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펜 국제 마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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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기
작품등록일 :
2014.01.22 21:19
최근연재일 :
2014.06.07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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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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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학기 초(3)

DUMMY

똑.

소년이 이름을 말하려던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의 입이 움직임을 멈췄다. 다급해진 에렌이 소년의 어깨를 잡고 재촉했다.

"어서 말해! 누구라는 거지?"

그러나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허공, 정확히는 현관문이라 짐작되는 곳에 가 있었다.

"누구냐고!"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알 수 있었다. 저번과는 달랐다. 지금이 아니면 그와 소년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고, 만나더라도 소년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직감, 혹은 본능이 그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에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똑똑.

누군지 모를 사람이 문을 한 번 더 두드렸다.

허공을 주시하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기다려봐."

"뭘 기다리란 거지? 어서 말하라고!"

똑똑똑.

"저 사람들은 정말 벽에 귀라도 달린 건가? 셀레이넨, 미안하지만 그 사람의 정체를 말할 순 없을 것 같군."

"뭐?"

"내가 지금 몇몇 사람들한테 신세를 지고 있거든. 그런데 그 사람들이 너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기를 원해. 지금 여기도 그 사람들 몰래 온 거거든?"

내용과 달리 소년의 표정은 장난스러웠다. 조금 전의 잔인한 표정, 그리고 지금의 장난스러운 표정. 어떤 것이 소년의 진짜 얼굴일까. 소년의 두 얼굴이 보여준 괴리감에 에렌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근데 정말 안타깝게도 저 사람들이 내가 여기 있는 걸 눈치챈 것 같다. 아무래도 이만 가야겠어."

"이봐!"

에렌은 소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소년은 그 손을 간단히 뿌리쳤다. 그는 비밀 입구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에렌은 무기력하게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밀 입구가 다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이미 없어졌을 거로 생각했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가 아니라 디안이야. 잊지 마. 나를, 내 이름을. 그리고 너 때문에 죽은 나의 가족들을."

비밀 입구가 완전히 내려가 닫혔다. 비밀 입구는 사라졌다.



똑똑똑

에렌을 깨운 것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소년은,디안은 이미 갔는데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디안이 간 것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자신과 대화하고 싶다는 의미일까.

무엇이 정답인지는 저 사람만이 알 것이다.

에렌은 침실 문을 열었다. 그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 보였던 것은 빨간색 공구 상자를 든 흑발의 어떤 남자였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에렌은 순간 당황했다. 자신과 디안 모두 잘못 생각했던 걸까?

남자는 열린 문틈으로 안을 힐끗 들여다봤다.

"그 아이는 갔나 보군."

그리고 그는 이어서 아무렇지 않게 에렌에게 말했다.

"문이 망가졌다고요?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예? 아, 네."

남자의 갑작스러운 존댓말과 일상적인 내용에 에렌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남자가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에렌은 남자가 설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섰다.

남자는 숙련된 몸짓으로 경첩을 살펴보더니 에렌에게 말했다.

"이런,이런.이거 엄청 망가졌는데요. 아무래도 경첩을 새로 달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남자는 공구 상자에서 공구 하나를 꺼냈다. 에렌으로서는 처음 보는, 이상하게 생긴 공구였다.

손잡이로 보이는 부분은 검은색 고무로 덮혀 있었고 가운데에는 철이 박혀 있었다. 철의 끝부분은 +자 모양이었다.

에렌은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흥미진진하게 공구를 구경했다. 에렌의 시선을 뒤늦게 눈치챈 남자는 피식 웃고 그에게 설명해줬다.

"이 공구는 십자 드라이버라는 겁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그렇겠죠. 고귀하신 귀족님들이 이런 걸 알아서 어디다 써먹겠습니까? 웬만한 귀족들은 이런 게 있는지도 모를 겁니다."

다른 귀족들이었다면 귀족을 능욕했다고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에렌은 본래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그냥 웃어 넘겼다.

"재미있으시나 봅니다."

"네. 아저씨 말씀하시는 게 재밌어요."

"그렇군요. 근데 마냥 즐거워할 때가 아닐텐데?"

남자의 존댓말이 다시 반말로 바뀌었다. 그 말투는 에렌의 신경을 묘하게 자극했고, 그에게 현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당신은...누구지?"

남자가 허허 웃었다.

