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임술년 반정 회갑연
숙종은 옥정을 위로하기 위해 서찰을 쓴 후 한내관을 불렀다.
"이 서찰을 옥정에게 전해 주거라. 어마마마께서 아시면 아니될 것이니 조심하거라."
한내관은 살며시 궁을 빠져 나가서 숭선군의 집을 찾아가 신씨에게 숙종의 서찰을 전해준 후에 떠났다.
신씨는 옥정을 불러 숙종의 서찰을 전해주었다.
'과인이 무능하여 그대를 다시 부르지 못하니 면목이 없구나! 과인은 그대가 사무칠 정도로 그립다. 그대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대를 만나지 못한 것이 벌써 반년이 넘었구나! 그대에 대한 어마마마의 오해가 깊으시니, 언제쯤 그대를 다시 부를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어 참으로 답답하다. 허나 어두운 구름이 세상의 빛을 막을 수 없듯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과인과 그대 사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하늘에서는 비익조처럼, 땅에서는 연리지처럼 영원히 함께 살자꾸나! 과인이 살아있는 한 반드시 그대를 다시 부를 것이니 기다려다오.'
옥정은 숙종의 서찰을 읽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신첩, 10년이고 20년이고 전하를 기다리겠사옵니다. 고려의 사평왕후는 강종의 부름을 40여년이나 기다렸는데, 신첩이라고 왜 못 기다리겠사옵니까? 신첩이 살아있는 한 기다리겠사옵니다.'
이로부터 2년 후.
대궐처럼 웅장한 저택의 정자에 백옥처럼 하얀 얼굴의 여인이 우두커니 앉아 화사하게 피어오른 매화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봄이 온들 무엇하랴. 전하의 용안조차 뵐 수 없는 내 신세가 처량하기 짝이 없구나!'
여인은 옥정이었다.
어느덧 숭선군의 집에 기거한지도 2년이 지났건만, 궁궐로부터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이따금 대왕대비가 발걸음하여 옥정에게 위로의 말을 건내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숙종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갈수록 깊어졌지만, 궁궐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이제 마흔둘의 창창한 대비가 살아있는 한 궁궐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이 옥정의 마음을 옥죄이고 있었다.
옥정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대비마마께서는 어찌 이다지도 나를 미워하시는걸까? 대비마마께서 나를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친어머님을 모시듯 성심을 다하겠건만, 어찌 이다지도 내게 가혹하신걸까?'
한사코 자신의 입궁을 막고 있는 대비가 한없이 야속했다.
순간 옥정의 두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봇물 터지듯 흘러내리기 시작해 한 시진이 지나도록 그칠 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까이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누군가 옥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마마...... 너무 슬퍼하지 마소서. 옛부터 고진감래라 하지 아니하였사옵니까? 필시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올 것이옵니다."
숙정이었다.
지난 2년간 숙정은 옥정에게 큰 힘이 되어왔다.
숙정의 말에 위안을 받은 옥정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고나서 숙정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네. 자네가 없었다면, 내 벌써 미쳐버렸을지 모르겠네."
숙정이 입에 손가락을 대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칫 모함을 받는 빌미가 될 수 있을 터인즉, 말씀을 삼가하소서."
마음이 한결 밝아진 옥정이 장난치듯 숙정의 어깨를 살짝 때리며 말했다.
"이 사람아, 말이 그렇다는 것일세......"
숙정이 환하게 미소짓자, 옥정도 모처럼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숙정이 뭔가 생각이 떠오른 듯 손뼉을 쳤다.
"마마, 한가지 좋은 소식이 있나이다."
옥정이 반색하며 물었다.
"무엇인지 말해보거라."
"사흘 후, 정명공주마마 댁에서 임술년 반정(인조 반정) 회갑연을 여는데, 조정 대신들은 물론 주상 전하께서도 친히 왕림하실 것이라 하옵니다."
순간 옥정의 가슴이 요동쳤다. 그러다가 대비와 중전도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수년만에 숙종을 볼 수 있으리라고 벅차올랐던 가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대비마마, 중전마마께서도 오신다더냐?"
"소녀도 잘 모르옵니다."
숙정이 고개를 흔들자 옥정의 마음에 한가닥의 희망이 용솟음쳤다.
"허면, 그날 과연 내가 전하를 뵐 가망이 있을 듯 싶으냐?"
"소녀가 어찌 알 수 있겠사옵니까? 일단은 전하를 뵐 준비를 하시는게 좋을 듯하옵니다."
"그래, 내 먼 발치에서라도 전하를 뵐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옥정은 숙종이 기거하는 경덕궁의 하늘을 우러러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전하, 소녀 너무나도 전하를 뵙고 싶사옵니다. 꿈에서라도 전하를 뵈올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나이다.'
임술년 반정의 회갑연 하루전, 인현왕후는 사가에서 데려온 궁인 복순을 불렀다.
그동안 사가에 보내는 서찰은 대부분 내관들을 통해 보내왔는데, 특별히 복순을 부른 것이었다.
"복순아, 이 서찰을 어머님께 전해드리거라."
여섯살의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복순에게 인현왕후의 친정집은 본가나 다름이 없었다.
거의 2년만에 본가를 방문할 것을 생각하니 복순은 뛸뜻이 기뻤다.
