘러간 검을 추스르며 옆차기로 거리를 벌린 후, 뒤로 피한 블레이드를 향해 대각으로 내리치는 공격...


가슴을 노리고 내리치는 베르의 검을 막아낸 블레이드는 기가 막힌다는 듯 가늘게 홉뜬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막힌 검을 회수하며 크게 회전하여 뒤로 돌아나간 베르는 검을 잡은 손을 들어 올려 귀 옆에 붙이고 칼끝으로 블레이드를 겨누며 자세를 낮췄다.


자세를 잡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 베르의 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블레이드의 가슴을 꿰뚫었다.


[막을 생각이 없어?]


[어처구니없군. 이런 것도 가능한가?]


[한 번 해본 거야. 가능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되네?]


천천히 검을 뽑는 베르는 성공한 실험을 자랑하고 싶은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씰룩거렸다.


검신의 모양대로 찢어진 옷 틈으로 블레이드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가지 못한다?


털썩.


손에 든 검을 지팡이 삼아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블레이드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왜... 지?]


[나니까.]


많은 뜻을 함축해 간단하게 대답한 베르는 손에 든 검을 액체로 바꿔 체내에 흡수했다.


[나름 쓸만한데 내 스타일은 아니다. 나중에 혹시 필요한 일 생기면 써먹어 볼게. 고마워.]


[우리끼리 상처를 입히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그 우리에 내가 포함되는 건 아니지? 감히 나와 같은 축에서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너희는 어디까지나 내가 버린 자투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착각하지 마.]


고개를 숙인 블레이드의 모습에서 강한 좌절감이 느껴졌다.


눈부신 발전으로 오리지널의 빈자리를 메꾸고 있다 생각했던 지난날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뚫린 가슴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일까?


갈 곳 잃은 검은 액체가 힘없이 흘러내려 벌어진 틈새를 막아보려 해도 그저 무의미한 움직임만 보일 뿐,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마치 자신의 능력에 좌절한 주인처럼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블레이드에게 다가간 베르가 어깨를 다독였다.


토닥토닥...


베르의 손을 통해 전해진 검은 액체가 표면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처럼 상처로 이동해 뻥 뚫린 공간을 채웠다.


[그렇게 풀이 죽어 있으면 내가 다 미안해지잖냐. 기운 내 인마.]


[무슨 뜻이지?]


[모든 행동에 꼭 뜻이 있어야 되냐? 그냥 받아들여.]


위로인지 조롱인지 알듯 말듯 모호한 말을 남긴 베르가 태연하게 소파에 앉아 마주한 블레이드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뭘 어떻게 돼? 하고 싶은 대로 해.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얻었어. 포상이라고 할까? 자유를 선사하지.]


[그 말은...]


[돌아가서 살던 대로 살든가, 구석에 짱박혀서 앞으로 벌어질 전쟁을 구경하든가. 맘대로 하라고.]


비록 세포를 흡수하여 정보를 얻지 않았다 해도 눈으로 목격한 베르의 정보를 클론에게 알려줄 수 있었다.


아무리 새로운 세포를 주입해 이전의 상태로 돌렸다 해도 신뢰라는 게 그렇게 쉽게 쌓이는 감정이 아니다.


[적이 될 수도 있다. 원하는 게 그거냐? 아니면 그래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말했잖아. 너의 존재를 잊지 말고 내가 준 정보를 받아들여 태준으로 살라고.]


[···]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태준이라면 어떻게 살지 잘 판단해봐~ 용건 끝났어. 가 인마! 멀리 안 나간다~]


어느새 원래 상태로 돌아온 유연의 모습에 마지막 말이 누구의 뜻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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