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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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최근연재일 :
2024.09.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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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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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보호는 아니지.

DUMMY

“여어~ 히사시부리~”


“응? 뭔 부리?”


“XX 반갑다고. 이 새끼야~”


날아오는 주먹을 여유롭게 피하는 세진은 체육관에 들어서는 석주를 발견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아아~ 바다 건너오셨어요? 조선말 겁나 잘하네요? 어디서 배웠데? 음... 에또... 곤니찌와... 와따시와... 혼또니...”


“뭐,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그냥 조센징이라고 해두자고. 그니까 되지도 않는 니혼고는 집어치우고 한국말로 해.”


‘조센징’, ‘니혼고’... 석주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석주를 비릿하게 바라보는 세진은 편하게 대꾸하면서도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상대의 주먹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허리부터 시작해서 턱을 노리고 올라오는 어퍼컷은 고개를 젖혀 피하고, 비어있는 복부를 향한 바디훅은 가벼운 동작으로 피하는 와중에도 시선은 오로지 석주에게 향해 있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빨리 오라고 선물도 보냈는데, 봤어?”


“아~ 길이 엇갈려나 봐요. 뭔데요? 먹을 거에요?”


“그래? 못 봤어? 안타깝군. 아쉽네. 아쉬워. 뭐 신경 쓰지 마. 별거 아니었으니까.”


별거 아니긴... 멀쩡한 사람 다리 자를 뻔했는데.


석주는 세진의 움직임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몇 판째에요?”


“응? 네 판? 다섯 판? 워낙에 휙휙 지나가서 잘 모르겠네?”


“아직 5승째요. 이번 판도 이미 끝난 거 같고, 한 판만 더 이기면 댁과 동률이지.”


의무실에 2명. 석주가 밍기적 대는 사이 3명을 더 쓰러트린 모양이다.


“부상자는요? 또 나왔어요?”


“처음과 세 번째 양반이 골절로 실려갔고, 나머지는 발길질 몇 번에 떨어져 나갔지. 이번엔 좀 오래 끄는 게 아무래도 봐주는 거 같기도 하고.”


“글쎄? 내 보기에는 그냥 쉬는 거 같은데?”


아닌게 아니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헉헉대며 주먹을 날리는 상대와 달리 세진은 안정된 호흡으로 여유 있게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심지어 틈만 나면 석주를 향해 말을 걸면서도 말이다.


“너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충분히 쉬었으면 올라올래?”


“시합에 집중해요. 그러다 한방에 훅 가면 뭔 개쪽이래요?”


“한방에? 누가? 내가?”


석주의 핀잔에 피식 웃어 보인 세진은 자세도 잡지 않고 무심하게 다리를 들어 올렸다.


강력한 예비동작도, 발목과 허리도 쓰지 않고 들어 올린 다리로 헉헉거리는 상대를 걷어차니 사내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졌다.


“내가 이런 허수아비한테 맞을까 봐 걱정한 거야? 거 참, 눈물 나게 고맙다. 새끼야.”


“다운!”


쓰러진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적극 개입한 김 실장은 세진을 뒤로 물리고 사내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이제 그만 하는 게 좋겠습니다만, 더 할 겁니까?”


한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거친 호흡만 뱉어내는 사내는 김 실장의 말에 대답할 힘도 없어 보였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는 바라보는 김 실장도 알 수 없었다.


“됐어. 이제 그만하자. 수고했어.”


조용히 다가온 세진이 손을 내밀자 힘없이 그 손을 마주 잡은 사내는 그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졌어요. 졌다고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몰라요. 몸이 말을 안 듣고 계속... 흑...”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진 사내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무너져 내린 사내의 몸에서 흘러내린 땀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입고 있는 옷은 물론, 경기장 바닥까지 촉촉이 적셨다.


“뭔 사내놈이 이렇게 약해빠졌어? 몇 대 때리지도 않았구먼. 징징거리지 말고 얼른 꺼져!”