"소녀, 중전마마의 명에 따르겠사옵니다."
"내일이 나라의 경사일이니 너에게 휴가를 줄 것이다. 오랜만에 본가에 들리는 것이니, 오늘 하루는 본가에서 지내고 내일 오시까시 궁으로 돌아오도록 하거라."
복순은 마냥 행복한 듯 함빡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참으로 감읍하옵니다."
인현왕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본가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그리도 좋으냐?"
복순이 두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렇다마다요. 소녀에게는 본가나 다를 바 없지 않사옵니까? 중전마마께서도 소녀와 함께 가시오면, 참으로 좋을 듯싶사옵니다."
이제 불과 열일곱의 인현왕후 역시 본가를 방문하여 부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대비가 전권을 넘긴 내명부의 일을 보살피느라 바쁜 나머지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나 또한 그러고 싶지만 처리해야할 내명부의 일이 많으니, 그럴 수가 없구나."
"하오면, 중전마마, 소녀 다녀오겠사오니 그간 옥체 보중하시옵소서."
복순은 인현왕후에게 하직인사를 올린 후 내전을 떠났다.
본가에 도착한 복순은 부부인(중전의 어머니에게 내리는 칭호) 조씨에게 큰절을 올렸다.
"마님, 그간 강녕히 잘 지내셨사옵니까?"
올해로 열네살인 복순은 본가를 떠나 입궁했던 2년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져 있었다.
2년전에 앳된 모습이었던 복순은 이제 성숙미가 물씬 풍기는 아리따운 소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씨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복순의 인사를 받았다.
"그래, 나는 잘 지내었다. 너도 그간 잘 지내었느냐?"
"소녀는 중전마마의 하해같으신 은총으로 한결같이 잘 지내고 있사옵나이다."
"잘 지내고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겨우 열두살의 철없는 복순의 입궁을 허락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조씨로서는 복순이 궁에서 잘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복순이 조씨에게 인현왕후의 서찰을 공손히 내밀었다.
"중전마마께서 주신 서찰이옵니다."
"수고했다. 너의 벗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만 물러가, 만나보거라."
"하오면 소녀는 이만 물러가보겠사옵니다."
실로 오랜만에 본가를 방문한 복순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하녀들을 만나니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하녀들은 몰라볼 정도로 아름다워진 복순을 보자 몹시 부러워하였다.
복순과 가장 친하게 지냈던 월매가 복순을 반기며 너스레를 떨었다.
"복순아, 이게 얼마만이냐? 한참을 못 보았더니, 그동안 참으로 예뻐졌구나! 중전마마께 올리는 수라상에서 매일 귀한 음식을 맛보아 그런 것이냐?"
예뻐졌다는 월매의 말에 두 뺨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복순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예뻐지기는...... 그게 무슨 소리냐? 너야 말로 내가 없는 사이에 참으로 예뻐진 것 같구나. 몰래 찬거리를 훔쳐 먹기라도 한게냐?"
"훔쳐 먹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망발이냐? 네가 궁인이 되더니, 별 망측한 소리를 다하는구나! 중전마마를 가까이서 모시니 이제 우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단 말이냐?"
"이것아, 말장난은 네가 먼저 시작하지 않았느냐? 너야 말로 내가 본가를 떠나 입궁하니, 이제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복순과 월매는 오랜만에 만나자 소싯적처럼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말장난을 했다.
하녀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향춘이 배를 잡고 웃으면서 꾸짓듯이 말했다.
"다 큰 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말장난이냐? 중전마마의 본가가 아니더냐? 마님께서 아시면 꾸지람을 들을 것이니, 어서 말장난질을 그치거라."
향춘의 말에 복순과 월매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웃음을 그친 월매가 홀연 근심어린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럽게 복순에게 물었다.
"중전마마께서는 옥체 강녕하시고 행복하게 잘 지내시느냐?"
월매 또한 복순처럼 인현왕후가 입궁할 때 따라가고 싶었지만, 어머니를 잘 모시라는 인현왕후의 명을 어길 수 없어 본가를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중전마마는 내가 잘 모시고 있으니, 근심하지 말거라."
근심하지 말라는 말과는 달리 옥정을 잊지 못하는 숙종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한 인현왕후가 떠오른 복순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월매가 복순의 심경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중전마마께서 행복하셔야 하실 터인데......"
월매가 눈물을 흘리자, 다른 하녀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숙종이 옥정을 총애한다는 사실이 항간에 널리 퍼져 그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월매가 눈물을 글썽이며 복순에게 말했다.
"복순아, 나도 너처럼 입궁할 수 있도록 중전마마께 말씀드려다오. 중전마마를 곁에서 모신다면 여한이 없겠구나!"
복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월매야, 궁생활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면 일이 밤늦게까지 끊이지 아니한다. 중전마마께서는 공평하신 분이라 나를 특별히 대우하시지 않으신다. 너 또한 마찬가지일테니 쓸데없는 생각 말거라."
"너는 어찌 궁생활을 견디었느냐? 네가 견딜 수 있는 일이라면 나 또한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궁에서 힘든 일만 도맡는다 해도 견딜 자신이 있으니, 네가 중전마마께 아뢰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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