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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은
작품등록일 :
2024.09.1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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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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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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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DUMMY

회사 대표 집에서의 회식. 얼마 전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의 축하 자리.


이 대리, 석훈은 사모의 닦달에 태어난 지 7개월뿐이 안 된 딸인 수현을 안고는 왔지만, 막상 분유도 안 먹고 울어대 이러지도 저러지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회식 자리가 어수선하니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건 사모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출입이 아직 어려운 어린 것을 굳이 자신이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나.


“으~ 앙! 으으~ 앙!”


자기가 포대기를 안고 다시 한번 분유를 물려 시도해 보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먹지는 않고 어찌나 세차게 울어 재끼는 지 귀가 다 따가울 정도였다.


“수현이가 원래 이렇게 분유를 안 먹나요? 생후 7개월 치고는 너무 가벼운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얼굴이 어두워지며


“네, 너무 안 먹어서 저도 걱정입니다.”


물리면 바로 뱉어내고 다시 물리면 혀로 밀어낸다. 계속 울어 보채기만 하니 숨넘어가겠다. 체온도 재 봤고 기저귀도 확인했다.


‘다른 데는 이상 없는데 그러면 배고파서 우는 건데, 어떡하나, 분유가 안 맞는 것 같은데....’


더는 안 되겠는지 기어이 사모가 다른 방법을 찾는다.


“안 되겠어요. 제가 젖을 물려 볼게요”

“예~ 헤!”

“여보, 뭐 하는 거야!”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젖동냥하겠다는 건데 가만있을 최 대표가 아니다. 남의 자식에게 젖을 물리겠다니 못마땅해 바로 저지에 나선다.


“배가 부른가 보지. 배고프면 먹겠지. 무슨 젖을 물리겠다고 그래!”


생각도 못 한 사모의 결정, 게다가 여간 탐탁지 않아 하는 대표의 반응. 석훈, 당황해서는 얼굴이 시뻘게진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모님. 정말 괜찮습니다. 제가 밖으로 나가서 안고 있으면 그칠 겁니다.”

“아니에요. 배고픈 거예요. 안고 토닥인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배고파 우는데 어른다고 되겠어요. 저도 애를 키우는데 알죠. 어린 게 안 됐잖아요. 엄마 젖도 못 물어보고.”


석훈은 황망해 몸들 바를 몰라 하고 최 대표는 일그러진 인상을 유지한 채 어떻게든 막아보려 재차 만류에 나선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한별이도 젖 먹여야 하는데.”


회사에서는 최 대표가 넘버 원. 집에서는 사모가 넘버 원이다. 게다가 아이를 낳은지 얼마 안 됐으니 모성애 충만한 엄마의 의지를 누가 막겠나.


떠들어라, 나는 한다. 두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꿋꿋하게 수현을 안고 방으로 들어간다.


“아, 아니, 에잇!”


방에 들어간 뒤 1~ 2분이나 지났을까? 숨넘어갈 듯 울어 재끼던 수현의 울음소리가 잠잠해졌다. 20분 남짓이 되자 사모가 나온다. 그것도 혼자.


“어찌나 잘 먹던지. 한별이도 젖먹이고 둘 다 막 잠들었어요.

“사.... 모님...”


석훈은 감격해 눈물이 핑 돈다. 석훈의 아내 지민은 수현을 낳다가 죽었다. 그러니 수현은 엄마의 품이란 걸 느껴보지도 못하고 젖 한번 먹지 못했는데 그걸, 그걸 오늘 사모가 해줬다.


최 대표는 이미 벌어지고 종결된 일, 깔끔히 단념하고 오히려 흡족해한다.


“자, 아이들이 밥 먹었으니 이젠 우리 차례네. 이 대리 뭐해?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앉아.”


최 대표는 잠시 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양 바로 안면 전환하고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며 석훈을 챙긴다.


“이 대리, 뭐 그리 껑충 서 있어. 내 옆으로 와 앉으라니까. 자, 뭣들 해? 제사 지내? 어서들 들자고.”

“네, 사장님.”


석훈이 목이 메어 식사를 못 하고 있자


“으그, 으그, 좀 전에 내가 뭐라 했다고 서운해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울 마누라 때문에 감동해서 그러는 거야?”


뻔히 알면서도 우스갯소리다.


“주접 그만 떨고 밥 먹어. 수현이 이제 한살이야. 시집 보낼 때까지 죽어라 벌일 만 남았어. 밥 먹어야 돈 벌지.”


좀 전에야 늦게 본 아들 사랑이 각별해 젖동냥에 발끈했지만, 최 대표가 누구인가?


가깝게는 사석에서 10살 차이 나는 형님 동생 사이다.


앞을 볼 수없는 지민과의 결혼을 처음에는 고아나 다름없는 석훈을 위해 친형처럼 걱정하며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에는 축복해 주며 결혼식 주례까지 서줬던 분이다.


그렇게 알아 온 지가 10년이 넘었다. 그런 분이 등을 토닥이기까지 하니 더 눈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울기만 해 봐. 기쁜 날에 초 치는 거니. 그러면 내 그냥 안 둬!”


덕분에 울음 쏙 들어가고 석훈도 식사를 즐긴다.


