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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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os
작품등록일 :
2024.01.0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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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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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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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DUMMY

지예의 등장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유연에게는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 셈이고, 태준은 낯선 이의 소란스러운 등장에도 여전히 닭똥 같은 눈물을 뽑아냈다.


“으애애애애애애앵~~~~~~”


무엇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복잡한 상황에 유연은 지예의 표정부터 살폈다.


전화를 끊자마자 한걸음에 달려온 듯, 거친 호흡과 밝지 않은 낯빛은 어떤 변명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양손에 가득한 서류뭉치는 뭔가 풀지 못한 숙제를 유연에게 시키려고 가져온 걸 테지?


‘좋아. 그렇게 하자.’


굳은 표정으로 양손을 내밀고 고민 끝에 정리된 변명을 쏟아내려는 순간이었다.


“누이야~ 이건...”


“닥쳐!”


겨우 입을 열려는 유연을 닥치게 한 지예는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내팽개치고 서럽게 울고 있는 태준에게 달려들었다.


다리 풀린 망아지 마냥 주저앉은 태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번쩍 안아 올린 지예는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꼭 끌어안았다.


“어어~ 뭐 하게? 누이야~!”


“애가 울면 달래야지! 뭘 구경만 하는 거야?”


“어?”


자신보다 더 큰 태준을 안아 든 지예는 엄마가 갓난아이를 다루듯,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며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우리애기~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어이구~ 이모한테 다 말해~ 이모가 다 혼내줄게!”


“으앵~”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이게 무슨...


“오이구~ 그래~ 그래~ 괜찮다~ 괜찮아~”


“훌쩍...”


서로 끌어안아도 머리 하나는 더 위에 있을 태준이 갓난아이가 어미에게 안기듯 지예의 품에 파고들었다.


“저기... 걔가 지금... 애로 보여?”


“그럼 개냐? 애가 우는데 구경만 하고 있어? 울다가 자지러지면 답도 없는 거 몰라? 니가 울렸지?”


“아니. 그게...”


대형견이 자신의 덩치는 생각 못하고 사람에게 안기는 게 저런 모습일까?


지예의 품에 힘겹게 안긴 태준은 서서히 울음을 멈추고 지친 듯 잠이 들었다. 눈가에 남은 눈물은 어느새 말라 하얀 소금기로 흔적을 남겼다.


소파로 다가가 잠든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지예는 머리맡에 앉아 가볍게 등을 토닥거렸다.


자주 봤던 장면이다.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잠든 상태에서도 꾸역꾸역 기어가 품에 안기는 아이의 모습...


다행히? 온전히 안기는 게 불편했는지 무릎을 베는 걸로 만족한 모양이다.


그 큰 덩치를 잔뜩 웅크리고 잠든 태준은 악마처럼 칭얼거리다 천사처럼 잠든 아이의 모습이었다.


“얜 누구야? 몰래 애 낳았냐?”


“응? 아니. 결혼도 안 한 총각한테 무슨!”


훅 들어온 도발에 발끈하면서도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기 힘든 유연은 오히려 지예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잖아... 아무리 아이처럼 운다고 해도 누가 봐도 다 큰 성인 남정네를 저렇게 다독이고 있으니... 소문이라도 나면 지예의 혼삿길은 진탕길이 될 것이 분명했다.


“누이야. 정말 걔가 애로 보여?”


“그럼! 이렇게 귀엽게 잠든 애가 뭐로 보이는데?”


태준을 바라보는 지예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여자가 연인을 바라보는 표정은 분명 아니었다.


힘겹게 키우는 아이가 새록새록 잠든 모습을 보며 삶의 행복을 만끽하는 엄마의 표정... 아니, 그런 표정은 또 어디서 배웠대?


“정말 진짜 다 큰 남정네로 안 보여? 내 눈엔 누이가 지금 외간남자를 재우는 걸로 밖에 안 보이거든?”


“흠... 그러고 보니까 낯이 익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래! 그거야! 잘 생각해봐! 호텔에서 만났었잖아! 그때는 유연이라 불렀지만, 이목구비는 확실히 본 적 있잖아! 같이 싸우기도 했어! 기억 안 나?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냐. 사람의 내면을 볼 줄 알아야지. 본다고 하면 이상한가? 몰라 나도. 암튼 그래.”


50대 초반의 김 대표도, 20대 후반의 벨보이도 지예에겐 유연이었다.


심지어 태준의 모습으로 지예의 앞에 선 것은 호텔에서 마주친 몇 분 정도였다. 그 시간 외에 마주친 적 없는데도 한눈에 유연을 알아봤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 살이 모자라 찢어 놓은 눈구멍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판별하고 위치를 인지하는 능력.


심안...


무협지에 등장하는 맹인이나,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은 주인공이 얻게 되는 가공의 능력을 지닌 거라고? 뭘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 거야? 힘만 키운 힘캐 주제에 그런 고급 기술을 어디서 익힌 거냐고!


“누이야. 나 봐봐. 난 뭐로 보여?”


“너.”


“아니 잘 봐봐. 다른 거 보이는 거 없어?”


“뭐가 되고 싶은데? 말만 해. 그걸로 봐줄게. 개? 닭? 뱀?”


농담처럼 말하는 지예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지예의 행동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정신분석학이든, 무협소설이든 뭐라도 좋으니 지예의 상태를 설명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말 돌리지 말고 얘 누구냐고. 왜 여기서 울고 있는 거야?”


