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부산
유 회장을 만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인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했다.
동생 양부모의 죽음, 그 살인과 배후에 범호 그룹 윗선이 개입된 건 확실하다. 그리고 그 인물이 유창호 회장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유창호 회장은 아들 유민태와 달리 표정과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감이지만, 동생 양부모를 죽인 범인이나 배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유창호 회장이 아니면 범호 그룹의 다른 누구라는 건데, 능구렁이 같은 유창호 회장이 이를 호락호락 가르쳐 줄 리는 없었다.
“내 아들을 죽인 이기명을 내 앞에 데려와. 그러면 모든 진실을 말해주지.”
그 아들을 죽인 놈이 나인 자신인데, 뭘 어쩌라는 건지. 참.
동생 양부모를 죽인 살인범과 배후가 누군지도 궁금하지만, 그보다 강만혁 변호사가 무엇을 조사하다가 변을 당했는지 그 부분이 더 궁금했다.
범호 그룹과 관련된 무언가를 조사했던 것 같은데. 서울 한복판에서 살인하고 건물에 불을 지를 정도면 뭔가 급박한 상황이었거나 아니면 우발적인 살인일 가능성도 있었다.
확실한 건 유 회장이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범인도 배후도 그리고 강만혁 변호사가 조사하던 그 무엇도.
유 회장에게 물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고. 대신 유 회장의 오른팔 김석진 비서실장을 공략할 생각이다.
유 회장과 만남에서 다소 민감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김 실장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를 모두 듣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8년 전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고 뜻이다.
‘머리를 치기 전에 팔다리를 없앤다.’
다음 타겟은 김석진 비서실장으로 잡았다,
*
집에 나인의 빵셔틀 명우가 와 있었다.
“부산?”
“어. 내일 어때?”
명우가 병태와 함께 부산으로 놀러 가자고 했다.
주말 동안 부산 광안리에서 불꽃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명우 말로는 굉장히 유명한 불꽃 축제라나.
“전에 부산에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명우가 말했다.
명우의 말대로 나인은 부산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자갈치 시장에서 회도 먹고 드라마와 영화에 나왔던 촬영지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그럴 시간이 없었다.
동생 양부모 문제와 강력팀 일 두 가지를 병행하다 보니 시간이 늘 부족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 와서 수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껏해야 멀리 가본 곳이 병태와 갔던 소래포구 정도?
모처럼 바닷바람도 쐬고 또 이번 기회 아니면 부산에 내려갈 일이 없을 같았다.
“너 부산 잘 알아?”
나인의 물음에 명우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 정도 부산에 있었잖아.”
“부산에서 뭐 했는데?”
“아는 형님들 일 좀 도왔지.”
어떤 일인지 대충 알 것 같아 묻지는 않았다.
“부산에도 아는 형님 있어?”
“부산뿐이게. 내가 발이 넓어서 전국구로 아는 형님들이 있어.”
“허허.”
“어쨌거나 부산은 내가 꽉 잡고 있으니깐 나만 믿어. 아, 부산에서 최고로 물 좋은 클럽도 내가 꽉 잡고 있거든. 부킹까지 완벽하게 책임질게.”
“태식아. 가자.”
병태는 이미 명우의 꼬드김에 넘어간 모양이다.
“가는 건 좋은데, 내일 주말이라 차 막히지 않을까?”
“막히기는 할 거야. 그래도 아침 일찍 출발하면...”
“항공권 구할 수 없어?”
“다 매진됐지.”
“웃돈 주면 구할 수 있어?”
“많이 주면 구할 수 있기는 한데.”
“그럼, 구해. 돈은 내가 줄게.”
“OK~”
*
토요일 아침.
웃돈 주고 구한 항공편 덕에 아침 일찍 그것도 비즈니스석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나인과 병태 그리고 부산 가이드를 자처한 명우와 함께 본격적인 부산 관광에 들어갔다.
자갈치 시장을 시작으로 맛집 투어와 필수 관광 코스에 영화 촬영지까지, 부산을 꽉 잡고 있다는 명우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부산 토박이보다 어째 부산을 더 잘 아는 느낌이었다.
‘오길 잘했네.’
유럽의 많은 관광지를 돌아다녀 본 나인이지만, 부산은 그곳과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닌 도시였다.
날씨마저 너무나도 좋았다.
