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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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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강철 멘탈의 비결

DUMMY

42화












“예?”


나는 귀를 의심했다.


“백건우 선수는 캠프 남은 기간 동안 1군에 합류해서 연습경기를 치를 겁니다.”

“진짜요? 이거 장난 전화 아니죠?”

“아닙니다. 저는 1군 매니저 루이스구요. 이건 구단의 공식 지시입니다. 아. 오해는 마세요. 미스터 백. 캠프가 끝나면 다시 더블A 팀으로 돌아갈 거니까요. 이번 기용은 앞으로 1군 시즌 운영을 위한 테스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루이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1군. 내가 내일 1군에 합류해서 매덕스, 글래빈, 스몰츠... 이런 사람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야구를 한다구?’


서둘지 않고 마이너리그에서 차근차근 선발 수업을 쌓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신나는 깜짝 사건이었다.


“제 유니폼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죠?”

“후후. 그건 걱정 마세요. 내일 1군 클럽하우스에 가보면 모든 게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내일 봐요. 미스터 백.”

뚝-


전화를 끊고 애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나. 내일부터 메이저 캠프로 출근한다.”

“정말이야!? 와우! 축하해! 마스터!”

“대단해. 건우야. 너라면 언젠가는 올라갈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그날이 올 줄은 몰랐어.”

“오해는 하지 마. 남은 몇 경기뿐이니까. 시범경기 일정이 끝나면 다시 더블A로 돌아와서 시즌 시작이야.”

“그래도! 진짜 브레이브스 유니폼을 입는 거잖아! 우리는 구경도 못해봤다구!”

“그건 그렇지.”


스프링캠프 시범경기가 5경기 남은 시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7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호텔을 나섰다.

회귀한 이후로 이렇게 잠을 설친 건 처음이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스프링캠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메이저리그 관계자는 오른쪽, 마이너리그 관계자는 왼쪽으로 가세요.]


오늘은 오른쪽으로 갔다.

경비원이 나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신분증 확인도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환영합니다. 미스터 백.”


나는 당직 직원의 안내를 받아 클럽하우스에 들어갔다.

영화에서나 봤던 넓고 고급스러운 클럽하우스였다.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

[치퍼 존스]

[앤드루 존스]

...

거물 선수들의 이름이 박힌 사물함들이 클럽하우스 내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백건우]가 적힌 사물함은 구석에 있었다.

비록 화장실 옆이었지만 지금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기가 당신 자리입니다. 미스터 백.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고맙습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나는 나의 사물함을 찬찬히 감상했다.

[GUN WOO 79]

새하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홈 유니폼이 걸려 있었다.

내 눈에는 나의 이름이 박힌 유니폼이 루브르에 걸린 모나리자보다 더 아름다웠다.


“유니폼이 내 몸에 딱 맞네. 맞춤 양복 같아.”


그동안 입었던 그린빌 유니폼과는 모든 게 달랐다.

옷감의 질, 재봉 상태, 심지어 단추까지 달랐다.


“이래서 메이저리그 뽕이 무서운 거구나.”


벌써 마이너리그 캠프로 돌아가기가 싫어졌다.

한번 메이저 맛을 보면 죽을 때까지 잊지를 못한다더니 과장이 아니었다.


“진정하자. 건우야. 너는 애가 아니잖아.”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유니폼을 착용했다.

언더 셔츠부터 양말까지 모든 게 제 사이즈로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고귀한 사람이 된 기분으로 1군 유니폼을 착용했다.

갑자기 내가 더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완전 폼나네.”


유니폼 입은 나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 보며 한참 감탄하고 있는데 누군가 불쑥 들어왔다.


“너는 누구지? 처음보는데... 신입인가?”

“아. 당신은...”


전생에서부터 내가 존경했던 백인 남자의 얼굴을 보고 나는 당황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 동양인 투수라면 존 로커를 때려눕혔다는 그...”

