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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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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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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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2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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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혼돈무제(混沌武帝) (6)

DUMMY

우선 마음에 걸리는 점은 백윤이 이끌고 온 무인들에게서 느껴지던 침울함이다. 마치 낭인들을 이끌고 온 것처럼 무인들의 분위기는 제각각이었고, 심지어 무공도 천차만별이었다. 그나마 비룡검객이라는 존재가 구색을 갖추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그리고 백윤이 쥬비와 나를 바라보며 했던 한마디가 마음에 걸린다. 빙룡. 용이 어떤 성질을 갖는지는 알 수 없을터인데 백윤이 빙룡이라 단정한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린다.

전에 없을 정도로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천의결의 직감이 마침내 허무맹랑한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혼자서 내린 결론은 공상에 불과한 법. 나는 지금부터 나를 괴롭혀 오는 불안한 직감에 대해 확인할 것이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막연하다면 막연한 불안을 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와 기감을 일깨웠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어서인지 몇몇이 주위를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지만 경공과 천의결로 누군가의 눈에 띄는 건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백윤의 방 앞에까지 왔다. 그래도 조금은 난관이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림돌이란 어설프게 번을 서고 있는 삼류무인 하나뿐이었다. 학도병 수준의 지식을 가진 내가 봐도 형편없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다.

“아닌 밤중에 누구십니까?”

너무 긴장을 푼 걸까? 백윤의 방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백윤이 내 기척을 알아채고는 선수를 친다. 이제 와서 기척을 숨겨봐야 소용없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문을 열어 백윤의 방에 들어섰다.

“당신이었군.”

백윤이 나를 알아보고 뭔가를 생각한다. 과연 면식도 없는 내가 일부러 찾아왔다는 사실만으로 환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추측할 수 있을까? 역시나 백윤은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폰테일에서 보낸 밀사인가?”

“밀사 같은 소리.”

나는 한껏 정련된 적의를 담아 조소했다.

“날 변두리로 보내서 굶겨 죽여 놓고 그런 헛소리가 잘도 나오는군.”

“그게 무슨....”

느닷없이 밀사라 생각했던 이가 살기를 보이자, 백윤이 얼떨떨해하며 묻는다. 아직 기억을 못하는 건가? 그 모습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다.

“하도 못난 소문주라 기억도 못하는 게냐? 설마 날 그렇게 쉽게 잊어버렸을 줄은 몰랐군. 이름을 밝혀도 눈치를 못 채다니.”

“너는....”

백윤이 정말로 대경실색해서 부르르 떤다. 백윤이 금방이라도 고함을 지를 것만 같아, 나는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져대고는 바깥을 가리켰다.

“나가서 이야기하지.”

여기서는 서로 곤란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어중떠중이들은 몰라도 비룡검객이 있으니 너무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 곤란해질 뿐이다. 내 손짓에 백윤도 이를 짐작했는지 고분고분 창문을 통해 조용히 몸을 날렸다.

백윤의 경공은 실로 대단해 보였다. 동년배에 적수가 없으리라 해도 좋을 만큼 탁월한 경공에, 나는 잠시 동안 감탄해 주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압도적인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강해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더욱 엄청난 이들을 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된 영문이냐?”

야트막한 언덕 중턱의 평지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서자마자, 백윤이 빗물처럼 싸늘하게 말문을 튼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단숨에 할 말을 쏟아 부었다.

“지옥에서 돌아왔다고 해봐야 믿지도 않겠지.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어떻게 된 거지? 저런 삼류들을 데리고 와서 용을 죽여 보겠다는 거냐? 적어도 천의검문의 검수들만 모아도 저들보다는 나을 텐데?”

“그건.....”

백윤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말했다.

“네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개소리 하지 마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내공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잠룡보를 밟아 백윤에게 접근해갔다. 백윤이 뒤늦게 대처하려 했으나 너무 느리다. 형편없다. 소렌은 고사하고 루베르크. 아니, 샬라메에 비하면 그저 이류에 불과한 몸짓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대체 천의검문은 어떻게 된 거지? 저런 삼류들 말고 진짜 고수는 어디 갔냐고!”