“아휴, 사장님 음식 너무 맛있는데요.”

“아구, 저 저, 까탈스러운 이 주임 입맛에 맞다니 신경 쓴 보람이 있네. 자네들 먹일라고 서울 일류 호텔에서 맞춘 음식이야. 알기나 하고들 들어.”


이주임이 바로 호응한다.


“서울 호텔요? 그 하OO 말씀이죠?”

“어떻게 알았어.”

“아후, 거기 뷔페가 맛있다고 비싸긴 좀 비쌉니까. 어쩐지, 어쩐지, 음식이 달라, 아주 맛깔나더라니. 역~ 시 사장님은 손이 크십니다.”

“우리 아들 탄생 기념인데 뭘 이깟 것 가지고 그래. 기다려들 봐! 울 아들 공부 잘하면 내 손이 얼마나 큰지 제대로 보여줄 테니.”

“김 과장님, 주말에 교회 가서 예수님한테, 도훈이는 불교라 했지? 절에 가서 불공드려. 꼭 ”

“?”

“?”

“뭘 그렇게 쳐다봐요? 사장님 손이 얼마나 큰지 확인 안 해요? 사장님 아드님, 공부 잘하게 해 달라고.”

“아~ 아.”

“하하하, 그래, 그래. 내 손 크기가 얼마나 큰지 직원들에게 꼭 좀 확인시켜 줬으면 좋겠다. 하하하.”

“호호호.”

“하하하.”


식사가 모두 끝나고 직원들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사모님, 오늘 정말 잘 먹었습니다.”

“너무 잘 먹었습니다. 사모님.”

“아, 이 사람들이 초대는 내가 했는데 감사 인사는 왜 죄 다 와이프한테 하는 거야.”

“모르세요?”

“?”

“모르셨구나~ 사장님께서 회사에서나 첫 번째지. 댁에서는 두 번째 서열인걸, 저희는 다 아는데 사장님만 모르셨구나.”

“뭐야! 이 사람들이.”

“하하하.”

“호호호.”

“살펴들 가세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다들 조심히들 가고 주말 잘 쉬어. 월요일에 회사에서 보자고, 2차 가지 말고 그냥 가! 나 자네들 식구들한테 욕먹기 싫으니.”

“네, 네.”


직원들 20여 명이 인사하고 석훈도 그 속에서 인사를 건넨다. 잠든 수현을 안고 돌아서 가려는데 석훈을 잡는 사모다.


“이 대리님, 이거.”


쇼핑백 하나를 건넨다.


“이게 뭔지....”


사모는 살풋 미소 지어 준다.


“수현이 옷 좀 샀어요. 그리고 이거는.”


이번에는 천 가방 하나를 더 건네며 석훈이 옷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전에 한마디 더 붙인다.


“모유 짜 놓은 거예요.”

“예?!”

“가셔서 바로 냉장고에 보관하세요. 내일 오후까지는 다 먹이세요. 먹일 때는 따뜻한 물에 보관 용기 채로 넣어두었다가 온도 체크해서 먹이면 됩니다. 아끼지 마시고 더 보관하시면 안 돼요.”

“아닙니다. 사모님 정말 이건 아닙니다. 아드님도 있는데 제 딸까지... 이러시면 제가 너무 염치가 없습니다.”

‘두 분이 오늘 왜 이렇게 날 울리려 하는지.’


그런데 석훈의 반응이 상반된다. 말은 사양하고 있지만 행동에서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손사래조차 치지 않고 그냥 말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말과는 달리 내심 받아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딸 수현이가 모유를 잘 먹는 모습을 봤으니 염치 불고하고 받아 가고 싶었다. 사장님이 봐서 난리 치기 전에 냉큼 받아 들고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


“가지고 가.”


대표도 알고 있었다.


“울 마나님이 정이 좀 많아. 우리 아들 이름 지어 줘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나 빚지는 거 싫어하잖아. 이걸로 이름값 낸 거다.”


사실이다. 석훈이 사장의 아들 이름을 지었다.


최 대표는 늦게나마 간신히 시험관 시술을 통해 본 아들의 이름을 좀 트랜드하고 간지나게 짓고 싶었으나 작명소의 이름은 죄 다 올드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대리 딸이 수현이라는 이름인 것을 알고 마음에 들어 해 석훈에게 어디서 지었냐고 물었고 자신이 지었고 아들일 경우 한별이라고 지으려 했다는 것을 알고는 한별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 차용해 온 것이다.


대표는 자신의 아들 이름으로 딱이라 생각했다. 성이 최 이니 최 한별. 말 그대로 최고로 빛나는 하나의 별.


사장 내외의 세심한 배려에 또 울음이 차오른다. 목이 메어 바로 감사의 말을 건네지 못한다. 가까스로 입을 떼


“사.... 사장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깟 일로 은혜는 무슨, 아니다 평생 갚아. 우리 회사에서 딴 데 갈 생각 말고.”

“네에.... 엡.”

“수현이 감기 걸리겠어요. 어서 가세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사모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수현이를 안고 있어 90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진심을 담아 연거푸 인사를 건네곤 귀갓길에 나선다.


돌아오는 길, 석훈은 오랜만에 자신의 배도, 딸의 배도, 부녀의 배 모두 빵빵하니 너무나 흡족해한다.


