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메이저리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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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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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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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의 공포

DUMMY

34화












“더블A를 건너뛰는 건 제가 싫습니다.”

“뭐야?”

“저는 급할 게 없습니다. 미국 프로야구의 시스템을 바닥에서부터 하나씩 맛보며 단계별로 올라갈 겁니다. 올 시즌은 더블A, 다음 시즌은 트리플A, 그리고 그다음 시즌에 빅리그를 노릴 겁니다.”

“너는 참 별난 녀석이야. 다른 선수였다면 당장 승격시켜달라고 했을 텐데.”


마이클 코치가 어이없어했다.

그에게 말해 줄 수는 없지만 내가 괴짜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명백한 실패 사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생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수호신이었던 김병원 선수의 선수 경력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김병원은 나보다 뛰어난 구속과 구위를 자랑하는 잠수함 투수로 마이너 생활을 2~3개월 짧게 하고 바로 메이저리그로 승격해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그 엄청난 초반 성공이 오히려 그 후 선수 경력을 갉아먹었다.

부상과 슬럼프에 빠졌을 때 대처하는 ‘경험’을 쌓지 못한 채로 메이저리거가 되어버린 탓이 컸다.

안타까운 부진이 길어졌고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김병원 선수가 입단하고 3~4년 동안 마이너에서 차근차근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경험을 쌓은 후에 메이저리거가 되었다면 더 오래 성공적으로 빅리그 투수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김병원보다 느린 공을 던졌고 제구력 말고는 그보다 우월한 점이 없었다.

그런 내가 서둘러 메이저리그에 올라간다면 생소함으로 잠깐 반짝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롱런 하지는 못할 것이다.

주변의 부추김에 넘어가지 않고 진짜 실력을 쌓으려면 냉정한 자기 객관화가 필요했다.


“나는 아직 빅리그에서 뛰기는 부족해. 하지만 더 좋은 투수가 될 자신은 있어. 시간은 나의 편이니까.”


***


다음날 연습경기.

[브레이브스 더블A 대 트리플A]


마이너 연습경기치고는 구단 내부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우선 스캇 보라스를 에이전트로 거느린 한국인 더블A 투수 백건우가 상위 레벨 타자들을 처음 상대하는 경기였고 마침 트리플A 선발 투수가 같은 동양계 투수였기 때문이다.

[브루스 첸]

브루스는 중국계 파나마인 좌투수로 지난 시즌 막판에 더블A에서 빅리그로 승격해 승수를 쌓으며 맹활약했다.


“브루스가 브레이브스 소속이 아니었다면 이번 시즌 무조건 빅리그에서 뛰었을 거야.”


브루스는 이번 캠프에서 초청 선수로 메이저리그 캠프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브레이브스 투수왕국의 성벽이 너무 높아서 선발진은 꿈도 못 꾸고 구원진 한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다가 일단 마이너 캠프로 돌아와야 했다.


“저 동양 꼬마 녀석이 그렇게 대단하다며?”

“히히. 그래 봐야 싱글A지. 오늘 도금이 벗겨질 거야.”

“그래도 보라스가 찍었는데 엉터리는 아니겠지.”

“채드 브래드포드와 폼이 비슷하네. 나는 지난 시즌 녀석에게 2홈런이나 뽑아냈어. 한 마디로 저 동양 꼬마는 좆됐다는 거야.”

“저런 변칙 폼은 한계가 있어. 메이저 레벨에서는 안 통해.”

“이봐~ 데로사! 너 메이저에서 얼마나 뛰었다고 메이저 타령이야?”

“지난 시즌에 12경기나 뛰었거든!”

“마크 맥과이어 납셨네~”


트리플A 타자들이 몸을 풀고 있는 백건우를 지켜보며 떠들었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의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잠깐이라도 빅리그를 경험했고 기본 8팀 이상을 옮겨 다닌 경험들이 있었다.

미국 야구판에서 단맛, 쓴맛, 똥맛까지 모두 맛본 선수들이라 기본적으로 시니컬했다.


“건우! 오늘 트리플A 꼰대들을 혼내주자.”

“저 야구도 못 하는 늙다리들. 오늘 제대로 당황 좀 할 거야.”


반면.

더블A 선수들은 20대 초반 선수들이 주축이었다.

