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흔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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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최근연재일 :
2023.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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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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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2권] 6장 - 변곡점_ 2화_ 창조자와 피조물(1)

DUMMY

남쪽으로 향하던 벨리안느의 발걸음이 멈췄다.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전나무 숲이 온 세상을 뒤덮은 듯했고, 그 높게 뻗은 가지들은 땅거미 지는 하늘을 잘게 갈라놓고 있었다.


벨리안느는 그 갈라진 하늘의 틈 사이로 어둠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아침부터 머리 한 켠에 자리 잡은 의문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길을 잃었구나.’


사실 인생이 여정 그 자체인 벨리안느였지만 길을 잃는다는 것은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 만큼 그녀의 방향 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단 한번도 어딘가를 목적지를 뒀던 적이 없어, 애초에 길을 잃는다는 개념과는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월영시라는 명백한 목적지가 있었고, 때문에 길을 잃었다는 당혹스러움은 그녀에게 더 크게 다가왔다.


“어디로 가야하는 거지?”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전나무로 이뤄진 감옥에서 유일하게 세상에 열려있는 천장이 어둠으로 닫히는 듯했고, 그렇게 세상은 감옥살이 같았던 지난 과거의 삶 속으로 벨리안느를 몰아 넣었다.


그 악몽 같았던 과거가 되살아나자, 미칠듯한 불안과 긴장감을 느낀 그녀였다.


동시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아니 무슨 일이 생겨야지만 이곳에서 벗어 날 수 있을거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험난한 길만큼 예리해진 그녀의 예감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벨리안느의 마법 감지 범위인 안에서 미약한 마법의 기운이 감지된 것이었다.


/////////////////


그녀가 감지한 마법기운은 총 5개였다.

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어느 하나 없었다.


보통 마력 기운을 내포할 수 있는 존재는 인형과 마법사뿐이지만, 이곳이 월영시와 월하시 사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마법을 부여받은 야별사 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다가오는데...’


그냥 지나치길 바랬던 기대를 져버리며 그 존재들을 점차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접근했고, 때문에 벨리안느는 그 존재들의 정체를 판단하고 대응해야 함을 깨달았다.


일단 이동 속도가 빨랐기에 사제가 포함된 월영군 부대일 가능성은 가장 낮아보였다.

또한 인형들이 국경선을 넘어 월연방국 깊숙한 곳까지 왔을 가능성 또한 적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사제의 명에 따라 혹은 상승 행군과 관련해서 우연히 자신이 있는 곳을 지나칠 야별사라 희망한 벨리안느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세상은 그녀의 그 사소한 희망마저 짓밟아버렸다.

일정 간격을 두고 이동했던 그 마력 기운들이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늑대처럼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정확히 모여드는 것이었다.


‘인형이구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능성에 벨리안느는 재빨리 초승달 허리와 같은 칼을 빼들고서는 전투 준비를 했다. 어짜피 인형에게 마력감지를 당한 이상 도망쳐봐야 언제가 따라잡힐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벨리안느의 희망을 짓밟은 존재들이 하늘 위에서 떨어지듯 그녀 앞에 등장했다.


어둠이 깔린 숲. 5기의 인형. 그리고 사용할 수 없는 마법.

이 모든 것이 벨리안느에게 불리했다.


그러나 벨리안느는 그 모든 자신의 약점을 뒤로 한 채로 칼자루를 꽉 움켜쥐면서 인형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공격 아니다.”


어둠의 저편에 서있던 인형 중 하나가 그렇게 말을 하면서 벨리안느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공격 아니다.”


인형의 어색한 말투와 칼을 뽑지 않는 그들의 행동에 긴장을 늦출 뻔했지만, 인형이라면 맨손으로도 자신을 죽일 수 있었기에 더욱 집중하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럼 뭐야?”


벨리안느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그렇게 말했다.


“말을 전한다.”


“뭐?”


“말을 전한다.”


그 인형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벨리안느를 향해 다가왔다.


“무슨 말?”