수현은 배가 불러서인지 아까부터 한 번도 안 깨고 편안하게 깊이 잠 들어 있었다.


자는 모습이 어찌나 이쁜지, 깨물어주고 싶고, 보면 볼수록 또 보고 싶어 빠져들게 만든다. 눈을 떼지 못하고


‘천사가 따로 없네.’


그런 수현을 바라보고 있자니 너무나 행복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지금 딱하나, 빈자리 수현의 엄마, 나의 아내, 지민을 그리워한다.


‘지금 당신도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 보고 있지? 우리 수현이 이렇게 이쁘게 잘 있어.

오늘따라....

당신이 너무 보고 싶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본다.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별들이 지민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 사람의 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사모는 수현이 젖을 떼 이유식을 먹기 전까지 모유가 끈기지 않게 제공했다. 그 덕분인지 수현은 잔병치레 없이 무럭무럭 자라 줬다.



****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한별과 수현은 같은 나이에 집안끼리도 아는 사이이니 유치원도 같은 곳을 다녔고 자연스럽게 절친이 된다.


유치원 첫 재롱 잔치


“너는 엄마 없지?”

“....”

“엄마도 없는 게, 애는 엄마도 없대요.”

“수현이도 엄마 있어!!”


수현이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는 모습을 한별이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뜨곤 발끈했다.


“아니야, 수현이는 엄마 없어!”


수현은 친구들 놀림에 어떤 대응도 못한 채 눈물이 그렁그렁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망울이었다.


“아냐, 있다니깐!”


한별, 주먹을 불끈 쥔다. 다른 생각 없다. 수현을 보호하기 위해 그냥 우긴다. 하지만 자기가 이겨 내기에는 보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왜 안 와? 수현이는 엄마 한 번도 안 왔어!”


그렇다고 물러설 한별이 아니었다. 목소리 큰 놈이 여기서는 왕이라는 듯 더 힘주어


“있다니깐, 있어! 수현이도 엄마 있다고!!”


한별과 수현이 알고 지낸 게 얼마인데 어린 나이임에도 한별은 수현에게 엄마가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어쩌려고 저리 막무가내로 우기는지. 뒤는 생각 안 하니 어린애 아니겠나.


한별이 대차다. 유치원이 떠나갈 듯 뺵빽 소리 지른다.


“있다고! 있어!!”

“그러니까 왜 안 오는 데 없으니까 안 오지.”


그때


“수현아!”


모든 아동의 시선이 일제히 쏠리는데 그곳에서는 화려한 빛이 발산하고 있었다. 그 빛을 등에 달고는


“엄마가 늦게 왔지. 간식 싸 오느라 좀 늦었어.”


수현은 울먹이며 달려가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우리 아가, 엄마가 너무 늦게 와서 화났구나.”


수현의 엄마는 너무나 이뻤고 게다가 세련되기까지 했다. 재롱 잔치의 엄마 중에 당연 최고로 아름다웠다.


한별이 시선을 돌려 아이들에게로 향한다. 눈을 치켜들어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기세로 씩씩댄다. 놀린 아이들을 노려보며 폈던 주먹을 다시 힘차게 감아쥔다.


“봐! 수현이도 엄마 있지. 너희들 수현이한테 사과해, 빨랑! 사과 안 하면 내가 때릴 거야!”


아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수현아.... 미안해.”

“너는 왜 안 해!”

“미안해.... 수현아.”


재롱 잔치가 끝나고 점심을 먹고 난 뒤의 취침 시간, 재롱 잔치로 다들 피곤했던지 곧바로 하나둘씩 잠들어 버리는데, 그때 누군가 남자아이들 방문을 스르륵 열고는 들어온다.


그리곤 그 정체불명은 살금살금 기어들어 온다. 그러다 한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수현이었다. 한별이 놀라 입을 떼려 하자 수현은 한별의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대곤


“쉿!”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한별 손에 무언가 쥐여 주고 나간다. 한별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건 사탕 하나.


어린 나이임에도 한별은 수현이 고마워한다는 걸 알았기에 말이 없었어도 그냥 좋았다. 그 마음이 그 마음이었기에, 그래서 마냥 좋았다.


유치원이 끝나고 유치원 차에서 내린 수현을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이한다.


“울 강아지. 오늘 재밌.”


항상 차에서 내리면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는 수현이 오늘은 할아버지를 못 본채 터벅터벅 걷는다.


얼굴은 시무룩한 표정에 입술을 당차게 물고는 고개를 숙인 채 땅만 바라보며 그냥 지나쳐 가 버린다.


“우리 강아지, 무슨 일 있었어?”


할아버지의 물음에도 못 들은 척, 그냥 입만 한 뭉치는 튀어나와 가지곤 집으로 향한다.


처음 보는 울 강아지의 행동, 틀림없이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 없으니, 애만 태운다.