마주잡은 손을 타고 검은 점이 옮겨가는 모습을 놓치지 않은 석주는 지긋이 세진을 응시했다.


분노도, 공포도,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세진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많이 보고 싶었구나? 뚫어지겠다. 새끼야. 그만 꼬나보고 이리와.”


“그럴까요? 아침부터 기다리느라 지겨웠겠어요?”


“아후~ 말도 말어~ 이렇게 비싼 새낀 줄 알았으면 초장에 눌러 놓는 건데, 괜히 봐줬어.”


천천히 세진에게 향하는 석주의 몸에서는 그 어떤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딛는 걸음걸이는 무게감은커녕, 오랜만에 만나는 동네친구에게 다가가듯,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잠깐!”


오로지 세진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던 석주는 김 실장에게 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세진 씨는 아직 6승입니다. 1승을 추가한 후에 석주 씨와의 시합을 허락하겠습니다.”


“예? 상관없는데요?”


“아~ 선생님. 당사자가 상관없다잖아요~!”


“안됩니다. 룰이 그렇습니다.”


룰은 무슨 룰. 도윤은 세진의 실력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지금까지 두 명이 부상으로 실려갔고, 나머지 네 명도 이상하리만치 무기력한 모습으로 패배를 선언했다.


봐주며 하든, 잔인하게 도륙을 내든, 대결에 나선 이상 당사자의 몫이었기에 굳이 참견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잔꾀를 부려서라도 석주와의 대결을 최대한 미루면서, 그럴 수만 있다면 이대로 세진의 우승을 선언하고 싶었다.


어딘가 음흉한 모습이 당최 맘에 들지 않는 세진은 이 실장에게 던져주고 이상하게 맘이 끌리는 석주와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공정하게 중립을 지켜야 할 심판의 위치였지만, 그동안의 인생관을 포기하더라도 이번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


“룰? 무슨 룰? 승자에게 도전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 어디 갔어?”


“석주 씨가 잠정적 우승자로 정해지면서 추가한 룰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왜? 맘에 안 듭니까?”


말빨이 딸리는 사람이 언성이 높아지는 법.


처음에 정한 대로 하지 않고 억지를 부리려니 평정심을 유지하던 도윤도 다소 시비조의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눈에는 눈! 상대는 하찮은 신입사원 주제에 감히 비서실장에게 감정을 드러낸 건방진 자가 아닌가!!!


도윤도 사람인지라 약간의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김 실장이 김 석주를 데려가고 싶어합니다.”


“알아요. 몰라도 알 거 같네요.”


도윤의 목소리가 커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구 원장이 하윤에게 슬쩍 귀띔을 해주었다.


몰라도 아는 척하는 것은 지도자의 기본 소양. 하윤은 그런 구 원장에게 낮게 속삭였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김 실장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보죠. 어디까지 할지 궁금하네요.”


“알겠습니다.”


비록 구 원장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바로 옆에 앉은 이 실장이 못 들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누가봐도 억지 주장을 펼치는 김 실장을 말없이 노려보던 세진은 슬쩍 이 실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무언가를 요구하는 눈빛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좋아. 오케이! 알았어! 한 명만 더 이기면 되는 거죠? 그때 가서 딴말하기 없어요.”


“석주 씨는 일단 물러나 있어요.”


“하지만... 음... 알았어요.”


세진의 정체에 확실한 심증을 확보한 이상, 쓸데없이 피해자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석주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도윤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물러날 것을 강요했다.


딱히 도윤의 고집을 꺾을 방법도 떠오르지 않으니 석주는 불편한 기색으로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다음 시합을 진행하겠습니다. 도전하실 분 계십니까?”


석주 때도 엄두가 나지 않아 주저하던 사람들이 겨우 1승이 모자란 세진에게 덤빌 리 만무했다.


게다가 하나같이 부상 아니면 구석에 처박혀 시름시름 앓고 있는 패배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주먹을 섞을 자신이 없었다.


“없으면 우승은 김 석주, 준우승은...”


