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자네 뜻대로 하게나
숙종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김만중이 인경황후의 숙부임을 고려해 애써 참았다.
"조사석이 불안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민망한 소문이라 말씀드리기 어렵나이다."
숙종이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경이 말씀을 꺼내셨으니, 어서 말해보십시오."
김만중은 숙종이 분노를 애써 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작정하고 말했다.
"전하께서 하문하시오니, 소신이 어찌 아뢰지 아니할 수 있겠사옵니까? 조사석이 숙원 장씨의 어미 윤씨와 내연 관계라 연줄을 대어 정승에 임명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온나라 사람들이 모두 들은 소문이온데, 유독 전하께서만 듣지 못하신 듯하옵니다."
김만중에게 존댓말을 써왔던 숙종은 분노가 폭발하자 하댓말로 호통쳤다.
"나와 같이 박덕한 사람이 군주로 있으면서 이러한 해괴한 말을 들으니 실로 군신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 김창협의 상소가 무례하긴 하였으나, 어찌 과인이 아들의 죄를 아비에게 물을 리가 있겠는가? 조사석이 연줄을 대어 정승이 된 것이라면 관직을 매수한 것이나 매한가지인데 금을 주고 산 것이라 여기느냐 은을 주고 산 것이라 여기느냐? 소문의 근거를 대라. 근거를 대지 못하면 결코 가만두지 아니하겠다!"
숙종의 추상 같은 호통에도 김만중은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말했다.
"전하께서 소신에게 소문에 대해 하문하시고 소문의 근거를 대라 말씀하시오나, 온나라에 모르는 이가 없는 소문이온데 어찌 소문의 근거를 댈 수 있겠사옵니까? 전하께서 소신에게 죄를 물으신다면 달게 받겠사오니, 차라리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숙종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로 계속 호통을 내질렀다.
"나라의 대신이라는 자가 허황된 소문으로 과인을 능멸하다니, 과인이 안중에도 없단 말이더냐! 어서 소문의 근거를 대지 못할까?"
"전하께서 소신이 따를 수 없는 명을 내리시오니, 의금부로 가서 전하의 하명을 기다리겠사옵니다."
김만중은 스스로 의금부로 가서 숙종의 처분을 기다렸다.
숙종은 분을 삭이지 못해 주먹으로 용상을 내려치고 승지를 불렀다.
"김만중이 허황된 소문으로 과인을 능멸하였으니, 당장 김만중을 의금부에 하옥한 후 날이 밝는대로 취조하여 소문의 근거를 이실직고하게 하라."
"주상 전하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고개를 조아려 대답한 승지는 갑자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 아뢰옵기 참으로 황공하오나, 소신이 붓이 없어 교지를 쓸 수 없사오니, 다른 승지를 부르셔서 명을 내리시길 바라옵니다."
인경왕후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정권의 실세였던 김만중을 의금부에 하옥시킨다면 조정에 한차례 풍파가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난처해진 승지는 붓을 품속에 숨긴 후 붓이 없어 교지를 쓸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붓이 없으면 사관을 불러 붓을 가져오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여봐라, 사관은 붓을 가져오라."
숙종은 승지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명을 내린 것이다.
사관에게 붓을 건네받은 승지가 어쩔 수 없이 교지를 쓰자 마침내 김만중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취선당으로 향하는 숙종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효성이 지극한 옥정이, 어머니 윤씨와 조사석에 대한 괴소문을 들으면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을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어찌 이 나라의 임금인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조차 지켜줄 수 없단 말인가? 재입궁할 때부터 여태까지 하루라도 잠잠할 날이 없으니 마음고생이 오죽하겠는가!'
숙종이 처소에 들어서자 옥정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신첩이 불미스러운 소문으로 전하께 누를 끼쳤사오니, 전하를 뵐 면목이 없사옵니다. 청컨대, 신첩을 내쳐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소서."
숙종은 옥정을 일으켜 세운 후 천천히 품에 안았다.
"마음에 두지 말거라. 허황된 소문일 뿐이 아니더냐? 소문에 관계된 자는 대신이라 할지라도 모두 엄벌에 처해 반드시 너를 지킬 것이다."
숙종의 품에 가만히 안긴 옥정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옥정이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신첩을 버리시지 아니하시겠다면, 바라옵건대 소문의 배후를 밝혀내, 신첩의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서인들이 신첩을 내치려고 한 것도 모자라, 허황된 소문으로 신첩의 어미까지 해치려하니 참담하기 그지 없사옵니다."
숙종이 옥정을 꼭 안으며 말했다.
"내 반드시 허황된 소문을 퍼뜨려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발본색출할 터이니, 눈물을 거두어 다오. 내 너의 눈물을 보니, 마음이 아프구나."
"전하께서 신첩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시오니, 신첩,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지극한 사내의 사랑이 아닐 수 없었다.
옥정은 문득 자신이야 말로 고금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여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크나큰 행복을 다른 여인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웠다.