집으로 들어와서도 연이은 할아버지의 질문 공세에 마치 입에 커다란 사탕이라도 넣어놓은 듯 말 한마디 없이 그 좋아하는 딸기도 먹지 않고 곧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곤


“철컥”


이내 문을 잠가 버렸다. 문을 걸어 잠갔으니 들어가지도 못하고 열쇠로 열고 들어가면 되지만 그건 수현이가 원하는 것이 아닐 테니 속만 새까맣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수현이의 행동. 걱정스러워 안절부절이다. 하는 수 없이 확인코자 유치원 선생님께 전화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수현이 할비입니다. 수현이가 오늘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통화를 하고 있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마치 얼음이 얼려지듯 점점 차갑게 굳는다.


7시 퇴근 시간이 되어 석훈이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공주님, 아빠 왔어요!”


바로 반응이 없자


“울 공주님! 수현아! 아빠 왔대도.”


이상하네? 반응이 없다. 수현이에게는 아빠가 최고다. 항상 다정다감하고 자기가 원하는 거라면 다 들어주는 아빠.


그래서 아빠가 오면 달려 나가 껌딱지 마냥 품에 착 안기는 수현, 아빠에겐 하루 중 최고로 기다려지는 이 시간, 그런데 오늘 그 기쁨이 사라졌다.


거실로 들어오며 눈이 사방팔방으로 두리번두리번 수현을 찾는다.


“왔는가.”

“아버님, 수현이 어디 갔어요?

“가긴 어딜, 방에 있어.”

“예?”


석훈은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어보지만, 어찌 된 일인지 문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수현아, 아빠 왔어. 우리 공주님, 아빠 왔대도.”


방 안에 있다는 데 방문은 왜 잠궜고 대답은 왜 없는 건지, 이게 도무지 뭔 일인지


그때 아무 말 없이 아버님이 석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거실로 인도한다. 아버님의 얘기를 다 듣고는 침울한 표정을 짓는 석훈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수현아, 수현아, 아빠가 치킨 시킬 거야. 빨랑 나와. 어떤 맛 시킬까? 우리 수현이 좋아하는 달콤한 맛으로 시킬까?”


수현이 좋아하는 치킨, 하지만 아빠의 기대완 달리 그래도 대답은 없었다.


“아버님, 우리 피자도 시켜 먹어요.”

“으...응, 그러자고 나도 피자랑 치킨이 먹고 싶었는데 나는 양념치킨으로 시켜줘.”


그제야 반응이 온다.


“안 먹을 거야!”


안 먹을 거면 가만히나 있지. 들어달라는 듯 목소리가 앙칼지다. 다물었던 입을 떼게는 했으니 일 단계는 성공.


“수현아, 안 나오면 아빠랑 할아버지가 다 먹을 거야. 빨리 문 열고 나와.”

“나, 엄마 찾아올 때까지 안 먹을 거야!”

“수현아....”


이미 아버님에게 들어서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은 알고 있었던 바지만 그래도 막상 딸의 입에서 엄마를 찾아오라는 소리를 듣자 어떻게 해줄 도리가 없으니 그저 애만 닳아한다.


“왜, 나는 엄마가 없어. 애들은 다 있는데, 한별이 엄마 말고 진짜 엄마 데려와.”

“하.......”


석훈으로서는 되도 않는 생떼이니 긴 한숨만 내뱉었다. 이럴 때마다 지민의 빈자리는 크게 다가온다. 없는 엄마를 어디에서 찾아오겠나, 어쩔 도리가 없으니 결국 다시 설득에 나설 수밖에.


“엄마는 일하러 외국에 갔다니깐 며칠만 더 자고 나면 올 거야. 그러니 우리 착한 공주님 어서 나와.”

“거짓말! 엄마 데려와, 엄마 외국에 없잖아!!”


갑자기 석훈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수현의 방문으로 돌진한다. 그리곤 문고리를 움켜쥐고는


“이 새꺄! 없는 엄마를 어디서 데려와. 이 문 당장 안 열어!”


단 한 번도 수현에게 큰소리나 화를 내 본 적 없는 석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수현과 할아버지는 깜짝 놀란다.


처음으로 들어 보는 큰 호통에 수현이 놀라 울기 시작한다.


“엄마! 엉엉, 엄마”


바로 후회하는 석훈이었다.


‘하.... 내가 왜 그랬지. 내가....’

“이 사람아, 왜 이러나 그 나이에 엄마 찾는 게 당연하지.”

“죄송합니다, 아버님. 저도 모르게 그만....”


아버님도 속이 문드러져 착잡했다.


수현은 그렇게 울다 잠들어 버렸다. 석훈은 아버님과 식탁에 앉는다. 분위기는 커다란 돌이라도 눌러 놓은 듯 무거웠다.


“밥 먹어야지.”

“생각이 별로 없네요.”


힘없어하는 사위가 안쓰러워 눈을 못 떼는 아버님이었다.


“.... 자네, 나랑 오랜만에 술 한잔할까?”


아버님은 주섬주섬 소주와 술안줏거리를 식탁에 꺼내 놓는다.


집안의 행복 덩어리인 수현이 밥도 안 먹고 울다 잠들었으니, 둘의 속은 속이 아니었다. 그 속을 몇 잔의 술이 오고 가며 달랜다.


“..... 아버님, 아버님은 지민이가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보고 싶지 않냐니? 손녀딸인 수현을 위해 잊고 지냈던 아니, 잊으려 애썼던 이름, 나의 소중한 딸 지민.