“반갑습니다. 톰 글래빈 선배님. 저는 한국인 백건우라고 합니다. 건우라고 불러주세요.”


매덕스에 이어 2번째로 좋아하던 투수 ‘여우’ 톰 글래빈이었다.


“이쪽 캠프로 넘어왔나?”

“예. 어제 연락을 받았습니다.”

“흐음. 그렇군. 부탁인데 더 이상의 소동은 원치 않아. 우리 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었으면 해.”

“물론이죠. 미스터 글래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스윽-


글래빈은 나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나를 지나쳐 자기 사물함으로 가버렸다.

그리곤 차근차근 루틴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나 따위는 벌써 잊어버린 듯.


‘역시. 매덕스 교수님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구나...’


나는 글래빈이 오늘 선발이라는 걸 느꼈다.

같은 투수였으니까.

그날 선발 투수를 건드리지 않는 건 야구판의 불문율이었다.

엄청 예민한 상태니까.

나는 조용히 글러브를 챙겨서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나야말로 더 이상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미치겠군. 나이 50살 먹고 15살짜리 애처럼 이렇게 설레고 흥분하다니...”

야구장 폴대 사이를 천천히 뛰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두 번째 인생을 살며 나는 전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 당당하게 살아왔다.

보라스나 슈어홀츠 같은 거물들에게도 당당하게 굴었다.

그러나.

나는 역시 어쩔 수 없는 야구 소년이었다.

어릴 때부터 방에 포스터를 붙여놓고 동경하던 매덕스, 글래빈 같은 투수를 직접 만나니까 나도 모르게 영혼이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헉. 헉. 이제 좀 낫군.”


땀을 빼니까 정신이 좀 돌아왔다.

야구장 반대편 그늘에서 글래빈이 트레이너와 몸을 풀고 있는 게 보였다.

끼어들어 말을 붙여보고 싶었지만 워낙 엄숙한 분위기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내고 오후가 되자 1군 선수들이 하나둘 클럽하우스로 출근했다.


“어라. 그 동양인 친구네.”

“한국인이라고 했지? 대단하네. 벌써 여기까지 올라왔다구? 야! 스프링어. 우리 곧 실업자 되겠다~”

“마이너 캠프에서 제일 잘 던졌다잖아.”

“언더핸드 투수라던데?”

“내가 싸우는 거 직접 봤는데 하이킥이 살벌해. 브루스 리를 직접 보는 줄 알았다니까. 그냥! 아뵤우! 팍! 팍! 너희들도 입조심 해라. 존 로커처럼 되기 싫으면~”


다들 나를 발견하고 수군거리면서도 직접 말을 걸지는 않았다.

원래 1군에 갓 올라온 루키들을 클럽하우스에서 골탕 먹이는 게 빅리그의 전통이었는데 나에게는 무슨 일을 당할까 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 분위기 불편하네.”


나는 있기가 괜히 민망해서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미스터 팩.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존 스몰츠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존이라고 불러요.”

“아... 미스터 스몰츠.”

“우리 클럽하우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스몰츠는 산적처럼 험악한 얼굴로 평화로운 미소를 짓고 있어서 어쩐지 더 무서웠다.


“스몰츠 장로님! 저 친구가 회개하게 기도해주세요~ 하나님의 은총이 절실합니다~”

휘이익-


1군 선수들이 분위기를 타고 나를 약 올렸다.

스몰츠는 그러거나 말거나 은혜로운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미스터 백. 당신의 마음속에서 분노와 미움이 이제는 사라졌나요?”

“아. 네. 저는 그때도 분노하지는 않았습니다. 로커를 미워하지도 않구요. 그냥 저와 부모님을 모욕하길래 미국식 응징을 가했을 뿐입니다.”

“노노노. 우리 인간에 대한 응징은 오직 저 하늘 위에 높이 계신 분께서만 가능하십니다.”

“아... 그랬군요. 저도 되는 거 같던데...”

“당신과 가련한 존 로커의 영혼을 위해 함께 기도해도 될까요?”