옥정은 숙종의 품에 안긴 채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제 서른을 바라보나 중전마마는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기셨으니, 언제 전하의 총애가 중전마마께로 기울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옥정은 인현왕후에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숙종이 인현왕후의 처소를 찾는 날에는 불 같은 질투심이 솟구쳐 병을 빙자하여 강짜를 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인현왕후와 옥정의 관계는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중전마마께 밉보인 이 마당에 권력이라도 있어야 전하의 곁을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옥정은 자신의 뒷배를 돌봐온 동평군과 조사석을 내세워 조정에 영향력을 행세할 생각이었다.
숙종의 지극한 총애에 옥정은 날이 갈수록 야심이 커져만 갔다.
불현듯 포도부장인 오라비 희재가 떠오른 옥정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전하, 신첩에게 한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무엇인지 말해보거라."
"신첩의 오라버니로 하여금 괴소문의 배후를 밝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라를 어지럽히는 소문을 조사하는 것은 포도청의 일로 옥정은 이참에 희재를 포도대장의 자리에 앉혀 서인들을 견제할 생각이었다.
숙종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오라비 장희재를 포도대장에 임명하여 소문의 배후를 밝혀내도록 하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만중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숙안공주가 숙종을 찾아왔다.
"전하, 김만중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는 말이 사실이옵니까? 사실이라면 당장 명을 내려 김만중을 방면하시길 청하옵니다. 김만중은 세상을 떠난 인경왕후마마의 숙부인데, 어지신 전하께서 어찌 인정을 두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사옵니다."
나무라는 듯한 숙안공주의 말투에 숙종은 화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다.
"김만중은 허황된 소문으로 저를 능멸했을 뿐만 아니라 소문의 근거를 대라는 저의 명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능멸하고 임금의 명에 따르지 않으니, 그 죄가 적지 않은데 고모님께서는 어찌 김만중을 두둔하시는 것입니까?"
"김만중은 충신이온데 어찌 전하를 능멸할 수 있겠사옵니까? 조사석과 옥정의 어미 윤씨에 대한 소문은 온나라 사람들이 아는 일인데, 어찌 소문의 근거를 말할 수 있겠사옵나까? 또한 신첩이 듣기로는 옥정 본인 또한 불미스러운 소문에 연루되었다 하오니, 소문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옥정을 궁밖으로 내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옥정을 내치라는 말에 숙종의 분노가 열화와 같이 폭발했다.
"고모님께서는 누구로부터 그 소문을 들었습니까?"
숙안공주는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그것은......"
"어찌 말씀을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기억이 나지 않사옵니다."
"지금 저를 기만하시는 것입니까? 비록 고모님이라 할지라도 임금을 기만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신첩이 어찌 지존이신 전하를 기만할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고정하소서."
숙안공주는 숙종이 고모인 자신에게 분노를 여지없이 드러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러한 숙안공주의 모습을 보자 숙종의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고모님께서 기억이 나질 아니하신다니, 저도 더 할말이 없습니다. 허나 앞으로는 말을 가려 하시길 바랍니다."
"전하......"
"여봐라. 숙안공주께서 떠나실 것이니, 어서 배웅하거라."
이때에 이르러 대전의 내관 대부분이 옥정을 따랐는데, 옥정이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옥정을 따르는 주내관이 숙안공주와 숙종의 대화를 엿듣고는 취선당으로 달려가 옥정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숙안공주께서 나에 대한 괴소문을 전하께 아뢰다니, 나를 내치시려함이 아니겠는가!'
옥정은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숙안공주를 비롯한 숙종의 세 고모 공주들 뿐만 아니라 숙종의 누이동생 명안공주, 네 공주 모두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 서러웠다.
'내 그토록 공주들과 화목하게 지내기를 바라였건만, 공주들께서는 한사코 나를 궁에서 내치지 못해 안달이시니 어찌하면 좋을까! 그래, 숙정과 상의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옥정이 숙정을 불러 사실대로 털어놓으니 숙정이 흥분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는 숙안공주께서 숙원마마를 음해하신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숙안공주께서 전하의 진노를 사신 듯 하오니, 이참에 숙안공주의 기를 꺾어 놓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옥정이 탄식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의 혈육이라곤 공주님들 뿐이거늘 꼭 공주님들과 등져야만 하겠느냐?"
숙정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혹여 공주님들이 합심하여 숙원마마를 음해한다면 어찌 되겠사옵니까? 열번 찍어 아니 넘어갈 나무가 없다는 말처럼, 전하께서 아무리 숙원마마를 총애한들, 계속 숙원마마에 대한 좋지 않은 말을 들으시면 총애를 잃을 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총애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숙정의 말이 비수가 되어 옥정의 마음을 아프게 찔러왔다.
"허면 어찌하면 좋겠느냐?"
"모든 것을 소녀에게 맡겨주소서. 실은 동평군께서 오래 전부터 숙안공주를 못 마땅하게 여기셨사옵니다. 첩이 동평군께 나서시라 여쭙겠나이다."
옥정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뜻대로 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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