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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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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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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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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 더 줘

DUMMY

50화












[사우스 캐롤라이나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생중계해드리는 99시즌 서던 리그 개막전 경기. 그린빌 브레이브스와 잭슨빌 선즈가 맞붙습니다.]


화창한 토요일 오후.

그린빌 홈구장에는 조촐한 개막전 행사가 진행되었고 팬들이 찾아와 내야석을 가득 메웠다.

시골 마을 축제 같은 푸근한 공기.

그린빌이란 이름답게 완만한 초록 언덕이 있는 작고 아름다운 야구장이었다.


[오늘 해설에는 우리 브레이브스의 영웅이자 메이저리그의 전설 필 니크로 옹이 특별히 나와 주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니크로. 우리 그린빌 사람들에게 인사 한번 해주시죠.]

[반갑습니다. 여러분.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허허허.]


필 니크로가 중계석에서 관중석을 향해 인사를 하자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곳 그린빌은 애틀랜타와 가까웠고 같은 브레이브스라는 이름을 쓰는 팀답게 다른 마이너 구단들에 비해 [원 팀] 의식이 강했다.

그린빌 사람들은 그린빌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두 팀을 동시에 응원했다.

두 팀이 싸울 일은 없으니까.


[니크로 옹께서 이렇게 마이너리그 경기 해설을 자청하신 이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번 시즌 우리 그린빌에서 뛰는 백건우 선수 때문입니다.]

[건~ 우~ 팩? 이렇게 발음하는 거 맞죠?]

[맞습니다. 그는 한국인으로 이번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투수입니다.]

[그 외국인 투수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이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바로 그가 너클볼러이기 때문입니다.]

[언더핸드 투수로 알고 있는데요. 그가 너클볼을 던진다구요?]

[그렇습니다. 저도 그의 투구를 보고 나서야 언더핸드로 너클볼을 던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백건우의 투구를 꾸준히 챙겨 보고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분명히 있지만 머지않아 우리 브레이브스를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할 거라고 믿습니다.]

[미스터 니크로. 우리 브레이브스를 대표하는 쟁쟁한 투수들이 너무 많잖아요. 설마 그런 수준까지 성장한다는 겁니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같은 너클볼러로요. 저는 너클볼러 투수가 월드시리즈 마지막 이닝에서 마지막 타자를 너클볼로 잡아내고 우승하는 장면을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백건우 선수가 좀 부담스럽겠네요. 자. 마운드에 백건우가 올라왔습니다. 키도 작지 않고 팔도 길어 보이고... 동양인 치고 신체조건이 나쁘지 않네요.]

[저기에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과 유연성까지 갖췄으니 축복받은 육체라고 봐야죠.]

[... 니크로 옹께서 정말 좋아하시네요.]


1회초.

나는 깨끗한 마운드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니크로 옹이 경기 전날 나에게 전화해서 오늘 나 때문에 해설하니까 잘하라고 격려를 해주었다.

캠프에서부터 그 양반의 집착이 좀 부담스러웠지만 고맙게 받아들였다.

앞으로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나에게 집착하고 나를 격려하고 응원하며 자신의 꿈을 투사할 거다.

이 시대의 프로 스포츠 스타는 그런 이유로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것이다.


“오히려 좋아.”


필 니크로 옹 덕분에 나는 첫 등판부터 [니크로의 후계자]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야구장에 모여든 그린빌 사람들도 기대가 컸다.

오늘 잘하면 나는 한 번에 그린빌의 스타가 될 수 있다.


[백건우가 와인드업 없이 간결한 셋 포지션에서 초구를 던집니다! 아!]

뻐어어어엉- !

“스트라이크!”

“역시...”


첫 타자 글레스피에게 바깥쪽 낮은 직구를 던졌다.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주심이 잡아주었다.


“웰컴 투 마이너리그인가...”

뻐어어엉! 뻐어어엉- !

[타자 헛스윙! 3구 삼진 아웃! 아웃 로만 집요하게 노려서 타자를 잡아냅니다. 톰 글래빈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언더핸드 공 궤적은 타석에서 더 낮게 보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타자들은 그냥 서서 당할 겁니다.]


나는 글레스피가 다음 타자 존슨과 이야기 하는 걸 지켜보았다.

보기보다 공이 낮게 보인다고 알려줬겠지.


뻐어어엉-! 뻐어어엉!

[또 삼진 아웃입니다! 이번에는 스트라이크를 하나도 안 던졌어요. 낮은 유인구로만 타자를 요리합니다.]

[메이저 캠프 마지막 등판 때보다 공이 살아있네요. 지난 2주간 회복을 잘 해낸 모양입니다.]