자식은 부모가 죽으면 무덤에 묻고,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가슴에 고스란히 묻혀 있으니 어디 가지도 않고 이렇게 응어리진 채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 사람아, 잊어야지. 왜 그 이름은 꺼내나.”

“아버님, 얼마나 힘드세요. 제가 수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버님께서 지민이를 생각하는 마음과 같을진대. 저도 자식이 생기다 보니 아버님께서 얼마나 힘드실지 조금은 가늠이 됩니다.”

“허....”


긴 탄식만 내뱉는 아버님이다. 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지금 수현이가 없다는 생각은 정말....”

“그러니까 지민이는 잊고 힘내야지. 수현이도 시간이 지나면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던 아빠를 이해할 걸세.”

“아버님, 그게 안 돼요.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도 그 사람을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 이 사람이.”

“이 핸드폰만 누르면 지민이가, 지민이가 당장이라도 대답할 것 같아요. 집에 올 때면 항상 지민이가 반갑게 맞아 줄 것 같다고요.”


석훈은 지민이 죽은 지 5년이 다 되어 감에도 핸드폰에서 지민의 번호를 지워내지 못했다.


“그러면 어떡하나, 이미 떠난 사람은 잊고 새출발해야지.”


아버님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석훈은 무너져 내린다.


“어떻게 잊어요. 어떻게... 매일 매일 머릿속에서 살아나 웃고 있는데 어떻게 잊냐고요. 흐..흑.”

“하~ 고, 오늘따라 왜 이러나.”


고마웠다. 남들은 죽으면 없었던 사람처럼 금방 잊고 새 사람 찾아서 새살림 꾸리는 게 다반사인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한결같이 내 딸을 잊지 않고 있으니 고맙기가 그지없었다.


그래서 우리 사위가 애처로웠다.


그런 사위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이제는 진정 자기 딸을 잊고 새출발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바랐다.


아버님은 냉정해 지려 애쓴다. 죽은 딸이 떠올라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몇 번의 목 넘김으로 간신히 참아낸다.


손녀딸은 울며 잠들었지. 사위는 이렇게 앞에서 울어 대지. 그러니 나까지 울면 어찌 되겠나? 바로 초상집 된다.


그때


“아빠 치킨 왔어? 나 배고파.”

“어.... 어, 일어났어. 우리 강아지.”


아버님이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재빨리 눈물을 훔쳐낸다.


“우리 공주님, 배고프지. 치킨 금방 온대.”


그렇게 슬픈 상황은 행복 덩어리가 일어나자 바로 종결된다.


사실, 수현은 한참 전에 일어나 있었다. 배고파 깨어나 문을 열고 나가려다 할아버지와 아빠의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수현은 아빠에게 화나 있었다.


남들 다 있는 엄마가 없는데도 단 한 번도 먼저 나서 엄마 얘기를 꺼낸 적이 없고 엄마가 돌아가셨음을 자신도 알고 있는데 매번 몇 날 밤만 자면 온다고 거짓말을 하는 아빠가 미웠다.


가장 미웠던 건 아빠가 엄마를 잊었다고 생각한 건데 둘의 얘기를 듣고는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래서 아빠에게 미안했고 그 어린 나이에도 슬퍼하는 아빠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아빠, 내가 유치원에서 배운 춤 보여줄게.”


그러고는 엉덩이를 실룩실룩,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까지 한다. 둘은 함박웃음 지으며 손뼉까지 쳐준다.



****

한별의 집


“엄마, 어떻게 알았어?”

“아까?”

“응.”

“유치원 문 열고 들어오는데 누가 그렇게 우렁차게 소릴 지르나 했는데 딱 한 번에 알아봤지. 우리 아들 목소리.”

“?”

“아들 목소리이니 뭐라 하는지 자세히 들어 보니까 수현이 편들어 주고 있더라. 그래서 엄마도 수현이 편들어 준 거지.”

“그랬구나”


아들은 생각했다. 엄마는 모르는 게 없구나.


“엄마.”

“응.”

“앞으로도 계속 수현이 엄마 해줘.”

“엉?”

“그랬으면 좋겠어. 나는.”

“그러면 울 왕자님은 유치원에서 엄마가 없는데?”

“나는 괜찮아. 집에 오면 엄마가 있는걸, 수현이는 집에 와도 엄마가 없잖아.”

“진짜로 괜찮겠어?

“으응, 나는 수현이가 놀림 받는 거 싫고 우는 건 더 싫어.”

“친구들이 엄마 없다고 놀리면 우리 왕자님은 어떡하려고?”

“칫! 때려 줄 거야.”

“풉! 호호호, 그럼 안 돼요. 근데 우리 아들 정말 멋지다. 수현이는 좋겠다, 우리 아들이 이렇게 위해주니.”


그렇게 시간이 지나 수현이 중학교 1학년 때 집에 귀가한 석훈에게 아버님이 다급하게 묻는다.


“자네, 지민이 어디 갔나?”

“예?”


갑자기 죽은 지민을 찾아대니 석훈의 눈이 동그래진다.


“수현이 아니고, 지민이요?”

“아, 이 녀석 눈도 안 보이는 데 도대체 어딜 간거야.”

‘하.... 아버님.’