"태도가 금방 바뀌십니다? 그러면 안 되지요, 아직 나이도 어리신 분이. 크면 어떤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 될지 차암 궁금하군요."

남자가 비아냥거렸다. 에렌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남자는 그런 에렌에게서 몸을 돌려 경첩에 드라이버를 대 뭔가를 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경첩 다 고치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조용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질문을 철저히 거부하는 말에 에렌은 아무 말 없이 남자의 작업을 지켜봤다.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디안을 데리러 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여기서 문을 고치고 있는 거지? 그리고...디안이 한 말은 정말 진실인가?

이 외에도 묻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 같았지만 에렌은 꾹 참고 남자가 작업을 끝내길 기다렸다.

"다 됐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남자가 비키고 에렌이 다가가 경첩을 살펴봤다.

경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에렌이었지만 꽤 깔끔한 솜씨로 마무리됐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잘 됐네요. 그럼 이제 설명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신발을 벗고 소파에 가 앉았다. 그리고 자기가 주인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조금 전의 수리공일 때의 예의바른 모습과는 반대였다.

"빨리 와서 앉지?"

어이없어 하면서도 에렌은 남자의 말대로 앉았다. 에렌이 앉자마자 남자가 말했다.

"세 가지. 난 너에게 세 가지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넌 나에게 세 가지를 물을 수 있다. 어떤가?"

"설명을 해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려고 했는데 아직 네가 그것들을 다 받아드릴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세 가지 질문으로 바꾼 거다."

에렌은 생각해보고 대답했다.

"제 질문에는 다 대답해줄 겁니까?"

"네가 받아드릴 수 있는 것만. 대신 너 역시 네가 대답하고 싶은 질문에만 대답해라."

"좋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질문하지요. 첫 번째로, 당신들은 누굽니까?"

"그 '당신들'이란 게 누구지?"

"디안, 그리고 디안이 신세지고 있는 사람들과 당신."

남자는 턱을 괬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행동이었는데도 그 모습은 에렌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이름을 말한건가. 그 녀석의 생각은 도통 알 수가 없군. 디안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제가 받아들일 수 없어서요?"

남자와 에렌의 시선이 문득 부딪쳤다. 그러나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남자는 그랬다.

"좋을대로 생각해.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그 아이는 널 진심으로 미워한다. 그리고 너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아이지."

"디안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때문에 죽은 자신의 가족들을 잊지 말라고.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죽인 사람을 알려주겠다고도 했습니다. 그게 다 거짓말이란 겁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디안의 말은 진실이었습니다."

남자는 등을 뒤에 기댔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지? 너에게는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

"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이지. 이제 나와 나의 친구들에 대해서 얘기해줄 때군. 나는 네 아버지의 친구다."

에렌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 평민 남자와 아버지가 친구였다고?

"정말입니까?"

"정말 네 아버지 친구지, 가짜 네 아버지 친구겠냐? 아니지, 우린 친구라 할 수는 없군. 나는 네 아버지를 싫어했거든. 네 아버지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보다는...동료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군. 그러고보니 채무자도 꽤 어울리는군 그래."

동료와 채무자.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었다. 이남자와 아버지의 관계 만큼이나.

"동료라는 건 뭡니까? 채무자는 또 뭐고?"

"그게 네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이냐? 난 딱히 상관없지만 다른 걸 묻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어?"

에렌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만족스럽게 손을 비비며 말했다.

"내 친구들에 대해서 말해주지. 그래봤자 말할 것도 별로 없지만. 내 친구들 역시 나와 똑같다. 그들 역시 네 아버지에게 빚을 졌어."

"그들 모두가?"

"그래, 우리들 모두가. 그 빚이 뭔지 알고 싶다면 알려 주겠지만, 그 대신 두 번째 질문은 그걸로 끝이겠지."

잠시 고민하던 에렌은 다른 것을 묻는 것을 택했다. 그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나중에 아버지께 들으면 될 것이다.

"이제 내 차롄가? 에렌, 어떻게 디안과 접촉했던 거지?"

에렌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그렇게 뭐라더니, 당신도 똑같군요. 제가 당신이라면 그 문제에 대해선 디안을 추궁하고 저에게 좀 더 중요한 걸 물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거 뭐? 네가 '어둠' 이전의 기억을 전부 잃었다는 거? 아니면 네가 현재 반란을 준비하는 조직에 가담해서 앞장서서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거?"