나는 그린빌에서 2주 동안 공을 한 개도 던지지 않았다.

메이저 시범 경기에서 평소보다 공을 강하게 던지며 몸에 부하가 걸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 계속 공을 던졌다가는 시즌 중반에 탈이 날 것이 분명했다.


대신 호텔 수영장에서 아쿠아 워킹을 했다.

물속을 어그적 어그적 걷는 동작이 폼 나지는 않았지만 런닝에 비해 뼈와 관절에 부담이 가지 않았고 물속에서 자연스럽게 몸 전체를 쓰게 되어 언더핸드 투수에게는 최적의 운동이었다.


[3번 코르도바가 좌타석에 들어섭니다. 지난 시즌 빅리그 경험도 있는 강타자 유망주입니다.]

척-


이젠 타석에 서 있는 자세만 봐도 타자의 견적이 나왔다.

이 녀석은 강한 놈이다.

하지만.

나는 마이크 피아자를 상대했던 사람이다.


파아아앙- !

[드디어 나왔습니다! 백건우의 언더핸드 너클볼! 타자 헛스윙!]


타자의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나는 포수 호세에게 공을 받자마자 바로 또 너클볼을 던졌다.


“볼!”

[이번에는 볼입니다. 하지만 흔들리는 무브먼트가 엄청나네요. 저걸 어떻게 칩니까?]

[게다가 궤적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잖아요. 타자에게는 악몽일 겁니다.]


파아아앙- !


나는 타자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몰아붙이다가 풀 카운트에서 6구를 던졌다.


[아! 한가운데! 타자가 멍하니 지켜봅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에는 너클볼도 아니고 그냥 느린 볼이었어요.]

“와우! 대단하네!”

“저 동양인 투수 배짱이 장난 아니야.”


3연속 삼진을 잡고 마운드를 내려가자 그린빌 팬들이 환호했다.

스스로 좀 놀랐다.


빅리그 타자들과 치열하게 대결했던 경험 + 2주간의 휴식 + 2주간의 아쿠아 워킹 회복 훈련.


세 가지 요소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나의 투수 레벨이 확 올라갔다.


따아아악- !

[3번 타자 호세가 바깥쪽 공을 밀어칩니다! 우측 담장~~~ 넘어가는 투런 홈런! 그린빌이 1회부터 2대0으로 앞서갑니다!]

[잭슨빌 0 대 2 그린빌]


타격에서는 호세가 빛을 발했다.

환호하는 그린빌 사람들은 몰랐다.

호세가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어서 야구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는 걸.


“어라. 그게 뭐야? 뭘 먹고 있냐?”

“건우. 너도 먹어볼래?”


우리 팀 공격 때 더그아웃에 앉아있는데 후보 선수들이 종이컵에 든 땅콩을 먹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땅콩이 껍질째였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명물 삶은 땅콩이야. 이렇게 입으로 껍질을 까서 쏙 빼먹으면 돼.”

“오오. 이런 게 있었어?”


동료들이 시키는 대로 땅콩을 까먹어보니 완전 별미였다.

육수에 삶았는지 짭쪼름한 맛과 고소한 맛이 어우러져 계속 먹게 되었다.

한국이었으면 바로 [마약 땅콩]이란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다.

미국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가는 DEA에 체포당하겠지만.


“건우. 여기서 끝이 아니야. 땅콩을 씹어준 후에 이걸 빨아줘야 남부의 별미가 완성된다구.”

“그래?”


동료들이 건넨 건 시원한 아이스티였다.

아이스티가 미국 남부지역의 전통 음료라는 걸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한국의 식혜나 수정과라고 할까.

어쨌든.


“오! 죽인다! 이건 마성의 조합이야.”


단짠은 미국에서도 진리였구나.

짭쪼름한 땅콩을 먹고 복숭아 향기가 나는 달콤한 아이스티를 빨자 입안에서 천국이 완성되었다.

삶은 땅콩과 남부식 아이스티는 무조건 나의 프랜차이즈 식당 메뉴에 넣기로 했다.

삶은 땅콩은 웰컴 푸드로 해도 좋을 듯.

메뉴 이름도 정했다.

[남부의 환대 땅콩].


“건우. 땅콩 그만 까먹고 마운드로 올라가.”

“네. 네.”


마이클 코치님이 뭐라고 했지만 목소리는 누그러져 있었다.

오늘 나의 투구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10킬로 증량 후 흔들렸던 나의 제구력이 아쿠아 워킹으로 영점이 잡혔다.


척-

“그럼 잭슨빌 잡으러 가볼까.”


나는 삶은 땅콩 국물이 묻은 손가락으로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다.