비가 점점 거세진다. 차가운 빗물을 뚫고 내공이 가득 실린 일수가 백윤의 방어를 꿰뚫고 멱살을 잡아챈다. 백윤이 힘없이 내 손짓에 딸려와 흙바닥을 뒹군다.

“강하군.”

백윤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비척비척 일어선다. 그리고는 독사처럼 바짝 경계하며 말한다.

“정말로 네가 도군인가? 그놈 이야기를 들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면 그놈 말을 믿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무능한 후계자의 변명에 불과하니 말이야.”

“미친 놈.”

헛소리만 지껄이는 백윤을 향해 나는 다시 발을 굴렀다. 그리고 그야말로 쏜살같이 달려들어 백윤의 다리를 걸어 넘어트린다. 백윤이 어떻게든 대항하려 하지만 천의결은 백윤의 움직임을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쓰러진 백윤 위에 올라타서 다시 멱살을 잡았다.

“개소리 말고 대답해 봐라. 네놈이 차지했던 천의검문. 천의검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

비바람에 몸이 식어야 하건만 내 몸은 기이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건 백윤을 압도하고 있다는 환희에서 비롯된 걸까, 아니면 형언할 수 없는 분노 때문일까? 그렇게 정적이 흐르고 백윤이 천천히 입을 연다.

“그래.”

다시 입을 다물려는 찰나, 나는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다. 백윤의 주둥이를 노리려다 간신히 가슴팍으로 궤도를 바꾸었다.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가는 공연한 일이 될지도 모르니까.

“다시 말해봐라. 나에게 모욕을 줄 때 넌 대체 뭐라고 했었지?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결국 문파를 다 말아먹은 거냐?”

“감히!”

백윤의 기세가 조금 거세진다. 역시 이렇게 쉽게 당할 리가 없지. 백윤이 단숨에 몸을 뒤틀어 나를 떨쳐내고 힘껏 도약해서 거리를 벌린다. 그리고는 무모하게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천하에 둘도 없을 겁쟁이가 감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꽤 그럴듯한 권격이 쇄도한다. 분명 상승의 무공이겠지만 나는 아주 손쉽게 그 검을 막아낼 수 있었다. 천의결조차 필요치 않았다. 지극히 정직하게 날아드는 강권(强拳)을, 나는 더욱 압도적인 힘을 발휘해서 잡아챘다.

“제길, 이것도 막아보시지!”

백윤이 다른 편 팔로 변화무쌍한 금나술을 펼치면서 거리를 좁혀온다. 하지만 스톰브링거에 비하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려터진 움직임이다. 해법을 궁리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나 역시 앞으로 나아가며 쾌검을 내뻗어서 백윤의 어깨를 가격할 수 있었다.

“크윽!”

백윤이 어깨를 움켜쥐며 신음한다. 검집조차 풀지 않은 공격이었기에 그나마 피분수가 솟지는 않는다. 하지만 백윤은 그렇기에 더욱 열이 뻗쳐서 마구잡이고 나를 제압하려 들었다.

“과연 다재다능하군.”

각법이면 각법. 장법이면 장법. 어느 하나도 부족한 부분이 보이지 않았지만 결국 다재다능할 뿐 극에 도달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뭉툭한 검집만으로 나는 묵묵히 백윤의 공세를 차단해갔다.

“그 검을 뽑아라! 나를 기만할 셈이냐?”

죽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것일지 아니면 무임으로서 자존심이 상한 걸지, 백윤은 길길이 화를 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내 마음은 어딘가 텅 비어 있었다. 가소롭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저 허무할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보다 강하다는 사실이 조금 기뻤다.

[보아라, 실패가 내정되었던 혼돈의 사도를. 너보다 훨씬 우월했으나 결국 너를 이기지 못하는구나.]