그동안의 행동, 연세가 있으시니 자연스럽게 깜박깜박하시는가보다 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정도가 심해지나 싶더니...


아버님의 치매 증상은 날로 심해졌고 낮에 홀로 남겨 놓을 수가 없으니 결국 수현과 상의 끝에 공기 좋고 시설 좋은 곳의 고급스러운 요양원에 아버님을 모셨다.


석훈의 형편상 무리인 곳에.


싼 곳에는 모시고 싶지 않았다. 언론에서 요양원에 대한 안 좋은 기사를 많이 접한지라, 당연히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혹시나 그 하나가 아버님이 될까 심려됐다.


게다가 직접 모시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스러워했고 미안해했다. 아버님에게도, 특히 죽은 아내 지민에게.


요양 비용은 매달 4백만 원씩 꼬박꼬박 채권자가 독촉하듯 청구되었고 석훈은 정말 소처럼 휴일 없이 일하며 끝까지 아버님을 놓지 않았다.


지민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몰라도 아버님만큼은 절대 놓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

시간이 흘러 수현과 한별은 무탈하게 커 고2가 되었다.


수현은 163cm에 하늘하늘 가녀린 몸매. 주먹만 한 얼굴은 고양이상에 이쁘고 귀여움을 다 가졌다.


중학교 때부터 배운 기타가 수준급으로 특히 노래 솜씨가 빼어나 남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하지만 연애만큼은 새침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도 옆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별은 188cm의 우월한 키, 호수를 담을 듯한 깊은 눈에 오똑한 콧날하며 연예인 후려갈기는 얼굴, 아버지 덕에 부유하게 커 귀티가 철철 넘쳐난다.


공부도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수재로 어렸을 때부터 각종 경시대회에 나가 수상을 휩쓸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남자는 운동 하나쯤은 해야 한다고 해서 어릴 적부터 시킨 유도가 도 대표 선수로 뽑힐 정도로 실력이 특출나다.


여기까지는 전교생들이 다 아는 공개 사항, 하지만 한별에게는 비밀스러운 세 가지 능력이 있었다.


아직 아무에게도 공개되지 않은 능력. OOO와 OO능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OO. 친구들은 물론이거니와 18년을 함께 한 수현도 모르는 한별의 능력.


이렇게 잘났으니 당연히 여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학교에서 한별이는 학교를 대표하는 자랑거리 존재였다.


여자들의 그 많은 관심과 대시에도 한별은 그 흔한 연애 한번 해본 적 없는 모태 솔로. 이유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현만 바라봤으니 딴 여자애들한테 관심이 없어 눈길 한번 준 적 없어 이런다. 그러니 연애는 공부완 별개로 거의 젬병 수준.


수현도 한별은 좋아하지만, 감정을 대 놓고 표현한 적 없고 한별이 다가가려 하면 까칠하게 굴며 벽을 친다. 새침한 성격에 자존심이 강해 번번이 한별의 애만 태운다.


수현의 절친 향미, 엄마의 일 때문에 어릴 때부터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중부 이남 지역만 계속 이사 다니었으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곳저곳의 근본 없는 사투리가 입에 배어 있다.


수현의 절친이기도 하지만 쾌활한 성격 덕분에 한별과도 격이 없다. 틈틈이 수현의 빈자리를 이용해 한별에게 대시해 보지만 역시 번번이 돌아오는 건 무한의 허탈감뿐.


한별의 절친 병길, 유치원 때부터의 친구. 한별과는 달리 공부와는 담쌓은 전형적인 덜떨어진 성격, 보기완 다르게 향미가 전학을 온 날부터 향미만 바라보는 순애보다.


“수학여행이라고 들떠 있지 말고 혹시라도 엉뚱한 짓들 계획했다가는 작살난다는 뜻이 뭔 뜻이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알았어?!”

“....”

“대답들 안 해!”


수학여행 출발에 앞서 담임선생님의 엄포가 귀에 쩌렁쩌렁 울린다. 마지못해 대답들 한다.


“네....”


아산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은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향한다. 선상에서


“수현아, 같이 사진 찍자.”


한별의 말에


“그래.”


둘이 포즈를 취하자 어림없다는 듯 절친 향미가 훅 치고 들어온다.


“으디를 둘만,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즌에는 둘만은 즐대 안된다.”


한별이 언짢은 듯 썩은 표정을 짓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눈치도 없이 그사이 한 놈이 더 끼어들어 온다.


“야야, 나도 나도.”


병길이었다. 즐거운 날 성내며 꺼지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곤


“자자, 찍는다. 하나 둘 셋 하면 찍는다.”


수현을 살짝 꼬집어 신호 주는 한별,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척하면 착이다.


“자~ 하나~ 둘~ 찰칵.”

“야! 셋에 찍는다며”


사진을 확인한다. 역시나 한별과 수현만 환한 미소, 둘은 눈감고 괴물 인상, 둘은 이쁘고 둘만 찐따.


이상하지 않나? 아니 어떻게 약속이라도 한 듯 둘만. 향미 바로 알아챘다. 한쪽 입꼬리를 쳐들고는


“이기! 이기, 이긋 들이 둘이 짰네? 짰어!!”


