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메이저리그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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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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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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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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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의 환대

DUMMY

슬기로운 메이저리그 생활 49화












“자~ 받아라. 크리스마스는 멀었지만 산타클로스의 선물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마이너 캠프로 출근해서 메이저 캠프에서 받아온 야구용품과 장비를 풀어놓았다.

더블A 선수들이 신나서 달려들었다.


“고마워! 건우!”

“메이저 캠프는 어땠어? 빅3와 이야기도 해봤어?”


여기서 빅3는 매덕스, 글래빈, 스몰츠를 뜻했다.

나는 말 없이 글래빈의 사인이 적힌 배트를 꺼냈다.


“이걸로 대답이 될까?”

“우와! 톰 글래빈 사인이잖아!? 진짜 그 사람한테 받은 거야!?”

“당연하지. 이걸로 안타도 쳤어. 나에게는 행운의 배트야.”

“정말 부럽다!”


뭐랄까.

겨우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을 보내고 왔을 뿐인데 마이너 캠프가 전과는 달라 보였다.


“식사는 어땠어? 스테이크가 매일 나온다며?”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어?”


여기 있는 선수들이 메이저 캠프의 모든 걸 궁금해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들 중 90%는 단 하루도 빅리그 경험을 해보지 못하고 방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건우. 시범 경기에서 제법 던졌더구나.”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앞으로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경험이 되었길 빈다. 이제 여기서 너의 소원인 선발 투수 수업을 착실하게 받도록 해.”

“예! 잘 부탁드립니다. 마이클 코치님.”


나는 더블A 감독실로 가서 감독과 투수 코치에게 복귀 인사를 드렸다.

둘은 나의 활약을 본인 일처럼 기뻐했다.

나에 대한 1군 코칭 스태프의 평가가 나쁘지는 않았나 보다.


“어...”

편하게 웃고 떠들다가 감독실을 나왔는데 복도에 마이너리그 선수 4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어렴풋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표정이었다.

딱히 개인적으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기에 가볍게 인사하고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들은 한 명씩 감독실로 들어가서 [통보]를 받는 모양이었다.


“캠프에서 애썼는데... 미안하네. 구단 사정상 어쩔 수 없게 되었어...”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듣겠지.


그날 저녁.

우리는 캠프 마지막 날 행사로 장기자랑과 바비큐 맥주 파티를 했다.

오후에 일부 선수들을 방출시키고 저녁에는 나머지 선수들끼리 파티를 한다는 게 가혹했지만 남은 자들은 또 한 시즌을 함께해야 했기에 놀고 먹고 웃으며 캠프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다음 날 아침.

캠프 주차장은 자대배치 받고 각자 부대로 떠나는 훈련소처럼 번잡했다.


“에반스. 시즌 중에 꼭 더블A로 올라와라. 기다릴게.”

“건우.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동안 정들었던 싱글A, 더블A, 트리플A 선수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고물 버스를 타고 소속 지역으로 이동했다.

싱글A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머틀 비치, 트리플A는 버지니아의 리치먼드, 내가 속한 더블A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그린빌이다.


“... 다음 시즌에도 이곳에서 봄을 보내게 될까?”


플로리다를 떠나며 창가에 비치는 새벽 풍경을 물끄러미 보았다.

뉴욕 양키스의 탬파 캠프와 LA 다저스의 베로비치 캠프의 풍경도 떠올랐다.

다음 시즌에는 내가 그곳 중 하나에 있을지도 몰랐다.

슈어홀츠 단장에게 단단히 찍혔으니까.

서부 팀들이 주로 가는 애리조나 캠프도 궁금했다.

나는 이 미국 땅에서 아직 경험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그린빌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음. 버스로 10~11시간쯤?”

“젠장.”


고달픈 마이너 라이프의 재시작이었다.


***


그날 오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군 선수단은 어젯밤 최고급 호텔에서 캠프 해단식 파티를 하고 오늘 아침 전세기를 타고 플로리다에서 1시간 만에 날아와 해산했다.

콕스 감독과 코칭스태프는 브레이브스 구단 사무실에 가서 슈어홀츠 단장과 이번 캠프 브리핑을 했다.

투수진과 야수진에 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가던 중 백건우가 언급되었다.


“백건우는 한 마디로 매버릭입니다.”


콕스 감독이 운을 띄웠다.

매버릭 Maverick은 독립성과 개성이 강한 야생마 같은 사람을 뜻했다.

팀워크를 망치는 인간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있었다.


“그렇게 주도적으로 승부를 끌어가는 루키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시범 경기라고 해도 말이죠.”