혼돈의 말이 들려오자 온몸이 싸늘히 식는 듯 했다. 이건 내 힘이 아니다. 나는 그저 혼돈의 안배에 따랐을 뿐 결코 백윤보다 잘난 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아예 싸울 의지가 사라져 버린다. 숨을 헐떡이는 백윤 앞에서 나는 검집을 다시 허리에 차면서 중얼거렸다.

“더 이상은 쓸데없는 다툼이다. 너도 그만 진정해라.”

백윤은 무섭게 나를 노려보다가 결국 투지를 꺾는다. 명석한 만큼 나와의 격차를 더욱 잘 실감한 탓이리라. 백윤이 어느 정도 숨을 고르고 나는 다시 백윤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백윤은 잠시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윤은 몸을 떨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저 강한 자만이 대접받는 세상이 싫었다. 단지 비천한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스러지는 이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건 잘 안다.”

그렇기에 나라는 존재를 더욱 용납할 수 없었을 테지. 그리고 나 역시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옳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는 백윤에게 천의검문의 미래를 맡기고 속편하게 있었다.

“분명 시작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네 부친과 심가장을 설득했다. 그리고 천의검문과 심가장은 내 이상이 실현된 곳으로 거듭났다.”

다시 태어난 뒤로는 별로 생각도 하지 않았건만, 아버지와 심가장이 가세했다는 말에 새삼 가슴이 아려온다.

“그리고 꿈을 키웠다. 내 이상이 더욱 널리 퍼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어려웠다. 천의검문은 분명 이름난 곳이었지만 무림 전체를 아우르기에는 여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한 거냐?”

백윤이 말을 멈춘다. 이제부터가 진짜 들어야 할 말이다. 백윤이 가장 꺼내기 힘들 말일 것이다.

“자금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황도 발굴에 전력을 기울였지. 진법까지 동원해서 얼음을 녹이고 마물을 물리쳐서 황도의 보물을 손에 넣었다. 그런데 그런 도중에.....”

백윤이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백윤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빙룡이 깨어났다. 중원을 파멸로 이끌었던 그 저주받은 존재가.”

“그럼 설마 지금 이곳을 노리는 빙룡이 그 존재인건가?”

“그렇다. 무림을 완전히 파괴하고 이젠 서역을 노리는 거다.”

막연했던 추측이 현실이 된다. 백윤은 혼돈의 사도다. 그러나 혼돈은 오래 전에 그 길의 끝에 수많은 이의 죽음이 있으리라 말했다. 그 말대로 백윤의 무모한 이상은 빙룡이라는 재앙을 초래했다. 그리고 그 재앙이 이곳에까지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네놈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허투루 살지 않았어! 분명 꿈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날 저버린 것 뿐이야!”

백윤이 공허한 변명을 토해내며 분노를 끌어올린다. 그 모습이란 마치 토리나를 잃은 나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처절했다. 그러나 그는 모른다. 이 모든 게 혼돈의 안배에 따른 인과일 뿐이라는 걸. 그가 가진 어중간한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는 걸.

“그렇다면 하나 묻겠다. 아버지와 심 소저는 어떻게 됐지?”

나를 소중히 하던 두 사람. 그 두 사람이 살아있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무림으로 달려가서 파멸한 무림을 되살리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백윤의 한마디가 내 생각을 완전히 꺾어놓는다.

“두 사람은..... 빙룡이 깨어날 때 가장 빙룡과 가까이 있었다. 그 다음은 모른다.”

“설마 도망친 거냐? 두 사람을 두고!!”

돌연 화가 치밀어 오른다. 말없이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한결같이 나를 위해주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고 떠난 심하령이 안타까워서 견딜수가 없다. 하지만 그 분노도 잠시뿐이었다. 나는 식어버린 분노를 가슴 속에 담아두고 몸을 돌렸다. 백윤이 외침이 들려온다.

“그래, 도망쳤다. 거기서 개죽음을 당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나는 쓸데없는 서역이라도 구하기 위해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무림의 힘을 규합했다.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무림에서 안 된다면 이 땅에서라도 이 이상을 실현하겠다.”

