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
주말.
역시나 출근도 해야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오늘은 정시은과 만나기로 했다.
연락했을 때 혹시나 정색하면서 누구냐고 물을까 걱정했다.
[나] : 안녕하세요.
[정시은] : 누구시죠?
[나] : 잘못 보냈네요. 죄송합니다.
[정시은] : 농담이에요. 존대하길래 모르는 척해봤어요.
[나] : 저··· 연락은 해야 할 거 같아서.
[정시은] : 저랑 한 약속. 기억하고 계셨네요?
그렇게 성사된 약속.
주말에 영화라도 보자고 했다.
[정시은] : 영화요? 0.0
[나] : 싫은··· 가요?
[정시은] : 아뇨. 뭐 이것도 색다르고 좋네요.
영화관에서 보기로 했다.
이렇게 정식으로 데이트한 지도 얼마나 오랜만인지.
미영이와 데이트했던 게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대학 다니던 시절에 돈도 없고 학업에 쫓기다 보니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조금 이상한 커플이었다.
서로의 꿈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기로 했었다.
데이트도 도서관이나 공부방에서 했고.
쉬는 날에도 자취방에서 함께 공부하거나 건설적인 일을 계획했다.
우리 집은 유복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알바도 해야 했다.
과외를 몇 탕 뛰면 사실상 미영이와 데이트할 시간은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정시은이었다.
그녀는 파마한 백금발 머리를 푼 채로 옅은 분홍빛의 블라우스와 테니스 치마에 스니커즈를 매치했다.
혼혈이라 그런지 눈동자도 푸른빛이 옅게 물들어 있었다.
생전에 본 적도 없는 이국적인 외모에 마치 내가 이세계에 있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 이건 현실이 아니구나.
이렇게나 젊고 예쁜 여자가 왜 나 같은 사람을 만날까?
그런 생각이 들려던 찰나.
“반가워요. 정시은이에요.”
손을 내미는 그녀.
그리고 얼떨결에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네··· 차우진입니다.”
“아직도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미안합니다.”
“뭐. 그럼 어때요. 새로 시작하고 좋죠. 어바웃 타임 보셨어요? 거기서 주인공이 블라인드 데이트에서 이상형을 만나잖아요. 근데 능력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잖아요.”
긍정적인 여자다.
기억이 나지 않는 남자에게 신선하게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다독여 주는 여자.
“새로 시작해 보죠, 뭐.”
“하하. 긍정적이네요.”
“제가 쫌.”
얄궂은 표정을 짓는다.
귀엽네, 쫌.
“아차! 저··· 먼저 할 말이 있거든요.”
“네. 뭐든지요.”
“나중에 사기당했다고 하실지 모르니까요.”
“음. 그건 들어보고 판단하죠.”
“속이려던 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것만 알아주세요. 저 이혼남이에요.”
보통은 질색할 거다.
특히 이런 멋진 여자라면 더더욱.
한 번 다녀온 사람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요?”
“네?”
“위로가 필요하신가?”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라도 모르셨다면. 지금이라도 도망치시라고요. 10초 드릴게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아마 인사불성일 때의 나는 이혼남이었다는 건 얘기 안 한 모양이었다.
정시은은 나를 그저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10, 9, 8, 7, 6, 5, 4, 3, 2, 1.”
카운트가 끝날 때까지 그녀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몸이 점점 내가 있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점점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를 살짝 올려다본다.
내 키가 180cm 정도니까 168cm? 정도 되는 거 같은데.
“짠. 도망 안 쳤어요. 그러니까 우진 씨도 도망치면 안 됩니다?”
“예? 진짜 이혼남이라서 싫진 않아요?”
“바람피웠어요? 아니면 도박? 범죄라도 저질렀어요?”
“아니요.”
“근데 뭐가 문제에요?”
와아.
남자인 내가 봐도 박력 있고 멋있다.
이런 여자도 실제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구나.
“이혼을 했다는 건 어쨌든 관계를 실패했다는 거고. 또 실패할 확률도 높다는 거니까요.”
“진짜 인연을 못 만났던 거겠죠. 혹시라도 나중에 영~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면 되죠. 누가 결혼해달래요?”
“하하. 그런 건 아니죠.”
“전 지금 우진 씨가 꽤 맘에 들거든요.”
“어떤 점이요?”