“백건우가 기존 팀에 끼칠 악영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슈어홀츠가 물었다.

그는 여전히 백건우에 부정적이었다.


“그것이 관건입니다. 백건우가 1군에 들어오면 반드시 팀은 변할 겁니다.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말이죠.”

“우리 브레이브스는 이미 완벽한 팀입니다. 특히 투수진은 빅리그 역사상 최고로 평가받고 있었죠. 마무리 존 로커가 빠지기 전까지는요.”

“...”

“그런 안정된 투수진에 굳이 불안정한 투수를 집어넣을 필요가 있을까요?”


슈어홀츠의 말에 콕스가 부정도 긍정도 아닌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레오 마조니 투수 코치가 나섰다.


“단장님 말씀대로 우리 브레이브스 투수진은 역대 최고가 맞습니다. 언제나 계산이 나오는 투수진이죠. 하지만 야구는 통계가 아닙니다. 가끔은 계산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주로 포스트시즌에요.”

‘!’


마조니 코치의 말에 모두가 움찔했다.

90년대 최강팀 브레이브스가 일부에게 비웃음을 사는 이유가 바로 [포스트시즌에 약하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그걸 단장과 감독 앞에서 대놓고 언급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감독님 말씀처럼 백건우는 매버릭의 속성을 지닌 선수입니다. 아직 약점도 있고 실력도 들쑥날쑥하지만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멩이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는 엄청난 에너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번 시즌 더블A에서 잘 갈고 닦으면 시즌 막판에 반드시 쓰임새가 있을 겁니다.”


마조니의 얘기는 9월 1일 빅리그 확장 로스터 적용 전까지 백건우를 마이너에서 성장시켜 막판 순위경쟁과 포스트시즌에서 써먹자는 뜻이었다.

슈어홀츠는 뭔가 생각하다가 이렇게 반박했다.


“백건우는 선발 보직을 고집하고 있잖아요? 제가 볼 때 우리 마조니 코치님이 이룩하신 완벽한 선발 로테이션에는 백건우가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데요?”

“지금 상황에선 그렇죠.”

“그럼. 코치님이 그 고집불통 매버릭을 설득해서 구원투수로 써먹을 수 있다는 뜻인가요?”

“... 그렇습니다.”

“확실하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지금 저는 존 로커를 대신해서 우리 뒷문을 책임질 일급 마무리 투수를 물색하고 있거든요. 구단주님께 추가 예산 집행을 부탁할 예정입니다.”

“아...”


야구단의 신 구단주가 언급되자 콕스 감독과 마조니 코치도 긴장했다.

신이 감독과 코치의 목을 날려버리는 건 코를 푸는 것만큼 간단했으니까.


“코치님이 그토록 백건우를 인정하신다면 저도 코치님을 믿고 추가 예산 집행을 일단 미루겠습니다.”

“... 그러시죠.”


마조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슈어홀츠는 예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아 불만이었지만 더 언급하지는 않았다.

마조니는 투수와 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코치였기 때문이다.

마조니 코치는 졸지에 백건우와 한배를 타게 되었다.


***


“어...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백건우는 불편한 버스에서 겨우 눈을 붙였다가 깨어났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버스 밖 풍경이 플로리다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LA의 야자수, 아이다호 감자밭이나 네브라스카의 황량한 들판, 오하이오 옥수수밭과는 또 다른 녹색으로 물든 정겨운 시골 풍경이 펼쳐졌다.


“도착했다. 다들 내려라.”


고물 버스를 타고 10시간을 달린 끝에 목적지 그린빌에 내렸다.

이제는 어두워져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이 좋았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린빌.”


백건우는 이 도시가 자신에게 행운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


2주 후.

더블A 서던 리그 홈 개막일 아침.


그린빌 브레이브스의 제1선발 에이스로 낙점된 나는 숙소인 호텔에서 꿀잠을 자고 일어나서 로비로 내려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건우 씨~”

“안녕. 메리. 당신도 어제보다 더 예뻐 보여요.”


불타는 금발에 주근깨가 귀여운 호텔 직원 메리가 건치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건우 씨~ 오늘 경기 잘하세용~”

“메리는 응원 안 와요? 이거 서운한데~”

“일 때문에요. 대신 라디오로 들으며 응원할게요. 꼭 이기세요.”

“물론이죠. 오늘 승리의 공을 당신에게 선물로 줄게요. 있다 봐요~”

“정말요?”


메리에게 손을 흔들며 호텔을 나섰다.

나는 어느새 2주 만에 남부 지역 특유의 억양을 장착하게 되었다.