백윤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무림에서 보였던 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이미 체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백윤도 스스로의 한계를 자각했을지도 모른다. 소드마스터도 소중한 이 하나도 온전히 구해낼 수 없다. 하물며 그 대상이 수많은 이들이라면 백윤 자신의 힘으로는 이상을 달성할 수 없다. 그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래, 포기하지 마라. 나는 그때처럼 포기했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어 그 한마디를 던지고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백윤이 무언가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으나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다만 혼돈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리고 있을 뿐이다.

[저것이 바로 본래의 운명을 내던진 이의 말로이다. 힘을 취하라. 그렇지 않으면 네 운명도 저리 끝날 것이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백윤에게 무언가 다른 길이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라웠다. 하지만 이내 그 놀라움도 혼돈이 주는 무게감에 짓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림으로 가려 했건만 무림은 이미 괴멸되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길은 무엇인가? 결국 혼돈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하루가 밝아왔다. 나는 창 너머로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눈을 뜨고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마음이 들지 않은 것이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밝아지는 창문을 바라보던 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도군. 일어나도록 해. 아침식사 후 혼례 연습이 있을 거야.”

소렌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를 듣자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안정되고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된다. 나는 먹먹하게 잠겨있는 목청을 뒤틀어 힘차게 대답을 해 주고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하고 문을 연 순간 소렌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여태 기다린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할 걸 그랬군.

“준비는 끝났어?”

“그래.”

혼돈이고 뭐고 지금은 내버려두자. 어차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일단 지금 할 일에 집중하도록 하자. 지금은 쥬비를 도와 드래곤을 물리치면 그만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소렌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식사를 마친 다음 나는 자카이야의 예복을 입었다. 조금 풍성한 옷매가 불편했지만 오히려 그 안에 내 옷을 입을 수 있어서 오히려 편한 점도 있었다.

“저, 도군.”

옷을 다 입고 식장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아름답게 꾸미고서 나를 기다리는 쥬비가 있었다. 어쩐지 신부라기보다는 신랑 같은 옷차림이었지만 도리어 그게 더욱 쥬비에게 어울리는 것 같았다. 군복을 입고 있는 쥬비는 여성스러운 구석이라고는 없었으니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지.

“나 어울려? 자카이야 예복은 남자랑 여자랑 똑같아서....”

쥬비가 유난히 수줍어하면서 묻는다. 그렇군. 자카이야는 동성간의 혼인도 허용되는 곳이니 예복이 남녀를 가리지 않겠군.

“잘 어울려.”

별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에 쥬비는 환하게 웃으며 정말로 신부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금세 씁쓸한 기분 달아오른 볼을 감싼다. 예전같았다면 쥬비의 이런 모습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본 예식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이들이 참관한 가운데 혼례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 손님들 중 엠펠로니아의 황제, 제피온도 끼어 있다. 실로 전무후무할 어마어마한 손님이다.

제피온은 이상할 정도로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고, 그 덕에 나는 한결 긴장을 풀고 혼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쥬비가 틀린 부분을 지적할수도 있었다. 어지간한 걸 다 내려놓으니 이런 점은 나쁘지 않군.

“후유, 이제 하나만 남았어.”

자카이야에서 존경받은 석학이 혼례의 의의에 대해 주구장창 떠드는 동안 쉴 시간이 생기니, 쥬비가 냉큼 내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말한다. 나는 떨떠름하게 그 손길을 받아들이고 휘장 틈으로 보이는 광경을 유심히 바라본다.

“많이들 왔지? 경비인원 삐고는 전부 참석했나봐.”

“정략혼일 뿐인데 정말 그렇네.”

무심코 한 말에 쥬비가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투덜댄다.

“이것도 약식(略式)이거든? 자카이야의 혼례는 정말로 성대하는 게 보통이니까.”

쥬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백윤을 발견했다. 기분이 묘하겠지. 그 멍청한 소문주가 자기보다 강해진 것도 그렇거니와 자기는 완전히 실패해 있었으니.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뭔데? 저 할아범 차례가 끝나려면 멀었으니까 물어봐.”