“잘생겼어요. 착하고. 그냥 막 끌리기도 하고. 그중에 제일은 그것도 잘하고.”
“그것이라면?”
갑자기 정시은이 시늉이라도 내려는 듯이 몸을 움직이자 나는 황급히 수습했다.
“아, 알겠어요! 보여주지 않아도 됩니다.”
“푸흡. 제가 뭘 할 줄 알고요?”
“뭘 할지 모르겠어서 더 무서웠거든요?”
“이런 점도 귀엽고. 그래서 좋아요.”
고백을 깜빡이도 켜지 않고 들어오네.
당황스러운 감정을 추스르며 괜히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저 저녁에 수업 있거든요.”
“그래요? 전 없는데.”
“학생이라서 좋겠네요.”
“누가 학생이에요?”
“당신이요.”
“나?”
“너요.”
지난번에 수업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그래서 대학교 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고등학생은 아니겠지.
나 설마 철컹철컹?
“나 학생 아닌데?”
“그래요? 그럼···.”
“저 수업 가르쳐요.”
“아. 과외?”
“아뇨.”
“음. 그럼 석사생?”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한 최대한 이었다.
“저 한국대에서 가르쳐요.”
시간강사인가?
혼혈인 걸 보면 영어 강사 뭐 이런 건가.
“시간강사요?”
“아뇨.”
“그럼···.”
“저 교수예요.”
“···.”
너무 해맑게 웃으며 말해서 현실감이 떨어졌다.
한국대라면 내가 졸업한 모교.
거기서 교수로?
“무슨 과목인데요?”
“국어국문이요.”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 전공이 국어국문이었다.
그리고 백도현 교수 때문에 요즘은 연락을 꺼리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어국문 쪽은 훤했다.
그런데 거기서 이렇게 젊고 예쁜 교수가 있다는 걸 내가 모른다고?
말도 안 되지.
지금 조교로 일하는 녀석들이 나한테 콧김을 뿜으며 자랑했을 텐데?
“저··· 그런 교수님은 제가 본 적도 없는데요?”
“그래요?”
“저 한국대 국어국문과 나왔거든요. 석사도 거기서 했어요. 물론 수료까지만.”
“이런 우연이? 어쩌면 운명?”
“하, 하하. 농담하지 말고요.”
누구라도 믿지 못할 거다.
내가 다닌 학교에 나보다 어린 사람이 대학교수라는 걸.
구라를 쳐도 적당히 쳐야지.
“진짠데?”
“흐음. 전 믿기 어렵겠는데?”
“우진아.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기독교십니까?”
“아뇨. 무교예요.”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끌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이혼한 직후에는 한동안 여자를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여자를 믿지도 못하겠고.
약간의 혐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영이에게 배신을 당하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여자가 나를 배신한 것만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박미나 쌤이 접근했을 때 거부감이 확- 들었었다.
그런데 정시은 이 여자.
이 여자는 달랐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근데 우리 이렇게 영화관 앞에서 계속 서 있을 거예요?”
“아! 죄송해요. 혹시 보고 싶은 영화 있어요?”
“흐음. 영화는 됐고. 딴 데 갈래요?”
“어디요?”
“재밌는 거 하러.”
“카페 갈까요?”
“으응~ 거기 말고.”
“그럼··· 쇼핑?”
“쇼핑 극혐.”
“하, 하하. 그럼··· 맛있는 거 먹을까요?”
“아직 배 안 고파요. 뭔가 격렬한 운동이라도 하고 싶은데.”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음란마귀가 끼어들었다.
격렬한 운동이라니.
“그, 그건 좀···.”
“음? 무슨 생각한 거예요?”
“예? 제가요? 뭐, 뭐요. 왜?”
“일단 따라와요. 운동을 해야 밥을 먹죠.”
씨익- 웃는 정시은.
그렇게 그녀의 손에 붙들린 채로 나는 어딘가로 끌려갔다.
*
“아흣.”
“허억··· 허억···.”
“거기 아니에요. 잘 좀 조준해 봐요.”
“허억··· 허억··· 이렇게요?”
“맞아요. 거기. 거기로.”
철썩.
“대박! 100점 돌파!”
우리는 현재 오락실에 와 있다.
실내 농구 게임으로 내기 중.
내가 먼저 시범을 보였는데 100점을 간신히 돌파했다.