그것 또한 뭐라 설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정체성부터 설명이 안 되는 다 큰 성인 남정네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길 잃었나 봐. 이 앞에서 울고 있길래 데리고 왔어.”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될 때는 무지성의 발언이 답이 아닐까? 그냥 떠오르는 대로 답해버린 유연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래? 경찰에는 신고했어?”


이걸 받아들인다고? 이게 맞아?


“아직. 누가 버린 게 아닌가 싶은데. 보육원을 알아보려는 중이었어.”


“그래도 경찰이 낫지.”


지예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태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상하지 않나? 아이 머리숱이 그렇게 풍성한 경우는 드물잖아?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에도 문제가 있는 거야?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데려가 볼까? 어디 아파서 그런 걸 수도 있잖아?”


“그럴까? 가는 길에 실종 신고도 하자.”


혼자서 이해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유연은 지예의 눈높이에 맞춰 태준을 대했다. 아이의 건강을 염려하는 척, 지예도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소아과로 가야 하나? 흠... 정신병원은 좀 그럴 텐데...


***


결국 종합병원을 택한 유연은 지인 찬스를 이용해 충분한 상담시간을 확보했다.


“아이고, 탐정님. 잘 지내셨어요?”


“저야 늘 똑같죠. 별일 없으시죠?”


“힘들게 얻은 독신 생활을 마음껏 누리는 중입니다. 하하~”


평소 다닐 일 없는 병원에 인맥 쌓을 일은 없었지만, 아내의 불륜 증거 확보를 의뢰받은 일이 계기가 되었다.


평생을 환자 곁에서 그들의 건강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의사는 타인의 건강은 지켰을지 몰라도 자신의 가정을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일은 실패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탓할 수 없는 일이다.


바쁜업무에 치여 가정에 소홀한 사람과 그런 남편을 기다리다 순간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 중에 누구에게 더 큰 잘못이 있는지 가리는 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양측 모두에게 잘못이 있는 사람 간의 다툼에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판단하기 위해 제3자를 끌어들이는 행위 자체에 문제가 있지만, 재산권이 걸린 이혼소송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가진 것이 많은 부부라면 말해 무엇하랴.


재산의 반을 포기해야 했던 이혼재판에서 유연의 도움으로 승소한 의사에게 이런 부탁은 은혜를 갚는 일에도 못 끼는 소소한 일이었다.


“그런데 환자분은...”


질문을 끝까지 이어가지 않아도 답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습관처럼 하는 말일 뿐, 눈은 이미 환자를 진찰하는 중이었다.


말끔한 외모에 군데군데 찢어진 너저분한 정장을 입고,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엄마라고 하기엔 어려운 여인에게 매달리듯 안겨있는 다 큰 사내의 모습이라면, 이것저것 검사하지 않아도 병명을 특정할 수 있었다.


“정확한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유아퇴행’을 의심해야겠군요.”


“유아퇴행이요?”


극심한 스트레스로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의지가 강해지며 나타나는 자기방어적 행동...


누구의 의식이 고통받아 이런 증상이 나타났는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신체건강한 사내들 틈에서 무도가의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온 블레이드와 편부의 손에 자라며 힘든 생활을 이어오던 태준의 만남이 원활할 리 없었다.


생활고를 버텨낸다는 것이 어지간한 정신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쉽게 겪지 못할 큰일을 연이어 당하면서 태준의 의식은 많이 무너진 상태였다.


혼란스러운 태준과 목적이 확실한 블레이드의 싸움이라면 결과는 뻔하다.


자연스럽게 블레이드의 정체성이 우성인자로 작용하여 태준의 의식을 잠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갈 곳 없는 태준은 꺼져가는 의식을 회복하려는 노력도 포기한 채, 아무 희망없는 현실에 순응하려 했다.


일련의 사건이 없었다면 무의식 깊은 곳 어딘가에 희미한 존재감으로 남을 태준에게 베르와의 만남은 어두운 구름 사이로 비추는 한 줄기 빛이 되었다.


‘블레이드의 정체성을 지닌 채 태준으로 살아라.’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 알 수 없는 베르의 말은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는 블레이드보다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 태준에게 큰 힘이 되었다.


똥개도 제집에서 붙으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


몇십 년을 함께한 육체의 쟁탈전은 포기하지만 않으면 태준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이다.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결과가 되었지만, 클론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태준의 정체성은 블레이드를 억누르는 데 힘을 다 쓰고 지칠 대로 지쳐 행복했던 기억을 찾아가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최근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나 봐요. 보통은 유뇨증이나 실어증 같은 증상을 보이지만, 이분은... 크흠...”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의사는 헛기침으로 자칫 민감할 수 있는 발언을 자제했다.


“유아기나 아무리 늦어도 청소년기에 잠깐 나타나는 증상인데... 정말 심한 스트레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치료는 힘든가요?”


“입원치료나 약물치료나 뭐든 할 수 있습니다만,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권장하는 편입니다. 유아기로 퇴행했다는 건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건데, 아이가 좋아하는 건 치료가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이죠.”


말도 못하는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채는 건 쉽지 않다.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표정과 행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이 아이들이다.


치료를 위한 거짓된 관심보다 부모의 대가 없는 따뜻한 사랑이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이 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주변에 자극받을만한 요소를 줄이고 지켜보시죠. 일시적인 증상일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으면 치료는 그때 가서 시작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주변에 부모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런 것까지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있나? 스스로 일어서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다음 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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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야 24.03.22 1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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