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우연의 일치
명안공주가 운을 뗐다.
"선대왕이신 할바마마께서 승하하시기 얼마 전에 사냥을 하실 때 여우를 잡으셨사온데, 여우가 죽기 전에 발버둥을 치며 발악을 하여 할바마마께서 크게 놀라셨다 하옵니다."
선대왕이란 명안공주의 할아버지 효종을 말했다.
'공주께서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
인현왕후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명안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바로 그날 밤 할바마마께서 기이한 꿈을 꾸셨는데, 그 여우가 꿈에 나타나 '나는 백년 묵은 여우라 얼마 후면 사람이 될 터인데, 너의 화살을 맞고 죽게 되었으니, 이 한을 어찌 풀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 내 반드시 사람으로 태어나 너의 후손에게 복수하리라.' 말한 후에 사라졌다고 하옵니다. 할바마마께서는 꿈이 너무도 생시같아서 어마마마께 말씀하셨다 하온데, 그때로부터 불과 넉달 후에 할바마마께서 갑작스러운 변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하옵니다.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니옵니까?"
"참으로 기괴한 일입니다. 허나 그것이 옥정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후 대비마마께서 사람을 시켜 확인하신 바, 옥정은 할바마마께서 그 여우를 사냥한 지 아홉달 후에 태어났다 하옵니다. 이 또한 기괴한 일이 아니옵니까?"
민간에는 백 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는 전설이 있어 대비로부터 효종의 꿈 이야기를 들은 명안공주는 옥정이 백 년 묵은 여우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인현왕후는 이러한 명안공주의 의중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참으로 기괴하긴 하오만, 공주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 뿐만이 아니옵니다. 어마마마께서도 변고를 당하시기 전에 참으로 기괴한 꿈을 꾸셨다 하셨사온데, 꿈에서 옥정이 한 맺힌 눈으로 노려보다 별안간 여우로 둔갑하여 덤벼들어 어마마마께서 몹시 놀라 깨어나셨사오나 꿈이 생시처럼 분명하여 몹시 기이하게 생각하시어 소녀에게 말씀하셨사옵니다. 하온데 어마마마께서는 그 꿈을 꾸신 후 달포도 안되어 승하하셨사오니, 이 또한 참으로 기괴한 일이 아니옵니까?"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명안공주의 이야기를 연이어 듣자 인연왕후는 불현듯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의연하게 말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겠사옵니까? 공주, 제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계신 듯한데,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세요."
명안공주가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옥정이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옵니다."
"무엇이 의심스럽단 말입니까?"
"태자방을 기억하시옵니까?"
"대비마마께 요사한 점괘를 올린 무당이 아닙니까?"
"그러하옵니다. 소녀가 들은 바로는 옥정의 어미 윤씨가 태자방의 무당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고 하옵니다. 혹시 옥정이나 옥정의 어미 윤씨가 어마마마를 해하기 위해 태자방에게 흉악한 사주를 한 것은 아닐까 참으로 의심스럽사옵니다. 어마마마께서 태자방의 말을 들으시고 물벌을 받으시지 않으셨다면, 어찌 그토록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셨겠사옵니까?"
명안공주는 옥정이 태자방을 사주하여 대비를 죽게 만든 배후로 의심하고 있었다.
말을 마친 명안공주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 생각에 흐느끼며 눈물을 쏟았다.
인현왕후도 눈물을 흘리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끼는 명안공주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설마, 전하의 총애를 받는 옥정이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공주, 머지않아 우리 또한 구천에 계신 대비마마를 뵈올 날이 있을 것이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옥정을 의심하지 않는 듯한 인현왕후의 말을 듣자, 명안공주가 흐느낌을 멈춘 후 말했다.
"옥정이 의심쩍은 구석이 한두가지가 아니지 않사옵니까?"
"아무 증좌가 없지 않습니까? 태자방은 장안에서 유명한 무당이라, 수많은 사람들이 태자방에게 점을 보는데, 우연의 일치가 아니겠습니까?"
"태자방이 이실직고하게 만들어 진실을 가려야 하옵니다."
"허나 증좌가 없는 일을 정황만으로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자방을 잡아들여 철저히 조사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전하께 태자방을 다시 잡아들일 것을 주청드리고자 이렇게 입궁한 것이옵니다."
명안공주의 말을 들은 숙종은 갑자기 어머니 대비의 죽음에 대해 의혹이 생겨 명을 내려 태자방을 잡아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옥정은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전전긍긍했다.
'전하께서 태자방을 잡아들이신 것은 대비마마께서 승하하신 의혹을 명백히 밝히시기 위함이 아닐까. 다 끝난 일이거늘, 전하께서는 무슨 연유로 태자방을 다시 잡아들이신 것일까? 태자방이 어찌되던 내 알바 아니나, 하필 내가 입궁한지 하루만에 태자방을 잡아들인 것은 어머님께서 태자방에게 수시로 점궤를 본 사실을 아는 자가 이를 빌미로 나를 모함하려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날 밤이 깊어서야 옥정을 찾아온 숙종의 안색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옥정은 숙종이 태자방의 일로 그런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전하, 용안이 좋지 않사옵니다.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으신지요."