다가오는 인형에 벨리안느는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서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자 그 인형은 벨리안느로 향하던 걸음을 갑자기 멈추더니 갑자기 온몸을 가볍게 떨기 시작했다.


긴장 속에서 그 인형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벨리안느는 이어서 그 인형의 작디 작은 입이 다시금 열리는 것을 보았다.


“주인이자 오랜 친구여, 지금 제가 갑니다.”


그 인형의 입에서 이전 목소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벨리안느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주인이자 오랜 친구여, 지금 제가 갑니다.”


7년만에 듣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아르센..’


홀로 있던 자신에게 밖깥 세상 이곳 저곳에 대해 이야기해주던 그 목소리가 다른 인형을 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벨리안느는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르센과 함께 했던 수천가지의 추억과 감정들이 그녀를 스쳐지나갔고, 그 성난 파도와 같이 격한 감정에 휘말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 벨리안느의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형들은 정말로 공격 목적이 입력되지 않았는지 말을 전달하자마자 어두운 숲속으로 되돌아갔다.


그렇게 실물은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벨리안느는 인형의 마력 기운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 않았고, 마침내 완전히 감지할 수 없게 되자 그녀는 몰려오는 긴장과 흥분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제가 갑니다...”


벨리안느는 인형들이 남기고 간 말을 무의식적으로 되뇌였다.

다시는 못 들을 줄 알았던 아르센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가 전달한 말의 의미는 더욱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르센은 인형이다.'


아무리 벨리안느와 깊은 관계에 있다한들 그가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인 것은 변함없었다. 때문에 유포레아스 공화국의 의장인 아르센이 자신의 직책과 직무를 제껴 둔채 직접 만나러 온다면 그 이유가 있어야 했다.


"아!......"


벨리안느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렇게 외쳤다.

엘제어란 인형의 끈질긴 추격에 이어서 이번에는 아르센이 직접 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야 떠올린 그녀였다.


'마법연계 때문에 아르센이 직접오는구나!'


벨리안느와 인형들 사이의 마법연계.

아르센 또한 인형들이 마법을 원활히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낸 것이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한 벨리안느였다.

방금 조우한 5기의 인형이 유포레아스 공화국에서 아르센과 함께 출발한 정찰병일거란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본대 또한 근처에 있을 것이었다.


본대의 규모 또한 최소한 아르센을 호위할 수준은 될거라 추측했고, 그런 인형 부대와 마주하게 된다면 제대로 된 마법 없이는 절대 물리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만나고 싶어."


정황상 당장 자리를 떠나도 시원치 않을 상황이었지만, 벨리안느는 그러나 눈앞의 전나무 밑에 쭈그려 앉고 말았다.


언제나 혼자였던 그녀의 인생에 횃불과 같았던 아르센이라는 존재.


벨리안느는 자신이 그런 횃불의 근처에 날아다니는 불나방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을 했다.

몸이 타들어갈 줄 알면서도 그 빛에 현혹되어 제대로 된 날개짓을 할 수 없는 그 존재처럼, 그녀 또한 아르센이 남긴 말 한마디에 발걸음이 묶여버린 것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인간 세상의 안전을 위협하는 만남.'


또다시 거대한 유혈의 사태를 일으킬 수 있는 그 만남을 앞두고, 어쩌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음에도 그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 이기적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벨리안느는 아르센을 만나고 싶었다. 어쩌면 그 또한 단순히 자신을 만나고 싶어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도 안되는 희망을 품은채.


'어찌지...어떻게 해야 할까..'


벨리안느는 무릎을 자신의 가슴팍에 당기고, 고개마저 숙인 채 웅크려 앉았다.


그렇게 피조물에 애정을 담았던 창조자는 피조물에 철저히 배신당했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당연히 나아가야 할 길을 떠나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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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2권] 6장 - 변곡점_ 2화_ 창조자와 피조물(3) +1 20.07.16 42 2 10쪽
68 [2권] 6장 - 변곡점_ 2화_ 창조자와 피조물(2) +1 20.07.14 40 2 9쪽
» [2권] 6장 - 변곡점_ 2화_ 창조자와 피조물(1) +1 20.07.14 43 2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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