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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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부정
작품등록일 :
2013.10.10 18:50
최근연재일 :
2013.10.2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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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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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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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22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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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9화

DUMMY

“아씨. 이놈은 왜 또 낮부터 연락을 안 받는 거야.”


수영은 지금 심통이 단단히 났다. 모처럼 다가온 주말. 화창한 날씨에 데이트를 하기는 커녕 어머니의 손에 붙들려 화분을 나르느라 허리가 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닐하우스 밖으로 내리쬐는 햇살과 그 위에 펼쳐진 파랗고 높은 하늘은 한창 감상에 빠져있는 수영의 가슴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순정을 만난다는 핑계 삼아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의 계획은 순정과의 연락이 안 됨으로써 초장부터 박살나고 말았다.

한참 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쉬는데 수영의 어머니인 은정이 그녀의 등짝에 스매시를 날리신다.


“화분 나르라니까 뭐하는 거야!”


갑작스런 고통에 수영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가뜩이나 순정과 연락이 안 되어 심란한데 어머니가 구박을 하니 더 속이 터지는 것이었다.


“아 쫌! 나 나갈 거라니까.”

“네가 나가긴 어딜 나간다고 그래.”

“주말이잖아!”

“주말에 만날 사람도 없잖아!”


정곡을 찌르는 은정의 말에 수영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하지만 이에 굴하면 게임 끝이라는 생각에 수영은 강하게 나갔다.


“만날 사람이 없긴 왜 없어! 나도 남자 만나러 갈 거야!”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은정의 콧방귀뿐이다.


“네가 남자를 만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에이. 남자 만나러 갈 거야! 삐뚤어질 거야! 막 놀 거야!”


미운 일곱 살처럼 떼를 쓰며 뛰쳐나가는 수영의 등 뒤로 은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 낳아도 되니까 빨리 아무 남자나 물어와 이 계집애야!”


수영은 다시 엄마에게 잡히면 또 화분을 날라야 한다는 생각에 급히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얼마 전에 산 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이순정. 이 자식. 내 손에 잡혀봐. 아주 그냥.”


이를 갈며 대차게 페달을 밟는 수영. 그러나 그녀는 곧 순정의 얼굴을 볼 것이라는 생각에 봄눈처럼 순정에 대한 원망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애라 미친년. 또 얼굴 볼 생각에 헤헤 웃기나 하고. 미쳤구나. 진짜.’


어느 새 해맑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에 욕을 하는 수영이었다.

도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자전거사업의 일환으로 고양시에는 자전거 도로가 나름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순정의 옥탑에 도착한 수영은 땀을 훔치며 순정의 방문을 두드렸다.


“야. 자냐?”


아무런 대답이 없자 수영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디 나갔나? 그래서 연락이 안 되는 건가?’


실망스런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수영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오늘 얼굴 보고 싶었는데.’


돌아서 나오려다 아쉬운 마음에 문을 살짝 잡아 흔들어봤다.


끼익.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문이 살짝 열렸다. 문이 잠겨 있지 않고 열려있었던 것이다.


‘어?’


수영이 문을 활짝 열자 집안에서 술 냄새가 강하게 풍겨 나왔다.


“우웩. 이게 무슨 냄새야.”


술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고개를 기웃거리자 바닥에 쓰레기처럼 말려서 뭉쳐져 있는 순정이 보였다.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있는 채로.


“순정아!”


수영이 놀라 순정에게 달려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순정아. 순정아. 정신 좀 차려봐.”


흔들어도 미동도 하지 않는 순정. 그저 얕은 심음성과 함께 조금씩 몸을 꼬물댈 뿐이었다.


“웬 술을 이리 퍼 먹어서.”


수영은 웅크리고 있는 순정의 몸을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주었다. 베개를 머리에 받히고 이불도 덮어주었다. 순정은 잠결에 추운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순정을 보는 수영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이상하게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수영은 그 핸드폰에서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수연과 순정이 같이 있는 것을 목격했던 그날 밤처럼 기분 나쁜 느낌을.

수영은 순정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냈다.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 빼내느라 한참을 고생했다.

핸드폰은 패턴이 아닌 비번으로 잠겨 있었다. 잠시 비번이 무얼까 고민하던 수영은 예전에 그녀의 전 여자 친구의 생일날 밥을 같이 먹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언제더라? 봄이었고……. 날짜가 무슨 욕 같은 거였는데. 아, 맞다. 4월 18일.’


수영은 잽싸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자 마법처럼 잠금이 풀렸다. 수영은 비밀번호를 맞추어서 신이 나면서도 기분이 무척 안 좋아졌다.


‘미친놈아. 비밀번호를 예전 여자 친구 생일로 해놓냐.’


수영은 구시렁거리는 입을 멈추지 못하고 벌레 씹은 표정으로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어렵지 않게 순정이 저렇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수정이 보낸 마지막 카톡 내용을 읽은 것이다.


‘이순정 진짜 가지 가지하는 구나.’