에렌의 눈이 커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걸...어떻게?"

"우리에 대해서 좀 더 말해주지.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바꾸겠다! 같은 큰 뜻은 없어. 우리 중에는 수리공이나 거지도 있는 한편, 너도 이름을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할 높으신 분도 있지. 큰 뜻도 없고 공통점도 없는 우리가 왜 모였는지 알려줄까? 그건 너희 아버지에게 진 빚 때문이야."

"빚?"

"그래. 뭐, 좀 더 좋은 말로는 은혜가 있겠군. 너희 아버지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길 가다 불쌍한 사람이라도 만나면 지나치지 못 하고 도와주곤 했지. 평생동안 그러고 살다보니 네 아버지에게 빚을 진 사람이 수두룩해진 거야. 하지만 너희 아버지에게 우리 도움이 필요했겠냐? 아니, 필요 없었지. 그래서 우린 너희 아버지에게 평생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갈 뻔 했지. 너만 아니었다면."

남자가 아버지를 싫어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이 남자는 아버지를 정말로 싫어했던 게 아니라, 안타까웠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빚을 지고서 그 빚을 갚지도 못하는 자신이, 그리고 대공이신 아버지가.

그렇다면 동료라는 건 또 무슨 뜻이지?

"네가 태어나고 우리는 다들 모여서 말했지. 이 아이는 앞으로 자라며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겪을 것이고, 또 이겨낼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는 혼자서 이겨내기에는 어려운 일도 있겠지. 그러니 아직까지 빚을 갚지 못한 우리가 이 아이 옆에 있으면서 지켜주고, 또 도와주면 어떨까? 다들 동의했어. 그래서 그 후로 우리는 죽 네 옆에 있었지. 그랬더니 네가 반란 조직에 가담했다는 것과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아주 자연스레 알게 됐지."

웃기는 일이었다. 그토록 숨기려고 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들키다니. 아버지께 호의를 갖고 있는 자들이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고문실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 디안은 뭐죠? 설마 그 녀석 역시 빚을 갚지 못 해서라는 이유로 저를 죽일 둥 살 둥 싫어하는 겁니까?"

"그럴리가. 그 아이는 널 진짜 미워해. 이유는 너도 알지?"

"만약 제가 디안의 가족을 죽인 사람의 정체를 묻는 데 두 번째 질문을 쓴다면?"

"대답 안 할거야."

토라진 것처럼 남자가 대답했다. 에렌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알겠습니다. 정체는 제가 직접 알아내죠. 그럼 제가 디안과 접촉한 경로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에렌의 말에 따르면 티엘을 로린네 방에 보내고 잠시 혼자 있을 때 소파 아래에 있던 쪽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게 우연이었는지, 혹은 디안의 계락이었는지는 디안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쨌든 그 쪽지에는 에렌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알려주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당연히 에렌은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쪽지에 써 있던 대로 방에 혼자 남아 디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디안이 왔다는 소리를 내자마자 마법으로 비밀 입구를 열어 디안을 방 안으로 들였던 것이다.

에렌의 말이 끝나고 남자는 어처구니 없는 얼굴을 하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맙소사, 이럴수가. 그 입구의 존재는 우리도 알고 있었어. 몇 해 전인가 여기에 인질로 뽑혀왔던 사람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만들어놨던 입구지. 그 사람이 네 아버지에게 빚을 진 사람이라서 우린 그것에 대해서 쉽게 알아낼 수 있었고, 네가 이 방에 배정되게 힘 좀 썼지. 하지만 그 입구가 역으로 이용될 줄은..."

"그렇게 힘 있으신 분들이 제가 아예 네펜 학원에 오지 않도록 힘 써주실 수는 없었던 겁니까?"

에렌은 반은 농담, 반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받아칠줄 알았던 남자는 혼이 빠져나간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우리라도 중립 지역인 네펜 학원에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순 없다고. 이 방에 배정되게 한 것도 엄청 힘들었어."

"잘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제가 두 번째 질문을 할 차례죠?"

잠시 머뭇대던 남자는 고개를 젓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나머지 두 개는 다음에 하지. 앞으로 넌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더 많이 생길 텐데 그 기회를 한꺼번에 다 써버리는 건 아깝잖아?"

듣고 보니 또 틀린 말은 아니라 에렌은 수긍했다.