오늘 부산에 오지 않았으면 후회가 됐을 정도로.
같은 시각 강남의 고급 일식집에서는.
유창호 회장의 비서실장 김석진과 경찰청 감찰 1팀 팀장 서유복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강봉 경찰서 강력3팀 강태식. 또 이 팀이네요.”
나인의 사진과 간단한 신상명세서가 담긴 서류를 보며 서유복 감찰 팀장이 말했다.
“그러게. 그 팀하고는 뭔가 악연이 있는 것 같아.”
김 실장이 말했다.
“선배님.”
김 실장과 서 팀장은 고교 동문이다.
“?”
“이참에 이 팀 싹다 털어 볼까요?”
“아니야. 그 강태식이라는 놈만 적당히 작업해.”
“네.”
“그리고 유복아.”
“네.”
“이번 건은 회장님 직접 지시한 거다. 실수가 있으면 안 돼.”
“저만 믿으세요. 그런데 어느 정도 선에서 작업 할까요?”
“음... 그 친구가 회장님 앞에서 그러더라.”
“?”
“무서운 게 없다고.”
“허! 회장님 앞에서요?”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서 팀장이 되물었다.
“그래. 다음부터 그런 소리 못하게 확실하게 처리해.”
“네. 다음 주 안으로 끝낼게요.”
다시 부산으로 와서.
명우 덕에 알차게 부산을 돌아본 나인은 불꽃 축제를 보기 위해 조금 일찍 광안리로 향했다.
불꽃 축제를 보러온 사람들로 이미 광안리 모래사장은 빈자리가 없었다.
다행히 명우의 아는 동생들이 미리 와서 명당자리를 잡아 두고 치킨과 회에 맥주까지 준비해두고 떠났다.
아는 형님만큼이나 아는 동생들도 많은 명우였다.
“태식아.”
광안리로 오기 전에 만날 사람이 있다면 따로 떨어졌던 병태가 돌아왔다.
그런데 병태 혼자가 아니었다.
‘한선화?’
병태 뒤에 한선화가 따라오고 있었다.
한선화. 병태의 사촌이자 동생 강태식이 짝사랑했던 고교 동창. 그리고 동생의 고백을 단칼에 차버렸던 여자.
일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어야 할 그녀의 등장에 나인은 다소 당황했다.
“야, 강태식.”
“어. 어?”
“오해하지 마라. 너 보러 온 거 아니니깐.”
누가 봐도 나인 때문에 온 것 같은데, 선화는 불꽃놀이 보려고 왔다고 우겨댔다.
어쨌거나 다소 어색할 것 같았던 분위기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니 선화가 합류하면서 칙칙했던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나인의 예상과 달리 선화는 털털하면서도 분위기를 잘 이끌어갔다. 예전 고등학교 때 이야기하며 웃고 떠들어 댔는데, 환하게 웃을 때면 주변이 다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 전시회가 열렸던 강남 갤러리에서 봤을 땐 다소 딱딱하고 차가운 이미지였는데, 아마도 그땐 미술 관계자들이 보고 있어 그런 이미지를 연출한 것 같았다.
분명한 건 지금의 선화 모습이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태식아.”
맥주 한 캔을 비운 선화가 나인을 불렀다.
“응?”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한테 고백했던 거 기억나?”
“아니. 전혀. 조금도.”
동생은 기억할지 몰라도 나인의 기억엔 없었다.
“설마 그때 나한테 차여서 삐진 거야?”
선화가 놀리듯 물었다.
“아니거든.”
“에이. 삐졌네.”
“안 삐졌거든.”
“그럼...”
선화가 나인의 얼굴에 바짝 대고 말했다.
“다시 고백하면 이번엔 안 찰 건데. 할래?”
나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을 맞대고 보니 더 미인이었다.
지금껏 나인이 만난 그 어떤 여자보다도 매력적이고 또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인은 선화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유럽에 있을 때, 나인은 많은 여자를 만났었다. 그중에는 정말로 사랑하고 싶은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여자도 한 명 있었다.
문제는 나인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인연이 깊어지면, 조직 세븐데드가 개입하게 된다. 둘의 사이를 갈라놓는 게 아니라 그냥 여자를 죽이는 것으로 끝낸다.
실제로 나인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 여자도 조직의 손에 죽고 말았다. 처음으로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 앞에서 나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그 여인의 죽음이 세븐데드를 무너트려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 나인은 그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가볍게 만나고 또 가볍게 헤어지는 만남만 유지했다.