쥬비가 그녀의 옷차림을 다시 정돈하며 대꾸한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상념에 대해 말했다.

“난 형편없는 사람이야.”

“우와 그걸 이제 알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넌 대체 왜 날 선택한 거야?”

쥬비의 손이 우뚝 멈춰 선다. 그리고 쥬비는 까무잡잡한 얼굴에서도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얼굴을 붉히고는 정신없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무, 무슨 실례를! 나는 그저 예언에 따랐을 뿐이야. 다른 의미는 없어. 너도 잘 알잖아. 아탄샤의 딸인 내가 왜 너 같은 평민을....”

평민이라. 오랜만에 듣는군. 나는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줘. 아니면 이 따위 혼례는 하지 않겠어.”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무책임? 아니다. 나는 애초에 그녀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천의검문의 일에 열을 올리고 나서야, 나는 내가 천의검문의 한 사람임을 새삼 깨우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쥬비와의 인연은 결코 내 것이 아니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 인연은 멜븐의 것도 아니다. 멜븐이 예언에 맞아떨어지는 사람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쥬비와 원래 혼례를 올려야 할 사람은 하나뿐이다.

“예언에 따르려면 비오스 자히넵과 혼인해도 충분하잖아. 내 말은 왜 굳이 그 자가 아니라 날 택한 거냐고.”

제임스는 쥬비가 나를 연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째서일까? 혼돈의 사도인 나도, 멜븐도 쥬비와 인연이 없다면 이 길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해?”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난 아직 네 감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단호한 선언에 쥬비가 눈에 띄게 당황해서 더듬거린다.

“어, 어떻게 그걸....”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말해봐. 왜 나를 좋아하고 있는지.”

쥬비가 조금 울먹이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파혼 통보를 받은 새 신부처럼 울먹이는 그녀에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나와 가까이 있던 이들은 모두 처참한 꼴을 당했다. 소렌은 강한 녀석이기에 비참한 꼴을 벗어났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쥬비로서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결코 쥬비의 감정을 용납할 생각이 없다.

“바보야!”

쥬비가 있는 힘껏 내 뺨을 후려친다. 아프다. 그와 함께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사랑에 빠진 쥬비를 추궁하는 건 역시 불편한 짓이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그냥..... 그냥 마음에 들어온 걸 어떻게 하냐고!”

이를테면 운명적이라는 말이다. 나는 혼돈의 인도를 받는 혼돈의 사도. 그렇다면 이건 혼돈의 인도일까? 혼란스럽다. 혼돈의 안배와는 다른, 운명이라는 게 또 존재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렇게 싫으면 하지 마. 이딴 것 따위.....”

쥬비가 입고 있던 옷을 벗으려 단추를 끄르기 시작한다. 그제야 내가 너무 마구잡이고 그녀를 몰아세웠다는 것이 떠올라, 나는 황급히 그녀의 혈도를 짚었다. 쥬비가 단추를 풀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나는 그녀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진정될 즈음에 혈도를 풀어 주었다.

“미안해. 내가 괜한 소리를 한 모양이야.”

“멍청이!”

쥬비가 있는 힘껏 내 가슴팍을 후려친다.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나는 그 울림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미안해. 어제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말야.”

내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쥬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슬슬 우리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 나 역시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기 위해 거울을 본 순간, 거울 안에 쥬비의 모습이 비친다. 쥬비는 언제부터인가 눈물을 흘렸는지 엉망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봤지? 너 때문에 화장 이상해졌잖아.”

쥬비가 다시금 눈가를 슥슥 문지르고는 말했다.

“하여튼 최악의 신랑감이야. 너는.”

그것 참 유감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건 변하지 않는 모양이야.

“솔직히 말해달라고 했지? 그래, 말해줄게. 나는 토리나가 싫었어. 나는 도망쳤는데 토리나는 안 그랬잖아. 그걸 직시하게 하는 토리나가 싫었어 사실.”