"좋아요. 그런데 그 말은 계속 제 옆에 있겠다는 겁니까?"

"당연하지. 우린 네 아버지에게 진 빚이 있으니까. 가끔씩 시간 나면 놀러오도록 하지."

남자는 옆에 놓았던 공구 상자를 들고 일어섰다. 에렌은 남자를 배웅하기 위해 뒤따랐다.

"넌 앞으로도 계속 반란을 준비할 건가?"

현관 앞에서 남자가 에렌에게 물었다. 에렌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조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왕을 폐위시킬 것입니다."

반드시 왕에게 복수할 것입니다. 제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같은 웃음이었다.

"그래. 네 멋대로 해라. 우리는 네 아버지에게 갚을 빚이 있으니 신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와주지는 않겠어. 이 정도면 나름 괜찮지?"

에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아 있던, 개인적인 궁금증을 남자에게 물었다.

"이봐요, 당신들은 쭉 내 곁에 있었다고 했죠. 그럼 혹시 '어둠' 때도?"

남자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남자의 말을 기다리던 에렌은 남자의 표정을 보지 못 했다.

"아니. 아무리 우리라도 그건 무리지."

그렇구나.

힘이 탁 풀려버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아니었다. 그는 그 자신이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에렌은 감정을 추스리고 간신히 웃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하긴. 아무리 당신들이라도 그건 불가능하겠죠."

"그래. 우리가 신이라도 되는 건 아니니까. 참. 너한테 부탁할 게 있다."

"뭘요?"

"네 아버지한테 우리 일은 좀 숨겨 줘. 네 아버지는 우리에 대해서 모르거든."

에렌은 장난꾸러기처럼 입꼬리만 올리며 웃었다. 남자는 그 웃음을 보고 불안한 예감이 들어 저도 모르게 손잡이를 붙잡았다.

"아하. 그렇군요. 당신들은 아버지께 이 일을 알리지 않기를 원한다는 거죠? 어른들이 부끄럼도 참 많네요. 그래도 저는 착하니까 말하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뭘 원하는 거냐."

"글쎄요. 제가 당신에게 지금 질문을 하나 더 하는 게 어떨까요?"

"뭐, 그러든가."

대답하면서도 남자는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도대체 뭘물어볼려고 이러는 거지?

하지만 그건 에렌도 마찬가지였다. 장난으로 한 말을 남자가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그는 결국 남자에게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간단한 것을 물어보게 됐다.

"이름이 뭐에요?"

예상 외로 쉬운 질문에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펠스."




약간 어두운 보랏빛의 하늘은 그 속에 노란색의 별들을 품고 있었다. 펠스는 손을 뻗었다. 저 멀리 있는 별들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러나 별들은 잡히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투박한 자신의 손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 한 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손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 녀석을 만났기 때문일까.

지 애비를 꼭 닮은 녀석이었다. 높은 이상을 갖고 그 이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불행을 자초했던 그 멍청이와 똑같은.

하지만 그랬기에 그 녀석은 더욱 고귀하고, 또 아름다웠다.

이 세상에 다시는 피어나지 않을 꽃이라는 것을 알기에.

하지만 꽃은 다시 피어났다. 그를 태어나게 한 아버지처럼 높은 이상을 갖고.

그리고 이번에도 그 꽃은 가장 행복할 때 질 것이다.

"바보같은 놈. 네가 그렇게 사니까 아들도 그 꼴 나는 거 아냐."

그의 오랜 친우가 옆에 있기라도 한 듯이 펠스가 말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너무 화내지는 마. 내가 말렸더라도 그 녀석은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을걸. 그 똥고집도 너랑 똑같지?"

"정말 재미있는 일 아니냐. 네가 그렇게나 증오했던 조직을 네 아들놈은 지 목숨보다도 아끼고. 인생 참 아이러니하지 않냐? 그래도 그 맛에 인생 사는 거지."

"어쩌면 오늘 나의 선택으로 멀지 않은 미래에 에렌은 조직을 탈퇴할지도 몰라. 반대로 내 선택 때문에 에렌은 평생 그 곳에 목 매달고 살지도 모르지.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 아이의 길은 그 아이가 정할 거다. 아버지인 너도, 나도 어느 누구도 그 아이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나는 에렌이 원하는 살도록 도와줄 거다. 그게 비록 옳지 않고, 그 아이를 괴롭게 만드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그 얘를 위해 기도해줘. 행복해질 수 있도록,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혹시 알아? 그 아이가 눈 뒤집혀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될지."

