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흔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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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최근연재일 :
2023.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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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1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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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1)

DUMMY

언제인지 모르게 하늘의 검은 치맛자락은 잉크가 맑은 물에 번지듯이 번져갔다.

세상의 밝은 부분을 조금씩 검게 물들여 가면서 어둠은 그렇게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불확실해 졌으나, 고요함을 얻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어둠 속에서 잠들어 가는 시간이었지만, 벨리안느 이얀은 그 때 눈을 떴다. 결코 밤에 눈을 떠본적 없던 그녀는 의아함에 앞서 목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을 느꼈고, 덕분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왜 이런 곳에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끝없이 펼쳐진 나무들의 행렬과 새하얀 눈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어디에서든 다 똑같이 보였겠지만, 벨리안느에게는 아니었다. 극도로 예민한 마법감각을 가진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똑같은 장소란 없었다. 모든 장소에는 각기 다른 마법의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고, 그 기운들은 하나같이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어났나?”


벨리안느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월영군 병사가 화롯가에 앉아 있었다. 그 병사의 얼굴을 보자마자 벨리안느는 자신이 자고 있었던,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절했던 이유와 자신이 왜 이런 낯선 곳에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꼬박 한나절을 기절해 있더군.”

타하란이 그렇게 벨리안느에게 말을 했다. 하지만 벨리안느는 역시 이번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벨리안느는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포박당하거나 검을 뺏기지 않은 사실에 의아했다.


“사빈이 너에게는 검과 포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 여자애를 상대로 포박을 하고 검을 뺏는 것은 월영군의 수치라고 하면서.”


벨리안느는 타하란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분대원들이 아직까지 자고 있는 화롯가 주변을 바라보았다. 벨리안느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힘든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다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했다.


“다른 녀석들이 자고 있을 때 서로 이야기를 좀 나누도록 하지. 우선 서로의 이름정도는 다시 확인 할 필요가 있겠지?”

타하란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역시... 하지만 네가 그렇게 나올수록 나는 점차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네가 벨리안느 이얀, 대륙의 공적이라는 사실에 말이다.”


벨리안느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으며 미친듯이 맥박치기 시작했고, 등에는 한 겨울임에도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듯 했다.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가장 공포스러운 일이 닥치자 벨리안느는 당분간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벨리안느 이얀은 5년 전 분명히 벨로나 세라트너에 의해 죽었다.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그런데.... 도대체 너는 대륙의 공적의 형제라도 되는 거냐? 어떻게 그녀와...”


벨리안느는 타하란의 눈빛에서 혼란스러움을 읽었다. 그리고는 5년 전에 이 사람을 보았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다. 자신을 처형시키기 위해서 모여든 각국의 병사들. 그중 자신을 붙잡는데 성공한 벨로나의 병사들. 그들 가운데 사로잡는 것을 반대하며 당장 처형하자고 소리치든 사내의 얼굴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무언의 마법사. 벨리안느 이얀. 그것이 정말 너의 이름인가?”

이제 타하란의 목소리는 격해졌다.

“나의 아내를 빼앗아 간 것이 다 너의 잘못 때문이냔 말이다.”


기어코 타하란은 칼을 빼들고 말았다. 그리고는 그 검을 벨리안느에게 향했다. 겁에 질린 벨리안느와 분노에 가득 찬 타하란 사이에 검과 침묵이 놓여있었다. 서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오로지 겨울 바람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으음... 백부장님. 안주무시고 ....지금... 무슨 짓 입니까!”

벨리안느와 타하란은 기지개를 켜다가 타하란의 모습에 깜짝 놀란 사빈을 쳐다보았다.


“대체 그 이아가 뭘 잘못했길래 계속 그러시는 겁니까, 예?”

얼굴이 길쭉하고 눈이 가느다랗게 찢어진 사빈은 다짜고짜 타하란의 손목을 잡고는 만류를 했다. 그리고 그런 사빈의 요란스러운 행동에 다른 분대원들도 일어나 무슨 일인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백부장님. 진정하시고 왜 그러시는지 이야기를 해 줘야죠.”