“시은 씨 차례에요.”
“넵.”
정시은은 심호흡을 한 뒤에.
농구공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작은 손에 잡힌 농구공은 금방이라도 골대로 빨려 들어갈 준비를 하는 듯했다.
본인이 먼저 하자고 했으니 분명 자신 있는 거겠지.
“스타트!”
그렇게 시작된 게임.
정시은은 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면서 열정적으로 슛을 쐈다.
그리고 최종 스코어는···
2점.
사람이 이런 점수도 받을 수 있구나를 처음 깨달았다.
초등학생도 이보다 점수가 잘 나오지 않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정시은은 당당하게 뒤돌더니 브이를 했다.
자기가 2점 넣었다는 건가?
무슨 세리머니지?
“와아.”
“쩔죠?”
“이런 점수가 나오기도 하는군요? 근데 왜 하자고 했어요?”
“재밌어 보이잖아요.”
“어쨌든 제가 이겼네요?”
“소원 말해봐요.”
“밥이나 한 끼 사줘요.”
“에이~ 뭐야. 그럼 다음에 우리 학교로 와요. 밥 사드릴게요.”
“학교요? 한국대? 저는 거기 학식이라면 치가 떨리는데요?”
“그래요? 메뉴 진짜 잘 나오던데?”
아무리 맛있어도 똑같은 레시피에 똑같은 납품업체에서 제조되는 음식을 4년 동안 먹으면 미슐랭 3스타라도 물릴 거다.
“그럼. 학교로 한 번 가죠, 뭐. 저도 안 간지 좀 되기도 했고.”
이제 여유도 조금 생겼으니 석사 졸업도 해야 하니까.
오랜만에 후배들도 만나고 싶기도 하고.
딱 하나 걸리는 거라면 거기엔 백도현 교수도 있다는 것.
“네. 오시면 제가 증명할게요. 저 교수라는 거.”
“하하. 그러세요.”
젊은 나이에 시간강사나 뭐 대학교에서 가르치면 다 교수라고 뻥튀기 하고 싶은 마음.
나도 다 안다.
근데 나는 지금 그것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어라? 못 믿는데?”
“믿을게요. 믿어요. 담에 연구실 투어도 좀 시켜줘요. 사실 저도 꿈이 대학교수거든요.”
“대박. 우린 운명이었어.”
“이상한 걸로 자꾸 엮지 말고요.”
“나 배고파요.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정시은은 팔짱을 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농구 게임할 때도 이렇게 좀 하지.
그러면 2점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뭐 드실래요?”
“음. 꼬리곰탕?”
“예?”
“혹시 싫어해요?”
“그건 아닌데···.”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자꾸 이런 음식이 땡기더라구요.”
멋쩍어하는 정시은 때문에라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생긴 건 파스타나 스테이크 썰 비주얼인데.
꼬리곰탕이라니.
반전 매력이네.
“근처에 꼬리곰탕 진득하게 끓이는 집 알아요. 거기로 갑시다.”
“진짜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정시은은 마치 꼬마 다람쥐처럼 작고 귀여웠다.
마음이 힐링 되는 기분이었다.
신령님이 사람한테 받은 마음의 상처는 사람한테 치유받아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딱히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압도적 감사, 신령님.
*
한국대.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교로 알려진 곳이다.
엘리트만 입학할 수 있다는 이 대학교는 진학만으로 탄탄대로가 열렸다고 할 정도.
그런 곳에서 나는 아마 최악의 아웃풋이 아닐까 싶다.
사실 나랑 비슷하게 여기저기서 골골대는 사람도 꽤 있다.
한국대라고 무조건 성공한다는 공식은 사실상 거짓에 가까웠다.
어쨌든.
원래는 한국대에 오는 게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이혼하기 전까지는.
개인적으로 사상 최악의 남자라 할 수 있는 백도현 교수의 직장이 한국대가 된 이후로 나는 모교조차도 달갑게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간과했던 게 있었다.
왜 연관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우진아.”
“미영아.”
미영이도 한국대 졸업해서 백도현 교수와 바람을 피웠다.
그렇다면 당연히 한국대에 가면 미영이를 만날 수도 있다는 걸 왜 생각하지 못했지.
하필이면 우리가 대학 시절 함께 거닐던 벚꽃 거리에서 마주칠 게 뭐람.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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