잽싸게 수현의 손목을 잡고 도망가는 한별


“거 있어라! 내 오늘 니네 둘 잡아가, 물고기들 호강 시켜줄 기다. 서라!”


제주도에 도착한 일행들은 곧바로 제주도 관광에 나서고 해 질 무렵에 숙소로 들어간다. 저녁 식사와 세면을 마치고 선생님들이 점검에 나선다.


“너희들, 수학여행 와서 들뜬 마음 알겠는데 잠 안 자고 헛짓거리들 하다가 걸리면 얄짤 없을 줄 알아. 특히 술 먹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생기부에 적나라하게 기록되기 싫으면 일찍들 자!”


그렇게 선생님은 간담 서늘한 엄포를 던져 놓고 순시까지 도는 통에 꼼짝없이 방에서 핸드폰에만 열중, 어느덧 시간은 열 시로 향한다.


이제 막 지정된 취침 시간이라 모두 취침 준비를 하고 있는데 유독 아홉 명 중의 한 명 병길만이 딴짓에 몰두한다.


취침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란 듯 드라이를 하고 왁스로 머리를 치켜세우는 데 여념이 없다.


이리, 저리로 고개를 돌려 거울 속 자신을 확인하고는 머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려 가며 몇 번에 걸쳐 헤어스타일을 고친다.


마침내 마음에 들었던가 입가에 미소가 쓱 번진다. 그리곤 씨익 웃는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는 친구들이 깔아 놓았던 이불을 동의도 없이 발로 홱 재치더니만 있지도 않은 세 벌의 옷을 꺼내 바닥에 깔아 주욱 늘어놓는다.


한참을 옷이 뚫어져라 응시하고는 고민하는 듯 턱을 괸다.


“음....”


거울 앞에서 몇 번을 번갈아 걸쳐보며 갈아입더니 이번에는 좁을 방안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모델이라도 된 마냥 런웨이까지 선보인다.


아주 가관이다, 가관이야! 이런 뭣 같은 개 코파는 짓거리를 보고 있자니, 순간 여덟 명의 친구는 굶주린 하이에나 가족으로 변신, 우두머리가 신호만 주면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시선 따위는 안중에 없어 한다. 한마디로 신경도 안 쓰인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 한 술 더 떠 콧노래까지 흥얼댄다.


“음♪ 음음♬”


이제 완성이 된 건지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만져 한껏 멋을 낸다.


아아~ 꼴 보기 싫어 돌겠다.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참다못해 여덟 명의 분노를 함축해 한별이 나선다.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가


“야! 이 시간에 뭐 하는 거야. 옷은 뭐고?!”


하지만 병길은 한별의 불벼락을 반사해 내며 이제는 휘파람까지 불어댄다.


“휘~ 휘.”


순간 쌍욕 튀어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지금 한별의 마음 딱


‘이걸 죽여? 살려? 죽인다. 그런데 어떻게 죽일까? 이걸 찢어.’


병길의 눈에 거울 속에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기세의 하이에나 일곱 마리와 그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188cm 길이의 수컷 표범 한마디가 눈에 들어온다.


팔짱을 끼고 뚫어져라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별을 발견했음에도 생까곤 천천히 제 흥에 못 이겨 음률을 섞어가며 말한다.


지금까지 행위의 이유를


“향미 방에 놀러 가야지요~. 이런 절호의 기회가 어딨어~요.”


그러고는 다시 거울에 집중, 자기 모습에 심취된다. 어찌나 마음에 들어 하던 지 자못 흐뭇한 미소가 얼굴에 만연하다.


그리곤 또박또박 절도 있게 외친다.


“완.벽! 너란 놈!”


두 팔을 쫙 펼쳐 보이더니 스르륵 눈까지, 이젠 자아도취에 무아지경의 세계로 빠져든다.


못 볼 것을, 절대 보고 싶지 않은 행위를 타인에 의해 강제로 지켜보게 된 친구들의 공통된 눈빛 의견은 장장 18년이란 세월 동안 거울 속 자신을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놈.


이건 틀림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자애가 좀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픈 거고 병명은 홱가닥 정신병. 그것도 당장 사회와 격리시켜 수감 치료를 요하는 중증 환자.


한별의 마음 한편에는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주절이 내뱉고 있는 병길이 근심인 부분도 있다. 사고 칠 게 뻔하니. 나름 오랜 세월을 같이한 절친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보이는 게 우선이다. 절친이고 나발이고 꼴 보기 싫은 건 싫은 거다.


그러니 볼멘소리로 쏘아붙인다.


“뭐! 여자 방엘? 미친놈! 그러다 선생님한테 걸리면 어쩔라 그래.”


그런 한별을 부처님께서 어리석을 중생을 바라보듯 내려다보는 병길. 스르륵 눈을 감는다.


부처님 설파하는 목소리를 흉내 내며


“어리석은 중생아~ 그러니까 스릴 있고 흥분되는 거지. 한 송이 꽃을 소유하기 위해 그런 위험을 감내할 용기조차 없는 자라니. 남자로서 부끄럽지도 않느냐~”


그리곤 오른쪽 눈을 살짝 뜨더니


“어리석은 중생의 이름, 보아하니 너의 이름이 최 한별이었구나.”