그 때문인지 나인은 선화에게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나인의 생각과 달리 심장은 심하게 콩닥거렸다.
이건 나인의 감정이 아닌 동생의 감정 같았다. 아무래도 동생이 선화를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넌 차여놓고도 배알도 없냐!’
동생이 눈앞에 있으면 한소리 해주고 싶었다.
한편 병태와 명우는 나인의 입에 어떤 말이 나올지 숨죽이며 기다렸다.
어째 이 둘인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아...”
나인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하늘 위로 폭죽이 솟아오르면서 밤하늘을 수놓았다.
불꽃 축제가 시작됐다.
“와~ 멋있다.”
선화가 시선을 하늘로 돌리며 말했다.
덕분에 나인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어쩌면 선화는 나인의 입에서 ‘아니’라는 말이 나올 걸 알고 시선을 돌리며 말을 자른 건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밤하늘을 수놓은 폭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나인이 유럽에서 봤던 그 어떤 불꽃 축제보다도 화려하고 또 아름다웠다.
그렇게 불꽃 축제가 한참 진행되었는데, 선화가 나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선화...”
자고 있었다.
자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고 있었다. 나인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교토 전시회 준비 때문에 어젯밤을 꼬박 새웠대.”
병태가 넌지시 말했다.
“그럼 한숨도 못 자고 부산에 온 거야?”
“어. 아침에 선화한테 문자가 왔었거든. 너하고 부산에 왔다고 했더니 갑자기 부산으로 오겠다는 거야. 난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는데, 진짜로 왔지 뭐야.”
“아...”
“너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
명우가 말했다.
“어?”
“눈빛이 달라. 내가 여자를 좀 아는데, 너를 보는 눈빛은 100% 좋아하는 남자를 볼 때의 눈빛이야.”
“인정!”
병태가 거들었다.
나인은 말없이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불꽃은 여전히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 놓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교주를 죽이고 세븐데드를 무너트리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나인은 분명 죽었다.
하지만 동생은 죽은 게 아니다.
식물인간에 가까운 상태였다.
만약 세븐데드를 무너트리면, 즉 나인이 할 일이 끝나면 지금의 몸은 동생에게 돌아가는 게 맞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동생이 동생의 몸으로 건강하게 돌아와주면.
나인은 잠들어 있는 선화를 봤다.
‘선화와 잘 됐으면 좋겠다.’
동생과 선화가 잘되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
1시간 넘게 이어진 불꽃 축제가 끝나고 나서야 선화는 잠에서 깨어났다.
다음 코스로 가기로 한, 부산에서 가장 물 좋은 클럽에 가는 건 선화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됐다. 대신 근처에 야시장 축제가 열린다고 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밤새워 놀고, 선화는 이른 아침 비행기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병태와 명우가 눈치껏 빠지면서 나인 혼자서 선화를 공항까지 바래다주게 됐다.
“태식아.”
탑승을 앞두고 선화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인을 바라봤다.
“응?”
“내가 어제 했던 말.”
“고백?”
“그래. 그 대답은 지금 듣지 않을게.”
“?”
“일본 전시회 끝나고 돌아가면, 내가 널 꼬실 거니깐 딱 기다려.”
참 맹랑한 아가씨다.
순둥이 동생과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대답은 그다음에 해. 알았지?”
“그래.”
한 달 예정이었던 도쿄 전시회가 다른 지역이 추가되면서 한 달 더 늘어났다고 한다.
화가의 미모 덕에 여기저기서 전시회를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나? 어쨌거나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선화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대신 딴 여자 만나기 없다”
“알았어.”
“약속했다.”
“약속할게”
여자를 사귈 일이 없기에 나인은 주저하지 않고 약속했다.
선화의 성화에 못 이겨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스캔? 했다. 훗날 이 약속 때문으로 낭패를 볼 거라는 걸 나인은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뜻밖의 손님 선화까지 함께한 부산 여행은 큰 사고 없이 알차게 끝났다.
- 작가의말
40화를 찍었네요.
지인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투베(투데이 베스트)에 들어가면 벽을 만나게 될 거라고.
요즘 그 벽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조회수가 정체되는 것을 보면서 이게 벽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벽을 넘으려면 더 열심히 쓰는 것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