펠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보랏빛의 하늘은 어느새 무언가 때문에 흐려져 있었다.





해가 떠올랐다.

에렌의 침실은 침대 머리맡에 창문이 있어 해가 떠오르는 즉시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에렌을 깨웠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어서 에렌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는 걸로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결국 그는 따가운 아침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가끔씩은 해가 안 떠도 괜찮을 텐데.

에렌은 멍해진 머리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그는 꽤 진지했다.

잠꾸러기인 에렌은 학원에 온 뒤로 급격하게 준 수면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매일 저녁 8시 30분에 잠들었다.하지만 어제는 생각을 하느라 밤 10시 25분이라는, 그에게는 너무 늦은 시간에 잠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늦잠을 잘 수 있기를 바랬던 건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 대신 수확은 있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그의 모든 문제를 정리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펠스의 말대로 반란이었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잊은 기억들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시간을 두고 조급해하지 않으면 그를 떠났을 때처럼 어느 순간, 다시 그에게로 돌아와있을 것이다.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나무는 로린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고 말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쓸 때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고민했던, 디안의 문제.

그 역시 깨끗이 해결됐다. 꺼림칙한 기분은 약간 남았지만 어쩔 수 없다.

디안의 가족을 죽인 사람은 그와 관련됐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민인지는, 혹은 조직의 일원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당분간 이 문제에 대해서 잊을 계획이었다.

반란은 그것 하나만 신경 써도 성공시키기 어렵다. 하물며 다른 골치 아픈 일들까지 함께 해결하려 했다간 반란이 실패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반란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이뤄야할 과업이다.

그러니....

"다른 일에는 신경쓰지 마, 에렌. 너는 반란을 위해 존재한다. 반란은 너의 인생이며, 제 2의 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성공시켜야만 해."

에렌은 의지를 굳히기 위해 소리내어 말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말이 십 년 전 누군가가 한 말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반란군이든 뭐든 네펜 학원의 입학생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에렌이 오늘 속성 검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전투 마법을 쓰는 데는 속성이 필요하고, 그 속성의 마법만 쓸 수 있다. 다른 속성의 마법도 쓸려면 쓸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자신의 속성을 쓸 때보다 몇 배는 힘들어 마법사가 아닌 사람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속성만 쓰게 된다.

대마법사를 목표로 하는 에렌으로서는 당연히 속성 검사를 해야 했겠지만 우연찮게도 그가 다녔던 베네스 학원은 마법 학원이 아닌 일반 학원이었는데다가, 베네스라는 나라 자체가 레센같은 대마법사를 배출한 것 치고는 마법에 무관심한 편이라 그는 이제까지 속성 검사를 받지 못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억누르려 하고 있지만 에렌의 심장은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티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이점이라면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에렌과는 달리 티엘은 손톱을 물어뜯고 발을 구르는 등, 누가 봐도 들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 좀 하지?"

긴장을 해서인지 말이 평소와 달리 날카롭게 나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티엘은 상처받지 않고 받아쳤다.

"지금은 긴장하는 게 정상이거든? 봐 봐, 다른 애들도 다 긴장하잖아."

그 말대로 주위 학생들 역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너처럼 미친 듯이 날뛰는 애는 없다고."

"칫, 시험 보는 건 처음인 걸 어떡해."

지금까지 티엘은 단 한 번도 시험을 본 일이 없었다. 학원도 안 다니고 수업도 제대로 안 듣는 그가 언제 시험을 치룰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에렌은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티엘에게 툭 던지듯이 물었다.

"너 귀족 아니야? 학원 안 다녔어?"

"응? 아, 내, 내가 남작 아들이잖아. 그렇게 유복한 편은 아니어서 못 다녔어. 그래, 돈이 없어서."

"언제는 앞날 창창한 남작 아들이라더니."

"그건 그거고!"

에렌은 이번에도 별다른 의심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티엘은 마음이 괴로웠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속일 수 있을까?

로린은 절대 들키지 말라고 했지만 에렌은 그의 친구다. 로린이 숨기라고 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다. 그러니 에렌이 배신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입으로 듣게 해야할 것이다.

물론 그건 지금은 아니고 먼 훗날 얘기다.