그들은 트리플A 선수들을 실패자로 보았고 본인들은 바로 빅리그에 올라갈 재능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구단에서도 진짜 재능이 뛰어난 선수들은 더블A에서 트리플A에 보내지 않고 바로 빅리그에 올렸다.

그 예가 오늘의 트리플A 팀 선발 투수 브루스 첸이다.


뻐어어어엉- !

[149km]


브루스는 지난 시즌 더블A 리그 올스타에 뽑혔고 최우수 투수상까지 받았다.

그리고 9월에는 빅리그에서 활약했다.

이번 시즌 팀 사정상 일단 트리플A에서 시작했지만 브루스의 마음은 아직 빅리그에 있었다.


“오히려 좋아. 그렇게 대단한 브루스를 오늘 내가 이기면 평가가 많이 올라갈 거야.”


지난 시즌 더블A 최고 투수와 선발 대결을 벌인다고 하니까 동기부여가 팍팍 되었다.

빨리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고 싶어 좀이 쑤실 정도로.


“플레이 볼~!”


1회초.

더블A 팀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뻐어어어어엉- ! 뻐어어엉!

“삼진 아웃!”


브루스는 자신이 여기서 놀 사람이 아니라는 걸 투구로 증명했다.

좌투수의 압도적인 구위로 더블A 타자들을 압살했다.

싱글A에서 브루스보다 더 빠른 공을 던지는 좌타자도 꽤 있었다.

그러나.

제구력과 변화구의 위력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결과는 3연속 삼진.

우리 더그아웃이 조용해졌다.


“제프. 꼰대들 잡을 준비 됐지?”

“물론이야. 가자.”


나는 일부러 제프와 큰 소리로 떠들며 더그아웃 분위기를 바꾸었다.

브루스의 불꽃 투구를 보니까 나도 빨리 공을 던지고 싶었다.


1회말.

첫 타자 하워드가 우타석에 들어섰다.

뭐랄까 전형적인 트리플A 터줏대감 느낌이랄까.

보통 빅리그와 트리플A의 수준 차이를 종이 한 장으로 비유하는데 그 한 장을 죽어도 넘지 못할 것 같은 타자였다.


뻐어어엉- !

“볼!”


언제나처럼 초구를 바깥쪽에 꽉 차게 던졌는데 오늘 주심은 볼을 선언했다.

나는 2구를 공 한 개 안쪽으로 던졌다.


따아아아악- !

“파울!”


밀어친 타구가 우측 담장을 살짝 벗어났다.

원 앤 원.

트리플A에서 잔뼈가 굵은 타자답게 힘과 기술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멕시코 리그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런 타자가 빅리거가 못됐다는 건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뜻이다.


“힉!”

뻐어어어엉- !

“스트라이크! 투!”


옆구리로 하드 슬라이더가 날아오자 하워드가 움찔했다.

약점 발견.

강인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몸쪽 공에 트라우마가 있는 모양이다.

트리플A 타자 중에는 의외로 이런 선수가 많았다.

힘과 기술은 메이저리그급인데 딱 종이 한 장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는 타자.


뻐어어엉- !

“삼진 아웃!”


하워드는 움찔했던 게 민망했는지 빠지는 하드 슬라이더에 성급하게 스윙했다.


“저 동양 녀석...”

“분명히 몸쪽 위협구를 던졌지?”

“제구는 확실한 거 같아.”


트리플A 선수들이 진지해졌다.

구속이 느린 언더핸드 투수라고 해서 유인구 위주의 도망가는 피칭을 할 줄 알았는데 공격적이고 빠른 리듬으로 타자를 사냥했다.


“스트라이크 투!”


다음 타자 마이크는 하워드보다 약했다.

주심 때문에 존을 좁혔는데도 바깥쪽 대응이 안 됐다.

그렇다면.


휘이이잉! 뻐어엉- !

“헉!”


3구로 라이징 커브를 던졌다.

온통 바깥쪽에 신경이 쏠려 있던 마이크는 눈높이로 공이 솟아오르자 꼴사나운 스윙을 했다.


“이번에는 3구 삼진이야.”

“저. 망할. 동양...”


트리플A 선수들은 더 이상 백건우를 동양인 꼬마라고 무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실 정신적으로 주눅이 들어있었다.

젊은 더블A 선수들이 야심 넘치고 자신만만한 반면 트리플A 고참 선수들은 이미 많은 승격과 강등을 경험했기에 (그리고 자신이 결코 풀타임 빅리거가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이제는 어렴풋이 깨달았기에)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젊은 선수를 보면 기가 팍 죽었다.