내 등 뒤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거울 너머로 쥬비가 히죽히죽 웃으며 내 목에 양 팔을 감고 안겨온 것이 보인다. 쥬비는 내 뒷목에 얼굴을 푹 박고 웅얼거리기 시작한다.

“토리나는 참 대단했지. 그런 위치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버티고 있었잖아. 누구든 그런 사람한테 빠져드는 것도 당연해. 프란츠가 헬렐레한 것도 이해는 된달까?”

목을 감싼 양 팔이 더욱 거세진다. 쥬비의 체온이 여실히 느껴지는 가운데 쥬비의 숨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온다.

“그런데 너는 별로 안 그랬어. 그래서 너한테 관심이 생겼나봐. 그리고 너는 이상한 힘을 보여줬지. 그 음흉한 자히넵을 한번이나마 물 먹였잖아. 그때부터였을 거야. 널 좋아하게 된 건. 그래서 자히넵한테 네가 예언이 가리키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이렇게 된 거야.”

쥬비의 목소리가 점점 먹먹해진다. 쥬비는 얼굴을 들지 않은 채 내 귀에 그대로 속삭였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내가 싫다면 이 혼인을 물러도 돼. 하지만.”

쥬비가 갑자기 허리를 쭉 펴고 내게서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는 얼굴을 보이지 않고 휙 돌아서서는 물방물이 맺힌 듯 흐릿한 어조로 말했다.

“적어도 드래곤을 물리칠 때까지는 나하고 어울려 줘.”

그 말을 끝으로 쥬비는 혼례를 연습하는 동안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혼례 연습이 끝나가는 참이었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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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4) +9 14.04.22 1,577 27 16쪽
110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3) +10 14.04.13 1,304 34 18쪽
109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2) +6 14.04.05 1,323 28 14쪽
108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1) +3 14.04.04 1,287 25 14쪽
107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0) +4 14.03.29 1,614 28 17쪽
106 10. 혼돈무제(混沌武帝) (9) +5 14.03.21 1,726 28 15쪽
105 10. 혼돈무제(混沌武帝) (8) +4 14.03.14 1,785 30 14쪽
104 10. 혼돈무제(混沌武帝) (7) +2 14.03.03 1,604 28 12쪽
» 10. 혼돈무제(混沌武帝) (6) +10 14.02.22 1,471 29 22쪽
102 10. 혼돈무제(混沌武帝) (5) +7 14.02.18 1,592 29 17쪽
101 10. 혼돈무제(混沌武帝) (4) +8 14.02.12 1,498 27 14쪽
100 10. 혼돈무제(混沌武帝) (3) +4 14.02.01 1,871 30 10쪽
99 10. 혼돈무제(混沌武帝) (2) +5 14.01.21 1,609 32 14쪽
98 10. 혼돈무제(混沌武帝) (1) +13 14.01.07 1,990 29 12쪽
97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10) +8 13.12.29 1,738 30 12쪽
96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9) +10 13.12.20 1,505 26 11쪽
95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8) +6 13.12.08 1,586 26 13쪽
94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7) +4 13.12.04 1,808 29 13쪽
93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6) +4 13.11.28 1,415 33 12쪽
92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5) +4 13.11.25 1,881 30 13쪽
91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4) +10 13.11.19 1,751 31 13쪽
90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3) +8 13.11.11 1,632 32 14쪽
89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2) +7 13.11.08 2,173 37 12쪽
88 9. 극복하거나, 혹은 추락하거나. (1) +4 13.11.06 1,844 39 17쪽
87 8. 무인과 군인 (14) +3 13.11.01 1,776 41 16쪽
86 8. 무인과 군인 (13) +3 13.10.23 1,857 41 14쪽
85 8. 무인과 군인 (12) +8 13.10.19 1,965 34 16쪽
84 8. 무인과 군인 (11) +4 13.10.17 1,645 38 14쪽
83 8. 무인과 군인 (10) +5 13.10.13 2,203 49 13쪽
82 8. 무인과 군인 (9) +6 13.10.11 2,150 4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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