“에이씨! 뭐래.”

“보아하니, 평생 메주랑 살 인상이도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을 수 있다는 말도 모르다니? 우매한 놈 쯧쯧쯧.”

“헛! 내가 그 입을 그냥!”


병길, 표정의 변화가 참 다채롭다. 이제는 인자한 부처님의 표정에서 다르게


‘이런 머저리 같은 놈!’


한심한 눈빛으로 양반 종놈 보듯 한별을 내리깔아 본다.


“그나저나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뭐가? 이 시간에 누가? 뭐가 와?”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냐? 기다려 봐, 알게 될 테니”


그때 뭔가를 손꼽아 기다리던 병길의 핸드폰이 울린다.


“왔드아!!!”


갑작스러운 환성에 깜놀하는 한별, 병길은 기쁨의 환호와는 달리 공손한 태도로 전화를 받는다.


“아, 네네, 제가 줄을 내려드릴 테니 묶어서 올려 주세요.”


그놈의 꿍꿍이속. 뭔 짓을 하는지 일언반구 설명도 없고 학교에서도 상상도 못 한 해괴망측한 짓을 수도 없이 벌였던 지라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니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제멋대로 이러고 있으니 어찌나 보기 싫은지 병길을 향하는 한별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정도였다.


“야! 너 도대체 뭐하냐니깐!!”


못마땅한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날카로운 눈빛으로 대응한다.


“아~ 잇! 가만 좀 있어봐라. 징징대지 말고. 애냐? 보채게.”

“허.”

“보고만 있어. 굿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떡이나 드셔.”

“내 참 저게 그냥. 아~ 유.”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갑자기 완강기에서 줄을 꺼내 창문을 열고 밑으로 내린다.


“어어,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좀 있어.”


어라, 이번에는 내린 줄을 끌어 올린다. 좀 올리나 싶더니만 갑자기 더는 못 올리고 다급하게 한별에게 구조 요청을 한다.


“어, 어 하한별아! 끈 좀 잡아줘. 빠빠, 빨리!”

‘그럼, 그렇지. 네 하는 짓이’

“야, 뭘?”

“일단 잡아 보라니깐. 뭐해, 빨랑!”

‘치, 굿은 제 혼자 한다더만...’


영문도 모른 채 한별은 어느새 병길의 호흡에 맞춰 줄을 잡고 있었다.


“조심, 조심.”


한별이 힘을 보태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줄은 수월하게 올라왔다.


‘뭐야, 그닥 무겁지도 않고만. 이것도 혼자서 못 올리냐. 등신아!’


기어코 끌어 올렸다. 둘의 협심의 결과물은 큰 검은 비닐봉지였다. 내용물은? 말 안 해도 3초 만에 알았다. 냄새 때문에.


닭이다.


묶인 봉지 틈 사이로 캔이 보인다. 닭이니 콜라는 당연한데 이상하네. 콜라면 빨간색 아니면 파란색 캔인데 이건 은색이다.


알았다, 그 은색 캔의 정체를.


“야! 이거 맥주 아냐?”

“어떻게 봤네.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눈도 좋아.”

“미쳤어! 선생님이 불을 켜고 있는데 그러다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이 덜떨어진 인간아! 그럼 한 번뿐인 수학여행인데 이 먼 곳까지 와서 그냥 잔다고?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어.”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으니, 인상부터 일그러진다. 퉁명스럽게


“뭐라고.”

“죽으면 평생 잔다고, 너는 왜 이렇게 잠이 많냐? 죽어서 잘 잠, 당겨 자는 거 아니냐는 둥”

“큭.”


한별, 병길의 일탈 행위에 대해 지랄은 했지만, 병길의 말에 다 반발하는 건 아니다.


뭐, 솔직히 우린 남자라는 공통점에 한편으로는 이해해 줄 만한 시간과 장소가 아닌가? 부모님 세대도 그 전의 할아버지 세대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선생님들도.


“아, 아니 수학여행이라는 특수성은 알겠는데 그래도 술은 좀 아니지 않나....”

“할 짓이 없어서 어디 섬까지 와서 설교 질이야. 전교 1등 생색내겠다는 거지? 그래서 그건 지금 안 먹겠다는 의사 표현인 거고 응? 맞지?”

“아니...”


내심 본능이 발동하며 이성을 짓누르는데 선생님의 서슬 퍼런 경고가 눈에서 떠나질 않는다.


‘술 먹다 걸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눈에 아른거려 좀처럼 결정짓지 못하자, 병길이 툭 던진다.


“뭘 망설여. 이미 망가졌어!”

“?”

“이미 발 담갔다고.”

“?”

“돌아갈 수 없는 강 건넜다고.”

“뭐라는 거야. 망가져? 발을 담가? 강은 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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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둘만의 몽상 NEW 20시간 전 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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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개만도 못한 인간 24.09.17 9 0 14쪽
6 병날 24.09.16 12 0 12쪽
5 너랑 하고 싶어 24.09.16 12 0 14쪽
4 클럽 24.09.16 15 0 10쪽
3 환상의 콤비 24.09.15 13 0 13쪽
2 ‘ㅈ됐다!!’ 24.09.15 15 0 13쪽
» 수학여행 24.09.15 24 0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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