속성 검사는 반별로 치뤄지지 않고 다같이 모여서 치룬다고 했다. 그 덕에 그들은 네펜 학원의 일단은 운동장인 곳에 모여 앉지도 못하고 서서 기다리게 됐다. 그 덕분에 에렌과 같이 있을 수 있게 됐지만.

"그나저나 이 학원은 학생 배려 좀 해주지? 벌써 몇 분째 기다리는 거야?"

"정확히 20분이네."

네펜 학원은 학생따윈 안중에도 없는지 그들은 20분째 운동장에 선생님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입학식 때의 그 많던 의자들은 다 어디다 버렸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분 뒤, 마침내 그들이 기다리던 선생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나타낸 것은 놀랍게도 에렌의 담임 선생님인 하벤이었다.

그는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미소를 헤벌레 지으며 말했다.

"모두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속성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축제의 개막을 알리듯이 하벤이 소리쳤다. 하지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머쓱해진 하벤은 뺨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여러분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으니 바로 속성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천막 보이시죠?"

하벤은 학생들이 오기 전부터 있었지만 아무도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 했던 천막을 가리켰다.

"제가 이 천막에 들어간 뒤에 차례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방법은 제가 안에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그대로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60여명의 학생이 모인 운동장에 정적이 흘렀다.

30분의 기다림, 그리고 선생이란 작자는 대충 설명만 해놓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지?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하며 서로의 눈치만 봤다. 티엘마저도 조용히 눈치만 살필 때, 한 학생이 나섰다. 에렌이었다.

"에렌..."

티엘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와 더불어 학생들의 불편한 시선들이 따라왔다. 거북했지만 에렌은 억지로 웃으며 그들 모두에게 말했다.

"할 사람 없으면 내가 먼저 해도 되지? 내가 좀 성격이 급해서."

실제로 에렌은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이렇게 가장 먼저 속성 검사를 하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계속 긴장하며 기다릴 바에는 차라리 먼저 속성 검사를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학생들은 아직 속성 검사를 받을 용기가 없었으므로 몇 명인가가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나 갔다 온다."

에렌이 티엘과 로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잠깐 검사만 하러 가는데 비장하게 인사를 하는 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했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다.

"응. 잘 갔다 와."

"조심해야 돼."

"조심하고 말 것도 없어. 검사만 받고 바로 나오는 거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농담을 하며 에렌은 천막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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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펜 국제 마법학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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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껍질 편 수정했습니다. 14.05.10 343 0 -
33 의혹 +3 14.06.07 651 10 8쪽
32 나름의 노력 +2 14.05.31 532 6 9쪽
31 껍질 +14 14.03.23 798 20 9쪽
30 움직임 +8 14.03.22 525 10 11쪽
29 거리 +6 14.03.09 683 14 9쪽
28 누군가의 마음 +10 14.03.08 552 8 16쪽
27 학원장과의 대화 +10 14.02.26 467 17 11쪽
26 학기 초(8) +8 14.02.24 464 8 10쪽
25 학기 초(7) +6 14.02.21 522 10 9쪽
24 학기 초(6) +2 14.02.19 337 8 11쪽
23 학기 초(5) +4 14.02.17 545 8 9쪽
22 학기 초(4) +2 14.02.12 549 9 12쪽
» 학기 초(3) +2 14.02.10 483 7 26쪽
20 학기 초(2) +2 14.02.07 454 11 13쪽
19 학기 초 +2 14.02.05 528 11 11쪽
18 입학(9) +2 14.02.03 499 10 11쪽
17 입학(8) +2 14.02.02 656 8 13쪽
16 입학(7) +2 14.02.02 490 8 8쪽
15 입학(6) +2 14.01.24 412 10 11쪽
14 입학(5) +2 14.01.22 701 8 8쪽
13 입학(4) +2 14.01.22 662 13 9쪽
12 입학(3) +4 14.01.22 884 15 10쪽
11 입학(2) +4 14.01.22 733 12 11쪽
10 입학(1) +4 14.01.22 607 15 6쪽
9 만남(5) +4 14.01.22 695 17 7쪽
8 만남(4) +4 14.01.22 727 17 8쪽
7 만남(3) +4 14.01.22 721 15 5쪽
6 만남(2) +6 14.01.22 839 19 11쪽
5 만남 +2 14.01.22 1,142 2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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