[4회초. 이제 3대0으로 뒤진 잭슨빌의 2번째 타순이 시작됩니다. 백건우가 선발 투수로 자질이 있는지는 이제부터 판가름이 납니다.]

[제가 지켜본 백건우는 누구보다 전략적인 투수였어요. 분명히 경기 전에 대책을 세웠을 겁니다.]


따아아아악- !


첫 타자 글레스피가 초구를 때렸다.

잘 맞은 듯 보였던 타구가 약해지며 중견수 스미스에게 잡혔다.


따아아악- !


다음 타자 존슨도 초구 공략.

2루수 윌리엄스가 땅볼을 잡아 1루로 던졌다.


[아웃! 공 2개로 투아웃을 잡아냅니다. 이번 회에 투구 패턴이 바뀐 거죠?]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아껴둔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고 있어요. 두 타자가 포심 패스트볼 타이밍에 배트를 내밀다가 당했습니다.]


잭슨빌 최강타자 코르도바가 좌타석에 들어섰다.

그는 첫 타석의 굴욕을 갚아주고 싶은지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아! 몸쪽에 위험해요!]

뻐어어엉- !

“볼!”


나는 좌타자 옆구리로 스크류볼을 붙였다.

코르도바가 놀라서 피했는데 마지막에 꺾이며 존을 살짝 빗나갔다.

“쳇.”

미국에 와서 가장 불만은 몸쪽 판정이 짜다는 거다.

이건 마이너, 메이저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는 바깥쪽 승부를 권장하는 모양이다.


파아아앙- !

[2구로 너클볼을 던집니다! 코르도바 스윙!]

따아아악- !

“파울!”


너클볼을 맞추는 것만 봐도 보통 이상의 타자였다.

하지만 나는 이 친구보다 더 뛰어난 좌타자들을 상대해봤다.


[백건우 3구! 아! 또 몸쪽이에요! 코르도바 스윙!]

따아아악- !


나는 몸쪽에 투심 패스트볼을 붙였다.

스크류볼의 잔상이 남아있던 코르도바의 스윙이 살짝 늦었다.

빗맞은 타구가 마운드로 굴러왔다.


[투수. 잡아서 1루로 여유 있게 송구~~~ 아웃! 삼자 범퇴! 4회까지 퍼펙트를 이어가는 백건우!]


나는 마운드를 내려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땅콩 더 줘~”


***


이날 나는 5이닝 무안타 무실점 무볼넷을 기록했다.

더 던지고 싶었지만 마이클 코치가 불허했다.


“건우. 이제 시즌 첫 경기야. 절대 무리하면 안 돼.”


나는 아이싱을 하고 더그아웃에 앉아서 삶은 땅콩을 까먹으며 아이스티를 홀짝였다.

그렇게 맛있던 땅콩에서 막판에 쓴맛이 났다.


[경기 끝났습니다! 잭슨빌이 그린빌을 상대로 경기 후반 대역전극을 벌이며 4대7로 승리를 거둡니다. 그렇지만 1회부터 5회까지 눈부신 투구를 보여준 투수 백건우는 대단했습니다.]


내가 마운드를 내려오고 잭슨빌이 강팀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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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연휴 마지막 날 보내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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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겁쟁이 사자와 오즈의 마법사 NEW +9 6시간 전 2,395 119 12쪽
» 땅콩 더 줘 +8 24.09.18 4,979 213 11쪽
49 남부의 환대 +11 24.09.17 6,139 218 12쪽
48 타격이 +10 상승했습니다 +11 24.09.16 6,832 243 12쪽
47 좋은 리듬이야 +7 24.09.15 7,715 250 12쪽
46 여기는 너의 놀이터가 아니야 +18 24.09.14 8,127 241 11쪽
45 로켓맨이 로켓 쏘는 소리 +9 24.09.13 8,686 24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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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배트보이까지 그를 따르더군요 +9 24.09.09 10,175 3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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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메이저리그 최악의 남자 +7 24.09.04 10,891 289 12쪽
35 마이너리그의 법칙 #3 +6 24.09.03 10,853 290 12쪽
34 종이 한 장의 공포 +9 24.09.02 11,036 284 12쪽
33 플로리다의 3월 하늘 +9 24.09.01 11,284 287 12쪽
32 언더핸드 투수의 평범한 패스트볼 +12 24.08.31 11,470 297 12쪽
31 마이너리그의 법칙 #2 +5 24.08.30 11,301 28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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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것이 대약물 시대 +9 24.08.28 11,560 28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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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술탄 오브 스윙 +12 24.08.26 11,537 290 12쪽
26 불맛 콘치즈 +6 24.08.25 11,584 288 12쪽
25 빗속의 쇼생크 탈출 +7 24.08.24 11,669 309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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