"오늘 명안공주가 과인을 찾아와 요사한 점괘로 어마마마를 승하하시게 만든 태자방을 다시 잡아들여 배후에서 사주한 자가 있는지 조사할 것을 청하였다. 과인 또한 이에 대해 의혹이 있어 태자방을 잡아들였거늘, 어리석은 내관들이 무당의 점궤에 죄를 묻는 것은 풍속에 어긋나는 일이니 방면하라 하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내 반드시 태자방이 어찌 그리 요사한 점괘를 내었는지 이실직고하게 만들 것이다."
분노에 찬 숙종의 말에 옥정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께서 내 점괘를 보시느라 태자방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셨으니, 전하께서 아시게 되시면 대노하실지 모르는 일이다. 그 전에 미리 말씀드려야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다!'
옥정이 털썩 무릎 끓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전하! 소녀, 전하께 죄를 지었사오니, 소녀를 벌하여 주시길 청하옵니다."
숙종이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죄를 지었다니,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소녀와 소녀의 어미가 태자방에게 점괘를 본 적이 있사옵니다. 대죄를 지은 자에게 점괘를 본 죄 죽어 마땅하오나, 소녀의 어미는 소녀로 인하여 죄를 지은 것이오니, 청컨대 소녀를 벌하시고, 소녀의 어미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숙종이 천천히 옥정을 일으키며 말했다.
"태자방이 아무리 대역죄인이라 한들, 너와 네 어미가 점괘를 본 것은 사소한 잘못일 뿐이거늘, 어찌 그로 인하여 벌할 수 있겠느냐? 너를 탓하지 아니할 터인즉 심려치 말거라."
옥정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숙종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하오나 전하, 대신들이 소녀와 소녀의 어미가 대죄를 지은 태자방에게 점괘를 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소녀를 궁에서 내치라 전하께 주청드릴까 두렵사옵니다."
숙종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과인이 총애하는 너를 누가 감히 내치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내 하늘이 무너져도 너를 지킬 터이니, 심려치 말거라."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옥정의 두눈에서 연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도의 눈물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여섯 해가 되도록 변치않은 숙종의 진심을 확인한 것이 너무도 기뻤던 것이다.
숙종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옥정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울지 말거라. 네가 우는 모습을 보니 과인의 마음이 아프구나."
"황공하옵니다."
눈물을 흘리는 옥정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숙종이 옥정을 와락 품에 안고 말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옥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태자방은 어찌 하실 것이옵니까?"
"어찌하면 좋겠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태자방은 장안에서 명성이 자자한 무당이라 전하께서 태자방을 죽이시오면, 전하께 누가 될까 두렵사옵니다. 하오니, 태자방의 죄를 용서하여 구천에 계신 대비마마의 넋을 위해 기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숙종이 한숨을 내쉬었다.
민간에는 무당을 죽이면 환생하여 나라에 재앙을 가져온다는 미신이 있어 숙종 또한 태자방을 죽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태자방의 죄를 취조한 후 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내 그리하마."
다음날, 숙종은 마침내 옥리에게 태자방을 방면할 것을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명안공주가 숙종을 찾아와 말했다.
"전하, 태자방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온데, 무슨 연유로 태자방을 방면하셨사옵니까?"
"태자방에게 제를 올려 구천에 계신 어마마마의 넋을 위로하라 명하였느니, 그리 알거라."
"하오면 태자방이 누구의 사주를 받아 어마마마를 해친 요사한 점괘를 낸 것인지는 조사하셨사옵니까?"
"내 친히 태자방을 취조하였으나, 죄가 드러나지 않아 방면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철두철미하게 조사하신 것이옵니까?"
명안공주는 태자방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대비를 죽게 만든 물벌 점궤를 낸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순간 숙종의 언성이 높아졌다.
"어허, 내 더이상 언급하지 말라 하였거늘, 어찌 그와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이만 물러가거라."
대전을 나선 명안공주는 인현왕후의 처소 통명전으로 가서 하소연을 쏟아냈다.
"중전마마, 전하께서 어찌 이리 하실 수 있사옵니까? 어마마마를 승하하시게 만든 태자방을 방면하다니요."
"전하께서도 숙고하셔서 결정하신 것일터이니, 공주께서 전하의 뜻을 따라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명안공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는 옥정이 전하께 태자방을 구명한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옵니다. 태자방이 자신의 죄를 누설할까봐 전하께 태자방을 용서해 달라 청한 것이겠지요. 옥정은 참으로 요악한 여인이 틀림없사옵니다. 중전마마께서도 마땅히 옥정을 경계하셔야 될 것이옵니다."
"옥정의 죄상이 드러난 적이 없거늘 어찌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공주께서 옥정에 대한 괜한 의심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옥정을 두둔하는 인현왕후의 말에 명안공주는 할 말을 잃어 한동안 침묵하다 공손히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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