사빈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타하란에게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타하란은 사빈과 그의 병사들에게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이 아이가 진짜로 벨리안느 이얀이라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다른 대원들을 자신과 같은 혼란 속으로 내모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타하란은 사빈의 손을 뿌리치고 칼집에 자신의 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빈에게 이어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빈... 이제부터 네가 그 아이를 감시하도록 해라.”


정말로 저도 모르는 순간에 소녀를 베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타하란은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까지 이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했고, 사빈 또한 이유는 달랐지만 동일한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네네. 안그래도 그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체 모를 소녀! 너무 겁먹지 말라고. 이래뵈도 다들 가정이 있는 정규군이야. 네가 걱정하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떨지도 말고.”


사빈이 꼼짝하지 않는 벨리안느를 향해서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빈은 한숨을 내쉬면서 벨리안느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그것에 놀라 흠칫거리며 물러서는 벨리안느를 아랑곳하지 않고, 사빈은 자신의 외투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벨리안느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초상화였다. 환하게 웃는 젊은 여성과 그 여성 품에 안긴 어린 아기의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


“내 딸이다. 타게테스라 하지. 이렇듯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엄연한 임무를 수행하는 월영군이란 말이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마라.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까.”


벨리안느는 조심스레 그 초상화 속 딸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빈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벨리안느의 제 3의 감각이 눈을 뜨며 그녀에게 경고를 보냈다.


마력을 띠는 모든 물체를 감지 할 수 있는 그 능력으로 벨리안느는 무언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공포 때문에 서서히 굳어졌다. 벨리안느의 눈동자는 여기저기를 훑으면서 재빠르게 움직였고, 그녀의 손 또한 너무 심하게 떨어 함부로 잡기조차 꺼려질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상태를 바라보던 사빈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저기....백부장님!


그의 다급한 소리에 타하란과 나머지 대원들이 사빈과 벨리안느를 둘러쌓다. 이제 벨리안느는 힘겹게 일어서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다리마저 후들거리고 있어 쉽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완전히 일어서자 그 무겁고 무겁던 그녀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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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4장 - 개벽(開闢)_1화_ 선고 (1) 20.06.05 68 4 10쪽
34 3장 - 효시(嚆矢)_5화_전조_(2) +2 20.06.04 69 4 12쪽
33 3장 - 효시(嚆矢)_5화_전조_(1) 20.06.03 65 3 12쪽
32 3장 - 효시(嚆矢)_4화_구금소 (2) 20.06.02 60 3 7쪽
31 3장 - 효시(嚆矢)_4화_구금소 (1) 20.06.02 65 3 9쪽
30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3.끝) +2 20.06.01 63 3 9쪽
29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2) 20.06.01 64 3 11쪽
»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1) +2 20.05.31 68 4 8쪽
27 3장 - 효시(嚆矢)_2화_하늘층 회의(2) +1 20.05.29 73 4 12쪽
26 3장 - 효시(嚆矢)_2화_하늘층 회의(1) 20.05.29 75 4 7쪽
25 3장 - 효시(嚆矢)_1화_무언 마법사의 조우 20.05.28 79 4 10쪽
24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끝) 20.05.28 84 3 11쪽
23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4) +1 20.05.25 90 5 10쪽
22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3) 20.05.25 88 4 9쪽
21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2) +2 20.05.22 91 6 7쪽
20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1) 20.05.22 99 5 8쪽
19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7화_ 별빛과 망루(2) 20.05.21 111 5 10쪽
18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7화_ 별빛과 망루(1) +1 20.05.21 106 7 7쪽
17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6화_ 거점 투입 20.05.19 117 5 11쪽
16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5화_담소 (談笑) +1 20.05.18 134 6 10쪽
15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4화_월몰 기도식 20.05.18 123 6 9쪽
14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3화_스승과 제자(2) 20.05.16 134 5 10쪽
13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3화_스승과 제자 20.05.15 178 8 9쪽
12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2화_흠결 20.05.15 178 6 7쪽
11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1화_만인의 죄인 20.05.14 284 7 12쪽
10 1장 - 악몽(9) 20.05.14 249 6 12쪽
9 1장 - 악몽(8) 20.05.13 261 6 11쪽
8 1장 - 악몽(7) 20.05.13 291 7 8쪽
7 1장 - 악몽(6) 20.05.12 301 7 7쪽
6 1장 - 악몽(5) +2 20.05.12 403 1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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