“고맙게도 좌타자가 나와주네.”


3번 말로이가 좌타석에 들어섰다.

멕시코 겨울 리그에서 트리플A 타자들을 실컷 상대했던 경험을 여기서 써먹을 줄이야.

존경하는 버베이시 단장님께 엽서라도 보내주고 싶었다.

척-

‘제프 녀석.’


내가 너클볼을 던지려고 하자 포수 제프가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고쳐앉았다.

뭐 상관은 없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이닝이 끝나면 혼을 내줘야지.


파아아앙- !

“나왔다! 진짜 너클볼이잖아?”


트리플A 선수들이 더그아웃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의 너클볼이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나비처럼 날아가 포수 미트에 꽂혔다.

스트라이크 원.

말로이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파아아앙- ! 파아아앙- ! 파아아앙- !

“삼진 아웃!”


나는 너클볼 4개로 말로이를 잡아냈다.

3연속 삼진.

캠프 와서 처음으로 너클볼이 말을 들었다.

아마도 브루스 첸 때문에 집중력이 높아진 듯.


2회초.

브루스 첸이 마운드로 올라오며 나를 빤히 보았다.

딱히 적의를 드러내는 건 아니고 그냥 분위기가 묘했다.


‘또 경쟁자가 들어온 건가.’


대략 이런 느낌.

브레이브스 투수왕국의 좁은 문을 비집고 들어가려다가 쫓겨난 브루스에게 나의 등장이 반갑지는 않겠지.


뻐어어엉! 뻐어어엉- !


브루스는 더블A 타자들을 압도했다.

2삼진, 1땅볼.

또 삼자 범퇴.

지난 시즌 팀 동료들에게 [너희들과는 클래스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었다.


“제프. 너클볼 받기 전에 자세 고쳐 앉는 짓 좀 하지 마.”

“내가 그랬어?”

“그래.”

“미안해. 조심할게.”

“그리고 지난 시즌에 브루스 공을 네가 받지 않았어?”

“맞아. 내가 받았었지.”

“그런데도 버릇 하나 못 찾았어? 한심하구만.”

“무슨 버릇?”

“하여튼 미국 녀석들은 어떤 면에서는 참 허술하다니까.”


브루스에게 삼진을 당한 제프가 궁금해했다.

나는 즉시 버릇 강의에 들어갔다.


“투구할 때 무릎을 봐. 짧게 올라가면 직구고 길게 올라가면 변화구야.”

“뭐!? 진짜!?”

“조용히 해. 일단 2회를 무실점으로 막고 3회부터 반격을 시작하자.”


2회말.

4번 롬버드가 좌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에서 롬버드가 너클볼을 의식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렇다면.


파아아앙- !


그런데도 나는 너클볼을 던졌다.

알아도 못 친다는 공포를 타자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다.


“스트라이크 원!”


대신 2구는 바깥쪽 낮은 포심을 꽂았다.

너클볼을 기다리던 롬버드는 배트를 들고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제부터는 쉬웠다.


뻐어어엉- ! 휘잉!

“삼진 아웃!”


롬버드가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스크류볼에 꼴사나운 스윙을 했다.

4연속 삼진.


스윽-

트리플A 팀 더그아웃을 보니 수석 코치가 누군가에게 전화로 보고를 하고 있었다.

브레이브스 메이저 캠프에 있는 구단 고위 관계자에게 이리 와서 나의 투구를 보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


따아아아악- !

“걸렸다!”


이런 잡생각 때문이었을까.

다음 타자 데로사에게 던진 너클볼이 회전해버렸고 배트 중심에 맞은 타구가 우측 담장을 넘어갔다.


“솔로 홈런!”

[트리플A 1 대 0 더블A]


연습경기인데도 야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홈런을 맞기 전까지는 내가 너무 압도적인 피칭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교만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타자를 상대했다.


뻐어어어엉- !

“삼진 아웃!”


후속 타자 둘을 침착하게 삼진으로 잡아내고 이닝을 끝냈다.

동료가 홈런을 치자 흥분해서 스윙이 커진 트리플A 타자들을 라이징 커브로 잡아내는 건 쉬웠다.

7타자 6삼진, 1홈런.


“건우. 홈런 맞은 거 마음에 두지 마.”


더그아웃으로 돌아오자 동료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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