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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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최근연재일 :
2024.09.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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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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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게

DUMMY

“7승! 김석주!”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정기를 그대로 두고 기계적인 승리 선언이 내려졌다.


직전까지 여섯 명. 석주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인지, 다른 요행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같이 기절했다가도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기 전에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고 7번째도 같을 거라 할 수 없으니, 김 실장은 쓰러진 정기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괜찮아요?”


석주가 먼저 엎드려 있는 정기를 흔들었다.


“흔들지 마요. 안 그래도 쏠리는 거 겨우 참고 있으니까.”


“많이 힘들어요? 의사 불러요?”


“말 시키지 말고 있어봐요.”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대꾸하는 정기의 목소리는 무언가를 머금고 말하는 것처럼 웅얼거렸다.


“괜찮으면 일어나 봐요. 상태 좀 보게.”


“아니. 잠깐 둬보라니까.”


마치 모래구덩이에 머리만 숨긴 타조 같은 정기의 모습을 석주는 비웃지 않았다.


“좀 봐봐요.”


그래도 정신을 잃지 않고 대꾸하는 모습에 석주가 정기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돌아보는 정기의 입가에 검붉은 피가 배어 있었다. 숙이고 있는 중에도 계속 흘렸는지, 진한 피비릿내와 함께 바닥에도 붉은 선혈이 낭자했다.


“뭐야?!?!?!? 혀 깨물었어요? 아~ 해봐요!!”


“퉤. 쪽팔리게... 괜찮으니까 소리 지르지 마요. 안쪽을 씹은 모양이에요. 말은 잘하잖아요.”


머금고 있는 것을 연신 뱉으니 빨간 피바다가 점점 퍼져 나갔다.


얼핏보면 온 힘을 다해 죽일 듯이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름 배려해서 숨 쉬는 데는 지장이 없게끔 적당히 힘 조절하고 있었다.


이번 공격도 정기의 머리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어깨에 완전 밀착시켜 강하게 이가 부딪히거나 실수로 혀를 깨물지 않게끔 최대한 배려했었다.


그런 배려도 무색하게 선혈이 낭자하니 석주로서도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좀만 이러고 있으면 나아질 거에요. 미안한데 잠깐만 기다려 봐요.”


“아니 이렇게 피가 나는데 어떻게 금방 나아요? 좀 봐요.”


정기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피는 이미 턱을 타고 내려와 웃옷까지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쉼 없이 뿜어져 나오는 피에 이러다 빈혈로 쓰러지는 게 아닐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석주 씨. 나와요.”


“아~! 어딜 나와요! 이렇게 피가 많이 나는데, 이러다 패혈증 걸릴 수도 있어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비켜요. 의료진 왔으니까.”


지가 뭘 할 것도 아니면서 그저 미안하고 걱정되니까 옆에서 뭐라도 하려는 모양이지만, 전문가가 있다면 자리를 내어주는 게 인지상정.


어느틈에 흰 가운을 입은 남녀가 의료함을 들고 정기의 옆에 자리 잡았다.


“아~ 해봐요.”


어딘가 아프거나 다쳤는데 눈앞에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의 말을 잘 따라 할 것이다.


“아~”


“에고... 일단 지혈부터 합시다. 마시지 말고 가만히 머금고 있어요.”


의료용 솜과 식염수를 건네받은 의사가 정기의 입을 가득 채운 피를 닦아내자 안쪽에서 무언가 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주머니에 있던 작은 손전등으로 입안을 비춰본 의사는 간호사에게 손전등을 넘겨주고 거즈를 꺼내 입안에 잔뜩 욱여넣었다.


“꼬매야겠네요. 여기선 안되고 의료실로 갑시다. 걸을 수 있겠어요?”


입안 가득 거즈를 머금은 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일어섰다. 의사는 그런 정기의 팔을 부축해 천천히 의료실로 향했다.


무릎까지 꿇고 양손을 바닥에 짚고 있던 석주도 따라 일어났으나 그들을 따라 의료실로 향할 수 없었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본 석주는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있던 핏물 사이로 자신이 손을 대고 있던 곳만 까맣게 변한 것을 발견했다.


김 실장은 의사와 함께 정기를 부축해 의료실로 향하느라 바닥에 눈길을 주지 못했다.


의사는 물론, 간호사도 환자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보지 못했다.


오직 석주만 자신의 손에 피가 묻지 않았음을 눈치채고 급하게 주저앉아 바닥을 닦았다.


당황한게 역력한 모습으로 허둥지둥 바닥을 닦으니 붉게 물든 선혈 자국이 흡사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는 것처럼 석주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얼른 웃옷을 벗어 바닥을 닦으니 하얀 티가 금세 빨갛게 변했지만, 잡고 있는 곳까지 붉게 물들지는 않았다.


“석주 씨. 괜찮아요. 사람들 와서 닦을 테니까 안 그래도 돼요. 이쪽으로 나와 있어요.”


“아. 네. 이것만 하고요.”


“안 해도 되니까 나와 있어요. 저기 오네요. 석주 씨는 다친 데 없어요?”


하던 일이 있으니 의료진을 따라 자리를 비울 수 없었던 김 실장은 장내를 정리하고자 이내 돌아왔다. 관리인을 부르고 청소를 지시하며 수습하는 와중에 옷까지 벗어 걸레질하는 석주를 본 것이다.


바지 이곳저곳에 튄 피를 보아 어딘가 다치지 않았나 확인하면서도 김 실장은 석주의 손까지 시선이 닿지는 않았다.


“전 괜찮아요. 에구... 어떡해요. 이렇게 피바다를 만들어놔서...”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엔 의료진도 대기시켜 놨고, 진행요원도 있으니까.”