그린빌에 와서 2주 동안 휴식을 취하며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미국 남부지역에는 남부의 환대(Southern hospitality)라는 특유의 문화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아. 반가워요.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세요~ 야구장에도 놀러오시구요~”

“어머. 당신 야구 선수에요?”

“그렇습니다. 그린빌 브레이브스 소속 투수에요. 오늘 오후 개막전에 등판합니다.”

“멋져라. 저는 선약이 있어서 못가지만 저의 남편에게 가보라고 할게요. 남편이 못 말리는 야구광이거든요.”


지금 나와 정겹게 대화를 나눈 사람은 생판 모르는 길 가던 백인 아줌마였다.

호텔을 나와서 야구장으로 걸어가는데 그냥 마주 오던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한동안 서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이 동네는 모두가 이런 식이다.


2주 전.

그린빌에 왔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꾸 나한테 말을 걸어서 당황했었다.

한국에서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혹시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 포교하는 건가?”

경계도 하고 의심도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냥 남부의 문화였고 분위기였다.

마치 디즈니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동네 곳곳에 퍼져있었다.

보이시와 시더래피즈 사람들이 순박하면서 좀 수줍었다면 이 동네 사람들은 MBTI로 따지면 E였다.

그것도 슈퍼 파워E.


“마스터! 오늘 컨디션 괜찮아?”

“당연하지. 호세. 너도 준비됐지?”

“응!”


야구장까지 걸어오며 동네 사람들과 몇 번이나 인사를 나누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이런 환대가 고맙긴 한데 좀 피곤하기도 했다.

시합 전에는 멍한 상태로 에너지를 아끼고 싶은데.


“건우. 나는 이 동네를 빨리 떠나고 싶어.”

“왜?”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어. 오해는 하지 마. 이 사람들이 싫은 건 아니니까. 근데... 역시 적응이 안 돼.”


호세도 불만(?)을 토로했다.

녀석도 처음 남부에 오면서 인종차별을 당할까 걱정을 했었다고 한다.

베네수엘라인이지만 흑인 피가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차별은커녕 셰어하우스 주인이 호세와 중남미 선수들을 물심양면으로 너무 잘 챙겨줬다.

주인집으로 불러서 고기도 먹이고 영어도 알려주며 잘해주었다.


“나는 빈민가 출신이야. 어릴 때 길에서 사람이 죽는 것도 여러 번 봤어. 그 거리를 탈출하는 길은 야구밖에 없다는 걸 깨달고 필사적으로 야구에만 매달렸어. 그런데 여기에 있으면 내 몸에서 그 긴장감이 빠져나가는 것 같아. 불안해.”

“호세. 너의 심정을 이해해. 하지만 1년 내내 긴장한 상태로 야구를 할 순 없어. 빅리그에서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해. 미국은 넓고 다양하니까.”

“마스터 말이 맞아.”

“덕분에 영어 실력도 부쩍 늘었잖아. 자! 가자! 남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거야. 우리 둘이서.”


나는 호세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남부인들의 그라운드로 나갔다.


[그린빌 브레이브스 대 잭슨빌 선즈]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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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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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겁쟁이 사자와 오즈의 마법사 NEW +9 6시간 전 2,393 119 12쪽
50 땅콩 더 줘 +8 24.09.18 4,978 213 11쪽
» 남부의 환대 +11 24.09.17 6,139 218 12쪽
48 타격이 +10 상승했습니다 +11 24.09.16 6,832 243 12쪽
47 좋은 리듬이야 +7 24.09.15 7,715 250 12쪽
46 여기는 너의 놀이터가 아니야 +18 24.09.14 8,127 24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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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이것이 강철 멘탈의 비결 +9 24.09.10 9,815 291 12쪽
41 배트보이까지 그를 따르더군요 +9 24.09.09 10,175 316 12쪽
40 왜 이름이 낯익지? +12 24.09.08 10,502 289 11쪽
39 건방진 뉴요커 녀석 +9 24.09.07 10,524 28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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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로커와 세탁소 +10 24.09.05 10,633 305 12쪽
36 메이저리그 최악의 남자 +7 24.09.04 10,891 289 12쪽
35 마이너리그의 법칙 #3 +6 24.09.03 10,853 290 12쪽
34 종이 한 장의 공포 +9 24.09.02 11,036 284 12쪽
33 플로리다의 3월 하늘 +9 24.09.01 11,283 287 12쪽
32 언더핸드 투수의 평범한 패스트볼 +12 24.08.31 11,470 297 12쪽
31 마이너리그의 법칙 #2 +5 24.08.30 11,301 28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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