“그건...”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매일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스몰츠가 갑자기 기도 모드를 발동했고 나는 엉겁결에 한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존 로커의 가련한 영혼을 위해.


“아멘!”

“믿쑵니다!!”


동료들이 장난식으로 스몰츠의 기도에 추임새를 넣었는데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 이것이 강철 멘탈의 비결이었나?’


존 스몰츠의 강철 심장은 바로 신앙심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 아버지 하나님... 우리 동양에서 온 형제에게 축복을 내려주십시오. 아멘.”

“아멘!”


어쨌든 나를 축복하는 것으로 기도가 마무리되었다.

놀랍게도 첫 1군 데뷔 경기를 앞두고 붕 떴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스몰츠를 겨우 떨쳐내고 불펜으로 나가려던 그때였다.


“으윽! 이게 무슨 냄새야!? 내 사물함에서 오줌 냄새가 진동하잖아!”

“크하하하!”

“이번에는 클레스코가 당했군.”

1루수 클레스코가 자신의 연습용 유니폼을 세탁통에 던져넣으며 인상을 썼다.

어제 누군가 그의 유니폼에 오줌을 싸놓고 사물함에 넣어둔 것이 분명했다.

24시간 동안 발효되었겠지.

다들 범인이 누군지 아는 눈치였지만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클레스코도 씩씩대기만 할 뿐 범인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어제 매덕스가 선발로 던졌나 보죠?”

“맞아. 어떻게 알았지?”

“그냥요.”


어제 경기에서 매덕스가 이겼는지 졌는지 클레스코가 실책을 했는지 안 했는지 나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매덕스의 짓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 눈치였다.

참고로 매덕스는 오늘 휴식일이라 클럽하우스에 출근을 안 했다.


“사물함에 크레모아라도 설치해 놓아야 하나...”


매덕스를 향한 나의 존경심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직접 만나본 글래빈은 사람이 너무 냉랭했고...

스몰츠는.


“...”


스몰츠가 나를 보며 은혜로운 미소를 지었다.

‘기도하세요.’

입 모양으로 이런 말을 하며.


어쩐지 메이저리그 90년대 최고의 팀에는 정상인이 하나도 없는 거 같았다.


***


뻐어어엉- !


나는 구원 대기를 명받고 1회부터 불펜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오늘 상대는 [플로리다 말린스].

이 동네 연고 팀이라 야구장을 찾은 관객들 전부가 말린스를 응원했다.

말린스는 2년 전 깜짝 우승까지 한 덕분에 반짝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브레이브스는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의 맹주로 4년째 지구우승을 독점하고 있어 나머지 팀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건우. 제법 쓸만한 공을 던지는구나. 너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론지 감독과 마이클 코치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걸 기억하거라.”

“옙! 마조니 코치님.”


마조니 투수 코치가 나의 불펜 투구를 지켜보았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어떤 기술적인 조언도 하지 않았다.

일단 실전에서 결과를 보고 만져주려나.


“그런 자세로 어떻게 공을 던지냐. 한국에서는 투수들이 다 그렇게 던져?”

“건우. 고맙다. 솔직히 존 로커 자식 꼴 보기 싫었거든. 그 새끼는 우리 미국에서 멸종되어야 할 인종차별주의자야.”

“네 덕분에 마무리 자리에 공석이 생겼어. 내가 차지하면 나중에 밥 한번 살게. 건우.”


불펜에서 함께 몸을 푸는 구원투수들은 모두 나를 반기는 분위기.

의외로 로커를 혐오하는 백인 투수들도 많았다.

[남부인의 수치]라고.

또 어쨌든 동료니 뭐니해도 일단 요직에 공석이 생기면 “땡큐!”인 것이 프로의 세계였다.


뻐어어어엉- !


1회초 말린스 선공.

나는 불펜에서 톰 글래빈의 투구를 지켜보았다.


“와아... 직접 보니까 미쳤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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