순정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영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내가 진짜 바보거나, 미친년이거나 둘 중에 하나구나.’


수영은 자신이 좋아하는 순정이 누군가에게 간다는 것을 상상하기 싫었다. 누구나 자신이 마음에 품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 할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가 힘들어 하는 것을 보는 건 더 고통스러웠다. 사랑에 상처받은 그가 바로 또 상처를 받는다면 다시 털어내고 일어나기 한동안은 어려울 터였다.

수영은 한동안 망설이다 결국 입술을 깨물며 순정의 핸드폰에 저장된 수정이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아저씨?]


그러나 수영은 바로 말을 걸 수 없었다. 급한 성격에 전화를 걸었지만 막상 상대가 전화를 받자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저는 순정이 친구인데요.”

[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잠시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저를요?]

“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그래요.]

“오늘 시간 되세요?”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수영의 눈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



약속된 장소에 도착한 수영은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며 긴장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평소 겁이 없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녀였지만 남자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일은 처음 겪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씨. 내가 진짜 하다하다 아주 별걸 다 하는 구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영의 눈에 낯익은 한 여자가 보였다. 카톡 프로필 사진에서 봤던 여자. 바로 그녀는 수정이었다. 수정은 무표정하게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선 숨기지 못한 긴장이 드러나 있었다.


수정에게 다가간 수영이 굳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정수정씨?”

“네?”

“반가워요. 순정이 친구 최수영이에요.”


수영의 인사에 수정이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정수정입니다.”


수정의 얼굴을 자세히 살핀 수영은 기가 찼다.


‘이거 미성년자 아냐? 이순정. 이 새끼 아오.’


수정의 얼굴을 살피고서야 수영은 수정이 보낸 카톡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미성년자면 그럴 수 있지. 집에서 못 만나게 하고. 이순정이 나쁜 놈인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수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학생이에요?”

“네.”

“고등학생?”

“고 3이에요.”


수영은 난감했다. 고3이라면 무척이나 중요한 때이다. 순정을 다시 만나 달라 말할 수도 없을 터였다.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는 수영을 수정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수영은 대답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저, 저기 그러니까. 아.”


수정은 수영의 행동을 보고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저씨가 많이 힘들어하나보다.’


잠시 망설이던 수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씬 잘 있어요?”

“아니요. 잘 못 있어요. 많이 힘들어해요.”

“네…….”


고민하던 수영은 애써 수정의 처지를 잊으려 했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은 순정이지 눈 앞의 이 소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안 떠나면 안 돼요?”

“네?”

“안 떠나면 안 되냐고요. 중요한 시기인 건 아는데 그냥 연락 정도는 주고받으면서 지내다가 나중을 기할 수도 있잖아요. 안 떠나면 안 돼요?”


수정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그럴 수 없어요.”

“왜요. 고3이라서 그래요? 순정이 잘 알잖아요. 공부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그거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왜 그래요? 나이차 때문에 그래요? 요즘 그런 거 누가 따져요. 집에서 알아서 그래요? 곧 성인이잖아요. 1년만 더 기다리면.”


수정이 수영의 말을 끊는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그래요? 다른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 때 수정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뜨는 얼굴. 바로 수연의 얼굴이었다.

수영은 무심코 울리는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리고 놀랐다. 아니 미칠 것 같았다. 보기 싫은 얼굴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만요.”


수영에게 양해를 구한 수정이 전화를 받았다.


“어, 언니. 나 잠깐 나와서 누구 좀 만나느라고. 금방 들어갈 거야.”


수영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언니라고?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닮았어.’


수영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정확히 느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 사람. 연적의 향기를 잡아내지 못하는 여자는 없다. 본능이 말했다. 저 둘은 자매가 분명하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영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화를 끊는 수정에게 수영이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수정.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이름도 정수연이었죠. 흔치 않지 않아요? 비슷한 이름, 닮은 분위기. 나이차가 많이 나긴 하지만…….”


수영의 말에 수정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희게 질리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설원을 보는 듯 했다.


“죄송해요.”


수영은 너무나 화가 나서 도저히 수정에게 예의를 차릴 수 없었다.


“자매였구나?”

“네.”

“그래서 그런 거야?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네.”

“그럼 왜 그랬어? 처음부터 가까이 가지 말지. 왜 그랬냐고.”


수정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죄송? 그게 그걸로 해결이 되니? 진짜 자매가 쌍으로 아주…….”


수영은 더 따지고 들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눈앞의 어린아이를 닥달해봤자 이미 상처 입은 순정의 마음은 치유될 수 없으니까.

수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됐다. 그만 두자. 이제 다 알았으니까 더 할 말 없네. 이제 순정이 근처에 나타나지 마. 연락도 하지 말고. 너도, 네 언니라는 사람도.”


작가의말

다음 글은 로맨스로 할 지 판타지로 할 지 고민되네요. 달달한 것도 쓰고 싶고, 막 나가는 것도 쓰고 싶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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