“에라이~ 겁쟁이 새끼들아. 그러고도 어디 가서 쌈박질 좀 한답시고 어깨에 힘주고 다녔냐? 아무나 나와. 살살 해줄게.”


서둘러 시합을 끝내려는 김 실장의 말을 끊고 큰소리로 광역도발을 시전하는 세진의 호통에도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야! 거기 도복! 아까 깨진 놈 맞지? 덩치가 아깝게 왜 깨졌나 함 보자. 나와봐. 형이 가르쳐 줄게. 그래! 너 인마!!!”


세진이 지목한 사내는 석주에게 래리어트를 맞고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 중 하나였다.


볼썽사납게 패배한 뒤로 만만한 상대에게 1승이라도 올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사내는 세진과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섣불리 나섰다가 패배하면 그대로 탈락. 우승은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지만, 하다못해 1승이라도 노려볼 기회마저 사라지게 된다.


백 만원만 있어도 밀린 공과금을 정리하고 토끼 같은 자식들에게 고기를 사 먹일 수 있다.


바닥으로 떨군 시선에 가족의 환한 얼굴이 아른거렸다.


“에헤이~ 뭐 이래? 어디서 그지같은 것들만 모아놨어? 어이 거기! 떡대 큰놈. 그래. 너! 너도 싫어? 정말 봐주면서 한다니까?”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솟아있는 허승찬은 세진의 지목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거렸다.


힘겹게 도장을 운영하는 사람들과 달리 허승찬은 나름 유명한 인플루언서로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체육관을 운영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저 새로 생기는 대회에서 콘텐츠나 뽑아볼까 하고 참여했을 뿐, 백만 원이니 이백만 원이니 하는 대전료나 얼마가 될지 모를 월급 따위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처구니 없이 방심하다 패하는 바람에 나머지 시합은 조금 신중하게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넌 좀 다를 거 같은데? 오~ 눈빛 보소~ 이리 와봐. 괜찮아. 살살 때릴게.”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이 정도 도발이면 응해주는 게 예의다.


무릇, 이름 있는 무도인이라면 버릇없는 하룻강아지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일을 수치로 여길 것이다.


“좀 지나갑시다.”


주위의 사람에게 건네는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분노의 떨림도, 대결을 앞둔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6승을 올리면서 보여준 세진의 무위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먼저 나서지 않은 것은 만만한 상대를 골라 괴롭히는 것으로 비치는 게 싫을 뿐이었다.


어쩌면 봐줬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닌 상대가 저급한 도발을 하는데, 언제까지고 주위 시선을 핑계로 피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누군가는 분명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렇게 퍼진 소문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는 팔로워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고, 어떤 해명을 한다 해도 체육관의 운영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좋아! 너 정도 꺾어줘야 저 새끼도 날 우습게 보지 않겠지?”


“승찬 씨는 이번에 패배하면 탈락입니다.”


“압니다. 잠깐, 탈락하면 집에 가야 합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됐소.”


승찬이 크게 기지개를 켜자, 앞에 서 있는 세진의 모습이 커다란 고목의 그림자로 햇빛을 피해 숨은 길고양이처럼 보였다.


세진의 키도 그리 작지 않았지만, 승찬의 얼굴을 마주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로 작지 않은 차이가 났다.


단순히 키만 크다는 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에 따라 길어지는 리치까지 무시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근육으로 꽉꽉 들어찬 승찬의 몸을 직접 마주한다면, ’키만 큰 허수아비’라고 깎아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 가까이서 보니까 제법 살벌한데? 너 키가 몇이냐?”


“알 거 없고, 살살 안 해도 되니까 편하게 와.”


“훗! 꼴에 객기는. 괜찮겠어?”


압도적인 피지컬의 차이를 마주하고도 조금도 기죽지 않는 세진은 여유로운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작가의말

아프지 마시고 다치지 마시고 풍요로운 한가위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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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오해 말고 이해 24.03.23 15 0 12쪽
39 아가야 24.03.22 1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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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그들은 24.02.07 2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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