어느새 몇몇이 청소도구를 들고 어질러진 바닥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기 씨는...”


“괜찮아요. 간단한 봉합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의사니까.”


“예...”


석주는 부끄러운 건지 미안한 건지 모호한 표정으로 붉게 물든 웃옷을 등 뒤로 돌렸다.


“석주 씨도 가서 씻고 오세요. 다친 데 있으면 숨기지 말고 꼭 말해요.”


“예.”


힘없이 대답한 석주는 두 손을 감추고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갔다.


“사고 정리하는 동안 잠시 쉬겠습니다. 30분 휴식할 테니, 화장실 다녀오실 분 다녀오세요.”


자유대련이건 약속대련이건 이 정도의 사고는 흔한 일이다.


싸우다 보면 감정이 차오를 수도 있고, 진짜 뜻하지 않게 빗맞아 도장 바닥을 피로 물들이는 일은 셀 수도 없었다. 양쪽 모두 미숙한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실수였지만, 고도로 훈련된 프로들만 대련하는 건 아니었다.


비록, 바닥을 물들인 부위가 넓게 퍼져 많아 보이긴 하지만, 빈혈로 쓰러진다거나, 출혈 과다로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밥 한 공기 든든히 먹고 푹 자고 나면 충분히 보충될 정도였기에,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끼리끼리 모여 담배를 피우러 가거나 정산이 필요한 사람들은 따로 조용히 모였다.


“봤냐?”


“뭘요?”


이 실장은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이 치워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옆에 있는 여인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못 봤어?”


“봤어요. 실장님이 이기는 거 아주 잘 봤어요. 지금 사와요?”


“아니...”


확신이 들지 않았다.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 얼핏 석주의 주변에 핏자국이 지워지는 모습을 본 듯했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불확신한 자신의 의심에 힘을 실어주기를 기대하고 동료에게 물었지만, 영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진이 아직 안 갔지?”


“예. 어딘가에서 빈둥거리고 있겠죠.”


“가서......”


이 실장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여인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기만 하던 여인은 이 실장의 말이 끝나자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


“야. 뒤질래? 뭐 하자는 거야?”


화장실에서 대충 물만 묻힌 석주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육두문자를 남발했다.


“이 xxx해서 xxx할 xxx야. 여기서 그따구로 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무척 화가 난 듯, 격하게 풀어내고는 있지만, 목소리는 가까이 가도 들릴까 말까 할 정도였다.


“좋은 말로 할 때 시키는 것만 해라. 계약이고 지랄이고 다 엎어버리기 전에... 이 xxx야. 내가 나 좋자고 이러고 있냐? 누구 때문에 이 지랄 하고 있는데, 어? 그거 하나 못 참아?”


혼자 흥분해서 열변을 토하는 와중에도 들고 있던 티셔츠를 붉게 물들인 자국이 조금씩 석주의 손을 향해 모여들었다.


“장난해? 내 말 안 들려? 이 와중에도 그러고 싶냐? 엉? 아놔~ 이걸 콱!”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웬수놈을 감출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해본 적 없는 방법이었지만, 힘은 필요했고, 고민 끝에 조심스레 시도해본 건데, 조금이라도 힘을 쓰면 에너지가 필요한 모양이다.


조용히 숨어지낼 때는 석주의 몸에 있는 것으로도 충분했지만, 격한 움직임을 지속하니 허기가 졌던 모양일까? 아니면, 단순히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외면하지 못한 걸 수도 있겠다.


말이라도 하면 이유라도 알겠지만, 혼자 묻고 답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석주 씨! 뭐해요?”


“예!”


급하게 티셔츠를 뒤로 숨기는 석주의 앞에 김 실장이 나타났다.


“한참 찾았네. 뭐 하고 있어요?”


“아... 저기 바람 좀 쐬려고...”


“정기 씨가 걱정돼서요? 의료진을 믿으세요. 응급처치도 많이 해보셨고 실력 있는 분을 모셨으니 너무 걱정 말아요.”


“예...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하고, 이 웬수놈 단속도 해야겠고, 우승도 해야겠고... 석주는 할 일이 많았다.


“이거 입어요. 남의 피 묻은 옷 입고 있으면 찝찝할 테니...”


“아... 감사합니다.”


김 실장이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어느 틈에 준비한 걸까? 사이즈도 모를 텐데.


“대충 눈대중으로 주워왔지만 맞을 거에요. 근데... 석주 씨...”


김 실장은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인기척은 없는지 살폈다.


“예?”


“우승하고 싶어요?”


“아... 뇨.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온몸을 투지로 불태우며 내리 7연승을 한 인간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음... 아... 네... 그래요...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아요. 시간 됐네요. 갈아입고 와요.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뒤돌아 가버리는 김 실장의 모습은 첫사랑에게 고백하려다 마는 모습 같아 보이기도 했다.


이성에게도 이런 걸 당해본 적 없는 석주는 뭔가 찝찝했지만, 설마 싶었다. 에이, 설마...


김 실장이 멀어지자 석주는 조심스럽게 하던 짓을 마무리했다.


“아무튼, 넌 이따 보자. 한 번만 더 멋대로 튀어나와라. 내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보고 싶으면!!! 알았어? 알았으면 대답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석주의 손등에 소심한 동그라미가 튀어나오나 싶더니 이내 사라졌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다고 해서 금세 풀어질 석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으니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작가의말

재료소진.


필요한 재료도 좀 채우고, 투표도 좀 하고 오겠습니다.


잦은 휴재에 짜증 나시겠지만, 이해해 주실 거라 믿고 다녀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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